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세이브로 따먹다-176화 (176/235)

〈 176화 〉 176 정수아 (1)

* * *

*

어제부터였을까, 두 사람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진 건.

다은이와 강주원 사이에 보이는 거리감, 남들에게는 똑같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정수아의 눈에는 달랐다.

미묘한 거리감, 왠지 모르게 서로 눈을 피하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평소보다 더 기운이 없어 보이고….’

어제는 다은이가 기운이 없어 보이더니, 오늘은 강주원이 기운이 없어 보였다.

강주원은 항상 자신감이 넘치는 인간이었다. 집안의 사업이 휘청거릴 때 잠깐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아카데미 입학한 뒤부터는 이전의 모습을 되찾았었다.

힘든 일이 있어도 항상 꿋꿋이 버티는 게 강주원이었는데, 오늘따라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다은이도 최근에 달라진 것 같고….’

오랜 시간을 함께했었기에, 다은이가 강주원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만큼 좋아하는 걸 알고 있어서일까, 다은이가 잘 되길 생각했던 적도 있고, 직접 도움을 줬던 적도 있었다.

매번 밀어내는 강주원 때문에 다은이가 마음고생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강주원에게 짜증 나는 감정도 있긴 했었다.

다은이 같은 여자가 어딨다고, 다은이의 마음을 고생시킨단 말인가.

다은이 혼자 속앓이하는 모습을 계속 지켜봐서일까?

지금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뭔가 익숙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의도적으로 강주원과 거리를 두는 듯한 모습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하긴, 짧은 시간도 아니고 마음을 접었을 수도 있다. 최근에 다은이의 모습을 보면 강주원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더 감정을 품은 모습이었으니까.

‘김시우….’

그렇게 접점은 없었기에, 큰 감정은 없었다.

단지 하위권이었던 김시우의 랭킹이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다.

실기 꼴찌의 대명사였던 인간이, 이제는 가장 성장 속도가 빠른 헌터로 자주 언급 될 정도니까 말이다.

검은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부드러움과 야성미가 공존하는 특이한 얼굴.

옛날 모습을 생각한다면, 말도 안 될 정도로 달라지긴 했다.

‘확실히 잘생기긴 했네….’

부드럽게 웃는 김시우의 옆에서 함께 웃는 다은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김시우의 옆에 다은이가 함께 있는 모습이 많아서일까, 자꾸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강주원이 저렇게 돼버린 것도 김시우 때문이 아닐까.

김시우와의 대련에서 패배했던 순간부터 시작해서 점점 강주원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항상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는데, 점점 여유를 잃어 가는 게 눈에 보였다.

“아~ 고마워. 잘 쓸게.”

“응~ 주원아!”

남들 앞에서는 괜찮은 척하며 웃고 있지만, 함께 했던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지금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다은이를 마음 고생시킨 걸 보면, 짜증 나긴 했어도 그래도 십수 년을 함께한 친구였다.

‘하아…. 진짜 짜증 나게….’

정수아는 한숨을 푹 쉬며 강주원에게 다가갔다.

“야 잠깐 따라와 봐.”

“좀 있으면 수업 시작인데 수아야?”

“조용히 하고 따라와.”

“응…. 알았어.”

따라서 오라고 하니 고분고분하게 따라오는 강주원이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여전히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처음에는 자신도 감정이 있었던 적이 있었으나, 다은이가 강주원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그 감정을 포기했었다.

그녀에게는 강주원보다 이다은이 먼저였으니까.

비록 다은이 만큼은 아니어도, 강주원도 자신과 오래 함께한 소꿉친구.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야?”

“너 무슨 일 있어?”

“응?”

“내가 모를 거 같아?”

“아무 일도 없어 수아야~”

“새끼…. 지랄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

“어…? 어...”

갑자기 강주원의 표정이 구겨지더니 이제는 눈가에 물이 맺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아니 씨 왜, 갑자기 질질 짜는 거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강주원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알 수 없는 모성애가 일어났다.

항상 당당한 표정으로 최선을 다하는 인간이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다고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보고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강주원을 품에 안았다.

“하….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너 이것보다 힘든 일 겪으면서도 잘 이겨냈잖아 새끼야. 열심히 하는 거 알고 있으니까…”

“수아야…”

둘의 키 차이 때문에 정수아가 강주원의 품에 안겨있는 것처럼 되긴 했지만, 정수아는 강주원을 위로하려고 등을 두들겼다.

‘이 녀석이 이렇게 컸던가….’

키 차이가 크게 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강주원의 품은 태평양처럼 넓었다.

그동안 운동을 열심히 했는지 단단한 몸, 왠지 모르게 좋은 향기도 나는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서러운 표정으로 울고 있는 강주원의 얼굴이 보였다. 보통은 꼴불견 같아야 정상인데, 잘생긴 외모 때문일까.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빠르게 뛰는 기분이 들었다.

“치…. 친구니까 힘들면 말을 해 병신아…”

“수아야..흐윽..”

*

“요즘 시대가 좋아지긴 했어.”

신광호는 자신의 손안에 있는 얇은 판을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손가락이 닿는 대로 화면이 휙휙 변하는 걸 보면서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범죄를 저지르고 계속 산에서 지냈기에, 스마트 폰을 직접 사용하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그때는 더럽게 느렸던 거 같은데 말이야. 크기도 작고.”

자신이 사용했던 기기와 비교했을 때 화면이 훨씬 크게 변한 최신형 스마트 폰을 조작하며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오른팔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꼬리가 남으면 추적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알아. 그냥 신기해서 그러지.”

신광호의 앞에는 속옷 차림으로 눈과 온몸이 멍들어 있는 한 남성이 의자에 묶여 있었다.

남성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자신을 그렇게 만든 건 눈앞에 있는 남자가 자신의 눈앞에 있으니 말이다.

팔다리가 다 구속되어 있으나, 말은 할 수 있는 상태였으나, 남성을 절대로 입을 열지 않았다.

소리를 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남성은 숨소리도 나지 않도록 최대한 조용히 했다.

“흠…. 전격 능력 사용자 이다은, 대한 아카데미 차석으로 차기 S랭커가 될지도 모르는 장래가 촉망받는 생도.”

신광호는 스마트 폰 속 인터넷 기사에 올라와 있는 사진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싸움의 흔적을 보고 번개가 내리친 것 같은 모습을 발견하고 검색해 봤는데 이렇게 바로 나올 줄은 몰랐다.

아마 차석이다 보니 관련된 기사들이 많은 모양이다.

“맞네, 가슴만 더럽게 큰 년. 검색하면 다 나온다고 하더니 세상이 참 좋아졌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대한 아카데미면 역시 조금….”

아무리 복수를 한다고 해도, 대한 아카데미를 건드리는 건 리스크가 너무 큰 행위였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지만, 아카데미 생도를 건드린다?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헌터 아카데미인 대한 아카데미 차석인 생도를?

그렇게 된다면 반드시 협회에서 상위 헌터들이 움직일 게 분명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몸을 숨겼으나, 상위 헌터가 움직인다면 말이 달라질 게 분명한 상황, 신광호의 오른팔 양대호는 신광호의 판단이 마음에 걸렸다.

“야.”

“아….”

양대호가 시선을 돌렸을 때는 자신의 목덜미 밑에 서늘한 도끼가 들어와 있었다.

도끼날 표면에 흐르는 선명한 마나에 의해 목덜미에 얇은 상처가 한 줄 생겨났다.

“대호야.”

“예….”

“내가 왜 널 데리고 다니는지 아나?”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게 행동했습니다.”

양대호는 눈을 바닥으로 깔자 신광호가 도끼를 거두었다.

“매번 이렇게 살 수는 없지. 언제까지 도망만 치면서 살겠어?”

“하지만 방법이….”

“이번 브로커 새끼가 중국 쪽으로 갈 생각이 있냐고 묻더라고.”

“중국 말씀입니까?”

“그래, 뭐 실력만 있으면 어디서든 살아갈 수 있는 법이야. 언제까지 산속에서만 지낼 수는 없지. 안 그래? 스마트 폰 인지 뭔지 그런 것도 쓰고, 사람다운 음식도 먹고…. 응?”

“하지만….”

신광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양대호를 노려보았다. 양대호는 눈치껏 입을 닫았다.

따끔거리는 느낌과 함께 양대호의 목덜미에는 새로운 상처가 생겨났다.

“대호야. 당한 건 돌려줘야지. 안 그래? 마지막으로 그 연놈만 처리하고 한국을 뜨자. 가는 길에 즐길 건 즐기고 가야지.”

여전히 마음에 한구석이 불편했으나, 양대호로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압도적인 실력 차가 나는 이상, 양대호는 신광호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는 없었다.

“그나저나. 이 년 존나 예쁘긴 예쁘네. 빨통도 크고 말이야. 안 그렇냐 대호야?”

양대호는 말없이 스마트 폰 속 사진을 바라보았다. 노을빛 머리카락과 신비한 녹색 눈동자, 거기에 한 손으로 잡을 수 없을 것 같이 거대한 가슴.

헌터들이 일반인보다 외모가 뛰어난 경우가 많긴 하지만, 이다은의 경우는 헌터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외모가 아름다웠다.

“…”

“새끼, 아닌 척하면서 집중하는 거 보소, 크크크 우리 대호도 남자는 남자인가 봐?”

“크흠..”

“이년 말고도 하나 더 있었지. 이름은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년도 비슷한 급이었거든.”

“…”

점잖아 보이는 척하고 있으나 양대호 역시 현상금이 달린 흉악범, 양대호의 눈동자가 성욕으로 번들거렸다.

“아아, 그러고 보니까 내가 형씨를 까먹고 있었네? 이름이?”

“…”

남자는 신광호를 보며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입을 열 때마다 자신에게 고문을 가하지 않았던가.

숨소리조차 시끄럽다며 때릴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이름을 묻는다는 말인가.

“야, 시발 내 말 안 들리냐?”

눈을 부라리며 노려보자 서둘러서 대답하는 남성이었다.

“바..박진우 입니다!”

“박진우.. 그래.. 맞다 대호야 현금은 있냐?”

“이 앞에 거래하면서 어느 정도 받았습니다.”

“흠…. 그래 진우야.”

“예…. 예!”

신광호는 박진우의 앞에서 도끼를 위로 던졌다가 받기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스마트 폰 빌려줘서 고맙다.”

“예…? 그…. 그럼 살려….”

남성이 말하는 순간 신광호의 손이 움직였다.

“근데 시발. 내가 입 열지 말라고 했잖아.”

오른쪽 다리에 박힌 신광호의 도끼.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으아아악!!!! 으그그극!!!!!!!”

남성은 고통스러운 듯 비명을 지르며 몸을 떨었다. 남성이 비명을 지르자 신광호가 도끼로 왼쪽 다리를 내려찍었다.

“입 열지 말라니까?”

“으그극!! 그으으읍…”

남성은 어떻게든 정신을 유지하며 신음을 참았다. 엄청난 고통에 정신을 게거품이 나올 정도였으나 살기 위해서는 참아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 버티는 박진우의 모습을 보며 신광호가 감탄을 터트렸다.

“호오?”

검붉은 핏물이 튄 신광호의 모습은 광인 그 자체였다.

“아주 깡다구가 있으셔? 살아남아서 꼭 복수하고 싶으신가 봐?”

신광호의 물음에 남성이 본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기 시작했다.

“으읍!! 으으읍!!”

“새끼. 끝까지 거짓말하네.”

__콰직.

“나는 사자 새끼든 토끼 새끼든 후환은 안 남기는 주의라서 말이야.”

그게 박진우의 마지막이었다.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