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191화 (191/813)

〈 191화 〉 186 유르파=익스티나

* * *

샤라난이 잠시 가게를 맡기고 2층으로 올라간 사이 안느가 실실 웃으면서 장난을 걸었다.

=도령. 목소리가 엄청 간드러지더라?=

놀리려는 의도가 가득한 모양새였지만, 환인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게 처세술이다. 사무적인 태도의 사람보다 웃는 얼굴을 하는 사람에게 보통은 호감을 쉽게 느끼니까.”

=……그럼 우리한테는 가식 없이 대한다는 거야?=

“그래. 너희들에게만 보여주는 모습이 내 본질에 가장 가깝다.”

=…….=

=…….=

너희들만이 특별하다.

왠지 고백 같은 대답에 놀리려던 마음이 쏙 들어가버리고만 안느였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뜨거워 얼굴을 마주치지 못하겠다. 그러나 그런 설렘도 잠시였다.

=자기~! 당신을 쫓아왔어요~!=

웬 회색 머리의 하늘거리는 원피스 차림의 여자가 카운터 쪽에서 달려 나오더니 냅다 날아들어 환인의 품에 안겨든 것.

좀 전의 설레임이 무색하게 가슴이 싸늘하게 식었다.

안겨든 것까지는 평범한 호감의 발현이라 쳐도, 자기? 자아기이?

안느와 이실리테는 서로 시선을 나눈 뒤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가가 환인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는 회색 머리 여자를 떼어놓는다.

양팔을 잡힌 유르파는 재회의 기쁨도 채 누리지 못하고 살짝 당황한 얼굴로 두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응? 으응? 꼬마들은 뭐니?=

=그러는 당신은 누구길래 우리 도령한테 함부로 달려들어?=

=주인님께 함부로 접촉하지 마세요.=

=……도령? 주인님?=

이실리테와 안느가 유르파를 향해 화난 고양이처럼 털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 환인도 드물게 당혹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카턴 마을에 있어야 할 유르파 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그보다 샤라난이 말한 아는 동생이 유르파였다니.

친자매인 후이니와 엔넬까지 거부감 없이 안았던 환인이었기에 의자매 같은 그녀들을 안았다고 배덕감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의자매였기에 살짝 곤란함을 느꼈다.

샤라난과 유르파가 눈앞에서 자신을 놓고 캣파이트를 벌이는 게 아닐까 싶었던 것.

그도 그럴 게 유르파가 자신에게 안겨든 순간 샤라난의 얼굴이 경직된 데다, 유르파를 향해 내비치는 안느와 이실리테의 기색도 심상치 않았다.

네 명의 여자가 피비린내 나는 결투를 벌여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인 거다.

일촉즉발. 가장 먼저 나온 이야기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향후 분위기가 달라질 것을 직감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유르파. 그런데 유르파와 샤라난 씨가 자매 사이였습니까?”

환인의 질문에 유르파가 샤라난을 돌아보곤 한발 늦게 표정이 어색해진다. 그것을 샤라난도 느꼈는지 똑같이 어색한 표정으로 동생과 시선을 교환한다.

=유리. 설마 네가 말했던 남자가…… 환인 님이었니?=

=으응……. 언니가 말한 사람도?=

=…….=

두 여자는 기가 막혔다. 그저께 밤, 서로 좋아하게 된 남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살을 섞은 경험까지 말하며 꺅꺅거렸었는데 설마 그 사람이 동일 인물이었다니.

유르파와 샤라난의 어색하기 그지없는 시선을 본 안느와 이실리테도 그 침묵의 의미를 깨닫고는 팔을 놓아주고 입을 다물었다.

=…….=

=…….=

=…….=

“…….”

분위기가 말도 못할 만큼 이상해졌다.

마도구점의 점주인 샤라난의 강요에 가까운 요청에 환인, 이실리테, 안느는 잠시 가게를 나왔다.

나오자마자 안느가 환인을 흘겨보곤 작게 한숨을 내쉰다.

=어휴. 도령도 참 대단하네.=

“…….”

=여자를 안는건 뭐라고 안 하는데 말이야. 그래도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게 조율 정도는 해야지.=

환인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그저 입을 다물고 있는데 상책이라는 걸 알기에 먼 산만 바라보았다.

화나서 핀잔을 준 게 아니라, 기막힌 광경을 마주해서 튀어나온 한숨이었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안 들리는 척 고개를 돌리고 있는 환인을 다시 흘겨본 안느는 별달리 표정이 바뀌지 않은 이실리테에게 물었다.

=저 안에 여자들도 이슬이 니가 말한 여자들 중에 한 명이야? 아니, 두 명인가.=

=아니. 저 두 명은 나도 처음 봐. 내가 아는

사람은 백려강 님과 이엘카타 님 두 분하고 멀리 있는 촌락의 아가씨 네 명뿐이야.=

환인의 미간이 살짝 좁혀들었다.

네 명 아가씨라면 류히, 에프니스, 후이니, 엔닐 네 명인데 이실리테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스사나 브릴릿이 이야기해준 건가.

=그럼 저 회색 머리는 누구야? 6급 직업자면서 도령한테 그렇게 애정을 표시할 정도라면 보통 관계가 아닐 텐데?=

다른 의도 없이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안느의 질문에 이실리테는 모른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때까지 동행했는데 주인님이 저런 여자를 만나는 것은 본 적이 없으니까.

이실리테가 자신을 돌아보는 모습에 이 정도는 이야기해줘도 되겠지 생각한 환인은 짧게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유르파를 만나게 된 경위. 그리고 그녀를 안게 된 전말.

=아…… 흡정족이었어?=

=카턴 마을에서 뒤쫓아올 정도였으면 첫 백화 경험이었겠네요.=

흡정족을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빠르지.

“그때는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날 잊으라 당부하고 떠나왔는데 설마 날 쫓아 여기까지 따라올 줄은…… 빈말로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이실리테가 뒤늦게 생각난 듯 아, 탄성을 질렀다.

=무두질 배우면서 반장님한테 들은 기억이 나요. 유르파 씨는 파르히스트에 저택을 사서 흥청망청 살아도 될 만큼 엄청난 부자인 데다 마도 제작자로서도 크게 성공한 분이시라고…….=

그 말대로 유르파는 수준급의 6급 부여 비술사였다. 실력이 얼마나 뛰어나면 그녀가 제작한 물건을 유통하기 위해 상인이 주기적으로 마을을 방문할 정도.

그녀가 가게에 만들어둔 상품을 다 합치면 금화 수백 ~ 수천은 될법한 값어치였고 그녀의 가게 또한 지리적 이점(마을 중심부+강변)으로 수백 매의 금화를 받을 수준이다.

마을 인구 수만 명의 좁은 사회에서라지만 성공은 성공이다. 그런 지위도, 돈도, 명예도 다 버리고 쫓아온다니 평범하게는 생각하지 못할 일이지 않은가.

사정을 알게 된 안느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뒤쫓아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하겠네.=

그리고는 피식 웃는 안느였다. 어느샌가 약간 솟아오르던 못마땅한 감정이 사라졌음을 느낀 것이다.

만약 저 유르파라는 여자가 별 볼 일 없는 여자였다면 조심성 없이 여자를 후리고 다닌다고 환인에게 약간 화가 났을 것이다.

자고로 남자라면 자신의 능력과 지위에 걸맞은 여자를 안아야 한다. 그래야 곁에 있는 여자에 대한 존중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들 같은 여자를 두고 아무 특징도, 가진 것도 없는 마을 여자를 안고 홀려서 쫓아다니게 만든다?

루크랑 국가 라드세아를 넘어 니오네브레스에서 유일하게 남자가 여자에게 린치당해도 할 말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저 유르파라는 여자는 일단 능력만큼은 확실하다. 6급에 부여 비술사에 재산을 수천 금화씩이나 쌓을 정도의 자산가니까.

그런 여자가 대부분의 기반을 버리고 쫓아올 정도라니, 그만큼 훌륭한 남자라는 생각에 오히려 기분이 살짝 좋아진 안느였다.

힐끔 이슬이를 본 안느는 그녀도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나저나…….

=도령. 혹시 저 유르파라는 여자한테도 사랑한다고 했어?=

“하지 않았다.”

=아무런 감정도 없고?=

“그래.”

그렇다면 큰 문제는 안되지만, 다른 문제가 남았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

환인은 유르파를 안으며 그녀의 스펙을 대강이나마 간파했었다.

비록 6급이라지만 그녀는 전투와 거리가 먼 쪽이었다. 6급이니까 어느 정도 전투 능력은 갖추고 있지만, 능력의 9할이 전투보다 제작 쪽에 치우쳐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실리테와 안느는 전투직이고 유르파는 생산직인 셈.

그래서 환인은 그녀를 영입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환인의 구상은 자신을 포함, 전열 탱커와 중열 딜러(이실리테), 후열 서포터(자신), 후열 힐러(성술사) 4인 파티였으니까.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전투와 연관이 없는 인물까지 동료로 받아들여 파티의 몸집을 불리는 건 원하지 않는다.

파티원이 늘수록 행동이 둔해질 테니까.

환인의 계획을 들은 안느가 고개를 기울인다.

=뭐, 도령이니까 허술하게 꾸미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저 여자 정도면 데리고 다닐만하지 않아? 파티를 보다 굳건하게 만들려면 전투직 외에 생산직도 몇 명은 필요하니까.=

“거점이 있다면 상관없겠지.”

거점을 마련하고 거래와 생산 규모를 늘려 파티의 재정을 확보할 때라면 유르파는 둘도 없는 인재다.

하지만 지금은 방랑하는 중이다. 동료를 마을에 대기시킨다면 필연적으로 이동 시간에 많은 할당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미궁 입구에 전투 능력도 없는 동료를 두고 입장할 수도 없는 노릇.

=그럼 어쩌게? 집도 명예도 기반도 다 버리고 쫓아온 여자야. 설득이 안 통할 걸?=

“…….”

=막무가내로 밀어내고 떠나도 또 뒤쫓아올 텐데 혼자 쫓다가 비명횡사하면…… 입맛이 굉장히 안 좋을 거야.=

안느의 이야기에 이실리테도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환인은 그런 두 여자의 반응이 조금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유르파도 파티에 받아들이자는 건가?

둘이야 동질감을 느끼고 친밀한 사이가 되었으니 한 남자를 공유한다는 생각도 부담 없이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다.

니오네브레스의 상식에 따르면 둘이 중동이나 아랍 지방의 자매처 비슷한 관계가 된다 해도 이상할 게 없으니까.

그런데 유르파는 경우가 다르지 않은가. 분란의 소지가 될 가능성이 매우 큰데 동료로 받아들이자고? 유르파가 어떤 성격인지도 모르면서?

환인은 그녀들이 기만당했다며 분노를 표시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기색 없이 동료로 받아들이자는 쪽으로 의견이 기우는 걸 보자 불현듯 상상하기 싫은 경우가 떠올랐다.

자신이 여자를 건들인 것처럼 안느와 이실리테도 다른 남자를 데려와 관계를 꼬아버릴지도 모른다는 상상.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지.’

지구에서 태어나 지구에서 살아온 환인이었기에 남녀평등이란 관점에서 어쩔 수 없이 떠올린 상상일 뿐이다.

이 니오네브레스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사태는 극단적으로 치닫는다.

자존심 빼면 시체나 다름없는 남자는 감히 자신의 여자를 건드려 자존심에 상처를 낸 상대를 용서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서로 죽고 죽이는 사투가 개막한다.

그리고 사투에서 살아남은 승자는 이 사태를 불러온 여자도 죽인다. 남자의 자존심을 짓밟았기 때문이다.

승자는 두 명이나 죽였지만 사회의 질타를 받지 않는다. 오히려 정의를 구현했다며 칭찬을 받게 된다.

이런 게 버젓이 이루어지는 이유는 이 니오네브레스가 남녀 성비가 극단적임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남성 중심사회이기 때문이다.

환인도 그런 이유로 임자가 없는 안전한 여자, 혹은 창관의 여자만 품는 거고.

그때 딸랑, 풍경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홀가분한 표정의 유르파가 나왔다.

잠깐 주위를 두리번거린 유르파는 환인과 이실리테, 안느를 발견하곤 복잡한 심경이 느껴지는 얼굴로 다가와 말했다.

=자기. 샤리 언니가 가게에 잠시만 들러 달라고 부탁했는데…… 들어주지 않겠니? 잠깐이면 된대.=

우물쭈물하는 유르파의 모습에 환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실리테와 안느를 돌아보며 양해를 구했다.

“잠시 다녀오지.”

=응. 다녀와. 우리는 이 언니랑 잠깐 이야기 나누고 있을게.

“…그래.”

환인은 유르파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마도구점으로 들어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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