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052 황색 능선
* * *
우르르르릉…….
맑은 하늘에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환인 일행은 더는 신경 쓰지 않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노란 대머리산을 끼고 돌면서 천둥소리를 워낙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산을 돌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구릉지나 언덕은 없어졌고 길은 평탄했으며 숲도 지구의 숲처럼 조용하고 상쾌했다.
딱히 숲이 옅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바로 옆의 대머리산이 워낙 높았기 때문에 표지판을 잃고 헤매는 일도 없었다.
다만 신경 쓰였던 것은 때때로 천둥이 크게 울려 퍼졌다는 것.
처음 천둥소리를 들은 것은 끊긴 능선을 내려와 숲으로 진입했을 무렵이었다.
꽈과광……! 우르르르르……….
=어?! 번개?!=
=번개 안 쳤어.=
=하지만 천둥소리였지 않아?=
=비도 안 오고 구름도 안 꼈는데 번개가 어디서…….=
숲을 진동시키는 천둥소리에 여자들이 놀라 두리번거릴 때 환인은 조용히 긴장을 끌어올렸다.
이미 맨몸으로 벼락을 쏘는 짐승을 본 환인이었다.
창을 꺼내 쥐는 동시에 강령을 펼친 뒤 사방을 경계했다.
방금 천둥소리는 나무 때문에 난반사되어 들렸다. 어느 방향에서 울려 퍼졌는지 알 수 없으니 긴장할 수 밖에.
환인의 행동에 후이니와 엔넬도 바짝 긴장해서 소리와 냄새에 신경을 쏟는다.
그리고 30분이 지나도록 아무런 변화가 없었기에 환인은 비상식량을 날려 보내 괴물의 존재를 확인했고, 주위에 괴물은커녕 짐승도 없다는 보고를 받고서야 긴장을 약간 풀면서 천천히 이동을 개시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3시간 뒤에 또다시 천둥이 쳤고 그 뒤로 주기적으로 크고 작은 천둥소리가 환인 일행의 귀를 뒤덮었다.
천둥소리의 근원지를 알게 된 것은 숲과 숲 사이 공터로 나왔을 때였다.
쿠구구궁! 쿠르르르릉…….
=대머리산에서 천둥소리가 내려와요!=
=주변에 짐승 냄새는 여전히 없어요.=
두 자매의 이야기에 환인은 노란 대머리산으로 시선을 주었다.
표고가 2만 미터는 넘고 정상에는 만년설 대신 정체불명의 노란 물질로 뒤덮여있는 데다 천둥소리를 내는 산이라니.
대체 무슨 산이 저런지 이해가 안 되는 환인이었다.
아니, 이해하길 포기했다는 쪽이 맞을 거다.
파란 불이 붙은 괴수 호랑이.
몸집만으로 해일을 일으키는 거대한 뿔비늘 고래.
번개를 쏘는 멧돼지.
산을 등에 지고 다니는 거북이.
현대인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존재들이다. 더욱이 그것들을 차례대로 만나며 놀람의 한계치가 높아질 대로 높아졌다.
앞으로 어지간한 일로 놀라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낮은 언덕의 경사를 내려가던 중…….
쾍쾍쾍! 쾌액!!
비상식량의 경고와 함께 저 앞, 숲의 초입에서 다섯 마리의 짐승이 출현했다.
눈이 세 개 달린 들개, 삼안견이었다.
지나가다 우연히 마주친 것은 아니었다. 삼안견 다섯 마리의 눈동자 15개는 숲에서 나올 때부터 이쪽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그 행동에 불길함을 느낀 환인은 바로 여자들을 물렸다.
“뒤로, 멀리 떨어지는 게 좋겠습니다.”
=네.=
내리막길의 좌우를 살폈지만, 포위의 흔적은 없었다. 그래서 더욱 이해되지 않는 환인이었다.
숲에서 가까워졌을 때 습격하면 더 편했을 텐데 왜 저렇게 먼 거리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걸까. 족히 100m는 되는…….
“……!”
티디딕! 티틱!
오싹 피부에 소름이 돋는 순간 3겹 영혼 방패를 생성해 앞으로 내세우자마자 무언가가 영혼 방패를 두들겼다.
‘바늘?’
떨어지는 것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반사적으로 뛰쳐나간 환인은 작게 혀를 찼다.
영혼 방패를 뚫지 못한 것을 보면 관통력은 없어 보이지만, 빛바랜 뼈와 비슷한 색의 바늘 끝에는 투명한 액체가 묻어있었다.
‘독이겠지.’
방패의 전개가 1초라도 늦었다면 공격을 허용했을 거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삼안견의 형태가 알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본 삼안견은 갈색이나 회색 개의 모습에 눈알이 미간에 하나 더 박힌 게 끝이었는데 저것들은 적갈색으로 통일되어있는 데다 촉수 같은 꼬리 끝이 꽃망울처럼 펼쳐진 모양새였다.
`저곳으로 바늘을 쏜 건가.`
티디디딕! 틱! 티틱!
거리를 1/4까지 줄였을 때 솔잎만큼이나 가느다란 바늘이 재차 날아와 영혼 방패를 두들겼다.
바늘이 통하지 않는 것을 본 삼안견들은 급히 숲으로 뛰어들려했지만.
퍼버버버벙!!
깽깽깽!
깨앵!
미리 날려놓은 영혼 구슬을 터트린 환인은 그대로 땅을 뒹구는 삼안견들 사이로 난입, 창을 거침없이 휘둘러 목을 베어냈다.
내구성은 알고 있던 삼안견보다 더 약했다. 큰 힘을 주지 않아도 뼈째 잘려 나가고 꿰뚫렸으니까.
순식간에 다섯 마리를 썰어버린 환인은 죽은 삼안견의 시체를 살피며 판단을 내렸다.
‘바늘만 조심하면 아무것도 아닌 놈들이군.’
원거리 공격이라는 위험성이 있지만, 이 삼안견의 신체 내구성은 정말 허약했다. 최하급 영혼 폭발에도 뼈가 부러질 정도였으니까.
더욱이 숲에서는 직선으로만 날아오는 침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삼안견들이 거리를 두고 숲에서 걸어나온 것도 그 이유때문이겠지.
=로푹시?=
가까이 다가온 에프니스를 쳐다보자 그녀의 입에서 곧장 설명이 쏟아졌다.
=앗. 저, 가운데 눈이 굉장히 좋아서 엄청나게 멀리까지 보는 짐승이에요. 사냥감을 보면 근처에 친구를 모아서 공격해온다고 초원이나 평원에서 제일 위험한 짐승으로 꼽혀요. 갑자기 괴물이나 짐승 무리를 이끌고 덮쳐온다고요.=
“행상인들에게 들었습니까?”
=네에…….=
“그 행상인들은 믿을만한 사람들인가 보군요.”
환인 자신이 직접 겪고 수집한 정보와 일치하는 내용이다. 촌사람이라고 속일 수도 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꽤 양심적인 사람이 아닐까.
가시 삼안견의 영혼은 다른 삼안견과 마찬가지로 하급이었고 영혼 구슬로 얻게 된 효과도 똑같은 시야 확대 능력이었다.
시야가 고배율 망원경을 쓴 것처럼 변한 환인은 자연스럽게 노란 대머리 산으로 시선을 주었다.
“……결정?”
그리고 노란 대머리산의 정상에 수정 같은 노란 덩어리가 빼곡히 뒤덮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큐빅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크리스탈처럼 생기기도 했다.
크기는 지금 시력으로 수월히 확인할 수 있을만큼 큰 게 있는가 하면 그저 노란색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작은 것도 많았다.
‘저 노란 물질이 천둥소리의 원인인 건가. 아니면 천둥소리의 결과물인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천둥 번개를 불러일으키는 생물이 있을 수 있겠지.
벼락에 맞은 눈이 노란 결정화를 이뤘다고 해도 환인은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
저 산꼭대기에는 뭐가 살고 있을지 궁금증이 커진다.
얼마만큼 강해져야 저 산을 오를 수 있을까. 푸른불꽃 호랑이를 사냥할 수 있을 만큼? 아니면 산거북을 수월히 죽일 수 있을 정도?
그런 날이 올까 싶어 피식 웃는 환인이었다.
대머리 산을 둘러 가는 귀환길은 힘든 일 없이 수월했다.
확실히 미궁을 빠져나온 건지 가시 삼안견을 만난 이후 짐승의 출몰 빈도가 급격하게 감소했고 반대로 겁많은 초식 동물이나 새들의 모습이 늘어났다.
동물들은 사람의 인기척만 들려도 달아났고 호전성이 조금 있는 동물들은 환인의 몸에서 풍기는 죽음의 냄새에 질겁해서 똥오줌을 지리며 도망치기 일쑤였다.
거기다 필드에는 여자들이 눈을 휘둥그레 뜰 정도의 비싼 약초나 식물이 가득했다.
=언니언니! 여기! 오스리트 풀이야!=
=해맞이 풀도 있어요!=
=앗, 가시방울열매다!=
=우와… 여긴 치유초의 군생지 아니에요?=
환인의 허락 아래 여자들은 길가다 눈에 띄는 약초나 식물을 채집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비상식량. 긴장 풀지 말고 주변에 짐승이 있나 없나 잘 감시해.”
쾍. 쿠엑.
왕관처럼 녹색 깃털이 서기 시작한 비상식량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주의를 환기할 만큼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평화로운 숲이었다.
환인 일행은 쉼 없이 이동했다.
=강 넓어!=
=강물은 별로 안 빠르네요.=
=그래도 헤엄쳐서 건널 수는 없어. 훈제 고기가 다 젖어버릴 테니까…….=
“뗏목을 만들어야겠군요. 주변에 나무는 많으니 작업을 시작합시다. 후이니, 엔넬.”
=넵!=
=네.=
중간에 폭이 90m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강과 마주쳐서 통나무로 뗏목을 만들어 건너기도 하고.
=온통 녹색이네요.=
=은인님~! 여기 이상한 석상이 있어요~!=
“폐허군요. 신전의 흔적 같은데……. 풍화되고 있는 것을 보면 무너진 지 수백 년은 지났나 봅니다.”
훗날 무너진 미궁의 터였음을 알게 되는 오래된 신전이 있는 녹색 분지를 가로지르거나.
=흐아~. 산 넘어 산이네!=
=류히 언니. 에프니스 언니. 괜찮아요?=
=하아, 하악. 괜……찮아. 후웃.=
=나도. 아직은, 버틸 만 해.=
=정 힘들면 말해요. 짐 들어줄게요.=
=응. 고마워…. 언니,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입으로 내뱉으세요. 그렇게 헉헉거리면, 더 힘들어요.=
=으, 응. 히휴우, 흐유우우…….=
크고 작은 산으로 이루어진 산악지대를 건너기도 했다.
올조트 대호수의 모든 모래가 밀려온 것 같은, 사막이 아닐까 싶을 만큼 방대한 백사장도 온종일 걸어서 지나쳤고 표고가 500m를 넘어가는 산이 등장하기 시작해 산과 산 사이에 자연적으로 생겨난 길을 따라 며칠을 걷기도 했다.
그렇게 보름 가까이 이동한 결과…….
=와! 노란 대머리산이 이제 안 보여!=
=집에 거의 다 왔다…….=
“이제 호숫가를 따라 이동하다 보면 여러분들의 마을을 발견할 수 있겠군요.”
=네, 은인님.=
고향이 가까워져서일까. 여자들의 안색이 밝다 못해 환하다. 목소리에도 설렘이 가득 묻어난다.
대호수는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왼편에 보이는 높이 400m 정도 되는 산을 오르자 곧바로 드넓은 수평선이 펼쳐진다.
근방은 산악지대의 연속이었고 대호수 연안을 따라서도 낮은 산맥이 형성되어 있었기에 현재 위치에서 그녀들의 마을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들의 마음은 가벼웠다.
2주에 가까운 시간 동안 짐승다운 짐승은 보지도 못했다.
덕분에 숲에서, 들판에서 돈 되는 약초나 버섯, 열매 등을 잔뜩 채취할 수 있었고, 네 명이 짊어진 보퉁이와 망태기에 잘 말린 비싼 약재와 식물을 가득 채울 수 있었다.
마을을 방문하는 행상인들에게 팔면 마을의 한 해에 가까운 수입을 얻을 수 있을 거라며 류히가 기쁜듯이 말했다.
물론 약재와 식물을 판 돈은 전부 환인에게 바칠 테지만, 그래도 기분이라는 게 있다.
즉 여자들의 마음은 이미 마을에 도착한 것과 다름없는 상황.
기분 같아서는 마을까지 계속 달릴 수도 있을 것 같은 여자들이었다.
대호수 연안을 따라 이동한 지 이틀째.
밤이 찾아와 주변에서 채취한 조개류에 얼마 남지 않은 훈제 곰고기를 모닥불에 구워 먹는 여자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환인은 류히가 공들여 만든 조개탕과 구운 훈제 곰고기, 대합 구이 등을 먹으며 웃고 떠드는 그녀들을 구경했다.
‘동료가 필요하긴 하다.’
보름하고도 하루 전에 류히와 엔넬을 품고 온기를 흡수했었다.
두 명의 온기는 어제부터 다시 회복을 시작했고 16일 전부터 계속 온기를 회복하고 있던 에프니스와 후이니의 아랫배 온기는 처음 봤을 때의 1/8까지 회복한 상태다.
크기로 따지면 새끼손톱 크기에서 500원짜리 동전 크기가 된 것이다.
‘약 3~5개월이면 원래 크기를 회복하겠군.’
길면 반년. 위험하고 긴급할 때만 도움을 받는다 치면 참작하지 못할 시간은 아니다.
비상식량에게 먹이를 주며 해맑게 웃는 네 명의 여자를 보고 있던 환인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왔기 때문일까, 그녀들은 두려움과 맞설 용기를 가지고 있었고 투지도 어느 정도 있었지만…….
‘동료로 부적합해.’
환인이 바라는 동료상은 별것 아니었다.
뒤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사람. 당장은 약하더라도 훈련을 하다 보면 강해질 수 있는 자질이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여자들의 전투 센스는 암울한 수준이었다.
판단력도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고 류히와 에프니스 같은 경우에는 신체 능력도 참담하다.
지구의 여자들보다 체력적인 면은 뛰어나지만, 그게 괴물과 싸울 수 있을 정도인가 하면 절대 아니다.
어떻게 훈련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지난 한 달간 시간이 날 때마다 훈련을 도와주었지만, 눈에 띄는 성장은 없었다.
후이니와 엔넬의 경우 늑대 두 마리와 싸워서 이길 정도로 실력이 늘긴 했지만, 그저 그뿐.
강령을 받은 류히, 에프니스, 후이니, 엔넬이 전부 덤벼도 강령을 쓰지 않은 환인을 상대로 1분도 버티지 못할 정도였으니…….
“…….”
흥겨운 전투도 살아있어야 할 수 있다.
늑대 인간과 싸울 때 느꼈던 그 짜릿한 희열을 다시 느끼려면 동료 한둘은 필수다.
순간적으로 사람과 싸워도 희열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 환인이었지만,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 생각은 접었다.
쿠우. 쿠엣.
여자들에게 배부르게 먹이를 받아먹은 비상식량이 환인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는다.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등을 토닥여주니 눈을 감고 목을 움츠리는데 그 모습이 흡사 포만감에 만족한 고양이 같다.
환인은 은하수가 펼쳐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동료는 천천히 찾아봐야겠군.’
자신에게는 영혼을 다룰 수 있는 초능력이 있다.
이 힘이면 혼자서 1.5인분, 2인분 정도는 할 수 있으니 당분간은 혼자 다니면서 천천히 쓸만한 동료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는 환인이었다.
그리고 사흘 뒤.
=마, 마을이다! 엔넬, 언니들! 우리 마을이에요!=
=흑…….=
=살았어, 우리는 살았어요……!=
높이가 평균 400m 정도 되는 산맥의 어느 봉우리에 오른 일행은 하얀 뭉게구름 같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작지만 정갈한 마을을 볼 수 있었다.
이상한 세계에 떨어진 지도 어느새 석 달이 가까워져 가는 어느 날.
환인은 처음으로 이 세상의 문명과 접촉할 수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