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 151 성도 파르히스트
* * *
=……?!?!=
아루루는 갑자기 자기 배 쪽에서 터져 나온 회백색의 빛 파동에 혼비백산했다.
뭐, 뭐지?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나도 쿠에를 갖고 싶다고 생각해서 짐승신님이 노하신 걸까……?
“아루루 양, 괜찮습니까?”
=네네? 어, 환인 님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글쎄요…….”
혹시 방금 일어난 일이 자기가 뭔가 잘못해서 그런 건 아닐까, 반쯤 울상인 아루루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환인은 주위를 살폈다.
환인뿐만 아니라 비상식량, 거기에 눈에 보이는 곳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 뿐만 아니라 도로를 오가는 말과 쿠에, 짐차를 끌고 가는 초식공룡 같이 생긴 파충류들까지 웅성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중이다.
=방금 뭔가 눈앞이 반짝인 거 같았는데, 뭐였니?=
=그, 글쎄? 나도 모르겠어. 그보다…… 뭔가 마음이 굉장히 편안해졌어. 넌 안 그래?
=어 너두? 나두 그런데.=
=허어, 그깟 게 뭐라고 이때까지 아웅다웅하고 있었는지 원.=
=그러게 말입니다. 욕심부릴 일도 아니었고 그저 순리에 따라 흘러가도록 두면 될 일을…… 괜히 언성 높이며 싸웠어요.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더 미안하지요.=
대낮에, 그것도 불시에 평온의 파동이 터져 나와서일까. 사람들은 파동을 눈치채지 못했고 눈치챈 사람도 파동이 어디서 터져 나왔는지보다 현재 느끼고 있는 감각에 집중하는 모양새다.
‘신전 내부에 불을 밝히지 않은 이유가 있었군.’
만약 지금이 밤이었다거나 해질녘이었으면 꼼짝없이 자신이 영혼사라는 것을 들켰을 거다.
비상식량을 타고 있는 자신에게 이목이 쏠리지 않는 것에 속으로 약간 안도하는 한편, 마음이 넉넉해지고 편안해진 사람들을 살피는 환인의 눈빛이 깊어졌다.
설마 평온의 파동을 쓰는 게 이렇게 간단했을 줄이야.
훈기와 한기는 뜨거움과 차가움이다. 즉, 극과 극이 만나 태극을 이루었다는 뜻.
태극이 무엇인가. 넓게 보면 동양의 고대 사상 중 음양과 결합해 만물을 생성하는 우주의 근원이고 좁게 보면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음양의 조화는 곧 안정을 뜻하니 회백색의 파동이 평온과 안정을 느끼게 해준다는 식의 해석도 이상할 게 없다.
두리번거리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정신 차리고 제 갈 길을 간다. 멈춰있던 도로도 움직이는 것을 보며 환인도 고삐를 쥐고 비상식량에게 출발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홀로렌 강을 건넜을 때, 우물쭈물하던 아루루가 입을 열었다.
=저기…… 방금 그거 환인 님이 쓰신 거죠……?=
자신을 뒤돌아 올려다보며 머뭇머뭇 묻는 아루루에게 환인은 작게 미소만 지어주었다.
=……환인 님이 그 일을 하시는 분인 건 비밀로 할게요!=
“아루루 양은 착하군요.”
눈치 빠른 아이는 싫지 않은 환인이었다.
우둔=고트모그의 감옥 미궁은 성도?? 파르히스트의 역사와 함께하는 미궁이자 파르히스트의 근본 그 자체였다.
감옥 미궁이 출현한 시기는 파르히스트가 마을에서 도시로 넘어가는 과도기 시점.
물자와 인재는 잔뜩 필요한데 둘 다 부족하던 당시 파르히스트 마을의 범죄자 수용소가 폭풍우와 벼락이 치는 밤에 미궁화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로 인해 마을 주변의 토양이 비옥화하며 식량 생산량이 증가했으며 가축 또한 질 좋은 볏짚을 먹으며 생육이 증대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감옥이라는 컨셉에 맞춰진 것인지 미궁의 출토품은 장물이라는 느낌의 녹슬거나 좀먹은 무기와 방어구, 그리고 간혹 등장하는 상자 속의 뇌물 풍 뭉개진 금화, 은화에 보석들.
그리고 감옥의 특성상 없을 수 없는 쇠창살.
마을로써 포화상태가 된 파르히스트, 파르히스트만 아니라 어떤 마을이든 요긴하게 쓰이는 것들 뿐이었다.
당시 별 볼 일 없던 마을 사람들은 미궁을 조심스레 탐험하며 녹슨 무기와 방어구를 회수했고, 그렇게 회수한 것들은 재연마하거나 녹여서 새로운 무기와 방어구를 만들어 다시 사용했다.
발견된 상자에서 나온 뇌물 풍 재화는 마을 번영에 모두 사용되었으며 미궁의 저층에서 생겨나는 쇠창살은 재생될 때마다 회수해서 각종 토목 공사에 사용했다.
위상석의 회수율도 높았기에 파르히스트는 활황에 활황을 거듭했고, 미궁이 등장한 이후 부쩍 각성하는 마을 사람도 많아져 미궁 공략에 박차가 가해졌다.
그렇게 생겨난 직업자들이 마을 주변 안정화를 진행하던 중 다수의 금광과 은광, 철광도 발견했고 이것들이 합쳐져 파르히스트가 성도로 발돋움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말 그대로 파르히스트가 성도로 승급할 수 있었던 바탕에 우둔=고트모그의 감옥이 있었던 것.
파르히스트와 수백 년을 함께 해온 미궁답게 감옥은 성도 파르히스트의 외성벽 안쪽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저기 하얀 벽 너머에 미궁이 있어요. 저 벽을 백원벽이라고 해요.=
아루루가 가리킨 곳은 외성벽보다 족히 1.5배는 더 높은 하얀 성벽이었는데, 독특하게도 희미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출입구는 작은 편이다. 네 명이 나란히 서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넓이였고 높이도 3m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웨이포드의 미궁과 비교하면 쪽문 수준.
‘분위기가 날카롭군.’
환인은 그런 미궁 외벽 출입구부터 날 선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흡사 국경에 전쟁 소식이 전해진 마을처럼 경색된 분위기가 파르히스트 병사들의 굳은 표정에서부터 느껴지고, 그런 병사들의 영향을 받아 출입 대기자들도 긴장하고 있다.
비상식량의 등에서 내려 줄을 선 환인은 말없이 묵묵히 차례를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후, 자신의 차례가 되어 병사에게 다가가자 얼굴에 짜증이 잔뜩 묻어나는 곰 귀의 여자 병사가 비상식량을 힐끗 보고 환인을 본다.
그리고 얼굴을 무표정으로 만들며 물었다.
=방문 목적이 어떻게 됩니까.=
“미궁 지도 구매가 목적입니다.”
=출입증을 제출하십시오.=
무미건조한 여자 병사의 요구에 환인은 출입증과 신분패를 제출했다.
신분패까지 확인한 여자 병사는 무뚝뚝함이 조금 완화된 모습으로 신분패와 출입증을 돌려주며 말했다.
=지나가셔도 됩니다. 안에서 소란을 피우면 체포당할 수 있는 만큼 행동에 주의를 기울여주시길. 그리고 아이는 출입이 금지되어있습니다. 입구에서 기다리라고 하던가 되돌려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환인이 입구에서 살짝 비켜서자 환인의 뒤에 서 있던 쥐 머리의 남자가 앞으로 나선다.
그리고 그 인서족을 본 여자 병사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아 이 미친 새끼가 또…… 이새끼야! 넌 영구 출입 금지라고 했어 안 했어?! 어?! 그런데 그 빌어 처먹을 면상을 또 들이대?! 우리가 그렇게 우습게 보여!?=
여자 병사의 샤우팅에 시궁쥐같이 생긴 인서족 남자가 기겁해서 두 손을 흔든다.
=으악! 아니아니! 누님 그게 아니라……!=
=누나는 씨발! 누가 니 누나야?!! 카람! 저 새끼 포박해!!=
=하아…… 야, 뒤지기 싫으면 좋은 말로 할 때 따라와라.=
=잠시만요 병사 나으리들! 제 말 좀…… 끄억!?=
=똥냄새 나는 아가리 벌리지마! 뒤진다!=
퍽! 퍽, 콱! 따악!
=으악, 컥! 사, 살려…….=
고성과 짜증 그리고 폭력이 오가는 광경에 아루루가 오들오들 떠는 걸 본 환인은 그녀의 등을 밀어내며 말했다.
“아루루 양. 볼일 보는데 얼마 안 걸릴 테니 저쪽 광장에서 기다리고 있으세요.”
=네, 네!=
여자 병사가 어지간히 무서웠는지 대답하자마자 도망치듯 달려가 버린다.
아루루를 보내놓은 환인은 병사들의 도끼창 자루로 얻어맞으며 죽는다고 비명 지르는 인서족을 무시하고 성벽 안으로 들어섰다.
“…….”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방대한 넓이의 또 다른 광장.
축구장을 9개, 가로세로 3개씩 합친 듯한 광장의 바닥은 검은색 자갈 벽돌로 깨끗하게 포장되어있었고, 높이만 45m에 달할 것 같은 하얀 성벽이 광장을 둘러싼 채 하늘 높이 우뚝 솟아있다.
그 탓에 그늘이 많이 져 있지만 주거지역도 아니고 딱히 신경 쓰이지 않는다.
하얀 성벽에는 10m 높이마다 사각형의 창window이 빼곡히 나 있었고 성벽 위에도 포대 비슷한 것이 설치되어있는 게 환인의 눈에 띄었다.
‘미궁 역류를 대비한 수성 대책인가.’
저 창문을 통해서 미궁을 뛰쳐나온 이형종을 공격하는 거겠지. 성벽이 저렇게 은은한 빛을 내뿜는 이유도 언데드를 약화하기 위한 조치 일부로 보인다.
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둘러본 환인은 성벽과 바닥을 제외하곤 웨이포드의 미궁 병영과 비슷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무기점, 방어구점, 도구점, 잡화점, 마도구 충전점, 술집, 여관, 목욕탕.
미궁을 나와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들의 건물이 성벽 쪽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거나, 광장 한편에 상인들이 모여 미궁에서 나온 사람들과 부산물을 두고 흥정하는 것도 웨이포드의 미궁 병영과 풍경이 똑같다.
다만 병영은 두께가 20m에 달하는 성벽 속에 꾸며놓은 듯했다.
출입구 위병소 근처에 성벽 안으로 들어가는 문 같은 게 달려 있으니 틀림없겠지. 일정 높이마다 설치된 창문으로 사람이 돌아다니는 것도 보이고.
‘딱히 둘러볼 것은 없군.’
저 앞에 미궁 건물로 보이는 단층 돌벽 건물로 향하며 주위를 둘러보던 환인은 미궁 앞 광장의 분위기에 눈을 가늘게 떴다.
사람은 많았다. 상인들을 비롯해 오가는 사람을 다 합치면 족히 300명은 되지 않을까 싶은 수준.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자아내는 소음은 활기찬 쪽의 소란이라기보다 좋지 않은 소식으로 웅성거리는 느낌이다.
미궁이 성장하려는 것에 신경이 예민해진 병사들이 날카롭게 굴어서 그렇겠지.
인간 부스러기들도 출현하기 시작해서 미궁의 위험성이 더 높아진 이유도 있을 테고.
그런데 생각보다 나이 어린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한국으로 치자면 고3이나 대1 정도. 도시 내부에 있는 미궁이라 접근성이 용이하기 때문일까.
환인은 문득 일부 사람들이 눈에 밟히는 것을 느꼈다.
무기와 방어구 차림은 평범한 모험가나 탐험가, 혹은 용병이지만 환인의 눈에는 살인자가 일반인처럼 꾸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동류는 동류를 알아본다고, 그들의 분위기에서 비인간적인 면모를 읽은 것이다.
‘사냥감을 물색하는 건가. 사람들을 살펴보는 눈길이 노골적이군.’
저 시선을 받아도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다니. 그것도 나름대로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여느 때처럼 생각을 입 밖으로 내놓지 않는 환인이었다.
=으흠. 안녕하십니까? 잠시 시간 되시는지?=
돌 창고 건물같이 생긴 미궁으로 걸어가던 환인은 진갈색 체모의 너구리 머리 남자가 다가와 말 거는 것을 쳐다보았다.
‘이 자도 불법적인 일에 가담하고 있군.’
합법과 불법 사이를 교묘하게 오가는 범법자의 분위기를 읽었지만, 환인은 내색하지 않고 평범하게 대답했다.
“무슨 일입니까?”
=아, 별건 아니고요. 보아하니 미궁 지도에 관심이 있으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마침 우리 파티가 미궁을 떠나게 됐는데, 가진 지도를 처분해야 할 것 같아서 그러는데 혹시 미궁 지도 필요 없으십니까? 사신다면 감옥 미궁 전층 지도를 19은화, 그 절반에서 조금 넘는 10은화에 팔겠습니다.=
“제안은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미궁 지도는 병사분들이 판매하는 것만 사용하라는 가르침이 있어서요.”
=아…… 그렇지요. 훌륭한 가르침을 받으셨군요. 그럼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환인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지만, 너구리 머리의 남자는 알아서 해석하며 멀어졌고 환인은 무표정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암표 상인 같은 인간이 파는 지도를 믿을 수 있을 리 없다.
멀어지는 너구리 남자를 힐끔 보니 어리고 세상 물정 모르게 생긴 사람들의 파티에 다가가 말을 걸고 있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헤벌쭉 웃으며 지도를 받아드는 회색 강아지 귀 여자.
세 명 파티의 리더인 듯한데 전사와 엽사, 성술사의 훌륭한 조합임에도 불구하고 환인은 그리 오래 살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순진해서야. 미궁이나 들판에서 등에 칼침 맞고 죽기 십상이겠지.
“…….”
내 알 바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미궁 입구에 도착한 환인은 짜증과 피로가 묻어나는 병사에게 우둔=고트모그의 감옥 전층?? 지도 19장을 19은화에 구매했다.
‘지도뿐이군. 그래서 19 은화인가.’
빛이 닿지 않는 미궁의 전층 지도는 5열은화였다. 가격 차이가 2배 넘게 나지만, 그 책자에는 이형종의 모습도 그려져 있었고 특징도 간략하게나마 적혀있었다.
정보가 포함되어있었기에 비싼 거였겠지.
큭큭.
킥킥킥…….
입구에서 적당히 떨어져 지도를 살펴보던 환인은 자신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키득거리는 한 무리의 파티를 보았다.
=어떡해. 지도 보는 것 좀 봐. 미궁에 관심 있나 봐.=
=미궁보다 각성에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할텐데 말이야.=
=너무 그러지마~. 저 사람도 하기 싫어서 각성 하지 않은 건 아닐 텐데.=
=킥킥킥킥.=
사슬 갑옷에 철판을 덧댄 듯한 장비의 남자 둘과 여자 둘이 비웃음과 조롱을 흘렸지만, 환인은 어디서 쥐새끼가 짖나 하는 태도로 몸을 돌렸다.
‘커피만 사서 바로 돌아가야겠군.’
아루루는 커피콩 상점을 몰랐는지 환인의 질문을 듣자마자 근처 가게로 뛰어 들어가더니 10분 후에 나와서 환인을 인근 상점가로 안내했다.
그리고 환인은 식품 잡화 소매점이라는 간단한 간판이 달린 곳에서 세 종류의 커피콩을 볼 수 있었다.
문제는 가격.
커피 원두는 세 종류였는데 100g당 1은화나 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이 세상으로 트립하기 전, 지구에서 가장 비싼 커피는 베스트 오브 파나마best of panama 커피 대회에서 우승한 어느 원두로 500g당 약 800달러, 한화로 90만 원짜리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저 그런 품종의 원두가 100g에 100만 원.
물론 물가가 완전히 이퀄을 그리는 게 아닌 만큼 여러 가지 고려 요소가 있지만, 그렇다해도 싸다고는 못하는 가격이다.
“…….”
고민하던 환인은 살짝 고개를 내저으며 점주에게 사과했다.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재방문을 기다리겠습니다.=
안느를 파티에 받아들이기 전이었다면 환인은 고민하지 않고 1kg정도 커피를 구매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안느를 영입해서 정식으로 파티가 결성되었고, 안느의 양보에 모든 수입이 배분 없이 파티의 활동 자금으로 자신이 활용하게 된 만큼 사적으로 유용할 수는 없다.
식비나 장비 정비, 도구 구매는 파티 활동에 포함되는 것이니 상관없지만 커피는 기호품이었으니까.
‘세 명이니 한 명당 수입의 5%씩 분배해서 개인 비용으로 쓸 수 있게 조정하는 게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소장원으로 돌아온 환인은 자초지종을 알게 된 안느의 황당해하면서도 조금 감동한 표정을 마주할 수 있었다.
=대장은 답답할 정도로 성실하네. 그 정도는 사도 아무 말 안 할 텐데.=
“그럴 수는 없다. 말하거나 의논하지 않은 부분에서 예외를 두기 시작하면 룰이 망가지는 것은 순식간이니까.”
=아니 그래도 대장이 그러면…… 내가 갖고 있던 소지금을 내지 않은 게 너무 미안하잖아. 대장은 전 재산을 공용 자금으로 넣었는데.=
“파티를 책임지는 리더와 멤버가 같을 수는 없지.”
=으~.=
두꺼운 두 손으로 얼굴을 뒤덮으니 작은 머리가 전부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다.
잠시 그렇게 고뇌하던 안느는 한숨을 푹 쉬면서 벨트의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어 작은 상자를 내려놓았다.
절그럭 소리가 나는 것이 꽤 무거워 보인다.
“이건 뭐지.”
=돈이야. 안에 30금화 정도 있어.=
“…….”
=그렇게 보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제안은 하나야. 이건 장비 마련이나 미궁 탐사 등에 쓰지 말고 그 외에 소비하자는 거. 난 먹는 것도 좋아하고 마시는 것도 좋아해. 내가 만족스러운 품질을 사기 시작하면 돈이 금화 단위로 빠져나가는 건 순식간일 테니까 이걸 쓰자고.=
그리고…… 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안느.
곰이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인 안느가 목소리에 민망함을 담으며 말했다.
=대장의 마음에 감동했거든. 언제 파티를 관두고 떠날지 모르는 나도 오래된 동료처럼 여기는구나, 해서…….=
“음.”
=대장이라면 내 소지금 전부를 줘도 될 거 같아. 하지만 그래도 받지 않을 거지?=
“멤버 개인의 재산은 개인의 것이니까.”
=응. 그러니까 이건 내가 내는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자금에 보태줘.”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받아들이지.”
흐, 웃은 안느는 그길로 환인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시 커피점을 방문했고, 환인은 미리 봐두었던 커피콩. 그중 브라질 산토스 NO.2와 흡사한 향기를 가진 커피콩을 두 주머니, 그리고 약간 시고 쓴 향기를 가진 두 종류의 원두도 한 주머니씩 구매했다.
=구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과지는 서비스입니다.=
다 합쳐서 약 1kg의 원두를 구매하자 여과지 50장을 서비스로 받았다. 가게를 나오자 가게 안의 커피 향에 인중을 살짝 찡그리고 있던 안느가 물었다.
=대장 커피 좋아해?=
“좋아한다.”
=그 쓰고 신맛만 나는 물 탄 검은 액체 같은 게 뭐가 맛있다고 그러나 몰라.=
“커피에는 여러 가지 맛이 있지. 단맛, 과일의 산미 같은 신맛, 그리고 식초처럼 혀를 찌르는 자극적인 신맛, 쓴맛, 짠맛. 어떤 원두를 어떻게 섞느냐에 따라 특정 맛을 진하게 낼 수 있고 또는 옅게 낼 수 있다. 네가 마신 커피는 다른 사람의 기호에 따른 쓰고 신맛의 바디감이 가벼운 커피였나보군.”
=우어. 커피는 그냥 시고 쓴 게 아니었어?=
이렇게 말을 길게 하는 환인을 처음 본 것 같다고 생각하던 안느는 이어진 환인의 말에 씨익 웃음을 지었다.
“네 취향을 알 것 같군. 돌아가면 네가 좋아할 만한 커피 한 잔을 내려주지.”
=헤에. 기대되는걸.=
그리고 환인에게 직접 커피를 대접받은 안느는 거짓말같이 커피를 좋아하게 되……는 일 같은 건 없었다.
=와, 이건 먹을만한데? 일부러 마실 정도는 아니지만.=
우유와 설탕을 타서 단맛과 바디감을 높이고 신맛과 쓴맛을 줄인 카페라떼를 홀짝이는 안느의 감상이었다.
그나마 이실리테는 물을 살짝 탄 에스프레소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아 혼자서 비싼 기호식품을 즐긴다는 부담을 덜 수 있었다.
‘이게 주인님이 좋아하시는 커피의 맛…….’
진실은 달랐지만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