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051 황색 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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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인은 일행을 이끌고 하나의 능선이 끝나면 새로운 능선으로 옮겨가며 꾸준히 대머리산을 향해 나아갔다.
식수는 물소리가 들리면 그때그때 보충하는 식으로, 식량은 훈제 곰 고기가 톡톡히 제 역할을 해주었다.
양은 5명이 한 달은 족히 먹을 정도로 많았지만 날씨에 상하는 게 걱정이었는데, 능선은 일교차도 크고 밤낮으로 건조했기에 고기의 보존에 쉬운 환경이어서 걱정을 덜 수 있었다.
덕분에 일행은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하루 14시간의 강행군을 이어갔고 그렇게 10일 째 되던 날.
노란 대머리산을 코앞에 둘 수 있었다.
‘코앞이라고 해도 산자락까지 5일은 더 가야 할 것 같지만.’
누렇게 마른 식물이 자갈 틈새에서 자라고 있는 언덕 꼭대기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대머리산의 자태에 여자들이 탄성을 지른다.
=후와. 대머리산 진짜 높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커.=
=멀리서는 작게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무서울 정도네.=
=똑같은 크기라도 멀리 있는 게 작아 보이잖아요. 그런 이유일 거예요.=
히말라야산맥보다 홀로 서있는 대머리산이 몇 배는 더 크게 보이는 것에는 환인도 감탄했다.
산자락까지 며칠은 더 가야 하는 거리에서도 고개를 한껏 젖혀야 산꼭대기를 볼 수 있을 정도다.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표고가 2만 미터는 간단히 넘겠군.’
뭉게구름이 산자락을 지나고 있는 것을 보며 대머리산의 높이를 계산하고 있을 때 여자들의 대화가 환인의 귀에 들어왔다.
=산이 커서 돌아가는데도 시간이 엄청나게 걸릴 거 같아!=
=그래도 미궁을 벗어난 것 같으니까 더 위험한 것은 없겠지.=
=확실히 괴물은 이제 안 보이고 동물도 떼로 몰려다니는 것들이라서 조금 안심이네.=
=류히 언니. 전 다르게 생각해요.=
=응?=
=저 산에서 사는 괴물이 주변까지 내려올 수 있잖아요? 저런 산에 사는 괴물이라면 더 강할 거라고 생각되는데요.=
=아. 그럴 수 있겠다.=
진짜 강한 짐승은 단독 행동을 하는 편이다. 약하니 무리를 지어 자신의 약함을 보충하는 거다.
그리고 이때까지 습격해온 짐승은 대부분 무리를 짓고 있었다.
여자들의 대화를 듣던 환인은 2달 넘게 정리하지 못해 치렁치렁해진 앞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말했다.
“아무튼. 왔던 길만큼 앞으로 더 나아가면 여러분들의 마을이 나오겠군요.”
=아무래도…… 저희 마을에서는 이 산이 안 보였거든요.=
여태껏 이동한 만큼 또 더 이동해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미안한 듯 류히가 눈꼬리를 늘어트린다.
환인은 신경 쓰지 않고 봉우리에 만년설 대신 노란 무언가가 뿌려진 산을 바라보았다.
“절반은 왔다는 뜻이니 다행입니다. 그러면 이제 가야 할 코스를 정해야겠습니다.”
노란 대머리산은 홀로 외로이 서있는 고산?山이었다.
그런 대머리산의 오른쪽은 지평선까지 펼쳐진 평원이었고, 왼쪽은 여태까지처럼 능선과 숲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환인은 여자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본 뒤 왼쪽 코스를 선택했다.
“강도 없고 동물도 거의 없는 평원이라면 짐승의 수도 적어 안전하겠지만, 우리가 소비하는 식량과 물을 생각하면 오른쪽은 무리일 겁니다.”
말레이 코디악의 고기를 죄다 훈제했다지만 다섯 명의 식사량은 절대 적지 않다.
그나마 식량은 아껴 먹을 수도 있지, 식수 없이는 사흘도 못 버틴다. 아무것도 없는 초원을 이동 중에 식량, 식수 고갈이라는 상황에 부닥치면 남은 것은 죽음뿐.
그에 비하면 왼쪽 코스는 숲과 언덕이 많으니 여차하면 풀뿌리를 캐 먹으면서 이동할 수 있다.
“올조트의 대호수도 비교적 가까우니 왼쪽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자신들의 생존 지식 및 판단력이 떨어지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여자들은 군말 없이 환인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류히, 에프니스, 후이니, 엔넬.
네 명의 여자들은 자기 분수를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염치도 있었으며 자신들을 죽음에서 구출해준 환인에게 큰 감사의 마음과 흠모의 감정도 품고 있었다.
그랬기에 전투 이외의 할 일은 자신들이 모두 하려고 노력했다.
전투 능력으로는 환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니 나머지 일에서 도움이 되고자 한 것이다.
짐 운반부터 야영 준비에 음식 준비, 거기다 남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크고 작은 성욕의 해소까지.
비단 류히를 포함한 4명의 여자 뿐만 아니라 결혼하지 않았거나 혹은 못한 시골의 처자들은 외부 방문자들에게 손쉽게 몸을 여는 풍습이 있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시절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외부의 새로운 피가 수혈되지 않고 세대가 교체될수록 기형아나 허약 체질인 아이들이 자주 태어난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어디서 이런 이야기가 시작했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촌락의 주민이라면 다들 알고 있었다.
새로운 피를 거부하면 결국 촌락이 사라진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그 이유만으로 외부인인 남자의 씨앗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식구가 늘어난다는 것은 집안에 일을 할 수 있는 손이 늘어난다는 뜻이며 촌락의 번영에도 도움이 되기에 남편이 없는 처자라도 아이를 가지게 되면 출산할 때까지 촌락의 율법으로 보호받게 된다.
또 대부분의 시골은 공동육아를 원칙으로 하기에 아이를 낳은 뒤에는 홀몸의 여자라도 부담 없이 생업에 종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촌락에서 태어났더라도 여자의 경우는 아이를 낳아야 촌락의 정식 구성원으로 인정받기도 하고, 만에 하나 자식이 강인한 전사로 자라면 같은 여자들의 선망을 받는 것은 물론 촌락 내에서 발언력도 강해지고 입장이라던가 신분이 여러모로 변화한다.
하여튼 그런 이유에서 류히와 소녀들은 환인에게 안기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다.
오히려 기회가 될 때마다 환인에게 안기기를 은근히 희망했다. 여자들의 눈에 환인은 생명의 은인이자 괴물인 바르둘마저도 물리친 전사 중의 전사였으니까.
혹시라도 그의 피를 잇게 되면…….
아무튼, 여자들은 가급적이면 그에게 많이 안기고 싶은데 어느 순간부터 자신들을 원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먼저 나서서 희망을 비출 수는 없다.
여자로서 창피하다거나 부끄럽다는 이유가 아니다. 교합 한 번에 남성의 기력이 얼마나 소모되는지 알고 있기도 하고, 감히 생명의 은인이자 전사인 환인에게 욕망으로 인한 요구를 하기에 너무 몰염치해서였다.
그래서 여자들은 속으로만 애절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자신들이 잠자리에서 실수한 게 있다면, 내키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고칠 기회를 제발 달라고 말이다.
그런 여자들의 속내와 다르게 환인이 여자들을 안는 것을 멈춘 이유는 단순했다.
그녀들의 아랫배 속 온기가 거의 바닥났기 때문이었다.
온기를 더 흡수하지도 못하는데 육체적인 유흥을 즐기자고 매일 밤 체력을 소모하는 것은 지금 상황에서 비효율의 극치다.
편히 쉴 수 있는 장소였다면 환인도 거절하지 않았을 테지만, 현 상황에 전혀 도움 되지 않는 행위를 굳이 위험을 무릅써가며 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 추세로 볼 때 온기를 다 회복하려면 대강 3개월은 필요한가.’
그러나 쌍둥이 산을 떠난 지 보름가량이 지났을 때 환인은 여자들의 아랫배 속 온기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흡수한 뒤 일정 시간이 지나야 온기가 회복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네 명의 여자 중 가장 먼저 온기가 바닥났던 류히가 가장 먼저 회복되고 있다는 것이 그 가설을 뒷받침한다.
그래서 환인은 여자들에게 손을 뻗지 않고 쭉 지켜보기만 했다. 온기가 하루에 얼마나 회복되는지 말이다.
사실 눈으로 온기의 양을 가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새끼손톱만 한 구슬의 지름이 0.1mm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면 그건 눈이 아니라 현미경일 테니까.
‘초능력이 온기의 양도 가늠할 수 있게 된 거군.’
그동안 정령이 보일 때마다 자신을 포함, 네 명에게 꾸준히 강령을 펼치고 영혼 기술을 써가며 훈련을 계속해온 환인이다.
그 덕에 보유 가능 영혼 구슬의 숫자가 16개로 늘었고 온기를 가늠하는 능력도 얻었다고 생각하는 환인이었다.
이제 영혼을 거두어들이면 16시간 동안 구슬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고 강령의 지속시간도 16분이 되었다.
현재 환인의 관심사는 영혼 구슬 보유 개수가 18개로 늘어날 때 자신의 능력이 또 한 단계 더 성장할 것 인가였다.
처음에는 6개만 보유할 수 있었고, 보유 개수가 12개로 늘었을 때 능력이 한차례 성장했다.
‘보통은 성장에 필요한 요구치가 점점 늘기 마련이니…….’
보유 구슬 한도가 18개로 늘어난다 해도 초능력이 성장할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기대감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이래저래 기대감으로 기분이 조금 싱숭생숭하기도 했고, 에베레스트산을 ‘따위’로 치부할 만큼 거대한 대머리산의 절경을 배경 삼아 이동하며 감수성이 눈곱만큼 피어난 환인은 달빛이 부서지는 강가의 야영지에서 류히를 품에 안았다.
이유는 있었다. 온기를 흡수하면 정말 15일가량의 휴지?? 기간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앉은 체위로 류히를 탐구한 환인은 그녀의 아랫배 속 온기를 아주 미약하게 흡수했다. 그녀에게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로 미약한 양을 말이다.
‘……흡수량도 조절할 수 있게 된 건가.’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지만, 온기가 다시 거의 바닥난 류히를 상대로 이 이상 시험해볼 수는 없다.
한차례 류히의 속에 파정하고 바위에 앉은 환인은 알몸으로 자기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은 채 얼굴을 묻은 류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열심히 앞뒤로 머리를 움직이던 류히의 회색 강아지 귀가 까닥거리다가 쫑긋 선다.
입에 그의 심볼을 물고 있던 류히가 시선만 위로 올리더니 작게 눈웃음을 짓고는 다시 얼굴을 그의 허벅지 사이에 묻는다.
‘내일 에프니스를 안으며 확인해봐야겠군.’
자신의 초능력에 대한 탐구심을 발휘하고 있을 때 환인의 심볼을 입으로 깨끗이 청소해준 류히는 몸을 섞은 여운으로 상기된 얼굴을 한 채 조심조심 물었다.
=저…… 은인님? 오늘은 제, 제가 마음에 드셨나요?=
“……?”
환인은 류히가 한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잠시 굳어있었다.
부엉
쾍?
부스럭, 부스스.
어딘가에서 들려온 부엉이 소리에 비상식량이 고개를 들어 부스럭거린다.
뒤늦게 정신 차린 환인은 잠깐 이마를 매만지다가 긴장한 것처럼 보이는 류히에게 물었다.
“음. 제가 잘못 이해한 거라면 정정해주길 바랍니다. 방금 물어본 것은 성행위가 만족스러웠냐는 질문이…… 맞습니까?”
=네.=
“…….”
환인은 드물게도 당황했다. 자신이 이만큼 당황했던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의 당황이었다.
경험 적은 남자가 여자에게 묻는 것도 아니고 여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다니.
자신도 모르게 입매를 매만지던 환인은 문득 에프니스와 후이니, 엔넬도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질문을 하신 이유를 들어보고 싶습니다만.”
이때까지 류히의 헌신적인 태도를 보면 이유가 있어서 그런 질문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부끄러워 얼굴을 빨갛게 붉힌 류히 대신 에프니스에게 그 내막을 듣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처제???, 아내를 빌려주는 제도가 한층 진화한 풍습이라니.
자신의 한숨에 여자들이 전부 움츠러드는 것을 본 환인은 표정을 풀고 이때까지 그녀들을 안지 않은 이유를 담담하게 설명했다.
=아……!=
이유를 들은 류히는 머리가 맑아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환인이 축복을 쓰기 위한 에너지를 얻는 데 남녀의 교합을 필요로 했다는 사실을 떠올린 거다.
에프니스와 후이니, 엔넬은 자세한 사정도 모르고 그저 은인에게 답례하기 위해, 그리고 가능하다면 강한 남자의 씨를 받기 위해 환인에게 안겼던 터라 자초지종을 알게 되자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여러분에게 매력적이지 않아서, 혹은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피로를 유발하는 행위를 위험한 장소에서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죠.”
여자들은 환인을 더욱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촌락의 또래 남자는 수확기가 지나거나 농번기가 끝나 일이 없을 때면 발정 난 개새끼처럼 온종일 여자들에게 치근덕거리기 일쑤였다.
자제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모습으로 껄떡거리던 남자에 비하면 환인은 얼마나 신사적인가.
“오늘은 이유가 있어 류히에게 성관계를 부탁드렸습니다. 내일도 한 번 더 부탁드리겠지만 그 후에는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성관계는 자제할 겁니다. 이유는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네, 은인님.=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것인 양 달콤한 음색으로 대답하는 류히. 그녀를 향한 여동생들의 시선이 조금 뾰족해졌다.
왜 언니가 대답하는 거지?
내일 부탁하겠다는 것은 언니한테 또 부탁한다는 말이 아닐 텐데??
이렇게 두고 볼 수는 없어!
그날 밤.
불침번 도중에 몰래 모인 여자들이 매우 작은 목소리로 내일 동침할 순서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것을 환인도 들었지만, 일부러 개입하지 않았다.
자신은 기다렸다가 입에 들어오는 떡만 먹으면 그만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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