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화 〉 190 성도 파르히스트
* * *
토너먼트 접수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이실리테와 안느는 참가 접수를 위해 아침 일찍 북부 파르히스트의 토너먼트 경기장으로 향했고, 환인은 다른 볼일이 있었지만 그녀들의 사기 진작과 호감도 관리를 위해 동행했다.
접수 방식은 간단했다. 신청서를 접수 직원에게 제출하면 끝.
그러나 그 과정은 평범하지 않았다.
대축제에서 토너먼트가 가지는 지분은 절반 이상.
여기에 접수 마지막 날이라는 특징이 붙어 북부 경기장 앞에는 수만 명이 넘는 숫자가 모여 접수장에 접수하는 선수들을 향해 함성과 환호성을 내지르며 엄청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와아아아!!!
출전자 한 명 한 명이 신청서를 낼 때마다 주변을 메우고 있던 군중에서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온다.
“…….”
온갖 화려한 장비를 착용한 남자, 여자들이 대놓고 주변을 의식하며 신청서를 내는 모습은 환인에게 우스꽝스러운 광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진짜 실력자는 주변을 신경 쓰지 않는 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저런 퍼포먼스가 있기에 축제의 하나로 자리매김하는 거겠지.
일행과 함께 그것을 구경하던 안느가 환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도령, 어때?=
“약한 사람들이 대부분이군.”
동작과 보법 및 체간의 무게 중심을 보면 제대로 기술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자신과 합류하기 전의 이실리테 수준 정도라고 할까.
상대적으로 이실리테의 평가가 재조정되는 가운데 아직 갑옷 수선이 되지 않아 평범한 복장으로 온 안느는 잠시 접수장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도 다녀올게. 이슬아, 가자.=
=마지막까지 기다린다고 하지 않았어?=
=도령은 할 일이 있는데도 우릴 따라온 거잖아. 그냥 일찍 접수하고 돌아가지 뭐.=
토너먼트에 대한 기대감이 많이 떨어졌다.그동안 종종 나와서 참가자들 면면을 살폈는데 강자라고 할 만한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
혹시 자기 눈이 별로인 걸까 싶어 마지막 날 도령에게 함께 가자는 부탁까지 해서 확인받았는데…….
‘도령도 약하다고 하니 뭐.’
그냥 일찍 접수하고 돌아가서 훈련을 좀 더 하는 게 낫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신청서를 내러 간 이실리테와 안느는 조금 다른 환호성을 받았다.
모여있던 군중 속 남자들이 예쁘다고, 미녀라고 환호성이 터져 나왔던 것.
반대로 여자들 쪽에서는 얼굴로 남자 꼬시려고 나왔냐는 야유가 쏟아졌는데, 두 여자는 어디서 개가 짖냐는 표정으로 흘려넘겼다.
=안느는 안 가?=
=응. 강자가 나올지 모르잖아. 혹시 모르니까 조금 더 지켜보려고.=
신청서를 제출하고 돌아온 이실리테는 그럼 그렇게 해, 하고는 집으로 돌아갔고, 환인도 원래 하려던 일을 하러 자리를 떴다.
하려던 일이란 다름 아닌 성술사 동료를 찾는 일.
아루루를 앞에 태운 환인은 비상과 함께 시가지로 향했다.
후드 망토를 깊게 눌러 쓴 채 아루루와 함께 비상을 타고 이동하던 환인은 처음 도착했을 때 비해 족히 세 배는 많아진 인파를 구경했다.
파르히스트는 대축제일이 다가올수록 흥겨운 분위기에 휩싸이고 있었다.
집을 나가보면 도시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여행자와 관광객들을 쉽게 볼 수 있었고, 상점과 길거리도 대축제 버전으로 바뀐 지 오래.
이런저런 이벤트가 도시의 동서남북을 구분해서 이루어지고 있어 볼거리도 풍성했다.
놀거리도 없고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은 조용한 촌락과 마을 생활에 길들여진 사람들이라면 눈이 돌아갈 광경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환인의 눈에 그의 생각을 뒷받침하듯 정신없이 주위를 구경 중인 사람들이 다수 눈에 띈다.
아무튼 도시 전체가 축제로 뜨겁게 달아오르는 느낌이지만, 환인의 눈에는 마냥 평화로워 보이지 않았다.
시민들의 얼굴 한편에 옅은 그림자가 보이는 것이다.
이유는 하나였다. 파르히스트의 아이돌이자 빈민의 여신이 살해당했다는 소문.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낸 것.
축제가 끝나면 무슨 일이 벌어져도 벌어질 것이다.
대표적으로 전쟁이라던가.
사절단이 와서 교섭을 진행했다지만 교섭 결과가 뒤집히는 일은 과거 지구에서도 흔했다.
현대에도 조약이라던가 정식으로 주고받은 국가 간 약속을 자국의 이득 때문에 헌신짝 내다 버리듯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정당한 교역에서 국가가 개입해 말도 안 되는 핑계와 트집으로 거래를 중단하는 일도 비재했는데 여기, 니오네브레스라고 다를 거라 생각하지 않는 환인이었다.
그 때문에 환인은 최장 4년, 최단 2달 이내에 전쟁이 벌어질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
일반적인 도덕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이 초래한 결과에 일말의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환인의 컨디션은 말 그대로 연일 최고조를 달리는 중이었다.
망자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시체도 수습해주었다. 복수도 해주었고 미궁을 어지럽히던 강도 무리도 척결해주었다.
미궁 안에서 개짓거리를 하는 놈들의 정체도 밝혀 파르히스트 성주의 체면을 지켜주었다.
자신은 그 대가로 자신의 안전을 조금 확보하기 위해 죽은 사람의 사유를 약간 이용했을 뿐.
게다가 자신이 소문을 퍼트릴 때는 주어와 목적어를 뺐었다.
이런 분위기가 형성된 이유는 어디까지나 시민들과 파르히스트 고위층이 스스로 만들어낸 거다.
‘……라고 생각하며 합리화를 생각하다니. 나도 변하긴 변했군.’
예전 같았으면 자신과 관련된 일이 마무리된 지금, 정말 단 1g도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꺄하하~!=
=같이 가~.=
=아하하하!=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사람들 사이를 달려간다.
축제일이 다가오며 늘어난 여행자, 모험가, 용병을 비롯해 인근의 촌락이나 마을의 관광객들은 도시 곳곳을 누비며 파르히스트 관광을 다녔다.
번화가나 시가지는 원래 떠들썩했지만 지금은 더욱 혼잡했고, 평소에는 조용한 변화가 외곽이나 고즈넉한 주택지역의 근처 상점 골목이라던가 가게들도 도시를 관광하는 사람들로 인해 북적거렸다.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축제 기념 할인이라던가 작은 바자가 도시 곳곳에서 무수하게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척 봐도 집 앞에 차려놓은 작은 노점에서 촌락에서 올라온 듯한 여행자와 기념품(이라기보다 실용적인 가정용품)을 두고 흥정하는 파르히스트 시민들.
특별 영업을 허가받아 도로에 간이 노점을 만들어 간식거리나 요깃거리를 만들며 맛있는 냄새를 뿌리는 시민들.
취미의 일환인지 흥겹게 악기를 연주하는 세 명 앞에서 기묘한 동작의 고전 안무 같은 것을 추는 사람들과 그 주변에 모여 구경하는 사람들.
고개를 들면 지붕과 지붕 사이를 장식하는 만국기 같은 오색 기장식이 도로를 꾸미고 있고 꽤 미적 감각이 살아있는 집주인의 집 같은 경우에는 알록달록한 꽃으로 외벽을 꾸민 예도 있었다.
하얀 외벽 건물에 그런 꽃이 장식되어있으니, 더욱이 그런 건물이 하나 건너 하나꼴로 있으니 확실히 축제 기간이라는 게 느껴진다.
“…….”
어디선가 바베큐 냄새가 흘러와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거리 하나가 통째로 고기 & 맥주 축제가 한창인 것을 발견했다.
보아하니 그 거리의 집 주민들이 단합해 일정 입장료를 받고 맛있게 구운 고기와 술을 무제한으로 제공하는 일종의 컨셉 거리로 보인다.
“구경거리와 즐길 거리가 상당하군요.”
=그럼요~. 이외에도 오후에는 노천극장도 열리고 야외 공연도 벌어지는걸요. 도시 동부에서는 물신 교단이 주관하는 물 축제도 해요. 도시 서문 밖에는 서커스도 도착했고요. 3일에 한 번씩 가장행렬도 이어져서 밤낮으로 볼 게 무진장 많아요!=
환인이 입을 열자 앞에 앉은 아루루가 종달새처럼 조잘거리며 어디에 어떤 축제가 있고 무슨 이벤트가 벌어지는지 열심히 설명을 늘어놓는다.
“물 축제입니까.”
=물 축제에 관심 있으세요? 그것도 재미있어요. 물신 교단이 주도하는 축제인데 성주님의 허가를 받아서 다들 서로에게 물을 뿌리면서 노는 거거든요…….=
설명을 들어보면 태국 치앙마이의 송크란 물 축제와 흡사하다.
하늘신 교단의 점지로 맑고 더운 날을 예견해 그날 서로에게 물총으로 물을 쏘거나 물폭탄을 던지며 서로에게 축복과 정화를 기원한다고.
=참여하는 사람도 매년 늘어서 지금은 수천 명이나 모여요. 그 외에도 일반인들도 대축제를 노리고 그동안 만들어놓은 수제 기념품 등도 팔고 시장이나 노점 거리 등도 있어서 볼거리도 무척 많고요!=
아루루의 반응은 말 그대로 놀거리가 가득한 축제에 잔뜩 신나고 흥분한 아이의 모습이었다.
아이들이라면 그저 많은 사람 사이를 돌아만 다녀도 가슴 두근거리고 신나겠지.
오랜만에 아루루와 함께 시가지로 나온 환인은 어떻게든 자신에게 대축제의 대단함을 알려주려 노력하는 아루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동쪽의 물신 교단 파르히스트 지부로 향했다.
성술사 동료를 영입하기 위해 며칠간 도시에 존재하는 5대신의 교단을 차례로 방문한 환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방문하는 신전마다 신관이나 사제를 일정 기간 유료로 파견하는 방식을 안내해주지, 동료의 알선 등은 일절 하지 않는다는 대답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형제님, 죄송합니다. 저희 교단도 마찬가지로 자매의 파티 가입을 장려하지 않는답니다. 대신 전투 교육까지 받은 자매님을 파견하는데…….=
역시나 이번에 방문한 교단도 인력 파견 업체처럼 신전 성술사를 돈 받고 기간 한정으로 파견하는 상품을 보여주었다.
그나마 온건하고 합리적인 느낌의 물신 교단이어서일까, 환인이 질문하자 그 이유를 설명해준다.
=고등급 파티의 미궁 탐사에는 성술사가 필수이지요. 전투 능력이 미흡한 성술사는 쉽게 파티의 착취 대상이 되기도 하며 미궁의 파티에는 남자 수가 많다 보니 성적 학대의 경우가 발생하기도 해요. 이 문제가 크게 불거졌던 것이 41년전에 있었던 러릭의 성술사 착취 사건이었어요.=
약 78년 전, 러릭이라는 인린족人?? 기린 남자가 7급 투술사라는 혼합직을 각성한 것을 계기로 대규모 길드를 형성했었다.
목적은 뚜렷했다.
최소 5급 이상의 직업자를 모아 10개의 파티를 조직, 2개조 1팀으로 꾸려 체계적인 미궁 탐사 및 마군 조사, 탐색 등을 시행하며 주변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
그중 주요 업무는 갓 생겨난 미궁의 탐색, 혹은 지역 호족의 의뢰를 받아 미궁을 파괴하는 일을 했는데, 고등급 미궁인만큼 치료를 담당할 성술사가 필수였고 러릭은 그러한 성술사를 신전에서 영입했다.
그 후에는 사건 발생 이후 알려진 대로였다.
2개 파티 당 1명의 신전 성술사만 배치했고, 2개 파티는 돌아가면서 휴식했지만 신전 성술사는 그런거 없이 미궁을 나오자마자 곧바로 미궁에 진입했다.
정신 침해가 일어나면 각성제를 먹이고 위상력이 바닥나면 약을 먹여 강제로 재우고. 그렇게 사용하다 망가지면 길드와 계약맺은 하급 창관에 돈 받고 팔아넘기고 교단에서 새로운 신전 성술사를 소개받고.
이런 일이 수십 년이나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 교단에 성술사가 흘러넘칠 정도로 많았기 때문이었다.
성술사로 각성하면 해당 지역의 신전으로 모이는 게 당시에는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하나의 집단이 성술사를 독점하는 사태가 되었다. 그리고 독점 공급자의 위치가 되면 사람은 쉽게 타락하기 마련이다.
러릭은 지역 호족, 교단의 고위 성직자와 커넥션을 맺었고 주기적으로 성술사를 제공 받았다.
2급에서 4급 사이, 비교적 약하고 문제가 있는 성술사가 중점적으로 러릭에게 제공되었고 그 과정에 수백 명의 성술사가 폐품처럼 취급되었다.
=그 일이 알려진 뒤 5대 종교는 홍역을 앓았답니다. 니오네브레스 전역에 이단심문관의 불시 검열이 시행되었고 비슷한 일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교단은 자체 정화에 나섰어요. 대다수의 고위 신관과 고위 사제가 대거 쓸려나간 거죠.=
조사 결과 대륙적으로 수만 명의 성술사가 이용당해 버려졌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개중에 추기경도 있을 정도의 신전 고위직이 관련 사건에 연루된게 백일하에 드러났다.
수천 명에 달하는 신전 고위직의 목이 심판 끝에 달아났다. 물리적인 의미에서 머리와 목이 분리된 것이다.
그리고 법제가 개편되었다.
신전은 결코 신전 성술사를 동료로 알선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전 성술사도 파티에 가입하지 않는다.
만약 신전 성술사가 파티에 참여하게 되면 교단에서는 상황을 조사한 뒤 그 성술사를 즉시 파문한다.
다소 극단적인 방식이지만 이 일로 네 자릿수의 고위 성직자의 목이 떨어졌으니 그럴 법도 하겠다 싶은 환인이었다.
다른 신전에서 그런 것을 이야기해주지 않은 것은 그게 교단의 치부여서 그런 걸 테지.
=……즉, 교단에서 성술사 동료를 얻기는 불가능하실 거예요. 가장 좋은 것은 계약금을 내시고 일정 기간 사제 자매님이나 신관 자매님의 파견을 받으시는 것이지요.=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일주일에 10금화는 좀…….
비록 그 파견 사제가 5급 이상에 어느 정도 전투 능력도 보유하고 있다지만 현재 환인에게는 부담이 큰 금액이다.
환인은 물신 교단의 사제에게 정보를 알려준데 대한 보답으로 약간의 헌금을 낸 뒤 파견 알선은 정중히 거절하며 교단을 나왔다.
‘안느에게 파티의 치료까지 짐을 지우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직업자들은 환인 자신처럼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위상력이라는 것을 자원으로 사용한다.
이를테면 판타지 소설이나 게임에서 등장하는 MP, Mana가 위상력인 것이다.
장전식이라는 것도 있는데, 난해한 술법은 외워야 할 주문만 10분에 이를 정도로 길고 복잡한 수인手?까지 맺어야 발동한다.
때문에 일반적인 술사들은 환인이 영혼 구슬을 만들어 쓰는 것처럼 미리 술법을 외워놓고 표식으로 남겨 필요할 때 쓰는데 이걸 장전?이라고 한다.
이 장전도 위상력을 소비하는 것은 똑같다.
즉, 안느가 파티의 힐러 역할까지 맡으면 1인분의 위상력을 투사의 기술 사용과 성술의 기술 사용으로 나누어 써야 하며, 가뜩이나 부족한 위상력 중 일부를 사용해 아침에 미리 장전까지 해놓아야 한다는 뜻.
6급정도 되면 본격적으로 위상력을 다루면서 기술에 소비하는 일이 많아진다.
예를 들어 방패를 땅에 내려찍어 주위를 흔들고 타격 성속성 범위 공격을 하는 것은 전체 위상력의 1/10이나 되는 양을 소비하고, 적이나 이형종의 술법적인 공격을 막으려면 이쪽도 방패에 그만한 수준의 위상력을 담아 막아내야 한다.
이 모든 걸 다 하려면 안느에게 부담이 크게 가해진다.
‘하는 수 없지.’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상처의 경중을 가려서 범용 물약을 상급, 중급, 하급으로 나누어 사용하는 수밖에.
회복제나 치료제로 어쩌지 못하는 것들만 안느의 성술 치료에 기대는 방식이면 안느에게 가는 부담도 덜해질 것이다.
현재로서는 그렇게 하며 동료를 천천히 찾아보는 수밖에 없는 듯 하다.
별 소득 없이 집으로 돌아온 환인은 안느가 안 좋은 표정으로 거실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안느의 표정이 나쁘군. 접수장에서 문제라도 있었나.”
후드 망토를 벗어 이실리테에게 넘겨주며 묻자 이실리테가 살짝 쓴웃음을 짓는데, 환인은 순간적으로 눈앞에서 빛으로 이루어진 꽃이 활짝 피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창문에서 들어온 빛이 이실리테에게 후광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인가.
=토너먼트 접수장에서 참가자와 시비에 휘말렸어요. 남자들한테 환호와 관심을 받는 게 일부 여자들의 눈에 눈꼴이 시었나 봐요.=
“…….”
안느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근 2주 전만 해도 강한 여성 왜곡된 성욕 같은 느낌의 포르노그라피에 출연할법한 체격이었던 안느는 현재, 솔잎과 부식물 층을 뚫고 자라 새벽이슬이 맺힌 민은난초처럼 가녀리고 청초한 느낌이다.
치마를 입고 싶다며 맥시 원피스에 가까운 푸른색 옷을 즐겨 입고 있어 그런 면이 더욱 두드러진다.
실상은 100kg의 압축 근육으로 바위를 주먹질만으로 깨부수는 괴력녀지만 아무튼.
“저런 외모라서 상대에게 얕보였나 보군.”
말하며 피식 웃자 그 대화를 들었는지 안느의 앵두 같은 입술이 불만을 표시하듯 삐죽 튀어나왔다.
소파 등받이에 늘어지듯이 등을 기댄 안느가 긴 한숨을 내쉰다.
=시비 받은 일은 처음이라서 당황하는 바람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어. 그게 제일 화가 나.=
아니었다면 몇 군데 부러트렸을 텐데, 여기까지 말해야 어울릴듯한 표정이다.
환인은 그녀에게 공감해주기보단 그녀의 뒷목을 한 손으로 살짝 감싸며 입술에 살짝 입맞춤해주었다.
=아?=
눈을 동그랗게 뜬 안느의 표정에 환인은 그녀의 갸름한 턱을 잡고 고개를 뒤로 젖힌 뒤 목구멍을 탐하는 것처럼 강렬한 입맞춤을 1분간 실행했다.
=헤으응…….=
1분동안 입술과 혀를 유린당한 은발의 미녀가 할딱이는 암컷의 한숨 소리를 흘린다.
환인은 작은 웃음을 유지하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느. 지금 네 모습은 투사라기보다 아름다운 신관에 가깝다. 네 예전 모습이었다면 겉으로 풍기는 위압감에 별말 하지 못했겠지.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크고 작은 시시비비에 종종 휘말릴 거다.”
달아오른 얼굴로 눈을 끔뻑이며 이야기를 듣던 안느의 표정이 대번에 차분해졌다.
무언가 깨달은 모습이니 더 이상의 이야기는 필요 없겠지.
환인은 이실리테에게 차 한잔을 부탁한 뒤 지정석에 가 앉았다. 그리고 얼마 전에 우연히 발견하고 그자리에서 구매한 수첩을 꺼냈다.
흑표범의 가죽을 쓴 것처럼 고급스러운 흑색 가죽 커버에 지구의 것과 다름없을 만큼 질 좋은 종이.
말은 수첩이라 했지만 다이어리와 비슷한 물건이다.
비록 은화 2닢이나 지불했지만 은화가 아깝지 않은 품질의 수첩을 펴서 매끈한 종이 질감을 느끼며 일정을 고심했다.
‘축제 개시와 토너먼트 시작까지 앞으로 8일…….’
남은 시간이 참으로 애매하다.
이 시간을 쪼개 써서 다른 미궁이라도 한 군데 들러볼 것인가, 아니면 유르파의 도움을 받아 위상류 훈련을 할 것인가.
환인은 도시를 돌아다니며 입수한 파르히스트 인근 미궁의 정보를 기입한 부분으로 수첩을 넘겼다.
우둔=고트모그의 감옥 미궁을 제외하고 파르히스트에서 가장 가까운 미궁은 도시에서 2일 거리에 있는 가고일 왕자의 비밀 묘지.
지하 1층에 5개 구역으로 나뉜 초거대 미로형 미궁은 X자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2시, 5시, 7시, 11시 방향의 4개 구역은 중심부로 다가갈수록 난도가 올라간다.
외곽은 1급 미궁 수준, 그리고 중심부는 5급 미궁 수준. 그러나 중심부에는 중핵이 돌아다니기에 출입이 제한되어있다.
‘한 구역만 탐사한다 치면 쿠에를 타고 왕복에 3일, 구역 하나의 탐사에 4일, 돌아와 휴식 1일.’
미궁엘 간다 치면 조금 일정이 가혹하다.
둘 중 어느 쪽이 나을지 고민하다가 이실리테와 안느의 의견도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덜컥.
개인실 쪽 세 개의 문 중 하나가 열리며 부스스한 회색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유르파가 비칠거리며 걸어 나왔다.
그녀는 주황색 은은한 빛무리가 맺힌 작은 완드를 쥐고 있었는데 빛무리는 끄트머리에 박힌 달걀만 한 주황색 보석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환인을 발견하자마자 으어어, 좀비처럼 다가온 유르파는 환인의 발치에 풀썩, 주저앉더니.
=헤, 헤헤헤…. 자아기야아, 와안성했어어으…….=
헤헤 웃으며 완드를 힘겹게 들어 보여주고는 환인의 다리를 껴안다시피 하며 축 늘어져 버렸다.
미동도 없는 유르파의 모습에 침을 꼴깍 삼킨 안느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주, 죽은 거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