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004 수해??
* * *
방패와 여분의 무기를 마련했고 식량도 약간이나마 확보했더니 환인의 머릿속을 채우는 근심이 상당 부분 줄어들었다.
무기와 방패, 그리고 코로나 베리를 먹은 지 4시간이나 지났는데도 멀쩡한 것이 근심을 줄이는데 한몫했으리라.
“음…….”
위를 올려다보자 여전히 하늘을 가리고 있는 숲의 지붕이 환인의 시야에 들어왔다.
환인의 목적은 하늘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의 방향을 보는 것.
나름대로 해가 뜨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녹색 괴물과 맹수의 발자국을 피해 움직이다 보니 동선이 불필요하게 늘어난 기분이었다.
밀림은 평지와 야트막한 언덕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언덕을 오르다 보면 방향이 어긋날 수도 있고 길을 가로막는 나무를 피하고 앞을 가로막는 가슴 높이의 수풀을 헤치며 나아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방향이 틀어지는 것.
거기다 중간에 수풀 속에 숨어있던 뱀……인지 도마뱀인지 모를 파충류에게 물릴 뻔도 하고 까마귀와 부엉이를 합쳐놓은 듯한 날짐승이 쫓아오는 것도 신경 쓰여 여러모로 피로가 가중되고 있었다.
다행인 점은 야트막한 언덕 지형에서 어젯밤 신세 졌던 곳과 비슷한 나무구덩이를 또 발견한 것과 코로나 베리를 좀 더 확보했다는 것이다.
중간에 소변을 보았는데 소변의 색이 주황색인 것은 불안 요소였지만, 지금 이대로만 이어진다면 언젠가는 숲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보는 환인이었다.
그 생각은 낙관이었다는 것을 1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깨달았다.
끼르르르.
끼히이이이.
여러 마리의 녹색 괴물과 맞닥트리고 만 것이다.
조금 경사가 진 언덕 바로 너머에 집채만 한 바위가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멀리서 바위를 보았다면 환인은 망설임 없이 우회해서 피했을 것이다.
이런 숲에 그만한 바위는 특이한 장소가 되기에 충분한 요소이고, 무엇이든 바위 아래 모여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겼을 테니까.
실제로 환인은 언덕과 나무에 절묘하게 가려진 집채만 한 바위를 발견하자마자 불길함을 느꼈고 그 즉시 걸음을 되돌리려 했었다.
그때 녹색 괴물이 바위 옆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말이다.
키히힉.
허리에 감아 하반신을 가리는 꼬질꼬질한 가죽, 그것을 두 손으로 잡고 바위 옆에서 어기적어기적 걸어 나오는 녹색 괴물의 모습에 비탈을 천천히 내려가던 환인은 눈을 부릅떴다.
거리는 15m 정도. 시야를 가리는 바위가 신경 쓰이지만 시야를 방해하는 범위는 그리 넓지 않다.
바위 뒤에 녹색 괴물의 부락이 있을 리 없다. 무리가 있어도 몇 마리 정도겠지.
그렇다면 선수 필승.
환인은 그 즉시 나무 곤봉을 두 손으로 움켜잡고 날듯이 달려가 점프.
키이?
있는 힘껏 내려쳐 녹색 괴물의 골통을 부숴버렸다.
뽜각!!
기괴한 타격음과 함께 양손 곤봉 아래로 피와 살점이 팍 소리를 내며 터졌다.
녹색 괴물은 고작 몇 미터만 남겨두고 환인을 발견했기에 그 어떤 행동도 보여주지 못한 채 즉사했다.
양손 곤봉이 보여준 예상 밖의 위력에 잠깐 놀란 환인이었지만, 방금 소리가 녹색 괴물의 무리에게(있다면) 닿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재빨리 몸을 숨기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한발 빠르게 녹색 괴물이 1마리 더 바위 옆에서 나타났다.
녹색 괴물은 머리가 박살 난 채 죽어있는 동족과 피가 묻은 환인을 보았지만, 상황 파악이 바로 되지 않는지 얼떨떨해하다가…….
“흡!!”
환인의 풀스윙에 상반신 복합개방골절이 되었고, 회색 바위로 날아가 부딪친 녹색 괴물은 자기 피로 전위적인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은 녹색 괴물 두 마리.
그 성과에 환인은 흡족해하기보다 곧바로 몸을 돌려 언덕 꼭대기를 향해 달렸다.
날것 그대로의 피 냄새가 이렇게 심한 것을 환인은 처음 알았다. 죽인 두 마리에게 무리가 있다면 방금 소란과 피 냄새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꺄꺆꺆꺅깎깍!!
끼요르르르르!!!
끄익! 끄익끄익!
아니나 다를까 여러 마리가 만들어내는 듯한 소란과 함께 약간 손질이 가미된 곤봉, 가시를 칭칭 둘러맨 클럽, 나무창 등으로 나름 무장한 괴물 다섯 마리가 한 번에 나타났다.
캬아아아아!!!
그중 돌도끼와 비슷하게 거무튀튀한 곤봉을 쥔 녹색 괴물이 환인을 삿대질하며 괴성을 질렀다.
바디랭귀지는 만국 공통어라고 하더니.
그 행동이 뜻하는 바를 읽은 환인은 한쪽 입꼬리를 세웠다.
목숨을 두고 싸워야 할 상황인데 어째서 심장은 기분 좋게 쿵덕거리고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는 걸까.
비교적 시야를 가리는 장해물이 없는 언덕 꼭대기에 먼저 도달한 환인은 나무 한 그루를 등지고 곤봉을 양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재빨리 주변을 훑어 지형 정보를 머리에 담는다.
꺄라라라락!!
끼략!
녹색 괴물 다섯 마리가 달려오는 모습에 환인은 미묘한 웃음을 얼굴에 띠었다.
선두에 4마리, 후미에 1마리. 척 봐도 막무가내 돌격이 아니라 조직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무기의 특성 차이로 인한 진형이 아니야. 뒤에 있는 놈이 무리의 리더군.’
환인이 거무튀튀한 곤봉을 든 녹색 괴물을 응시하니 그 괴물도 환인을 보며 씨익 웃는다.
자신을 먹잇감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행동이지만 환인은 분노하기보단 신기하게도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네 마리는 10m 거리까지 접근했고 거기서부터는 좌우로 퍼지며 조심스럽게 환인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환인은 어처구니없음을 느꼈다.
포위, 좋다. 목표가 도망치지 못하게 막고 사방에서 공격을 퍼부어 숫자의 폭력을 보여주기 쉬운 포지션이니까.
하지만 그것도 때와 장소, 상황을 가려야 하는 법이다.
10살 정도 되는 초등학생, 나름 몽둥이 같은 무기를 들었다곤 해도 고작 초등학교 3~4학년 정도 되는 아이들이 포위했다고 겁먹을 어른이 있을까.
하물며 이쪽은 진압봉과 경찰 방패 같은 것을 들었는데?
물론 저쪽이 살인할 생각을 하고 있다면 조금 섬뜩하겠지만, 환인은 녹색 괴물 세 마리를 죽이며 어느 정도 자신이 붙었다.
자만이 아닌 자신감.
더욱이 저놈들은 포위라는 개념을 그저 둘러싸고 팬다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등지고 있는 나무 뒤로는 왜 가는 거지? 전방은 왜 눈에 띄게 벌리고?
그래도 뭔가 의도가 있지 않을까 싶었던 환인은 경계심을 새로이 다잡으며 다른 세 마리와 어느 정도 떨어져 홀로 있는 녹색 괴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키힉?!
들고 있는 나무 몽둥이로 땅을 탁탁 때리고 있던 녹색 괴물은 삽시간에 가까워지는 환인을 보고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질렀다.
환인은 이해되지 않았다. 적이 달려든다면 괴성이 아니라 공격을 해야 할 것 아닌가. 아니면 피하거나 막고 반격을 생각하거나.
그러나 녹색 괴물은 환인이 야구 선수처럼 양손 곤봉을 휘두를 때까지 굳어있었다.
퍼억!!
완벽한 자세로 휘둘러진 곤봉은 각도와 타격점이 맞아떨어지며 묵직한 소리와 함께 녹색 괴물을 5m가량 날려 보냈다.
충격에 기절했는지 어쨌는지 녹색 괴물은 그대로 비탈을 구르기 시작한다.
키갸아아악!!
끼요오오오옷!!
캬르르르르!
그것이 신호가 된 것처럼 남은 세 마리는 포위고 뭐고 없이 동시에 환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
힐끔, 환인은 거무튀튀한 곤봉을 든 녹색 괴물에게 시선을 주었지만, 놈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두 손으로 양손 곤봉을 꾸욱 쥔 환인은 거의 뭉쳐진 것처럼 달려오는 세 마리중 가운데 놈을 향해 힘껏 던졌다.
훙훙훙훙
체감상 5kg에 가까운 양손 곤봉을 비쩍 말라 30kg은 될까 말까 하는 녹색 괴물이 피해 없이 받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꽤액!
얻어맞고 양손 곤봉과 함께 나자빠지는 한 마리. 맞은 장소가 좋지 않은지 오른팔이 덜렁거린다.
환인은 허리춤에서 돌도끼를 꺼내는 것과 동시에 가시 클럽을 휘두르는 왼쪽 놈의 공격을 나무 방패로 막고 녹색 괴물의 옆구리를 힘껏 찍은 뒤.
쩌어억!
크게 잡아당겼다.
키햐악!
가로로 크게 찢어진 옆구리에서 피와 함께 내장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가시 클럽을 버리고 자신의 내장을 주워 담으려는 녹색 괴물을 그대로 뻥, 걷어차 버린 환인은 후욱, 고조된 감정을 크게 내쉰 숨에 담아내면서 어어어 주춤거리는 네 번째 녹색 괴물을 향해 날듯이 달려가 미국 대장처럼 나무 방패를 눕혀 면상을 찍었다.
쾅!
뀌야아아악!!!
일부러 뾰족하게 마감한 방패 끝부분에 얼굴이 찍히며 눈도 함께 찔렸는지 투명한 액체가 피와 함께 녹색 괴물의 얼굴에서 줄줄 흘러내린다.
괴성을 지르며 무기인 나무창도 내팽개치고 발광하는 녹색 괴물의 머리통을 돌도끼로 찍어 마무리하려 한 환인이었지만.
“……!”
줄곧 경계하고 있던 다섯 번째 녹색 괴물이 허리춤의 더러운 주머니에 손을 가져가는 것을 보았다.
멀다. 저 주머니에 뭐가 있는지 모르지만 달려가서 막기에는 늦었다.
더욱이 몇 번의 전력 질주와 체력 배분을 못 해 네 마리의 녹색 괴물을 쓰러트리며 숨이 턱까지 차오른 상태.
그렇다고 해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환인은 이제 주머니로 들어간 놈의 손을 보고 돌도끼를 투척하려 팔을 들었다.
요행이라도 좋다. 맞으면 최고의 시추에이션이고 빗나가더라도 투척에 놀라 굳으면 그것도 환영이다.
그리고 돌도끼를 마악 투척하려는 순간.
흐로로로로롱!!
물리적으로 귀청을 찢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가슴을 진탕 시키는 불가사의한 소리가 바위 너머에서 크게 터져 나왔다.
“큽……!?”
퀴힉!?
환인도 놀랐고 다섯 번째 녹색 괴물도 놀랐지만, 환인은 자신보다 10배 정도는 더 놀란 듯한 녹색 괴물의 행동에 불안이 엄습해옴을 느꼈다.
녹색 괴물은 얼굴이 잿빛으로 변하더니 극도의 불안을 느끼는지 황급히 좌우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환인을 본체만체하며 환인의 근처에 있는 나무로 달려가더니.
키야이이잇!!
손톱 발톱이 빠지고 손발에 가시가 박히고 껍질에 찢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무 위로 올라가기 위해 발악을 한다.
그 순간 환인의 머릿속에 퍼즐 조각이 맞추어졌다.
“흡!”
환인도 몸을 날리듯이 나무로 달려가 2m 정도 기어 올라간 다섯 번째 녹색 괴물의 한쪽 오금을 돌도끼로 찍어버렸다.
캬아아악!?
끔찍한 고통에 나무에서 떨어진 녹색 괴물은 경악과 고통, 분노, 두려움이 범벅이 된 얼굴로 환인을 향해 비명을 질렀다.
환인의 귀에는 놈의 비명이 ‘무슨 짓을 하는 거냐!’라는 비명으로 들렸지만, 비명을 무시한 환인은 땅을 뒹구는 녹색 괴물의 허리춤에 달린 가죽 주머니를 낚아챘다.
끼이이익!!
자신의 물건을 빼앗겼다는 사실에 흉성을 터트리며 환인을 향해 고목 같은 손을 뻗어 할퀴려는 녹색 괴물.
그마저도 나무 방패로 후려쳐 치운 환인은 거무튀튀한 곤봉까지 빼앗았다.
“잘 있어라.”
그리고 심장이 터져도 좋다는 심정으로 포효 소리가 들린 곳의 반대편 비탈을 전력으로 달려 내려간다.
키갸아아아악!!!
악에 받친 비명에 뒤를 힐끔 돌아본 환인은 녹색 괴물이 일어나려다 자빠지는 모습을 보았다.
예상대로여서 다행이군.
앞으로 시선을 돌린 환인은 길게 자란 수풀을 미끄럼틀 삼아 약간 가파른 비탈길을 빠르게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 비탈의 끝에 도달한 환인은 튕기듯이 몸을 일으켜 전력 질주를 시작했고, 나무에 가려져 녹색 괴물과 전투를 벌였던 곳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흐로로로로롱……!!
캬이이잇…!
기이익……!
정체불명의 포효와 녹색 괴물들의 아련한 비명이 들려왔다.
‘내가 도망칠 시간만 벌어다오.’
포효를 듣자마자 포효의 주인이 누구인지 환인은 대강 짐작했다. 그리고 짐작대로라면 절대 싸워서는 안 된다고 판단을 내렸다.
여기서는 무조건 도망쳐야 한다.
최대한 멀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