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세이브로 따먹다-217화 (217/235)

〈 217화 〉 시작과 끝, 끝과 시작 (8)

* * *

*

나는 쓰러져 있는 거구의 기사를 말없이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검사는 검으로 말한다고 하지 않던가.

아직도 손이 떨리는 기분이다.

주변 공간을 완벽히 장악하고, 심상속의 푸른 달이 하늘에 떠오른 그 느낌이 아직도 생생했다.

뭔가 만족스러워 보이는 표정을 지은 기사를 뒤로하고, 뒤에서 자조적인 표정으로 웃고 있는 프로토에게 다가갔다.

“내가 말했지?”

청월참에 당했는지 붉은색 피를 흘리고 있는 프로토는 말없이 그저 웃을 뿐이었다.

새하얀 종교 복장이 점점 붉게 물들어 가고 있음에도 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해하지 말고 꺼지라고.”

생명의 불씨가 꺼져가고 있어서일까.

놈을 중심으로 공간이 붕괴하고 있는 조짐이 느껴졌다.

균열의 틈새가 커질수록, 몸에 힘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시스템의 힘이 돌아 온 건가.’

사라진 힘들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시스템의 힘이 없이도 이겼는데, 이제는 질 수가 없었다.

“당신은 정말 질리는 인간입니다. 정말로 감탄했습니다.”

프로토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손뼉을 쳤다.

피에 젖어 붉게 물든 손바닥이 맞닿을 때마다 듣기 거북한 박수소리가 들렸다.

광기 어린 모습만 봐서일까.

죽기 직전까지 발광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다지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반응이었다.

두려움도, 분노도 없이, 그저 조금 허탈한 감정이 남아 있을 뿐.

무슨 숨겨둔 수가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반응이었다.

__쩌적.. 쩌저적…

시간이 흐를수록 균열의 크기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뭐 숨겨둔 수라도 있어?”

나는 녀석에게 칼을 겨누며 말을 걸었으나, 녀석은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곧 뒤질 녀석이 왜 이렇게 침착한 거야?

“어차피 제가 죽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을 겁니다.”

“달라지는 게 없다고?”

“큰 흐름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죽은 자리를 누군가 대신할 것이고, 결국 세상은 끝나겠죠.”

“내가 바꿀 거라니까?”

“푸흐흐흐…”

놈은 날 조롱할 목적으로 비웃었다.

이 새끼가 자기가 어떤 입장인지 모르는 건가.

__퍼억!!

타격감 넘치는 소리와 함께 프로토 새끼가 바닥을 뒹굴었다.

내구성은 약한지 고작 한방에 볼품없어 보이는 얼굴.

한쪽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놈은 비웃음 멈추지 않았다.

‘통각이 없는 건가.’

“푸하하하하하!!!!!”

끝까지 재수 없는 새끼였다.

차라리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며 추한 모습을 보여 줬으면 통쾌한 느낌이라도 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 남길 말은 있어?”

뭐 솔직히 세상이 끝난다느니, 운명이 정해져 있다느니 그런 말들은 실감나진 않는다.

수 백, 수천 번을 생사의 갈림길을 건너왔는데 그딴 말이 믿기겠는가.

어떤 시련이 닥치던, 어떤 벽을 만나던 그냥 지금처럼 계속 나아갈 뿐이다.

“아쉽네요. 당신이 절망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게 말입니다.”

놈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품에서 칼을 꺼내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세상이 끝나고 다시 시작된다면,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요.”

“그럴 일 없을 거다.”

“글쎄. 앞날은 모르는 법 아니겠습니까?”

프로토는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았다.

시작부터 끝까지 이해할 수 없는 새끼였다.

[ “시..시우님! 제 말 들리시나요?!” ]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그렇고 일이 다 끝나고서야 등장하다니.

너무 늦었잖아.

[ “죄송합니다. 별로 도움을 드리지 못한 것 같아서…” ]

마키나가 사과할 일은 아니긴 했다. 최대한 날 도와주려 한 모양이고.

직접적인 도움을 주려면 저 새끼처럼 되지 않는 이상은 힘들겠지.

[ “프로토는 죽었네요.” ]

“왜 아쉬워?”

혹시 둘 사이에 특별한 관계라도 있었나?

남자 친구 같은 존재였으려나.

[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절대로 아닐 겁니다.” ]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부정하는 걸 보니, 둘 사이가 썩 좋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저 새끼도 인간형태로 존재한다면 마키나도 똑같지 않으려나?

[ “자꾸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시고 기다려 주세요. 곧 게이트를 열도록 하겠습니다.” ]

처음에는 공허했던 공간인데, 저 녀석이 죽고 생겨난 균열 너머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꽤 볼만했다.

북극에서 보인다는 오로라 같은 느낌이라 해야 하나.

‘아 궁금한 게 있는데, 다은이랑 같이 공간 이동한 건 마키나가 한거야?

[ “그렇습니다. 제가 지내는.. 아니 말이 잘못 나왔습니다. 안전을 위해 이동시킨 공간입니다.” ]

사용하던 공간이라, 어쩐지 여성의 체취가 느껴지는 것 같더니.

마키나는 어떻게 생겼으려나. 여신이면 외모가 나쁘지 않으려나.

프레이아는 괜찮게 생기긴 했는데.

아니다. 마키나는 못생기지 않았을까?

아마 프레이야 보다 한참 떨어지겠지.

‘그래서 모습을 안 보여…’

[ “이세계를 기준으로 뛰어난 편인… 아니 아닙니다! 자꾸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

오호.

마키나가 거짓말을 할 성격은 아니니 꽤나 외모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다.

신은 침대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 “그거 성희롱입니다! 헛소리 하지 말고 들어가세요!” ]

“알았어.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

눈앞에 일렁거리는 게이트를 들어가는 순간 몸이 붕 뜨는 부유 감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머리가 핑 돌며 살짝 어지러운 기분까지.

갑작스럽게 몸이 가벼워지자 뭔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 엘레넨 비전 검술의 숙련도가 상승 합니다. ]

[ 엘레넨 비전 검술의 숙련도가 상승 합니다. ]

[ 엘레넨 비전 검술의 숙련도가 상승 합니다. ]

[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

[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

[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

게이트를 넘어가는 순간 시끄럽게 울려대는 알람 소리에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최근에 시스템이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 새끼가 범인이었나.

“다은아 괜찮아?”

“…”

정신을 잃었는지 새근 거리며 자고 있는 다은이.

자는 얼굴도 전혀 굴욕적인 모습 없이 그저 귀엽게 보일 뿐이었다.

“저기로 가면 되는 거야?”

[ “네. 그러면 아카데미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

아까 공간을 나왔던 것처럼 똑같은 크기의 게이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신을 잃을 다은이를 공주님 안기로 들어 올렸다.

맥박도 정상이고, 크게 문제가 되는 부분은 없어 보였다.

잠들어 있는 모습이 천사 같아서 확 잡아먹고 싶어지지만, 뭐 지금은 참아야겠지.

“돌아가자 아카데미로.”

*

“수아야 오해라니까?”

“오해?”

“그래 아무런 사이도 아니야.”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도 이미 다 봤는데, 끝까지 부정할 생각인 걸까.

자신은 정말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강주원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아직도 그딴 말이 나와?”

“아 진짜!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화내는 모습에 역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순위가 오르면서 여러 길드에서 오퍼가 들어오고 있다고 했던가.

여유가 생기니 사람이 달라지는 모양이다.

하긴, 주변에서 여자들이 그렇게 좋다고 달려드는 데.

‘김시우. 그 새끼도 그렇고, 잘생기면 다야?’

김시우를 생각하자 괜히 짜증 나는 느낌이 들었다.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소식도 없고, 다은이는 무사한지도 모르겠는데.

친구라는 새끼는 저러고 있으니 말이다.

“어머~ 주원아!”

“어 채영아?”

한채영인지 뭔지 하는 년이 쓸데없이 커다란 가슴을 들이밀며 당연하다는 듯 팔짱을 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강주원에게 말을 거는 여우년.

이래도 오해라고?

정말로 오해였으면 여기서는 단호하게 밀어냈어야 했다.

“그만해 채영아.”

“아 왜~ 그래서 여기서 뭐 해?”

밀어내고 있는 척하고 있긴 하지만, 그다지 힘이 실려 있지는 않았다.

이래도 내가 오해하고 있는 거라고?

“개새끼..”

“수아야!!”

나는 그 자리를 그대로 피했다.

강주원이고 김시우고 다 쓰레기들 밖에 없었다.

개새끼. 가슴 큰 여자가 좋다는 거겠지.

마침 옆에 있는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

루비를 닮은 눈동자라 머리카락, 관리를 열심히 해 어디 하나 군살 없이 탄탄한 몸매.

비록 가슴은 작긴 하지만, 보기 좋게 벌어져 있는 골반.

그년 보다 외모는 내가 더 뛰어난 거 같은데.

강주원 개새끼, 쓰레기 같은 새끼.

그딴 새끼보다는 김시우가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 새끼는 나랑 있을 때는 나한테만 집중했는데… 씨… 내가 뭔 생각을 하는 거야!’

대놓고 바람 피는 쓰레기와 사진으로 협박해 강제로 자신을 겁탈한 놈.

괜히 서러운 기분에 눈가에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언제나 처럼 재수 없는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다은이가 잘못되면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니까..”

눈앞에 고인 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질 때쯤,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정수아?”

시험을 진행하며 질리도록 들었던 목소리.

“뭐야? 왜 울고 있어? 어떤 새끼야?”

“흐윽.. 흐으윽…”

강민지의 얼굴을 보자 참았던 눈물보가 거세게 터지기 시작했다.

“야, 야? 왜 갑자기 울어?”

당황한 목소리로 자신을 품에 안아주는 강민지.

그래 이 느낌이었다. 탄탄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이 느낌.

“갑자기 왜 울고 난리야…”

목소리는 사납게 쏘아붙이듯 말했으나 머리를 쓸어내리는 손길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시험장에서 계속 같이 있어서 일까.

옆에 있으니 뭔가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강민지는 김시우와 어떤 사이일까.

다시 김시우 얼굴을 떠올리자 뭔가 끌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김시우.. 김시우 이 개새끼!! 절대로 용서 안 할 거니까… 그러니까… 살아있으라고…”

__지이잉..

“뭐야 무슨 문자가…?”

강민지는 문자를 확인하더니 갑자기 자신을 밀어내고는 어깨를 잡았다.

갑작스런 강민지의 행동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때.

“김시우랑 이다은 돌아왔대.”

“아…”

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안심해 버렸다.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