소설리스트

미궁기담-196화 (196/813)

〈 196화 〉 191 성도 파르히스트

* * *

안느는 물론 이실리테도 ‘진짜 죽은 거 아냐?’하고 우려할 만큼 환인의 무릎 위에 엎어진 유르파는 시체 같았다.

하지만 환인은 그녀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허벅지에 닿아있는 그녀의 몽실몽실한 젖가슴을 통해 심장이 콩닥콩닥 뛰고 있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

환인은 그녀의 손에서 흘러내리는 완드를 받으며 걱정하는 여자들에게 말했다.

“살아있다. 며칠 밤샘 작업하더니 최후의 기력을 짜낸 모양이군.”

가까이 다가온 두 여자는 남자 친구의 이야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양쪽에서 유르파의 어깨를 잡아 일으킨 뒤 소파 빈자리에 데려가 눕힌다.

그사이 환인은 완드를 살폈다.

완드는 크게 두 부위로 나눌 수 있었다. 30cm가량 되는 검은색 광택 나는 나무 재질의 몸체. 그리고 다이아몬드 커팅으로 깎은 6급 위상석.

일단 몸체는 나무 특유의 질감을 잘 남기면서 매끈하게 다듬어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이 일품이다. 보면 볼수록 명품 특유의 숨겨진 매력이 느껴진다.

위상석은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커팅되어 있었는데 보는 각도에 따라 주황색이 섞인 일곱 가지 빛이 반짝였다.

완드의 끄트머리에 나무뿌리가 포근히 감싸듯 고정되어있어 좀 험하게 다루어도 분해될 염려는 없어 보인다.

환인은 주황색 빛무리가 보석에서 은은히 흘러내리는 것을 잠시 구경하다가 탁자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어떤 기능이 있는지 모르는데 함부로 건드리다가 망치면 곤란하지.’

그사이 안느와 이실리테가 유르파를 걱정스레 살피며 대화를 나눈다.

=원기 회복 술법을 걸어볼까? 아니면 원기 물약을 먹여?=

=둘 다 하는 게 좋겠어. 일단 기운 차리게 한 다음에 뭐라도 먹이면…….=

“그보다는 내가 원기를 보충해주는 쪽이 나을 거다.”

=응?=

“성술인 원기 회복 술법은 피시전자의 체력을 소모해 보충한다. 원기 회복 물약은 복용자의 체력을 건드리진 않지만, 약재가 효과를 내는 과정에서 신체에 약간 부담을 주는 편이지.“

하지만 자신의 원기 방출은 온전히 자신의 원기를 넘겨주는 것이기에 대상은 아무 부담 없이 원기가 회복된다.

밤마다 살을 섞으며 원기 흡수와 방출의 효능을 끝내주게 느꼈던 두 여자는 환인의 설명에 조건 반사적으로 얼굴을 살짝 붉히며 좌우로 비켜주었다.

환인은 그 사이에 서서 유르파의 상의 밑단을 가슴 위쪽까지 끌어올렸다.

속옷을 입지 않아 이실리테와 맞먹는 G컵 사이즈의 가슴이 중력에 못 이겨 좌우로 살짝 흘러내린 상태가 눈에 들어온다.

옷 위로도 원기 방출은 가능하지만, 전송 비율을 끌어올리려면 심장 가까운 곳에 직접 피부 접촉하고 쓰는게 좋다

환인은 몰랑몰랑한 젖가슴을 쥐고 정신을 집중했다.

몸 안의 훈기가 오른손으로 흘러 들어가며 오른팔이 손끝에서 팔꿈치까지 까맣게 물든다. 그리고 손을 뒤덮는 작은 아지랑이.

이윽고 환인의 원기가 유르파의 가슴을 통해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환인의 원기 1/4을 받고 나서야 유르파가 =으응…….= 작은 비음을 흘리면서 눈을 떴다.

환인은 아직 비몽사몽인 유르파의 양 볼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

“3.7명분의 원기를 받고서야 정신 차리다니. 대체 얼마나 기력을 쓴 겁니까.”

=……아?=

흐리멍덩한 회색 눈동자가 눈을 끔뻑일수록 맑아진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치챈 유르파가 푸흐흐 웃으면서 옷차림을 추슬렀다.

=미안해. 작업이 거의 마무리되어가던 시기라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됐네.=

=사흘간 침대를 쓴 흔적이 없어요. 가져다준 식사도 마지막 두 끼는 거의 손도 안 댔고요.=

유르파의 방을 보고 돌아온 이실리테의 이야기에 유르파를 지그시 바라본다.

아무리 직업자라지만, 근접 전투직으로 분류되는 직업이 아닌 이상 신체 능력은 일반인보다 조금 좋거나 비슷한 수준이다.

저렇게 며칠씩 잠도 안 자고 끼니도 거르면서 일하면 쓰러지는 게 당연하다는 뜻.

환인은 조금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 자기 관리를 못 하는 사람이라면 동료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시 생각해봐야…….”

=아앗!? 아, 앞으로 몸 관리 잘할 테니까! 이번에는 자기한테 좋은 걸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에 욕심내서 그랬던 거야앙!=

화들짝 놀란 유르파가 환인의 허리를 붙잡고 울상을 짓는다. 환인은 그런 그녀와 잠시 시선을 교환하다가 그녀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유르파. 저는 동료들과 생활할 때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자기 관리입니다.”

=…….=

“몸을 망가트리는 불규칙한 생활.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는 무절제. 집안을 어지럽히는 나쁜 습관. 이런 것들이 있다면 근본적인 화합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약간 어지르는 습관이나 가끔 과음하는 습관 정도면 신뢰를 쌓은 관계일 경우 그렇게 문제가 되진 않을 거다.

물론 그럴 때마다 동료들이 잠깐잠깐 짜증은 부리겠지. 하지만 그런 습관을 지닌 채로 동료들과 목숨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이가 되기까지 얼마나 어렵고 먼 길이 될 것인가.

“가족이라는 혈연관계의 울타리가 아닌, 생판 남인 사람들과 모여 살아간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사이좋게 지내며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자세와 배려가 필요한 겁니다.”

=으응…….=

진심으로 수긍하는 유르파 뿐만 아니라 이실리테와 안느도 환인이 하는 말에서 느끼는 점이 적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주인님/도령이 먼저 행동으로 그런 배려와 존중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이실리테는 주인님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함께 지내왔던 시간을 떠올렸고 안느는 환인과 처음 만난 이후 줄곧 그가 보여주었던 행동거지를 떠올리며 공감하고 있을 때 환인이 말을 이었다.

“그런 존중과 배려는 어려운 게 아닙니다. 생활 근간을 뜯어고치고 상대방에게 맞추라는 뜻이 아니라, 바른 생활에 자기 관리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사람이 호감을 느끼는 건 별거 아니다. 멀쩡한 외모라면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몸가짐을 깨끗하게 유지만 해도 따라온다.

그런 상태로 함께 여행하며 추억이 쌓이면 돈독한 우정과 동료애가 싹트는 것이다.

물론 까닭 없이 상대가 싫을 수도 있다. 이 경우에도 근간에 배려와 존중이 있었다면 이야기를 통해 결별하기도 편한 법.

세 여자는 환인의 주관론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앞으로 조심할게. 매일매일 깨끗하게 씻고 주변 정돈도 잘할게. 자기는 카턴 마을에서 내 공방도 봤잖니? 나, 평소에는 깔끔하게 다닌다구?=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유르파는 그 말속에 숨겨진 뜻을 읽고는 침을 꼴깍 삼켰다.

만약 그때도 더럽게 있었다면…….

=도, 도령. 나는? 난 뭐 고칠 거 없어?=

갑작스레 불안감이 치민 안느가 눈치 보며 묻는 모습에 환인이 작게 웃으면서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토닥였다.

“넌 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개개인의 개성까지 죽일 정도의 자기 관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 그래도 지적이 필요할 땐 꼭 말해줘야 해?=

“그런 거면 나보다 이실리테에게 조언해달라고 하는 게 좋겠지.”

이실리테는 말 그대로 자기 관리의 근본 그 자체니까.

욕실에서 깨끗하게 씻고 온 유르파는 당장이라도 잠들고 싶을 만큼 피로와 수마가 몰려왔지만, 꾹 눌러 참았다.

방금 환인에게 자기 관리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대낮에 자버리면 그가 어떤 눈으로 볼지 짐작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옅게 화장하고 머리를 깔끔하게 정돈한 유르파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다가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 자기 외모가 떨어진다고 생각한 적 없는 유르파였지만, 지금만큼은 거울 속의 자신이 못난이처럼 보였다.

“이슬이 아가씨랑 안느 아가씨가 좀 예뻐야지.”

환인의 곁에 서 있는 안느와 이실리테와 비교하면 자신은 오물 구덩이 속의 호브나 다름없다.

아무튼, 깔끔하게 씻고 단장까지 끝마친 유르파는 금방 완성한 마도기­구원을 환인에게 소개했다.

기능은 심플하게 세 가지, 소유자의 원기 회복과 내구도 회복, 분실시 소환 기능의 셋.

=소환 기능은 말 그대로 한 달에 한 번, 자기의 손바닥 위에 소환할 수 있는 기능이야. 다른 기능은 전부 제외했어. 이런저런 기능을 덕지덕지 붙여봤자 위상석의 에너지를 낭비할 뿐이니까.=

그래서 심플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에 환인은 만족감을 표시했다. 환인이 가장 바라는 것은 구원을 오래, 그리고 내구도를 신경 쓰지 않고 사용하는 거니까.

시험삼아 완드를 들고 그녀들에게 원기를 보충해봤더니 자신의 원기가 줄어드는 느낌이 없다.

익숙해지면 완드에서 곧장 그녀들에게 원기를 보내줄 수도 있겠지. 원거리에서 보충해줄수 있게 되면 더 바랄나위 없을텐데.

원기를 보충받은 안느와 이실리테가 탄성을 질렀다.

=와아, 이래서 완드로 만들려고 한거였구나? 굉장하네. 몸이 막막 가벼워.=

=약간 나른한 느낌이 싹 달아났어요. 개운한 느낌이네요.=

그에 비해 유르파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뭐지, 방금 자기가 뭘 한 거지?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임시 동료에 불과한 지금 지금 묻는 것은 안될거 같은 예감에 유르파는 입을 꾹 다물었다.

환인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완드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기능은 물론이고 얼핏 보면 평범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감성이 느껴지는 디자인도 마음에 듭니다. 좋은 물건을 만들어 주어서 고맙습니다, 유르파.”

=응응. 그리고 이건 자기가 부탁했던 단검이야.=

약간 스팀펑크 느낌의 단검 다섯 자루가 유르파의 손가방에서 나왔다.

환인은 유르파의 설명을 들으며 단검의 구조를 확인하던 중 안느의 질문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도령한테 이런 게 필요해? 그냥 저주를 내리거나 달려들어서 두들겨 패면 무력화될 텐데.=

“나라고 무적은 아니니까. 만약을 대비하는 것은 어느 경우에서든 필요한 일이다.”

=…….=

=……?=

유르파는 안느가 왜 저렇게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짓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자신이 공간 진동 폭탄과 수백 장의 부적을 들고 다니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

허탈한 웃음을 짓던 안느는 자신을 향해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의 유르파에게 키득거리며 물었다.

=나랑 이슬이랑 순수하게 신체 능력과 기술만으로 도령하고 싸우면 누가 이길 거 같아?=

=……?=

이걸 묻는 이유가 뭘까.

본격적으로 마도구­구원을 제작하기에 앞서 유르파는 며칠간 그녀들의 조언을 들어가며 체력단련을 했었다.

덕분에 유르파는 그녀들이 대련하는 것을 옆에서 직관할 수 있었는데, 그녀의 눈에는 적어도 두 명 다 4급과 6급을 넘어서는 기량을 가진 거로 보였다.

특히 이실리테는 자신보다 훨씬 큰 붉은빛의 대검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안느를 압도하는 수준이었는데…….

=그걸 묻는다는 건 자기가 이긴다는 뜻이지?=

이상할 일은 아니다. 세상에는 각성하지 못한 뛰어난 무사도 많고, 그런 사람들은 무술의 단련에 목숨 건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응. 우리 둘이 져. 도령이 진심을 내면 10초 컷일까.=

=그건 대단하네.=

안느는 태연한 유르파의 반응에 입술을 삐죽였다. 방금 대목은 ‘그렇구나.’하고 받아들일 게 아니라 ‘뭐어?!’하고 놀라야 할 부분인데?

=그런 표정 짓지 말렴. 나도 진짜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을 좀 봤단 말야. 그중에는 사람이 맞긴 한 걸까 싶은 사람도 있었고.=

=그래? 누군데? 어디에 살아?=

호기심은 안느뿐만 아니라 이실리테도 느꼈다. 주인님과 비슷할 정도의 천재가 또 있다고?

=파르히스트 백천 근위 무사단의 단장, 아렐 케드윈. 그는 무직자면서 검 한 자루로 7급 직업자를 무릎 꿇리는 검의 대가야.=

=……뭐어?=

=41년 전 마스터 토너먼트에 출전해서 모든 대전을 TKO로 승부 짓고 당당히 근위 무사단에 입단, 그리고 1년 뒤 단장 자리에 올라선 인물이야. 올해로 아마 68살 쯤 되었으려나. 잘하면 이번 마스터 토너먼트에 얼굴을 비칠지도 몰라.=

단장직에 있는 자는 몇 년에 한 번, 마스터 토너먼트 우승자와 친선대련을 해야 하는 규칙이 있는데 아렐 케드윈은 벌써 3년째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고.

환인의 관심이 약간이지만 마스터 토너먼트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 * * *

=…….=

환인이 보았다면 왕의 집무실이라고 생각했을 만큼 100평 남짓한 백색 기조의 화려한 집무실.

흔히 볼 수 없는 하얀 대리석 바닥.

먼지 하나 묻지 않은 백색 벽.

가구도 하얀색이고 집기도 하얀색이며 집무실을 장식하는 화초와 꽃도 하얀색인 순백의 방.

1000년 묵은 백목白?을 소재로 장인이 1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책상에는 한 남자의 신상을 조사한 보고서가 올려져 있었고, 책상의 주인인 백곰 머리의 남자는 그 보고서를 깊은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율캄, 레힐, 에트브룩, 웨이포드, 마에스티그, 카턴, 파르히스트로 이어지는 여정.

율캄 이전에는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는 흔적.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느 촌락에서는 엄청난 실력의 무사라는 증언이 나왔다.

어느 촌락에서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여행자라고 마을 주민의 목격담이 있었다.

그를 아는 자들은 한사코 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길 저어했다. 고위 호족이라는 배경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조사가 어려웠을 거란 첨언이 붙어있을 정도였다.

더욱이 웨이포드에서는 저 항구도시 프라버의 주인, 백의 자녀와 함께 미궁을 탐사했다는 정보가 있었고…….

‘엘위드리스 가문의 영애인가.’

얼마 전 영혼사로 각성한 플뢰족 영애와도 관계가 있었다.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점은 그가 지나친 촌락과 마을에 감도는 평온하고 맑은 분위기.

백곰 머리 남자, 파르히스트의 정점에 있는 펜리=후스티오=파르히스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얼마 전 불귀의 객이 된 셋째 딸의 웃는 얼굴이 어둠 속에서 아른거린다.

사랑해마지않는 딸이 죽어서 돌아왔다. 더욱이 발견 당시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짓뭉개져 있었다고 했다.

당시 펜리 성주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어서 극심한 분노를 느꼈으며 허탈함에 이어 의문이 들었다.

대체 누가? 어째서?

알아본 결과 딸의 사망은 말 그대로 사고였다.

미궁이 성장하기 시작하며 내뿜는 막대한 위상력이 미궁 내부에 함정을 생성했고, 생성된 함정을 무작위로 옮겼고, 이형종도 자리를 바꾸게 했다.

그렇게 생성된 전이 함정에 딸의 호위 셋이 휘말려 제각기 다른 층으로 흩어졌다.

그사이 하필이면 중핵과 마주친 딸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하필이면 그때 미궁이 성장한 것이 불운이었고, 하필이면 그때 딸이 아끼던 후배의 졸업 시험이 있었던 것이 불운이었고, 하필이면 그때 전이 함정이 생성된 것도 불운이었고, 하필이면 그때 중핵이 딸의 곁으로 이동한 것도 불운이었다.

불운이 겹치고 겹쳐 벌어진 사고였던 것이다.

저 중 하나만이라도 빠졌다면 딸은 살아남았을텐데.

=…….=

최초 발견자는 한 명. 보고서 속의 남자였다.

이후 자신의 책상까지 올라온 조사 보고서와 사유서는 어디 하나 빠지거나 이상한 점 없이 완벽했지만, 펜리 성주는 믿지 않았다.

너무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보고에 오히려 의심을 품었다.

아니, 이성이 일부 마비되어 일부러 의심을 했다고 보아야할지도 모르겠다.

딸의 죽음에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을 느낀 성주는 그 석연치 않은 점을 밝혀내기 위해 가문 전속 영혼사와 짐승신 교단의 추기경을 불러 딸의 혼의 강령을 시도하였다.

빈민들을 불쌍히 여겨 자선과 은혜를 베풀던 착하디착한 딸이다. 자신이 거두어들인 이들의 후사가 걱정되어서라도 이승에 머물고 있을 거라 생각하였는데.

=송구합니다. 요나 님은 성불하여 신의 정원에 드셨습니다.=

딸이 이미 짐승신님의 정원에 들었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만 들었다.

펜리 성주의 의구심은 더욱 깊어졌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육감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펜리 성주지만, 이번만큼은 그 육감에 기대어 사건의 재조사를 명했다.

그리고 올라온 보고서에는 이전 조사 보고서와 마찬가지로 사건 정황이 앞뒤로 제대로 이어져 있었다.

크라버리의 개망종, 길레스=벡슬의 행위에 대한 이유도 설명되었으며 딸의 행동에도 타당한 된 이유가 존재했다.

그래서 이상했다. 너무 앞뒤가 잘 맞아서. 증인의 발언에 약간의 기억 혼동 없이 딱딱 나와야 할 말만 나오고 벌어져야 할 상황만 벌어져서.

와중에 딸의 사망사건에 크라버리의 개망종과 연관이 있다는 소문이 도시에 퍼지기 시작했다.

성내에서 흘러나간 소문은 아니었다. 조사 결과 소문은 아클라멘토 대학원 근방의 술집에서 시작되었으며 아클라멘토 대학원의 직원 중 하나로 의심된다는 내용이 나왔다.

며칠 지나지 않아 근위 무사 중 문제아로 찍혔던 제하=메샤가 아클라멘토 대학원을 사이에 끼고 딸의 시신을 찾아낸 그 남자와 분란이 벌어졌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또 이 남자인가.

그 남자의 파티원이 땅신 교단의 성투사라고 한다. 그 결과 땅신 교단이 얽혀들었고 크라버리의 성주 일가와도 재차 얽혀들었다.

펜리 성주는 관련 사건을 정리하는 한편 참을 수 없는 의문과 답답함을 느낀 성주는 보고서의 남자를 소환하려 하였다.

딸의 시신을 발견한 남자. 타이밍 좋게 성투사를 파티에 영입한 일. 미궁 강도를 언급한 것과 미궁 중핵을 사냥해낸 일. 휘하 근위 무사와 트러블을 일으켰고 그 추방한 근위 무사를 쫓아가 살해까지 했다.

따로따로 나눈다면 이상할게 없는 사건의 나열이지만, 이 전부가 한 사람이 연관되어있다는 것을 알게되자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하들이 강하게 만류했다.

직위도, 작위도 없는 평민을 성에 불러들여 독대한다는 것 자체가 7급 호족의 품위를 크게 훼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주는 일갈하여 신하들의 입을 막았다. 이미 그때 성주의 머릿속에는 그 남자뿐이 없는 상태였다.

성주가 신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사단과 근위 무사를 보내 남자를 성으로 소환하기 직전, 그의 행동을 제지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홀대할 수 없는 방문객, 플뢰 족 출신의 귀족 영혼사.

호족의 품위를 해치려는 성주를 막기 위해 신하들이 성주에게 조언을 올릴만한 신분의 사람을 찾아온 것이다.

=성주님. 그분은 성주님께서 의구심을 품을 분이 아니십니다.=

=본인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본인도 모르는 판국에 엘위드리스 양이 알고 있단 말인가?=

=따님을 잃어 생긴 분노는 그분이 아닌 다른 원흉에게 향하여야 할 일이지요……. 그분이 무고하시다는 것은 앞으로 제가 걸어갈 영혼사의 길에 대고 맹세할 수 있는 일입니다.=

=41년을 성주로서 몸 바쳐오는 동안 본의 아니게 단련된 육감이 의심을 부르짖고 있다.=

성주의 조용한 역정에 엘위드리스 영애, 이엘카타는 슬픈 미소로 한 가지 조언을 남기고 떠나갔다.

=그렇다면 먼저, 소환이 아닌 초대를 하여 그분과 독대하여보시는 것을 권해드리겠습니다…….=

모호한 육감이 또 발동했다. 그탓에 펜리 성주는 엘위드리스 영애의 그 말을 차마 무시할 수 없었다.

성주는 혼란스러웠고 지쳐버렸다.

1년에 한 차례 발동하면 많다 할 정도의 육감이 고작 한 달 남짓한 시기에 몇 번이나 발동된 것인가.

셋째 딸의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진 꽃망울 같은 딸을 가슴에 묻은 펜리 성주는 사흘 밤낮을 고민하다가 40년된 친구이자 악우라 부를 수 있는 이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각하.=

밤하늘처럼 까만 깃털에 볏까지 까만 닭 머리의 인계족人?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는다.

=휴식실에서 부르려 했지만 상황이 여의찮아서 여기로 불렀다네. 그러니 편히 하게.=

=그래? 무슨 일인데?=

한쪽 무릎을 꿇고 예의를 표시하던 친구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40년째 변하지 않는 태도로 심드렁하니 다가오며 묻는다.

다른 곳의 성주가 본다면 눈을 휘둥그레 뜨다 못해 호족의 명예를 더럽힌다며 게거품 물고 작두를 대령하라 소리칠 태도였지만, 펜리 성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이 친구를 찾아가서 ‘정중히’ 초대장을 전해주게. 다시 말하지만 정중하게 일세.=

아렐=케드윈은 친구가 밀어주는 보고서를 받아 자신의 자랑인 검은 볕을 한차례 쓸어 넘기며 겉표지를 보았다.

보고서의 첫 장에는 검은 머리의 잘생긴 남자가 그려져 있었고, 그 아래에 환인이라는 두 글자가 박혀있었다.

이자가 누구길래 초대하는데 성주의 왼팔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을 보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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