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092 소도시 웨이포드
* * *
헬마르=베레.
소도시 웨이포드의 17대손이자 현 웨이포드 성주 알드진=베레의 형제.
그는 하룻밤……이라는 표현도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단시간에 27명이나 되는 영혼을 성불시킨 영혼사에게 경악과 경외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때 가문을 찾은 영혼사는 가묘의 영혼 하나를 성불시키는 데만 꼬박 일주일이 걸렸었어. 그런데 저분은 어떻게 저렇게 간단히 영혼을 성불시키는 거지?’
특히 마지막의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고족 거리 저택에 가묘조차 세우지 않은 졸부들을 말로만 성불시킨 장면에는 전율이 일었었다.
그래서 헬마르는 나섰다.
이분이라면 자신의 의문을 틀림없이 해결해줄 거라고 믿어서였다.
“…….”
환인은 그런 헬마르를 보며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속으로 지었다.
첫날 헬마르의 정체를 듣고 헬마르의 의문을 들은 환인은 직감적으로 더러운 정치판의 술수로 희생된 것을 간파했다.
문제는 바로 거기서 발생한다.
헬마르를 성불시키기 위해서는 직접 그 정치판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뜻.
환인이 보기에 헬마르=베레는 호족‘치고’ 지나치게 착했다. 착한데다 화술도 뛰어났다.
그간 이 세계의 기초 상식을 수집하며 알게 된 것에 따르면 호족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긴 하지만 대다수가 선민의식의 극에 다다른 족속들이었다.
그런 족속임에도 불구하고 헬마르는 이곳 제2 공동묘지의 영혼들과 상당히 사이좋은 관계성을 가지고 있었다.
다들 방황하는 영혼이라는 동병상련으로 인한 동질감이 있긴 했겠지만, 그게 가능했던 것은 헬마르의 기본적인 성정이 착하고 말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이었을 거다.
헬마르는 알드진=베레의 동생이다.
이 세계에는 적서 차별이 존재했다. 정실의 장자, 즉 적장자가 가문의 모든 것을 이어받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헬마르는 죽었다.
살아생전은 몰랐지만, 죽고 나서 보니 알 수 있었다고 헬마르는 말했다. 오랜 시간 천천히 독을 먹어 죽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헬마르는 부모님께 묻고 싶다고 말했다. 왜 자신이 죽어야 했느냐고.
‘부모가 죽인 게 아니라 형제가 죽였겠지. 어쩌면 부모의 방조도 있었을 수도 있고. 알드진에게 과잉 충성하는 고족이 독살했을 수도 있고.’
적장자도 아닌 헬마르=베레의 친화력은 누군가의 우려를 사기에 충분해 보였으니 말이다.
아무튼 가능성은 여러 가지지만 팩트는 하나다.
헬마르의 영혼을 데리고 성에 들어가면 자신도 위험하다는 것.
웨이포드 성의 가묘에도 안장시키지 않고 이쪽으로 쫓아냈다는 걸 보면 어지간히 싫어하는 게 틀림없다. 그래서 환인은 나서기 싫었다. 이런 정치판에 끼어드는 것은 자신의 취향이 아니었으니까.
보통 평범한 사람이라면 여기서 적당히 말을 돌리거나 꾸며내서 헬마르의 부탁을 거절했을 것이다.
“헬마르. 당신의 미련은 제가 해결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환인은 직설적으로 거절했다.
「어, 어째서요? 영혼사님은 굉장한 실력이시잖아요. 저도…….」
“당신은 호족 가문 정실의 둘째입니다. 성골 중에서도 성골이지요.”
「그, 그런데요?」
환인은 헬마르가 어째서 죽어야 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저 또한 저 먼 나라의 왕족 핏줄입니다.”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지만 어쨌든 한국인은 단군의 자손이나 다름없으니 자신이 왕족의 핏줄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왕가의 밑바닥이 어떤지 알고 있기에 가능하면 이 나라의 왕족이라 할 수 있는 호족의 집안 사정에 개입하고 싶지 않습니다.”
「…….」
환인의 거부에 헬마르의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눈앞의 영혼사가 왕의 핏줄이라는 것은 놀라웠지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집안일에 개입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어째서?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냥 가서 물어보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어느새 3명의 영혼은 흩어지고 헬마르만 사당에 남은 상황.
환인은 이엘카타를 돌아보며 말했다.
“피곤해서 쉬고 싶군요. 쉴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해주시겠습니까.”
환인의 대화를 귀담아듣던 이엘카타는 연이은 충격에 머리가 멍멍했지만, 환인의 부탁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 영혼사님. 이쪽으로…….=
그리고 우두커니 선 헬마르=베레를 두고 환인을 오두막으로 안내했다.
환인과 비상식량을 자신의 거처로 데려온 이엘카타는 복잡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쿠엣. 쿠우~
“좀 쉬자.”
쿠엑! 쿠우웃!
“넌 지금까지 편하게…… 아니다. 여기냐? 여기가 좋으냐?”
쿠헷. 쿠히히히.
자신의 침대에 앉아 녹색 애완조와 놀아주는 온화한 모습.
영혼의 유족들에게 사례금을 갈취하던 불한당 같은 모습.
갈취한 돈을 다른 영혼의 유족을 돕는 데 사용하는 천사 같은 모습.
영혼사의 권리이자 의무인 성불을 외면하는 악마 같은 모습.
그리고 먼 나라의 왕족이라는 정체성.
또 자신을 안아줄 때 보여준 짐승 같은…….
어젯밤 자신을 찍어누르던 남자의 무게감을 무의식중에 떠올린 이엘카타는 황급히 생각을 털어내고 땅의 신님께 기도를 올렸다.
=…….=
이엘카타는 어느 모습이 환인의 참모습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의 종족에게 내려지는 축복. 진실의 눈과 진실의 귀는 여태까지 환인이 거짓말 한 점 없이 행동해왔음을 알려주었다.
선인과 악인의 모습이 공존할 수 있는 건가?
영혼의 성불을 행하면서 영혼의 성불을 외면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갖출 수가 있는 건가?
영혼사가 되려면 저런 양면성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나?
“이엘카타. 괜찮습니까?”
=네, 네?=
“슬럼가의 악취가 당신에게는 힘들 수도 있었겠군요. 앉아서 좀 쉬도록 하세요.”
어느샌가 가까이 다가와 자신의 이마에 손을 올리며 염려해주는 다정하고 달콤한 목소리.
귀가 오싹하는 느낌에 쫑긋 세운 이엘카타는 자신도 모르게 귀를 감싸 쥐었다가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거절했지만 이엘카타는 자신의 손을 잡아당기는 그의 힘을 거부할 수 없었다. 손만 잡혔을 뿐인데 온몸이 잡힌 것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의 손에 이끌려 침대 가장자리에 앉으니 귀엽고 예쁘게 생긴 녹색 새가 무릎에 머리를 올리고 똘망똘망한 눈으로 바라본다.
이엘카타는 그 귀여운 모습에 작게 미소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보드라운 깃털의 감촉이, 살아있는 생명의 따스한 온기가 오늘 하루 느꼈던 정신적인 압박을 해소해주는 느낌이다.
=……영혼사님. 한 가지만 여쭈어보아도 될는지요.=
“물론입니다.”
차마 환인의 눈을 들여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이엘카타는 웃는 것처럼 눈을 감고 있는 녹색 새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째서 헬마르 씨의 영혼을 방황에서 구해주지 않으셨습니까? 다른 영혼들도…… 영혼사님이시라면 충분히 성불로 이끄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계속 생각하느라 표정이 안 좋았던 건가. 고지식함이 느껴지는 질문에 환인은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었다.
그걸 본 이엘카타는 그가 왜 웃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살던 곳에 벌집을 들쑤신다는 관용구가 있습니다.”
=벌집……인가요?=
“둥지를 공격당한 벌들은 당연히 화를 내겠지요. 깊게 사고할 지성이 없으니 일단 보이는 생물은 다 공격하려 들 겁니다.”
환인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눈치챈 이엘카타의 안색이 흐려진다.
쿠엣?
“비상식량. 이리 와라.”
눈을 깜빡이며 고개 숙인 이엘카타를 향해 우는 비상식량을 안아 든 환인이 이야기를 이었다.
“헬마르 씨의 미련을 들어주는 것은 간단합니다. 제가 숨기고 있던 정체를 밝히고 알드진 베레 4급 호족의 성을 방문해 헬마르 씨에게 영기를 충전해주면 그만입니다. 그러면 헬마르 씨는 사후의 의문을 해결할 수 있겠지요.”
=…….=
“어제 제가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헬마르 씨의 성불은 고도의 정치적 문제가 섞여 있다고…….=
“예. 헬마르 씨는 독살당했습니다. 그의 생전 모습 또한 착하면서도 사교성 좋고 친화력이 뛰어난 사람이었겠죠. 하지만 현명한 지성은 갖추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친화력을 경계한 알드진 베레, 혹은 헬마르 씨의 부모, 어쩌면 그들에게 과잉 충성하는 누군가가…….”
=헬마르 씨를 살해했겠지요…….=
“……그런 상황에 그를 성에 데려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이엘카타는 대답하지 못했다.
짐작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두려운 상상이 끝없이 퍼져나가서였다.
“나쁘게 말하면 멍청하고 좋게 말하면 순수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화가 나면 무섭게 변하는 법입니다. 그의 마음속에 품고 있던 원한과 증오의 씨앗이 분노라는 비료를 먹고 싹을 틔우면 그는 혼재로 변화할 겁니다. 그런 혼재는 저도 정화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상태가 된 헬마르 씨는 일가친지의 죽음을 원할 테지요. 그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 가십니까?”
환인의 담담한 이야기에 이엘카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작은 얼굴이 두 손에 다 들어가는 것을 보며 환인이 확인 사살하듯 말했다.
“웨이포드에 재앙이 내릴 겁니다. 혼재로 인한 아비규환, 알드진 베레의 분노로 인한 탄압, 자신의 치부가 퍼지지 않도록 통제하려는 시도에 무차별적인 보복까지.”
=……헬마르 씨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뜻인가요……?=
“모든 영혼이 가진 미련과 한을 풀어주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살해당한 사람의 억울함은 누가 풀어주나요?=
“자신들은 사람 위에 서 있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벌을 내려야 한다면…… 그건 신들이 해야 할 일이겠지요.”
=……!=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멍한 표정의 이엘카타에게 다가가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러자 이엘카타의 가녀린 눈매가 슬픔에 차 흔들린다.
=그런 건…… 너무 슬픈 이야기에요……. 모든 영혼에게 공평하게 향해야 할 성불과 정화의 축복이, 몇몇 사람 탓에 갈라져야 한다니…….=
“…….”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저 자신이 가장 한심하게 느껴져요…….=
환인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안아주었고 이엘카타도 말없이 환인의 가슴에 안겨 작은 눈물을 흘렸다.
슬픔에 잠긴 이엘카타를 상냥하고 자상하게 잔뜩, 온몸으로 보듬어준 환인은 지쳐 잠든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이런 성향이 이엘카타의 특성인지, 아니면 영혼사들의 공통된 특성인지도 궁금하군.’
영혼의 성불과 정화를 그저 비즈니스적으로만 여기는 환인이었다. 하지만 이엘카타는 영혼 성불 작업을 숭고한 사명, 혹은 그와 비슷한 인류애 정도로 여기듯 했다.
만약 다른 영혼사들도 이엘카타와 비슷한 성향이라면…….
‘좀 더 착한 척을 하는 것이 좋을까.’
이엘카타의 하얀 목과 쇄골, 뽀얀 가슴 등에 새겨진 자신의 키스 마크를 만져보던 환인은 이불을 끌어 올려 그녀의 나신을 덮어주고 오두막을 나왔다.
‘이 이상 착한 척은 무리다. 생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이보다 더 착한 척을 해야 할 이유도 없고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만약 어떻게든 그래야 한다면…….
‘영혼사로써 활동은 중단하고 모험가 행세를 하는 쪽이 낫지. 이 경우 초능력은 종족 간에 주어지는 특별한 탤런트, 기프트 정도로 꾸미면 될 테고.’
이 세상의 사람들은 특별한 종족 재능tribal talent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플뢰 종족인 이엘카타는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서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과 귀를 가졌다.
진실의 주시자watcher of truth라는 선천 능력이다.
루크랑 족은 수인화animalization라는 능력으로 일시적인 동물로 변신해 몇 배나 강해진 육체 능력을 선보일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을 소개할 때 아주 먼 곳의 소수 종족 정도로 소개하면서 종족 재능이라고 설명하면 다들 이해할 테지.
외모도 4대 종족, 7대 아인종 여느 종족과도 다르니까.
제2 공동묘지를 걸어 나가던 환인은 자신과 시선이 마주친 영혼들이 슬그머니 숨는 것을 보았다.
‘헬마르를 제외한 나머지는 내버려 두면 제풀에 미련의 끈을 놓치고 성불할 거다. 수천 명이 묻혀있는 이 넓은 묘지에 고작 31명의 영혼만 있던 걸 보면 틀림없어. 헬마르가 가장 큰 문제인데…….’
잠깐 생각해보던 환인은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자신만 사라진다면 헬마르를 자극할 요소는 없어진다. 그러면 언젠가 제풀에 지쳐 성불할지도 모르는 일.
혹시 긴 시간 현실에 남아 율캄의 혼재나 이실리테의 아베트처럼 혼재가 된다 치면 그땐 다른 영혼사가 그를 제령 하겠지.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미궁 조사와 다른 세 곳 공동묘지를 방문해야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비상식량과 함께 올츠 호텔로 걸음을 옮기는 환인이었다.
하지만 방문하지 못했다.
=들었어들었어? 우리 도시에 영혼사님께서 방문하셨대!=
=정말? 언제? 어디에 계신대?=
=몰라. 어젯밤에 슬럼가에 나타나셨다더라!=
=어? 난 중심가에 나타나셨다고 들었는데?=
=둘 다 나타나셨겠지 뭐! 아무튼 영혼사님이 오셨으니까 거리가 한층 더 맑아지겠네~.=
어찌 된 일인지 영혼사가 웨이포드를 방문했단 사실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었다.
스사의 저택을 찾아가는 동안 모여있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는 대부분 하얀 후드 로브의 영혼사 이야기였다.
‘유족들은 내가 직접 당부했고 그들도 절대 밝히지 않겠다고 확답을 받았다. 이엘카타도 약속을 어길 위인은 아니야. 스사는 당연한 일이고. 소문은 역시 슬럼 지역에서 퍼진 건가.’
슬럼의 판잣집은 방음 성능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바로 유족들을 데리고 나왔다지만 유족들에게 믿음을 주는 과정에서 소리가 새어 나갔겠지.
저택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스사가 나와서 우려를 표시했다.
=환인 님. 도시가 시끌시끌한데 괜찮으십니까?=
“예. 한동안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자신이 제2 공동묘지를 방문하는 모습을 본 사람은 얼마 없다. 본 사람들도 묘지에서 일하는 관리인들 뿐.
=그러면 다행이군요. 아무튼 브릴릿에게 보고는 받았습니다. 그들을 촌락으로 이주시키고 싶으시다고요.=
환인은 그의 저택 응접실에서 스사의 부인, 앤플린드에게 차를 대접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더 이상 웨이포드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으니까요. 망가진 몸도, 지친 정신도 되돌리려면 촌락으로 이주하는 게 가장 좋을 겁니다. 세 가족을 이주시키고 정착하는 데 드는 비용은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주머니에서 금화 세 장을 꺼내놓자 스사가 눈을 부릅뜨더니 고개를 붕붕 젓는다.
=환인 님. 율캄과 에트브룩에서 받은 사례금이 얼마였는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금화 1장이면 8인 가족을 기준으로 평생을 놀고먹고 살아도 되는 돈입니다. 제 생각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고작 열은화 여섯 장이라고요?”
=예. 열은화 한 장은 마을에 기부하고 나머지 한 장으로 나름 훌륭한 집을 짓고 식료품과 가구를 채워 넣고도 수입 없이 5년은 너끈히 지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음.”
=이주자들에게 너무 많은 돈은 독입니다. 한 1년 정도 요양하면서 몸을 추스른 뒤 2년 차부터 농작을 시작해서 3년 차부터 수입이 들어온다 치면 남은 2년분의 돈은 비상시를 대비한 저축. 그러니 열은화 두 장이면 충분합니다.=
“스사 씨의 계산에 이주 비용은 포함되지 않았군요.”
=하하하. 환인 님께서 좋은 일을 하시는데 어찌 비용을 받겠습니까. 아니더라도 촌락에 이주자를 알선해주면 촌장에게 일정량의 사례금을 받으니 그 사례금으로 비용을 치르면 됩니다.=
“스사 씨에게 여러 번 신세만 지는 것 같습니다.”
=환인 님 같은 분을 도울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저와 제 가족들은 만족입니다.=
영혼사를 돕는다는 의미는 지구 감각으로 말하자면 천국행 편도 티켓 우선권을 끊는 것과 비슷하다.
면죄부까지는 아니더라도 선행에 크나큰 플러스 포인트가 된다고 믿는 셈. 이것도 웨이포드에서 사회를 공부하며 알게 된 지식이다.
환인은 쓰게 웃으면서 열린 방문 틈으로 기웃거리는 소년 소녀, 스사의 자식들을 불렀다.
이리 오라고 손짓하자마자 질레우와 에이라가 쌩하니 달려와 소년소녀 특유의 생기발랄한 얼굴로 눈을 반짝인다.
‘이러는 것으로 마음이 편하다면 얼마든지 해주지.’
양손을 아들 질레우와 딸 에아라의 머리 위에 올리고 강령을 펼쳐주었다.
=우와아~?=
=와아아!=
최하급 강령을 받고 놀라며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환인이 조곤조곤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질레우, 에아라. 너희들의 아버지는 무척 훌륭한 분이시다. 그런 아버지를 본받아 열린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그런 훌륭한 어른으로 자라거라."
=네!=
=네에~!=
두 소년소녀는 냉큼 어머니에게 달려가 영혼사님의 축복을 받았다며 폴짝폴짝 뛰었다.
앤플린드는 그런 자식들을 보듬어 안고 감사의 뜻이 담긴 미소와 인사를 올린 뒤 아이들을 몰고 응접실을 나간다.
=알겠지요? 영혼사님이 우리 집에 방문하셨다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비밀이에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거예요……!=
=저도요……!=
닫히는 문 너머로 작아지는 목소리를 듣던 환인에게 스사가 깊게 감사하는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아이들에게까지 축복을 내려주시다니,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항구적인 효과는 없는, 일시적으로 건강하게 해줄 뿐인 축복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환인 님께서 직접 축복해주셨다는 사실은 변치 않으니까요.=
하하 웃던 스사는 아참, 하고 추임새를 넣더니 알고 계셨냐면서 이야기 하나를 꺼냈다.
=하이에른 상급 무관의 하이엔 조드 상급 교관이 환인 님을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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