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3화 (113/120)

지금까지 그런 일이 없기는 했지만, 엄마도 사람 아닌가.

피곤하거나, 어딘가 안 좋으면 늦잠 정도는 잘 수 있겠지.

“나이도 있으니까, 뭐….”

좀 서글픈 이야기지만, 그녀의 엄마도 이제 젊은 나이는 아니다.

얼굴은 여전히 동안이라 여전히 제 나이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 속까지 속일 수는 없는 거겠지.

‘가끔은 내가 대신 차릴까…? 도진이도 나름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효심 깊은 생각이지만, 김도진이 들으면 화들짝 놀라 자빠질 생각을 하며 그녀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시원한 물을 컵에 가득 따라 마시며 돌아서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미안해, 딸…. 엄마가 오랜만에 늦잠 잤나 보다. 알람을 왜 못들었지…?”

타는 갈증을 채우기 위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뒤로 돌아서는 신유정.

“컥!”

그리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입에 가득 머금고 있던 물을 그대로 입밖으로 쏟아냈다.

주르륵

힘없이 흘러나와 턱을 타고 떨어져 내리는 물줄기들.

그녀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물었다.

“…누구세요?”

분명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돌아봤는데.

마주한 이도 분명 엄마가 맞긴 한데…, 엄마가 아니었다.

* * *

“꺄아악!”

알람이 채 울리기도 전에 다른 소리가 끼어들어 내 잠을 깨웠다.

듣자마자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다.

우리 정희 씨가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본 모양.

그렇다면 그 뒤의 움직임도 뻔하지.

캉캉캉!

“도진아! 일어났으면 문 좀…, 아니, 안 일어났어도 좀 일어나서 열어줄래?!”

다급한 목소리가 문을 뚫고 들어온다.

그리고 또 다른 목소리가 요란하게 내 귀를 때렸다.

“야! 너 우리 엄마한테 대체 뭘 먹인 거야, 이 미친놈아!”

아.

이건 예상 밖인데.

생각해 보니 아침에 그녀의 얼굴을 보는 건 나뿐만이 아니잖아?

“또 들들 볶이겠네.”

녀석에게 한소리 들을 걸 생각하니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

일단 그건 차치하고, 지금은 새삼 바뀌었을 우리 정희 씨 얼굴부터 감상해 볼까.

느긋한 걸음으로 현관으로 걸어가 잠금장치를 풀어낸다.

그러자 곧장 열리는 문.

환한 햇살을 후광처럼 등에 업은 그녀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도, 도진아. 아줌마가 자고 일어났더니 이런 모습이….”

“어, 음.”

사람이 너무 놀라면 어찌할 줄 몰라 아무런 반응조차 못 하게 된다더니.

난생처음으로 그 기분을 경험했다.

진짜…, 말이 안 나온다.

그냥 모르겠다.

어찌 반응해야 할지, 어떤 말을 먼저 꺼내는 게 맞는지.

모든 걸 판단하는 이성적인 감각이 전부 마비된 듯한 느낌.

얼굴이 막 바뀌었다거나 한 건 아니다.

백 년 달맞이꽃이 영화(靈花)라곤 하지만, 못생긴 얼굴을 잘생기게 해준다든가 하는 식의 궁극의 성형술은 불가능하거든.

분위기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우아하고, 기품 있고, 온화하고…, 그런데 한편으론 한없이 요염한 그대로.

그녀의 얼굴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다름 아닌 세월의 흔적이었다.

제아무리 젊다고 해도 그녀의 피부에는 채 이겨내지 못한 세월의 흔적들이 묻어 있었다.

멀리서 보면 잘 모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로소 드러나는 것들.

그런 것들이 말끔하게 사라지고, 그 자리를 생기와 탄력이 대신 메꿨다.

탱탱하고 촉촉한, 그러면서 가까이 들여다봐도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는 도자기 피부.

어젯밤 차를 마시면서 이미 상상해봤다.

지금보다 더 젊어진 그녀의 얼굴은 어떨까, 하고.

…막연한 상상은 본디 현실이 되면 어느 정도 힘을 잃기 마련인데, 이번엔 정반대다.

오히려 내 상상력이 빈약했구나, 통탄하게 될 정도.

옆에 있는 신유정의 시선을 의식하며 당장 껴안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억누른다.

“아줌마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렇게 된 이유는 네가 어젯밤에 준 차밖에 없어서…, 맞니?”

“어…, 그렇긴 한데요.”

당장 모든 진실을 밝힐 수는 없다.

백 년 달맞이꽃은 가격도 가격이지만 아예 매물조차 없는 초희귀 재료다.

그걸 나보고 어디서 구했냐고 물어보면 내가 할 말이 없어지니까, 적당한 걸로 대충 얼버무릴 필요가 있다.

“이게, 저도 좀 놀랍네요.”

“놀라다니…?”

“그, 얼마 전에 던전 돌다가 얻은 건데, 알고 보니 그 꽃이 피부 미용에 좋다고 해서 아줌마 드리면 좋겠다 싶어서 그냥 끓여드린 건데, 이렇게까지 효과가 좋을 줄은 저도….”

안다, 허술한 거짓말인 거.

근데 어쩔 거야, 내가 그렇다는데.

허술한 거짓말일수록 더욱 뻔뻔하고, 의연할 필요가 있다.

그때 뒤에 서 있던 신유정이 내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던전? 무슨 던전? 너 맨날 우리랑 같이 갔잖아. 근데 우리가 돈 던전 중에는 꽃이라곤 단 한 송이도 없었는데?”

제법 날카롭긴 하다만,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지.

“…주말에 잠깐 갔었어. 너희 말고 다른 사람이랑.”

“다른 사람 누구?”

이 거짓말에 그나마 현실성을 부여할 수 있는 사람은 내 주변에 단 한 명뿐.

“윤지안 씨랑.”

아는 이름이 나오자 신유정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진다.

“둘이?”

“아니, 지안 씨하고 협회 직원분들 두 명 더 해서 네 명.”

“흐음….”

분노가 한층 누그러드는 게 보인다.

나는 여전히 안절부절못하는 정희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는 그냥 단순히 달맞이꽃인 줄 알았는데…, 단순한 달맞이꽃이 아니었나 봐요.”

“그, 그런 것 같네.”

그녀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으로 제 얼굴을 연신 쓸어내리고 있었다.

본인이 만지기에도 느낌부터가 다르겠지.

이제는 남들 앞에서 아줌마라 부르기에 민망한 수준이 되어버렸다.

예전에도 정말 잘 쳐주면 30대 초중반도 노릴 수 있었던 그녀는 이제 20대 후반이라고 해도 믿을 수준이 되었거든.

어디 가서 아줌마라고 부르면 젊은 처자한테 그게 무슨 막말이냐고 핀잔을 들을지도.

“그래서, 그 꽃은 이제 더 없어?”

신유정이 떡고물을 노리고 내게 물어왔다.

애가 욕심도 많지.

안 그래도 젊고 탱탱한 애가 그거 더 먹어서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아쉽게도 어제 전부 다 썼어.”

“아….”

탄식하며 원망어린 시선으로 귀엽게 째려보는 신유정.

이렇게 없는 척하다 나중에 슬쩍 한 장 줘야지.

“아무튼, 아줌마.”

“으, 응.”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향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축하드려요.”

내 말에 그녀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진다.

방금 한 말에서 무언가 낌새를 눈치챈 모양이다.

본인이 젊어진 것이 의도치 않은 우연으로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을.

뭐, 그 정도는 눈치채도 상관없지.

“…그래, 우리 도진이 덕분에 아줌마가 큰 선물을 얻었네.”

“씨이, 나쁜 새끼. 나는 안 주고 엄마만….”

정희는 옆에서 씩씩거리며 구시렁거리고 있는 신유정의 등짝을 내리치며 활기차게 외쳤다.

“도진이가 엄마 생각해서 준 걸 왜 네가 나눠 먹으려고 하니? 넌 안 그래도 젊잖아.”

“아, 몰라!”

자신이 삐졌음을 어필이라도 하려는 듯, 쿵쿵 발을 구르며 아래층으로 홀라당 내려간다.

어쩌다 둘만 남게 된 상황.

잠깐이라도 안아볼까 싶어 팔을 뻗으려는데, 그녀가 예상치 못한 움직임을 보였다.

신유정이 보이지 않게 되기가 무섭게 그녀가 먼저 내 품으로 파고든 것.

“후후…, 정말 약속 지켰네.”

그녀가 말한 약속이란 마녀로 살게 해주겠다던 그때 그 말이겠지.

나는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지켜야죠. 아무렴 누구와의 약속인데.”

웃는 얼굴로 내 품에 안겨 있는 그녀를 향해 물었다.

“이제 정말 밖에 나가면 아가씨로 보겠는데요? 남자들이 막 전화번호 달라고 난리 치겠다.”

“호호, 걱정되니?”

“아뇨.”

그런 걱정할 때는 이미 지났다.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솔직히 이제는 아무래도 좋아. 다른 사람의 시선도, 남들에게 보이는 내 모습도. 그냥…, 도진이 네가 아줌마를…, 나를 어떻게 보는 게 제일 중요하단다.”

더욱 은근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는 그녀.

“그러니 말해보렴. 지금의 내가…, 네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갖다 붙이자면 얼마든 붙일 수 있다.

수십 단어든, 수백 단어든 생각할 시간만 주어진다면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내뱉는 답은 더없이 담백하고, 그렇기에 솔직했다.

“예뻐요.”

이 이상의 말은 더 필요치 않다는 듯, 단호하고 또 선명하게.

그러한 내 태도는 확실한 보답으로 돌아왔다.

“저녁에 시간 되니?”

“…없어도 만들어야죠.”

“그럼 만들렴.”

내 품에서 떨어져 나간 그녀가 제 모습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잇는다.

“이 정도면…, 밖에서 데이트해도 괜찮지 않겠니?”

“…확실히.”

살아온 세월만큼 쌓인 완숙미와 톡톡 튀는 생기가 뒤섞여 자아내는 형언할 수 없는 매력과 분위기에, 넋이 나간 표정으로 대답하고 고개를 흔드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 손으로 말도 안 되는 요물을 세상에 탄생시킨 것은 아닐까 하는 아찔한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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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로 향하는 버스 안.

발등에 불 떨어지듯, 두 개의 문제가 생겼다.

하나는 옆에 앉아 한껏 기분 나쁜 표정을 짓고 있는 신유정.

“야, 아줌마한테 좋은 거 챙겨드린 게 그렇게 기분 나쁠 일이야?”

내가 묻자, 녀석이 신경질 섞인 몸짓으로 고개를 젓는다.

“누가 그렇대? 그런데 적어도 나눠서 줄 수 있었던 거 아니냐고.”

“…….”

얘도 좀 심경이 복잡한 듯하다.

뭐…,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아무리 동안이어도 엄마라는 호칭을 쓸 수 있는 수준이었던 자기 엄마가 이제는 언니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어려졌으니 당황스럽기도 하겠지.

또 그렇게 좋은 걸 자기는 홀라당 빼먹고 제 엄마만 챙겼다는 게 서운하기도 할 테고.

이래서야 서프라이즈니 뭐니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 같다.

“야, 유정아.”

“왜.”

뚱한 목소리로 답하는 신유정.

나는 녀석의 귀에다 대고 그토록 듣고 싶은 말을 건넸다.

“사실 그 꽃잎 아직 좀 남았어.”

내 얼굴을 보기도 싫다는 듯, 반대로 돌리고 있던 머리가 휙 돌아온다.

반응 죽이네.

“…아침엔 없다며.”

“그거야 장난이지. 없는 척하고 나중에 깜짝 선물로 주려고 했는데, 네가 너무 삐져 있잖아.”

녀석의 얼굴이 단숨에 붉어진다.

“삐, 삐지기는 누가!”

검지로 녀석을 똑바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너.”

“…아니라고.”

자기도 좀 찔리긴 하는지 박박 우겨대진 못하고 소심하게 대답한다.

“이제 화 좀 풀렸어?”

“아, 화난 거 아니라니까?”

그렇게 대답하면서 입꼬리가 삐죽삐죽 올라간다.

화 풀렸네, 풀렸어.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한다.

과장되긴 했지만, 어느 정도 맞는 말이라고 본다.

한껏 화나고, 서운해 하는 얼굴로 주변을 서성이고 있으면 그것만큼 거슬리는 게 없거든.

표정을 보아하니 녀석에 대한 문제는 이제 안심해도 될 것 같다.

“다음이 문젠데….”

이제 두 번째 문제가 남았다.

아침에 데이트를 신청한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문제다.

기왕 어려 보이게 됐으니, 요즘 젊은 친구들이 하는 데이트를 즐겨보고 싶다던가.

“미치겠네.”

이게 왜 문제냐고?

나도 젊은 몸뚱어리를 차지하긴 했지만, 젊은 사람이 아니니까 문제지.

한마디로 요즘 젊은 애들이 어떤 식으로 데이트를 하는지 정확히 모른다는 거다.

“이걸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인터넷에 검색이나 해볼까 고민하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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