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115화 (115/813)

〈 115화 〉 112 소도시 웨이포드

* * *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환인 님.=

단정한 바지 차림으로 이실리테와 함께 들어온 브릴릿이 허리를 깊게 숙이며 인사한다.

“…….”

환인은 말없이 작게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실리테는 입술을 삐죽이더니 중철 대검을 벽에 세워놓으며 지적했다.

=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주인님이 고작 3급 미궁에서 낭패 보실 거라 생각했어?=

=그럴 리가 있나.=

=그럼?=

브릴릿은 이실리테를 잠깐 한심해하는 눈으로 보다가 환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환인 님은 알아들으신 거 같으니 됐다.

=뭐냐구…….=

자신을 무시하고 주인님께 걸어가는 브릴릿을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이실리테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갑옷을 벗으며 환인의 허락을 받아 앞자리에 앉는 브릴릿을 힐끔거렸다.

주인님은 저 생뚱맞은 말의 뜻을 이해하신 것 같은데 무슨 말이지?

=자리를 비우신 스사 님을 대신해 앤플린드 님의 전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스사 님은 어젯밤 일어난 리아나린 상회 건으로 나흘간 웨이포드를 떠나셨으며 환인 님의 식사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어 매우 애석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흘이면 제가 드렸던 미궁 탐사 최소 예상 시일이군요.”

=예. 스사 님도 그날 복귀를 예정하시고 떠나셨습니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문제없습니다. 그런데 브릴릿 씨는 용케 저와 연관된 일인 줄 아셨군요.”

=환인 님이 입장하시던 그 날 새벽, 스사 님과 저도 미궁병영에 있었습니다. 상품 준비를 위해서였습니다.=

‘응?’

장비를 차곡차곡 정리하며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이실리테는 머리가 간질간질한 느낌과 함께 무언가가 이어지려 하는 것을 느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 미궁에서 뭔가 일이 벌어질 걸 알고 있었다. ▷ 주인님과 내가 미궁에 들어가는 걸 목격했다.

……백려강 아가씨랑 함께 들어간 걸 알고 있었다?

‘뭐야. 그럼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주인님이랑 연관이 있다는 걸 알고서 다행이라는 인사를 한 거였어?’

물론 이실리테는 스사가 어떻게 백려강 아가씨의 신분을 눈치챘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원인과 결과를 알고 있으니 과정은 그냥 넘긴 느낌.

직접 물어서 확인하고 싶지만, 주인님과 대화 중에 끼어드는 것은 하녀로서 절대 금물인 행위다. 이실리테는 궁금증을 꾹 참으며 차를 타와서 주인님과 브릴릿 앞에 내려놓고 한쪽에 얌전히 선다.

그런 이실리테의 행동에 브릴릿은 속으로 굉장히 놀랐지만,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었다.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곱게 묶은 포니테일.

티없이 하얀 블라우스와 허리까지 올라오는 가죽 코르셋. 그 아래로 쭉 뻗은 다리를 단정히 감싸는 진회색 바지.

눈을 반쯤 감고 환인의 옆에 서있는 단정한 아가씨의 모습에 브릴릿이 기억하던 선머슴 이실리테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바뀔 수 있는 거군.’

앤플린드 마님의 부탁으로 환인 님을 찾아가던 브릴릿은 앞에서 걸어오던 검전사가 =야.=하고 어깨를 툭 쳤을 때 이 여자가 제정신인가? 하고 생각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을 건드리며 아는 척하다니. 예의가 없거나 눈이 안 좋아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설마 그 여자가 이실리테였을 줄이야.

“아쉽지만 스사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다시 자리를 만들도록 하지요.”

딴생각하고 있던 브릴릿은 환인의 이야기에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예. 그렇게 앤플린드 마님께 전하겠습니다.=

“스사 씨와 앤플린드 씨에게 다음 만남까지 몸 건강히…….”

말하다 말고 멈추는 환인의 모습에 브릴릿도, 이실리테도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언제나 품위 있게 행동하던 환인이 이렇게 말을 중간에 끊은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

“……브릴릿 씨.”

=예.=

“절 얼마나 믿으십니까.”

=스사 님과 앤플린드 마님과 동등합니다.=

모범적인 답안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진담을 담아 조언했다.

“웨이포드를 떠나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 전해주십시오.”

중요한 이야기가 나올 거라 생각했지만 설마 도시를 뜨라니?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에 브릴릿이 입을 뻐끔거리다 물었다.

=어……째서인지 이유를,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다른 도시는 본 적이 없어 명쾌한 답을 내드릴 수 없습니다만. 이 도시에서 제가 발견한 혼재 예비군만 다섯입니다. 미처 찾지 못한 혼을 셈해본다면 스물이 넘을지도 모릅니다”

=……!!=

=……!=

“차후 다른 영혼사님이 이 도시를 찾을 것이라는 소식을 접했습니다만, 그 시기가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도시에 오래 머물며 그러한 영혼을 다 성불시키고 싶지만, 사정상 웨이포드를 떠나야 하기에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변명삼는다.

브릴릿은 정말로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다가 일어서서 환인에게 허리를 숙였다.

=스사 님께 꼭 전해드리겠습니다.=

“부탁합니다.”

심각한 이야기에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중에도 환인의 옆에 앉아있는, 그새 또 성장한 비상식량에게 눈길을 빼앗기는 브릴릿이다.

이실리테도 그렇고 비상식량도……. 환인 님과 함께 다니면 사람 동물 할 것 없이 큰 변화를 경험하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하며 객실을 나가려던 브릴릿은 이실리테에게 붙잡혔다.

=잠깐만…… 이야기 좀 해.=

=……무슨 이야기?=

=그으, 됐으니까 잠깐만 따라와.=

=……?=

조금 붉어진 얼굴로 자신을 잡아끄는 이실리테를 따라간 브릴릿은 이어진 이실리테의 이야기를 듣고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고, 고마워. 주인님을 모실 수 있게 된 건 너랑 스사 덕분이야.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

=어, 어.=

=스사한테는 인사할 시간이 없을 거 같아서 그러는데 스사한테도 고마웠다고 전해줘.=

=……알았다.=

환인은 이실리테가 브릴릿을 붙잡고 하는 말을 들으며 창밖의 푸른 하늘을 응시했다.

이엘카타도 없고 하이엔=조드가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른다. 도시를 배회하는 영혼도 거의 다 성불시켰고 영기를 흡수할만한 여자도 간단히 손에 넣기 어렵다.

미궁까지 경험해봤으니 웨이포드에서 할 일은 없다.

더 머무르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일.

오늘 레심이 찾아오겠다고 말하지만 않았어도 리아나린 상회가 박살 나고 피가죽 클랜의 두목이 목 매달린 것을 봤으니 후환은 없겠다고 생각하며 웨이포드를 떠났을 것이다.

“…….”

행정관 앞에 목 매달린 피가죽 클랜원들을 생각했더니 수거해놓은 붉은 영혼 구슬로 시선이 갔다.

남은 구슬 유지 시간은 앞으로 28시간 정도.

‘인간의 영혼을 강령하면 짐승이나 정령과 다른 효과를 볼 것 같단 말이지.’

인간을 대상으로 몇 가지 실험을 해보고 싶은데…….

레심과 백려강이 없었다면 습격해온 피가죽 클랜원으로 인체실험을 해봤을 거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고, 지금이 아니면 언제 다시 실험해볼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환인은 자연스럽게 일반 구역의 뒷골목 사람을 대상으로 인체실험을 하는 상상을 했다.

“…….”

그리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이지만 사람을 사람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환인은 곤란함을 느꼈다.

‘이게 살인의 여파인가.’

한두 명도 아니고 첫날에만 네 명, 마지막 날은 20명이 넘는 사람을 죽였다. 죽일 때도 아무런 느낌을 못 받았다. 그저 이형종보다 상대하기 쉽네, 하는 짧은 감상뿐.

그리고 인제 와서야 문제라고 깨달은 점을 큰 문제로 인식했다.

사회에 도움도 되지 않는 쓰레기들을 몇 죽인다고 문제가 되겠냐는 안이함이 지금도 머리를 채운다.

‘안돼.’

다른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이 세상이나 현실에서나 탈 없이 살아가려면 살인을 최대한 멀리해야 손해를 덜 본다.

그렇다고 무작정 살인을 금지하면 이쪽이 곤란한 일이 생길 수 있다. 인간 부스러기나 피가죽 클랜의 습격만 봐도 알 수 있으니까.

달칵.

=잘가.=

=잘 지내라.=

대화가 끝났는지 브릴릿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이실리테를 쳐다보았다.

‘……이실리테에게 살인의 유무 판단을 맡기는 건 바보짓이지.’

동료가 필요하다.

최소한 살인을 대신 판단해줄 수 있는 ‘정상적인’ 동료가.

레심이 찾아온 것은 점심이 한참 지났을 무렵이었다.

=내부 협력자를 통해 피가죽 클랜과 리아나린 상회 소속의 직업자 26명 및 직원과 조직원 169명을 이번 습격 계획 용의자로 모두 생포 혹은 현장에서 사살했습니다. 그중 이번 사건의 주범 격인 피가죽 클랜 리더 아시아 루단을 비롯한 7명의 수괴의 목을 매달았고 남은 19명은 이블 팩션 접경지역으로 호송 보내는 것이 결정되었습니다.=

그 외 각성하지 못한 일반인 중 죄가 없는(주로 상회 쪽) 사람은 조사를 통해 석방할 계획이고 나머지는 지하 광산 노역 행이 확정이라고.

“내부 협력자라면 리아나린 상회 수석 책임자라는 인웅족 여자입니까?”

=아십니까?=

“예. 비상식량을 금화 200에 사겠다고 찾아왔었습니다. 적당한 거절로는 납득하지 못할 모습이어서 강하게 거절했더니 겁먹고 돌아가더군요. 그 모습에서 후환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었습니다.”

=그랬군요……. 그래서 마주쳤을 때 곧장 무릎 꿇고 자비를 청했던 거였군요.=

레심의 짧은 중얼거림에 환인도 간밤에 있었던 일과 행정관 앞에서 본 것, 그리고 벌어졌던 일을 통해 어떻게 된 일인지 사정을 빠르게 추론해냈다.

‘알드진 베레는 처음부터 리아나린 상회와 피가죽 클랜의 자료를 쥐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클랜과 상회를 잡아먹은 거고.’

아무리 이프리벨과 알드티스의 협조가 있었다 하더라도 고작 4시간 만에 작전을 위한 정보 입수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환인은 확신했다. 알드진=베레는 처음부터 리아나린 상회를 노리고 있었다고 말이다.

=……환인 님은 제반 사정을 아무래도 다 파악하신 것 같습니다.=

“알드진 베레님은 처음부터 클랜과 상회의 자료를 쥐고 계셨던 거겠지요.”

=……예. 아가씨가 습격받은 것에 지극히 분노하셨지만, 냉철하게 병력을 지휘해 단숨에 리아나린 상회를 동결하고 피가죽 클랜의 주거지와 시설을 습격하셨습니다. 그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예전부터 정보를 입수한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어른의 더러운 세계를 들여다본 소년처럼 조금 어두워진 얼굴로 찻잔을 들여다보는 레심에게 환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리아나린은 웨이포드 3대 대형 상회 중 한 곳입니다. 그런 곳을 집어삼키면 아직 중형 상회에 불과한 베레 가문 직속 상회가 크게 성장할 수 있겠지요.”

환인이 수집한 지식에 따르면 웨이포드의 열두 곳 상회 중에는 베레 가문 직속 상회도 있었다.

문제는 베레 가문 직속 상회는 대형이 아니라 중형이었다는 것.

리아나린 상회를 직속 상회에 병합시키면 알드진=베레의 지갑은 더욱 풍요로워지겠지.

=아. 이런 일이 생기면 단숨에 집어삼키기 위해 자료를 모으고 있었다는 이야기군요…….=

“물론 혈족이 습격받은 것에 분노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면에서는 냉철하게 계산해 가문에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인 것이지요. 성주라면 책임져야 하는 가솔과 시민이 많은 만큼 응당 그런 행동을 취해야 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환인은 현 웨이포드의 호족과 적대할 생각이 없으며 그 뜻에 찬동한다는 자기방어적인 스탠스를 취했지만, 레심은 상관하지 않았다.

=……환인 님 말씀이 맞습니다. 리아나린 상회는 겉으로 일반 사업체를 표방하고 있었지만, 실체는 피가죽 클랜의 양지 진출을 위한 발판이었지요. 범죄의 싹은 미리 뿌리 뽑아야 하니…….=

아직 어리고 순수한 인랑족 남자에게 친족이 공격받은 것을 빌미로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알드진 베레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부류.

그러나 이해해야 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자신도 그러한 세계에 살고 있었으니까.

레심은 조금 기운 빠진 모습으로 나머지를 설명했다.

=피가죽 클랜과 리아나린 상회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특히 피가죽 클랜은 일반 클랜원들까지 잡혀들어왔으니 이후로 환인 님을 귀찮게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아가씨께서 잘 말씀하신 덕분에 이번 사건의 초점은 도시의 뒷골목 조직이 호족 영애님을 습격, 납치하려 했다는 것에 집중됐습니다. 피가죽 클랜이 이전에 해왔던 범법 행위도 차츰차츰 수면 위로 떠 오르는 중이니 환인 님이 성가신 시선을 받는 일은 앞으로도 없겠죠.=

“아가씨께 신경 써주셔서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십시오.”

=예. 꼭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감사드립니다.=

무엇이 감사한지 내용이 빠진 이야기였지만, 환인은 어렵지 않게 파악하고 조용히 대답했다.

“레심 씨가 고마워하실 일은 없습니다. 저는 계약에 따라 아가씨를 호위했을 뿐이며, 그 과정에 아가씨가 밝아지고 진취적인 성격으로 변한 것은 아가씨 자신이 만들어낸 변화이니까요.”

자신이 우려하는 것을 꿰뚫어 보고 배려해주는 저 모습.

레심은 정말로 안타까워했다. 이분이 호족만 된다면 호족 출신 영혼사라는 네임드로 아가씨와 이어질 조그만 가능성이 생길 텐데.

그렇게 아가씨와 맺어진다면 아가씨도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텐데.

=……그래도 감사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아무리 영혼사인데다 출중한 무술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6급 호족은 엄연히 준진골로 취급받는다. 그런 집안이 차원 방랑자 출신의 영혼사와 혈연으로 맺어지는 것을 받아들일까?

절대 아니라고 레심은 장담할 수 있었다.

영혼사라는 존재의 가치가 뛰어나긴 하지만 그게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하면 절대 아니다.

후원등을 하는 것으로 충분히 친밀하게 지낼 수 있는데 굳이 외인의 피를 가문에 받아들일 이유가 있는가.

6급 이상 호족은 호족끼리 이어진다.

8급이상 진골은 진골끼리만, 10급의 성골은 성골의 피가 이어진 성골하고만 이어지는 것이 불문율처럼 아득히 먼 과거부터 이어져 왔다.

다른 피가 섞여드는 것을 가문은 절대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아가씨를 숙청하고 그 대상이 된 환인 님마저 살해하려 할 수 있는 사항.

만약 환인이 성족의 임명으로 1급, 혹은 2급 호족이 된다 하더라도 본인의 끔찍하면서도 열정적인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할 텐데 레심이 지켜본 환인은 열정과 거리가 먼 성격이었다.

‘아가씨…….’

아가씨도 그것을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니 성에 들어온 뒤로 기운 없는 모습을 보였던 거겠지.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잘 가십시오. 기회가 되면 다시 봅시다.”

=하하……. 만약 프레버를 방문하신다면 드린제 가문을 찾아주십시오. 환대로 맞이하겠습니다.=

“꼭 찾아가겠습니다.”

환인과 악수를 하고 나온 레심은 아가씨의 걱정으로 인해 우울한 마음을 표정에 드러내며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빌어먹게도 푸르군.’

* * * *

=이엘카타 님.=

=백려강 님.=

작은 새가 지저귀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꽃이 흐드러지게 핀 작은 정원에서 명상을 겨우겨우 이어나가고 있던 이엘카타는 폭풍과도 같은 사건을 이끌고 나타난 호족 영애를 돌아보았다.

=죄송해요. 제가 명상을 방해했나요?=

=아닙니다. 부끄럽게도 잡념을 떨치지 못해 시간만 축내고 있던 차였습니다.=

작게 미소 지으며 대답하는 플뢰 족 영혼사의 모습에 백려강은 한 남자의 모습이 어렴풋이 비춰보이는 것을 느끼며 그녀의 옆에 살포시 앉았다.

=…….=

=…….=

찌르르르­ 짹짹.

쫑쫑쫑.

정원을 찾아온 작은 새들이 두 사람의 어깨며 머리에 내려앉아 노래를 부른다.

조인족 중에서도 희귀한 파랑새의 피를 짙게 이은 백려강과 숲의 종족인 이엘카타가 예쁜 정원에 나란히 앉아 작은 새들과 놀아주는 모습은 지나가는 시종, 시녀와 기사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 폭의 명화로군.’

‘저 장면을 그림으로 남길 수 있다면 돈을 얼마라도 낼 텐데…….’

백려강은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노니는 작은 새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앉아있는 이엘카타를 힐끔, 훔쳐보았다.

웨딩드레스 같은 순백의 옷을 입고 머리에 작은 티아라를 올린 이엘카타는 그녀가 살아오면서 몇 번 보지 못한 절세미녀였다.

파란 색조에 흰색을 섞어 디자인한 드레스의 백려강도 그녀 못지않은 미녀였지만, 백려강은 한 가지 사실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있었다.

처음 웨이포드의 성에 들어왔을 때 이엘카타와 처음 만난 백려강은 그녀에게 좋은 감정은 없었었다.

환인의 짧은 설명만 들었을 때는 이엘카타가 환인의 활약을 도둑질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달랐다.

이엘카타는 성에 불려오자마자 도시에 자기자신 외에 다른 영혼사가 한 분 더 계시며, 도시를 배회하는 혼을 정화한 분은 그분이었다는 것을 솔직하게 밝혔던 것이었다.

=혼재마저 정화하시는 그분께서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조용히 성불행을 행하는 분이십니다. 성주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면 부담스러워 피하실 테니 멀리서 지켜만 보심을 권해드립니다.=

=개인적으로도 꼭 한 번 그분을 뵙고 싶습니다만……. 엘위드리스 가문의 영애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따르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인연이 닿는다면 언제고 이어지는 법. 알드진 베레 님과 연이 닿을 분이라면 차후에 꼭 다시 만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엘카타가 힘을 써서 알드진=베레의 관심을 그분에게서 떨어트려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땐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었고.

=그분은 저의…… 정인 같은 분이십니다.=

영도??의 영혼 기사가 도착할 때까지 머무르는 이엘카타와 친해진 이후 그녀의 고백을 들은 백려강은 질투를 느꼈다.

같은 여자도 반할 만큼의 미녀가 뺨에 옅은 홍조를 띠며 한 말은 그녀가 그렇게나 간절히 바라던 경험이었기 때문이었다.

포르릉.

=…….=

자신의 손바닥에서 떠나가는 알록달록한 작은 새를 바라보던 백려강이 가슴 속에 차오르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자신조차 어찌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진 소녀의 모습에 이엘카타는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백려강 님.=

=……?=

=저는 백려강 님이 부럽습니다.=

=전 이엘카타 님이 더 부러운걸요……?=

그녀를 돌아보며 말하던 백려강은 마치 금빛과 은빛이 스며든 것처럼 빛나는 이엘카타의 눈동자에 순간 말끝을 흐렸다.

저건…… 무슨 현상이지? 백려강이 눈을 깜빡이자 이엘카타는 상냥한 얼굴로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자상하게 어루만졌다.

=저와 그분의 인연은 가늘디가늘어 이후에도 이어질 수 없는 연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다르다는 말일까? 설마 이엘카타 님의 저 눈동자는 예지시??? 능력?

들어본 적이 있다. 고대 플뢰 족의 피를 이은 가문에서 때때로 미래를 예지하는 사람이 태어난다고.

백려강은 가슴 두근거리며 이엘카타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지만, 그녀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지며 자신의 손을 잡는 순간 두려움이 살짝 가슴을 먹먹케 했다.

=……당신에게는 두 가지 운명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으로서도, 가문으로서도 평탄하고 무난한 삶을 이어가며 여성으로서 행복을 얻을 운명.=

=하나는 멀고 괴로우며 춥고 아프며 힘들고 지치는 고난과 가시밭길. 그 끝에 있는 것이 당신이 바라는 행복인지도 알 수 없는 운명.=

=어느 쪽을 선택할지 당신은 선택하기만 하면 됩니다.=

=…….=

=그러면 그 운명은 당신의 것이 될겁니다.=

백려강은 금빛과 은빛의 눈동자에 홀린 것처럼 한참 뒤에, 노을이 질 무렵 레심이 찾아와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 이엘카타 님은……?=

=영혼 기사님들과 떠나셨습니다.=

=아…….=

=괜찮으십니까? 어지러워 보이는데요.=

=응. 괜찮아. 난 괜찮아…….=

걱정스러운 레심의 물음에 멍하니 대답한 백려강은 세상이 불타는듯한 붉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슴에 손을 올렸다.

‘내 운명…….’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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