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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기담-154화 (154/813)

〈 154화 〉 150 성도 파르히스트

* * *

이실리테의 방에서 밤을 보낸 안느는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쿠르티를 빌려서 호텔을 다녀왔다.

외모에서부터 성격과 요리 솜씨까지. 마음에 쏙 드는 이실리테와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지내고 보니 혼자 그 넓은 호텔에 덩그러니 있기 싫어졌던 것.

1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명상을 끝내고 내려간 환인은 뒤뜰에 쿠르티를 들여보내는 안느를 볼 수 있었다.

뒤뜰 정원 문을 열어 쿠르티를 내보낸 안느가 계단에서 내려오는 환인에게 손을 흔들었다.

=좋은 아침이야.=

“그래. 짐을 챙겨온 건가.”

=응. 사흘 남은 거 숙박 취소하니까 선불로 낸 요금의 50%만 돌려주더라.=

“이곳이 소장원이라지만 호텔만큼 편하진 않을 텐데.”

=무슨 소리야? 동료가 됐으니까 한곳에 머물러야지. 그리고 여기 있어야 이슬이의 맛있는 요리를 먹을 수 있잖아?=

킥킥 웃으며 주방 쪽을 돌아보는 안느의 행동에 맞춰 음식 냄새가 거실로 흘러나와 환인도 피식 웃었다.

=아무튼, 자.=

“……무슨 뜻이지?”

내미는 돈주머니를 받지 않고 묻자 안느는 손을 뻗어 환인의 손을 잡고 직접 주머니를 쥐여주었다.

=식비하고 기타 파티 운용비에 보태 쓰라고. 첫 수익은 미궁을 다녀온 뒤에 발생할 텐데 난 중도 참가했으니 일정부분 비용 부담은 해야지.=

“괜찮다. 영혼사 활동을 하게 되면 부수입이 발생하는데 그걸로 생활비를 충당하니까.”

=어제 받은 그 사례 같은 거?=

“그래.”

어제 쿼카 머리의 남자가 내준 기부금을 떠올려본 안느는 그다지 큰돈은 아닐 거라 짐작했다. 실제로도 사례금은 5열은화였지만, 일반 가구에서는 큰돈이긴해도 안느에게는 푼돈밖에 안되는 돈이다.

=흠. 성불행하면 돈이 많이 들어와?=

“중심가의 기득권층, 특권층에게는 사례비를 뜯어낸다. 성의라고 말하면 대체로 금화 단위를 내주더군. 일반 서민들은 그들의 판단에 맡기고 촌락의 주민들에게는 음식이나 술 같은 사례 외에는 받지 않는다. 대신 촌장이 촌락 발전 기금 중 일부를 안겨주지만.”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는 많이 받고 가진 게 없는 사람들에게는 안 받는단 이야기에 내심 만족한 안느는 환인이 도로 내미는 주머니를 밀어내며 말했다.

=그냥 받… 아니다. 이리 줘. 이슬이한테 줘서 맛있는 밥 해달라고 해야지.=

환인의 손에서 주머니를 낚아챈 안느는 곧장 음식 냄새가 흘러나오는 주방으로 가서 요리 중인 이실리테의 손에 주머니를 올려놓고 나왔다.

=자, 잠깐. 안느? 이거 뭔가요?=

=그걸로 식비하고 생활비로 써. 음식에 관련된 데 쓰는 건 상관 안 할게.=

=……돈이 적지 않은데요?=

요리에서 손을 못 떼는지 주방에서 이실리테의 목소리만 나온다. 하지만 안느는 대답하지 않고 환인의 탁자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 수입 분배에 대해서 말인데. 전적으로 대장한테 다 맡길게.=

“수익이 얼마나 될지도 모르는데 다 맡긴다는 건가.”

=응. 보통 파티는 모든 수익을 파티원 머릿수에 1인을 더한 뒤 나누고, 따로 빼둔 1인분으로 파티 공금으로 운용하잖아. 그런데 대장의 말을 들어보면 우리 파티는 평범한 파티가 아니니까.=

“…….”

=이슬이한테 무기랑 방어구랑 다 사줬다며? 옷하고 속옷도. 나도 그렇게 책임져주면 돼.=

환인은 유르파가 주었던 체질 관련 책자를 덮고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그렇게 생각을 짧게 정리한 환인은 빙글거리며 웃고 있는 안느에게 물었다.

“네 무구는 마도기겠지. 나와 이실리테의 장비는 평범한 마수 가죽 장비다. 내 주도로 장비의 교체가 이루어진다면 네 차례는 한참 나중의 일이 될 거다. 너에게 있어서 손해밖에 안될 텐데 그래도 괜찮나.”

=손해와 이득을 생각했다면 애초에 대장의 파티에 참여하지 않았지.=

그건 그렇지, 속으로 생각한 환인의 귀에 안느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간단하게 대장이 책임져야 할 입이 하나 더 늘었다고 생각해. 그리고 난 성투사로 활동하면서 모아둔 돈도 제법 있거든.=

이야기를 들은 환인은 검지로 탁자를 톡 톡 두드리다가 말했다.

“널 파티에 받아들이면서 생각해둔 것은, 너에게 미궁에서 일어나는 총수익의 절반을 분배하는 거였다. 현재 파티 전투력의 지분을 생각해본다면 네가 50%는 되니까. 하지만 그걸 거절한다는 것은…… 네가 우리와 합류한 이유가 뭔지 의문이 생기게 한다.”

=그야…….=

“이실리테의 밥이 맛있어서라는 대답은 하지 말고.”

말을 꺼낼 새도 없이 원천적으로 봉쇄당한 안느는 샐쭉 눈을 흘기고는 웃으며 말했다.

=간단해. 나도 이제 혼자 지내는 건 조금 지쳤어. 그리고 대장하고 이슬이가 마음에 들어. 영혼사의 호위라는 커리어도 나름대로 관심이 있고 무엇보다 특이점 덩어리인 대장하고 여정을 같이 하면 재밌을 거 같아. 이게 제일 큰 이유야.=

“재미라. 재미와 흥미는 인생에 있어 중요한 요소지.”

잠깐 생각하던 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미궁을 탐험하고 얻는 수익의 5%를 용돈으로 주지. 그 외 모든 수익은 내가 주도적으로 활용하고, 여기에 네가 내걸었던 조건인 죄 없는 사람에게 피해 주는 용도로는 쓰지 않겠다. 동의하나?”

=응. 동의해.=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이실리테가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으며 나오는 것을 보고 흑창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30분간 이실리테와 대련해준 뒤에 아침 식사를 할 거다. 그때까지 네 할 일 하고 있어라.”

=옆에서 구경해도 돼?=

“된다.”

창을 챙기러 2층으로 올라온 환인은 이실리테와 안느가 뒤뜰로 나가서 대화하는 모습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며 소리 없이 숨을 내쉬었다.

‘재미라.’

안느의 앞에서 인간 부스러기들을 잡아다 영혼의 생체 실험에 동원해도 괜찮을까.

성투사라고 무작정 정의를 부르짖는 것은 아닌 거로 보였다. 이엘카타도 분위기가 담백했을 뿐이지 마냥 순진하고 착한 것도 아니었고.

‘그래도 기본적으로 선 성향인 듯하고 그에 마땅한 기준도 세워져 있었지.’

이 바닥 생활도 짧지 않은 듯 하니 일을 진행하기 전에 적당히 보편적인 수준의 설득과 확인을 받으면 괜찮을 거라는 판단이 든다.

뒤뜰의 문을 열고 나가자 대검을 휘두르는 이실리테와 그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안느가 눈에 들어온다.

이실리테가 모범적인 정확한 자세로 종베기, 횡베기, 사선베기를 반복하고 있고 안느는 옆에서 그런 이실리테의 자세를 진지한 태도로 봐주고 있었다.

=자세가 굉장히 좋네. 하지만 대장은 창을 쓰던데…… 검도 대장한테 배웠어?=

=가르쳐준 분이 따로 있는데 신분 때문에 밝히기가 조금 그래요.=

=그래? 그럼 됐어. 이제부터 대장이랑 대련한다고?=

=네.=

=끝난 뒤에 나랑도 한번 대련해볼래?=

=앗, 30분 뒤에 식사 준비 마무리 해야 하는데.=

=당장이 아니라 쉬는 시간에도 괜찮아.=

=그러면 저야 좋죠. 잘 부탁해요=

어제 대결 결과로 알게 된 안느의 실력은 보통 이상이었다. 웨이포드의 5급 권투사 하이엔=조드보다 기술과 신체 양쪽이 1.5단계에서 2단계 정도로 더 강했던 것.

저 정도라면 빛이 닿지 않는 미궁은 홀로 간단히 주파할 수 있겠지. 1급~3급 괴물 지네가 모여있던 괴물 방을 만나더라도 위험하지 않을 거다.

‘저 신체 능력에 강령까지 받는다면…….’

하급이나 중하급 강령을 받으면 혼자서도 우르거를 잡아낼 수도 있겠지.

안느의 강함을 체계적으로 분류하던 환인은 아침 대련을 끝내고 아둔 고트모그의 감옥 이야기를 꺼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이실리테를 불렀다.

“아침 대련 시작하지.”

=네!=

30분간 방어술 훈련을 치른 뒤 집 안으로 들어온 환인은 안느가 살짝 질렸다는 듯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너 진짜 무자비하게 패더라.=

“신체 내구 단련 목적도 있으니까. 실제로도 점점 맷집이 늘고 있고.”

=이슬이 각성 타입이 뭐길래?=

“힘이 가장 세고 내구가 그 뒤를 따른다. 재생력도 일반인의 서너 배는 되겠지.”

=대검을 쓰기에 최적화된 분배네. 그렇다면 그런 훈련도 괜찮지.=

쿠웃.

=안돼. 깃털 먼지 날린다고 주방에는 들어오지 말랬잖아.=

큐으.

고개를 끄덕이던 안느는 비상식량이 음식 냄새에 이끌려 주방으로 들어가려다가 이실리테의 손에 막히는 걸 보고 피식 웃는다.

환인도 그걸 보다가 안느에게 물었다.

“아둔 고트모그의 감옥에 대해서 들은 게 있나.”

=아니? 왜?=

“아공간 가방을 구매하러 갔던 마도구점의 점주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는 인간 부스러기들이 감옥에 출몰하고 있다더군.”

=흥. 축제 기간이라고 그 분위기에 편승해서 한 몫 챙기려는 쓰레기들이군.=

안느의 표정에 칼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그런 놈들을 상대로 저주를 시험해보려고 한다.”

=……영혼사의 힘으로 저주를 건다는 거야?=

“다른 영혼사들이 힘을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기에 임의로 저주라고 이름 붙였을 뿐, 영혼에게 힘을 빌려 내리는 축복의 일종이다. 저주에 당하면 축복과 다르게 신체 능력이 떨어지지. 심할 경우 착란과 환각도 보게 되고.”

=저주 술사의 약화하고 비슷하네?=

“음. 그래서 성불하려 들지 않는 혼재를 정화할 때, 그리고 성불행을 방해하는 놈들이 나타났을 때 쓸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놈들을 상대로 연습해보려 하는 거지.”

그 행위가 네 가치관에 어긋나지 않겠냐는 질문에 안느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펴졌다.

=상관없어. 나도 적극적으로 도와줄게.=

“의외군. 일부러 함정에 걸어 들어가는 식이라 내켜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환인의 의문에 안느가 눈에 불을 켜고 으르렁거린다.

=미궁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새끼들은 몸의 구멍이란 구멍은 전부 메워버려야 하니까. 감히 땅신님의 축복에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그 안에서 개짓거리를 해?=

뿌드득, 허공을 움켜쥔 안느의 손아귀에서 살이 비틀리는 소리가 난다.

그런 부스러기들이 눈앞에 있다면 골통을 으깨버릴 듯이 살기등등한 모습이다.

‘땅의 신의 교단은 미궁을 신의 축복이라고 하는 건가.’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다. 미궁이 생긴 주변 지역의 토양이 굉장히 비옥해지니까. 거기다 미궁 안에서 나오는 각종 자원을 생각해보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이상할 지경이지.’

그 후 이실리테가 식사 준비가 되었다며 안느에게 음식 옮기는 걸 도와달라 부탁했고, 안느의 극찬과 비상식량의 환희 속에 식사를 끝낸 환인은 곧장 미궁에 들어갈 준비를 개시했다.

“이실리테. 미궁에 들어갈 준비를 시작하지. 이번 일정은 3일 정도로 필수 준비물은 밤마다 피울 3일 치 장작이다.”

=네. 그럼 아공간 주머니에 장작을 가득 채울게요. 식사는 건량 같은 간단 식으로만 준비할까요?=

“그래. 시체가 돌아다니는 곳인 만큼 감염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모르니 조심해야지.”

환인의 대답에 비상식량의 머리와 목을 쓰다듬어주며 친밀도를 올리던 안느가 버럭, 고함질렀다.

=뭐? 안돼! 질병 정화하고 약한 성역 전개는 나도 가능하니까! 밥 맛있는 거로 해줘!=

“성역이 공기 중의 감염을 막아주는 건가. 지속시간은?”

=펼치고 90분 정도? 전개를 종료하면 그만큼 쉬어야 다시 쓸 수 있어.=

“그럼 취식에는 문제없겠군…….”

=어떻게 할까요?=

미궁에서 요리는 어렵지 않다. 열선 플레이트도 있고 장작도 잔뜩 챙겨갈 테니까. 성역이 공기 중의 감염을 막아준다면 요리 환경에도 문제없다.

하지만…….

“안느. 현재 보유 중인 아공간 주머니는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에 야영을 위한 장작을 채우고 요리에 필요한 도구와 음식 재료까지 챙기기에는 공간이 부족해.”

=엥. 주머니가 그것밖에 없어?=

“핑계 같지만 여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사흘 뒤에 주문한 대용량 아공간 가방이 올 테니 그때까지는 건량으로 참아라.”

=잠깐 기다려봐.=

안느가 2층으로 올라간 뒤 위층에서 우르르, 뭔가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에 내려온 안느의 손에는 작은 포대 같은 주머니가 들려있었다.

=주문했다는 아공간 가방이 완성될 때까지는 이거 써. 가로 세로 높이 2m 가방에 무게 감소 50%야. 여기다 장작을 채우고 그 작은 주머니에는 생활 도구 넣어두면 되지?=

맛있는 식사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에 환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이실리테는 헛웃음에 가까운 쓴웃음을 지었다.

그걸 본 안느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지적한다.

=이슬이 너 그런 표정 짓는 거 아니야. 먹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그건 저도 동감이지만요. 그래도 시체가 우글우글한 곳에서까지 그러는 건 좀 어떨지…….=

=그런 곳이니까 더 잘 챙겨 먹어야지.=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환인은 가죽옷의 후드를 덮어쓴 뒤 비상식량의 고삐를 잡고 말했다.

“아루루 양이 온 거 같군. 신전에 다녀오마.”

=아, 네. 지시하신 것은 오전에 마무리 지어놓을게요.=

“그래.”

대답하고 문을 열자 문 앞에는 아루루와 렛서 팬더 머리의 또래 소년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환인 님!=

“좋은 아침입니다, 아루루 양.”

아루루의 인사를 받아주고 갈색과 흰색의 털 무늬가 귀여운 렛서 팬더 소년을 바라보자 꾸벅, 허리를 숙인다.

=안녕하세요. 여기에 안 님이 있으시다고 해서 아루하고 함께 왔어요. 안 님의 가이드인 효고에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안에 있으니 들어가 보세요. 아루루 양은 저와 함께 가죠.”

=넵! 오늘은 어디로 안내해드릴까요?!=

“일단 남부 신전부터 갑시다.”

남부로 내려가기 전, 북부 신전도 지나치면서 외관과 묘지를 살폈다.

‘묘지에 영혼이 없군. 길거리에는 가끔 눈에 띄는데……. 이엘카타가 먼저 도착해서 성불행을 한 건가.’

북부 신전의 외관은 남부 신전과 다를 게 없었다. 겉이 같다면 속도 비슷하겠지.

그리고 도착한 남부 신전은 아직 오전이라 그런지 그저께 방문했을 때와 비교하면 방문객이 1/10 수준이다.

넓은 신전 내부를 드문드문 채운 사람들 사이를 지나 성물방에 도착한 환인은 성물방의 사제에게서 범용 중급 질병 회복제, 질병 내성 증가제를 각각 12개씩 구매(­26은화, 2은화는 헌금)했다.

=감사합니다. 형제님께 짐승신님의 가호가 함께 하길 기도하겠습니다.=

“저야말로 짐승신님의 축복이 깃든 성물을 나눔 받을 수 있어 기쁠 따름입니다.”

=고마우신 말씀을……. 그러고 보니 형제님께서는 이틀 전에도 방문하셨지요?=

“예. 천벌 받을 불사자들을 일부나마 정화해보려 축성 받은 마스크를 구매해갔었습니다.”

=과연. 미궁을 준비하고 계셨던 거군요…….=

이틀 전에 보았던 회백색 파동, 그걸 물어보기 위한 운을 어떻게 떼면 좋을까 생각하던 차였는데 백색의 사제복을 입은 여사제가 운 좋게도 먼저 신변잡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덕분에 말 걸기 쉬워졌다고 생각하며 환인이 부드러운 표정과 목소리로 질문했다.

“혹시 외람된 질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례한 질문이라면 무지한 세속인이라 생각하시고 무시하셔도 괜찮습니다.”

=네……?=

짙은 금발을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빗어 내린 미녀 여사제의 눈동자가 살짝 커진다. 이윽고 난감한 듯 곱게 눈을 내리깔고 아무도 없는 주위를 살피듯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그…… 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삼가하여주셨으면합니다만…….=

다행히 허락이 떨어졌다. 환인은 여전히 부드러운 표정으로 한층 더 정중히 입을 열었다.

“그저께 방문했을 때 보았던, 그 불가사의한 회백색의 파동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 잠도 잘 오지 않았었습니다만…… 곤란한 질문이라면 답을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

여사제는 몇 초간 말없이 환인의 얼굴을 응시하다 한 손으로 특이한 성호를 그려내곤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런 질문은 지극히 평범하며 뭍 사람이라면 응당 궁금해할 것입니다. 전혀 외람되지 않은 질문이니 난감해하시지 않으셔도 괜찮답니다. 그 회백색의 파동은 영혼사시라면 누구나 노력 끝에 펼쳐낼 수 있는 것으로 평온의 파동이라 하는 것입니다.=

“평온의 파동…… 그렇군요. 그래서 그날 부드럽고 포근한 기분이 들었던 거였습니다.”

=형제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산 자에게는 마음의 평온과 안녕을 주며 죽은 자에게는 긍휼한 마음으로 정화와 성불을 돕는 자애의 파동이지요.=

환인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여사제의 손을 살짝 잡고 고개를 숙였다.

“사제님 덕분에 가슴속을 꽉 메우고 있던 체증이 내려간 기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손을 잡힌 여사제는 =아…….= 놀람을 담은 작은 소릴 내고는 뺨을 살짝 붉혔다.

그리고 환인의 몸에 가려진 입구 쪽을 살짝 내다보고는 손바닥보다 작은 쪽지에 짧은 글귀를 적어 환인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만 돌아가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형제님의 앞길에 그분의 축복이 가득하길.=

반강제로 성물방에서 내보내진 환인은 속으로 잠깐 의아해하다가 쪽지를 펴본 뒤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며 주머니에 넣었다.

쪽지에 적힌 것은 집 주소와 함께 ‘밤에 찾아와주세요.’였다.

“다음은 미궁 출입소로 갑시다.”

=넵.=

아루루를 앞에 앉힌 환인은 비상식량을 움직여 도시의 북동쪽으로 향하며 여사제가 해주었던 말, 그리고 이엘카타가 평온의 파동을 쓸 때를 곰곰히 곱씹었다.

영혼사라면 노력 끝에 누구나가 쓸 수 있다고 했지.

이엘카타는 영혼사가 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 말은 어지간해서는 다들 쓸 수 있다고 보는 게 맞겠지.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엘카타는 영도 출신의 수행자였지만 자신은 영혼사의 업이나 기술에 대해서 배운 적이 없다고 했었다. 그 말은 즉 각성하고 난 뒤 자연스럽게 쓸 수 있게 되었다고 보는 게 맞을 터.

“…….”

자신은 왜 못 쓰는 걸까. 혹시 깨달음이 필요한 건가?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별개의 제반 지식이 필요한가?

평온의 파동을 쓰기 전에 이엘카타는 양손을 맞잡았었지. 그것은 보여주기 위한 요식행위가 아닌, 파동을 쓰기 위한 단계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환인은 아루루의 작은 손에 고삐를 쥐여주었다.

=엣? 환인 님?=

“괜찮습니다. 비상식량은 똑똑해서 가야 할 곳을 말해주면 알아서 갈 겁니다. 고삐는 그냥 쥐고만 있으세요.”

=네. 네.=

두 손을 비운 환인은 기도하듯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왼손에는 훈기를, 오른손에는 한기를 흘려보낸 순간.

“……!”

화아아아아아———

밝은 햇살 아래여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회백색의 아름다운 빛무리가 밑도 끝도 없이 넓게, 그리고 멀리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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