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116화 (116/813)

〈 116화 〉 113 가닌 평원

* * *

이른 아침 식사를 끝내고 호텔에서 체크아웃한 환인은 호텔의 부속 건물인 쿠에 하우스 앞 공터에서 비상식량에게 장비를 입혀주었다.

“밖에서는 답답하더라도 계속 입고 있어라.”

쿠우.

순순히 대답하는 비상식량의 머리에 발키리 헬름, 날개 투구까지 씌워주자 이실리테가 자신의 밀짚색 쿠에를 끌고 오며 감탄했다.

=와. 비상식량 멋지다~.=

쿠엣!

으쓱거리듯 꽁지를 살랑살랑 흔드는 비상식량 옆에 이실리테의 밀짚색 쿠에가 서자 확실히 비교된다.

크기는 밀짚색 쿠에가 조금 더 컸지만, 날개와 날개 깃털은 비상식량이 월등하다. 하지만 다리 굵기는 밀짚색 쿠에가 조금 더 튼튼해 보인다.

동체도 밀짚 쿠에는 2명이 탈 수 있을 정도인데 비상식량은 혼자 밖에 못 태울 정도.

하지만 이 차이도 비상식량이 4차 성장을 하면 역전되겠지.

=주인님. 가방 올릴게요.=

이실리테는 환인의 가죽가방을 받아 비상식량의 안장 후미에 세워진 결합부에 단단히 연결하고 흑창도 창날집을 씌워 안장 옆에 붙였다.

그리고 흑창보다 짧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장검보다 긴 일자형 막대를 들며 환인에게 물었다.

=이게 주인님의 새 지팡이에요?=

“머리만 버렸다. 사슴뿔은 아무런 효과 없는 장식용이라더군.”

처음에는 사슴뿔 헤드가 걸리적거려 팔거나 버리고 휴대가 간편한 스틱이나 롯드를 사려 했었다.

하지만 마도기 상점을 방문해 여러 종류의 지팡이, 스틱, 롯드 등을 쥐어봤지만 어느 것도 사슴뿔 지팡이처럼 따스함과 서늘함 두 기운이 몸에 흘러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 막힌 것처럼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물론 답답함마저 들었던 것.

결국 쓰던 지팡이를 분석 의뢰해 사슴뿔은 그저 장식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해체, 이음새를 마감질만 해놓았다.

덕분에 작대기 같은 스틱이 되어버렸지만, 환인은 오히려 이쪽이 심플해서 마음에 들었다.

화려한 장식 같은 것은 눈에 띄고 걸리적거릴 뿐이니까.

=그렇구나. 저도 사슴뿔 모양은 좀 별로였어요. 막 부족 단위의 머리 나쁜 이형종들이나 좋아할 모양이었잖아요.=

이때다 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새를 비판하자 환인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호브가 쓰던 것을 강탈했으니 당연한 거겠지.”

=아.=

이실리테도 배시시 웃고는 비상식량의 목을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자, 다됐어.=

쿠에~.

그리고 자신의 짐을 자기 쿠에, 쿠르티에게 싣기 시작했다.

‘으흥. 이거 진짜 좋네.’

아공간 주머니 덕에 부피 대부분을 차지하는 2인분의 침낭, 옷, 식기, 주인님과 자신 그리고 쿠에 두 마리가 먹을 식량을 담으니 평범한 여행자들의 짐에 비하면 차림이 엄청나게 가벼워졌다.

=레심 씨가 선물로 준 아공간 주머니 정말 좋네요. 아니었으면 부피가 다 실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났을 텐데.=

어제 찾아왔던 레심은 여러 가지 감사와 성의 표시라며 빌려주었던 아공간 주머니를 선물로 주고 갔었다.

넣은 물품의 무게는 1%도 경감해주지 않는다. 보존 기능도 없는 단순한 아공간 주머니였지만, 1㎡ 정도의 보관량만으로도 금화 10닢이 넘어가는 물건.

촌락의 경우 금화 1닢이면 적당히 아껴 썼을 때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 큰돈이고 마을의 경우는 30년을 놀고먹을 수 있는 돈이다.

금화 10닢이면 촌락에서는 10대가, 마을에서는 3대를 먹여 살릴 거금인 거다.

그걸 가볍게 선물로 주는 모습에 이실리테가 빈익빈 부익부를 느끼고 쳇, 혀를 찼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

‘아무튼. 난 주인님만 믿고 따르면 돼.’

어제 21개의 무기를 처분하고 돌아온 이실리테는 자신이 40일간 기술원에서 하녀 교육을 받는 동안 환인이 얼마나 큰 돈을 벌었는지 듣고 깜짝 놀랐었다.

‘40금화라니.’

자신의 장비에 쓴 돈만 금화 1닢에 가깝고 비상식량의 저 장비도 금화는 가볍게 넘어가는 고가의 물건으로 보인다.

하우스를 오가는 다른 투숙객이나 호텔 직원들이 비상식량을 힐끔거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

40일간 웨이포드에서 쓴 돈을 다 합하면 5금화에 가까울 텐데 대체 무슨 방법을 사용하셨기에 그걸 빼고도 30금화가 넘는 거금을 어떻게 벌어들이신 걸까.

“미궁을 탐사하면서 돈을 벌려면 이형종 사체를 수집해야 하니 아공간 주머니를 좀 더 마련해두는 것이 좋겠지.”

이후 일정을 말한다는 걸 깨달은 이실리테가 도적단을 탈퇴할 때 강탈한 쿠르티를 보며 대답했다.

=제가 200kg 정도는 짊어질 수 있고 쿠에도 200kg 정도는 짊어지니까……. 이만한 아공간 주머니 3개만 더 사면 미궁에서 이형종 부산물을 잔뜩 챙길 수 있을 거예요.=

“노동자가 될 생각은 없다. 다음 도시에서 적당한 주머니 하나만 더 마련하는 걸로 하지.”

=넵. 주인님, 출발 준비 끝났어요.=

쿠르티의 안장 뒤에 여행 가방을 올리고 중철 대검까지 실은 이실리테의 이야기에 환인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비상식량의 등에 올라탄다.

암만 봐도 저 움직임은 평범한 영혼사의 수준을 넘었다고 생각하며 이실리테도 따라 쿠르티의 등에 올랐다.

“가지.”

환인이 등자로 옆구리를 툭 건드리자 비상식량이 알아서 몸을 돌려 길을 걸어 나간다.

안식일이라 평소보다 많은 이동량을 보이는 도로에서 비상식량이 재주도 좋게 마차 사이로 끼어들자 이실리테도 쿠르티를 몰아 환인의 옆에 자연스럽게 따라붙으며 물었다.

=주인님. 다음 목적지는 어디인가요?=

“이곳에서 남쪽으로 3주 거리에 있는 성도 파르히스트다.”

=앗. 혹시 두 달 뒤에 열린다는 대축제에 참여하실 생각이세요?=

“그래. 축제 중에 토너먼트가 열린다고 하니 그곳에서 동료를 구할 예정이다.”

=동료……인가요?=

두근, 하고 이실리테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나는 주인님께 뭘까.

지금은 하녀다. 하녀 겸 짐꾼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

이 이상은 욕심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동료라는 말에 반응하는 자신이 서글프면서도 하녀로서나마 주인님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게 기쁘다.

“그래. 그땐 네 의견도 들어볼 생각이니 조금쯤은 생각해두도록.”

……응?

지금 그 말씀은, 나도 동료라고 생각하고 말씀하신 거 맞지?!

=네, 넵.=

이실리테는 긴장을 풀었다간 환호성과 함께 날뛸 것만 같아서 고삐를 꽉 쥐고 필사적으로 입매를 억눌렀다.

성도 파르히스트와 소도시 웨이포드는 가닌 평원에 속해있다.

그리고 동, 서 로아팅스 정글이 웨이포드와 파르히스트를 좌우로 포갠 형태다.

서쪽 로아팅스 정글을 따라 북쪽으로 쭉 올라가면 올조트의 호수가 나오고 6급 삼림형 미궁과 율캄이 나온다.

동쪽 로아팅스 정글을 관통해 동쪽으로 쭉 나아가다 보면 백려강의 부모가 지배 중인 항구도시 프라버와 바다만큼이나 넓은 알류겔 호수가 나온다.

평원을 따라 쭉 남하하면 몇 개의 촌락과 마을이 나타나고 그 너머에 상급 도시, 성도?? 파르히스트가 있다.

많은 마차와 여행자들이 오가며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도로를 따라 내려가던 환인은 단단하게 다져진 비포장도로를 내려다보았다.

길을 좌우로 벗어나면 일주일 거리에 로아팅스 정글이 존재해서기도 하지만, 두 도시 사이에 비교적 평탄한 구릉과 평원이 펼쳐져 있어 이동이 고착화된 덕분에 생겨난 도로다.

환인과 이실리테는 그 길을 따라 지평선으로 향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파르히스트에 대해 아는 것이 있나.”

=기술원에서 시사와 상식을 배울 때 들었어요. 파르히스트가 성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주변에 금맥, 은맥 같은 광맥이 많아서라고요.=

자연스럽게 성도가 된 도시는 주변에 소도시 몇 개나 중급 도시를 거느리고 마을이나 촌락은 셀 수 없이 많이 지배하는데 파르히스트는 반대로 주변을 집어삼켜서 성도가 됐다.

=도시 규모만 따지면 파르히스트가 압승이지만, 주변의 마을과 촌락 숫자를 다 합치면 웨이포드와 비슷하다고 해요.=

“돈으로 주민을 모으고 영지를 늘려 성도가 된 건가. 그런 식으로는 작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을 텐데.”

웨이포드는 이 근방에서 제법 큰 도시다. 거느린 마을과 촌락의 수만 해도 세 자리에 가까울 정도.

성도라면 소도시 웨이포드보다 거느려야 할 마을이나 촌락은 더 많아야 한다.

중급 도시나 소도시도 몇 개는 거느려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파르히스트는 그런 웨이포드보다 거느린 마을과 촌락이 더 적다.

=덕분에 지배하고 있는 소도시는 하나뿐이고 역사도 웨이포드보다 짧고요. 그거 때문에 웨이포드랑 파르히스트랑 사이가 조금 안 좋다고 기술원의 선생님이 알려주셨어요.=

“사이가 안 좋다고…….”

환인은 문득 어느 주점에서 들었던 행상인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거리가 비교적 가깝고 사이가 좋은 친족, 혈족 도시라면 서로 힘을 합쳐 도로를 포장해놓기도 한다.

포장도로가 생기면 물류 수송에서부터 여러 산술적인 이익이 발생하기 쉬우니까.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전쟁이 발생하거나 미궁의 역류 현상이 발생하면 즉시 침략의 이동경로가 되기도 하기에 어지간히 친하지 않은 이상 포장도로를 놓는 일은 없다.

‘성도 파르히스트는 거리상 웨이포드의 직계에 가까운 상급 도시이지만, 사이는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다. 그 말은 도로가 포장되는 일은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겠지.’

포장도로를 놓는 일은 보다 높은 등급의 도시가 낮은 등급의 도시에게 손을 내미는 듯한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즉, 7급 호족인 파르히스트 성주는 고작 4급인 웨이포드의 성주가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이 가소로워서.

4급인 웨이포드 성주는 역사도 없이 돈으로 등급을 산 파르히스트의 성주에게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기 싫어서.

그와 함께 환인의 머릿속에 피가죽 클랜­리아나린 상회 사건의 마지막 한 조각이 갖춰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알드진 베레가 그렇게 빨리 움직였군.”

=네?=

“단순히 친족이 공격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몇 시간 만에 대형 상회를 무너트릴 병력을 동원한 것은 과한 대응이라 할 수 있다. 리아나린 상회는 명색이 웨이포드를 대표하는 3대 대형 상회 중 한 곳이니까.”

보통이라면 사법 거래 같은 것으로 상회는 알드진=베레에게 막대한 상납금을 바치고 용서받는 그림을 그리는 게 정상일 것이다.

물론 6급 호족 영애가 공격받았다는 것은 큰 문제지만, 대형 상회 한 곳이 무너진다면 적지 않은 여파가 몰아치는 것은 물론 도시의 수익까지 악화할 수 있는 건수.

때로는 명예보다 돈을 우선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는 걸 환인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환인은 조금 이해되지 않았었다. 사건이 발생하고 고작 4시간 사이 모든 일이 끝났다는 게.

“하지만 내막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 당연히 일어날 일이지.”

=어…….=

갑자기 비약된 이야기에 이실리테가 이해를 못 해 어벙한 표정을 짓는다.

“알드진 베레가 리아나린 상화를 먹어 치운 이유. 보복성이라는 뜻이다.”

=……??=

“…….”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눈을 끔뻑이는 이실리테의 모습에 환인은 입을 닫았다.

이실리테는 지식을 습득하고 그 지식을 활용하는 능력은 괜찮았다.

예를 들어 달걀을 주면 배운 달걀 요리법을 떠올려서 달걀 요리를 능숙하게 하는 식.

하지만 주어진 정보 속에서 연상 작용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유추하는 능력은 좋지 않은 편이었다.

환인은 이실리테가 이해하기 쉽도록 좀 더 풀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웨이포드와 파르히스트의 관계, 리아나린 상회와 이어진 피가죽 클랜, 영애 습격 사건, 빠르게 움직인 웨이포드의 정규군, 리아나린 상회가 다루는 주요 상품.

“알드진 베레는 파르히스트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네가 말한 역사의 심도 외에도 더 있다.”

=어떤 건데요?=

“리아나린 상회는 파르히스트에서 유행을 가져다 웨이포드에 퍼트리는 역할을 한다는 건 너도 들었으니 알 거다.”

=넵.=

“상회는 파르히스트에서 돈 주고 물건을 사서 웨이포드에 팔아 돈을 번다. 그리고 그렇게 번 돈을 다시 파르히스트에서 물건을 사서 웨이포드에 팔지. 그 말은 웨이포드의 자본이 일방적으로 파르히스트로 흘러 들어간다는 이야기다.”

=어…….=

웨이포드에서 생산한 물건을 파르히스트에 팔 수 있으면 문제는 안 됐겠지만, 하급 도시가 상급 도시에 역수출하는 일은 별로 없다.

더욱이 특징이랄게 없어 오랫동안 중급 도시로 승급하지 못한 웨이포드다.

규모의 차이 덕분에 웨이포드에서 생산할 수 있는 것은 파르히스트에서도 생산할 수 있는 것이 대부분일 테니 수출을 할 품목이 없는 것이다.

알드진=베레의 입장에서는 꼴도 보기 싫었을 것이다.

힘들여 도시를 살찌워놓으면 그 영양이 파르히스트로 넘어가기만 하니까.

그 이유로 알드진=베레는 오래전부터 눈꼴신 리아나린 상회와 피가죽 클랜을 주시하고 있었을 테고…….

“기다리던 사건이 벌어지자마자 알드진 베레가 움직인 거다.”

=6급 호족 영애 미궁 습격 사건…….=

“그래. 명분도 있으니 리아나린 상회를 시민들의 불만과 반발 없이 합법적으로 뭉개버린 거지.”

=그, 그냥 마음에 안 드니까 치우라고 하면 안 되는 거에요? 성주 님이잖아요.=

“리아나린 상회쯤 되면 파르히스트 고위층과도 연결되어있을 가능성이 클 거다. 그게 한 다리 거쳐서든 두 다리 거쳐서든. 그런 상회를 단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친다는 건 저쪽에서 개입할 여지를 주는 셈이다.”

=…….=

이쯤 되자 겨우 알아들은 이실리테가 뺨을 감싸 쥐며 한숨을 토해낸다.

=그, 참……. 간단한 일이 아니네요.=

“대형 상회쯤 되면 연 수입이 금화 수천, 수만 장은 되겠지. 그게 전부 웨이포드의 살점을 파먹고 쌓는 재산이다. 네가 만약 웨이포드의 성주라면 기분이 어떻겠나.”

명분도 이쪽에 있고 실리도 충분하다. 일석이조의 일인데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스사가 황급히 떠난 것도 리아나린 상회와 관련된 사업 아이템에 문제가 생겨서였겠지.

이실리테는 입을 살짝 벌렸다.

대형 상회의 예상 이상 가는 수입에도 놀랐지만, 그저 몇 가지 지식을 가지고 여기까지 추측해낸 환인의 지성에 놀라서였다.

이실리테는 자신이 그렇게 멍청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남들과 비슷한 정도?

그도 그럴 게 어제 무기를 팔기 위해 일반 구역과 중심가를 돌아다니며 주워들은 이야기는 대부분 자기 생각과 비슷한 수준이었으니.

­ 리아나린 상회와 피가죽 클랜이 한통속이래!

­ 피가죽 클랜이 6급 호족 영애를 습격했다던데?

­ 우리 성주님이 본보기 삼아 두 곳을 무너트렸다더라.

그런데 주인님은 자신과 달랐다.

알드진=베레가 리아나린 상회를 왜 그렇게 뭉갰는지, 어째서 그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이 해치웠는지 그 내막을 간파한 거다.

‘저번부터 생각했지만, 주인님은 절대 평범한 분이 아니야.’

어제 브릴릿하고 레심이랑 대화를 나누실 때도 그랬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자신은 무슨 대화가 이렇게 뚝뚝 끊어지고 말을 하다 마는 건가 했는데 환인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으으. 남자는 너무 멍청한 여자도 싫어한다고 하던데…….’

주인님만큼 똑똑해지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그저 주인님이 하는 말을 척, 하면 착, 하고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만 똑똑해지고 싶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실리테의 고민이 늘어간다.

이동은 마냥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사흘 동안 이형종으로 보이는 마수가 몇 차례 공격해왔고 핏자국과 마차, 짐수레 등이 부서진 흔적을 몇 번이나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오버플로우가 벌어진 미궁의 뒷정리가 아직 다 안됐나 봐요.=

“간단히 해결될 일은 아니겠지. 미궁을 벗어난 이형종을 추적하는 것은 어지간한 병력으로도 무리일 테니.”

그렇다고 해서 여행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하지 못한 영혼 화살, 영혼 폭발, 영혼 방패의 숙달을 위해 기술을 사용해 습격해온 이형종들을 손쉽게 퇴치했기 때문.

퇴치한 마수와 이형종의 가죽과 부산물은 이실리테의 손에 무두질 되어 아공간 주머니에 들어간 상태다.

‘영혼 구슬 38개의 위력이 대단하긴 하군.’

영혼 화살만 난사해도 여섯, 일곱 마리 정도 되는 2~3급 이형종은 접근도 못 하고 온몸에 구멍이 나서 죽는다.

미궁에 들어가면 이형종이 넘쳐흐르니 영혼 구슬 수급도 매우 쉽고, 야외에서도 주변의 정령을 모으면 그만이니 영혼 구슬이 부족할 일은 없다.

환인은 파티 구성을 떠올렸다.

‘내가 후방에서 서포트겸 원거리 딜러를 맡고 이실리테가 근력을 살린 근거리 딜러 역할을 맡는다고 하면 필요한 것은 전열의 탱커와 힐러.’

4명 파티에서 파티원에게 강령만 걸어줘도 6명 파티와 비슷한 전투력을 낼 수 있으니 파티가 많을 필요도 없다.

‘소수 정예가 필요해. 파르히스트에서 괜찮은 방패 역할을 구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환인과 이실리테는 또 다른 습격의 흔적과 마주쳤다.

=이 사람들도 이형종의 공격을 받았나 봐요.=

반쯤 뜯어먹힌 사람들의 흔적과 반파되어서 흩어진 수레, 그리고 죄다 헤집어진 짐의 모습에 이실리테가 눈살을 찌푸린다.

미궁 역류가 벌어진 지 언젠데 아직도 정리를 못 해. 중부 호족은 진짜 죄다 머저리들 뿐인가.

이실리테가 속으로 호족의 무능함을 욕하고 있을 때 환인은 현장에 남은 흔적을 좀 더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비상식량. 먹는 거 아니다.”

킁킁, 시체의 냄새를 맡는 비상식량을 고삐를 당겨 막은 환인이 말했다.

“이건 사람에게 습격당한 거다.”

=……네?=

“사람에게 습격당해 몸을 추스르던 중 이형종의 공격을 받았겠지. 평범한 여행자인 척하는 인간쓰레기들이 근처에 있다.”

환인의 말에 이실리테도 뒤늦게 짐을 헤집은 사람의 흔적을 발견했다.

시체도 잘 보니 베인 자국과 뒤통수를 얻어맞은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이 상도덕도 모르는 자식들…….=

인상을 사납게 찌푸리며 씹어먹듯이 중얼거리는 이실리테를 잠시 응시하던 환인이 물었다.

“네가 도적 두목일 때는 이런 상황에 어떻게 했지?”

=그야 지금처럼 미궁 역류로 주변에 이형종이 대폭 늘어나면 이형종을 사냥하러 다니죠. 정상 영업을 하려면 가도가 안전해야 하니까요. 그러다 이형종한테 공격받는 여행자나 행상인을 발견하면 도와주기도 하고요.=

“이형종을 잡아서 획득한 부산물을 파는 건가.”

=네. 부산물을 거래할만한 마을은 멀거나 못 들어가니 도와준 행상인한테 강매하는 식으로 팔아넘겨요. 그래도 바가지는 안 씌웠어요! 시세에서 10% 정도만 더 받아내는 정도였어요.=

행상인 처지에서는 큰 이윤 없는 거래겠지만 목숨을 건졌으니 불만 없이 거래에 응했겠지.

환인은 고개를 끄덕여주고 등자로 비상식량의 배를 살짝 건드렸다.

걷자는 신호였지만 비상식량은 고개를 돌려 환인을 보더니 쿠우~ 즐거운 듯 콧소릴 내며 앞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어휴. 또 달려? 비상식량 진짜 달리는 거 좋아하네.=

이실리테도 그 뒤를 따라 나란히 선다.

쿠엣!

쿠에.

쿠우?

쿠에~.

달리면서 비상식량이 쿠르티와 대화하는 것처럼 쿠에쿠에거린다.

그걸 보던 환인은 약간 답답함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늘에서 감시 정찰해주는 게 없으니 조금 답답하군.’

비상식량의 기척 감지는 야생의 초식동물보다 더 뛰어난 면이 있다. 거의 50m 거리에서도 생명체를 탐지할 수 있는 수준.

그러나 비상식량이 날아다니며 적을 찾아줄 때와 비교하면 그 범위가 1/10도 안 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만족스러운 점도 있는 법.

비상식량의 탑승감은 서스펜스가 완벽한 고급 승용차를 타는 느낌이었다. 비상식량이 일부러 몸을 흔들지 않는 이상 충격이 거의 올라오지 않는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말만 봐도 알 수 있다.

승마에 익숙하지 않으면 자신의 허리도, 말의 허리도 작살나기 마련인데 두발짐승인 쿠에는 기승 기술이 없는 초짜도 매우 편안하게 탈 수 있는 것이다.

쿠에엣!

길에서 살짝 벗어나 약간 높이가 있는 구릉의 꼭대기에 올라선 비상식량은 신난다는 듯이 달려 내려가다가 점프, 날개를 퍼덕거리며 완만한 체공을 이어간다.

삽시간에 수백 미터를 날아가자 쿠르티는 물론 이실리테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 모습을 쳐다보며 부러움 섞인 탄성을 지른다.

쿠삐~.

=우와~. 나도 날아보고 싶어…….=

살아있는 생명을 타고 비행(활강)하는 느낌은 생각보다 더 좋았다. 비행기를 타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던 것.

환인은 높은 데서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하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미소를 지웠다.

‘13명. 직업자 둘에 근접 다섯, 원거리 여섯.’

하늘을 날아가던 중, 절묘하게 시야가 가려진 구릉지 뒤편에 숨어있던 무장 강도들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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