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12/120)

그때까지 이 여자의 노골적인 유혹은 내게 역효과밖에 유발하지 않는다.

나는 웃으며 그녀를 내게서 떼어냈다.

“왼쪽으로 공간이 많이 남으시네요.”

“아…, 아아, 그, 그렇네요? 아하하, 왜 몰랐지….”

이리 거절할 줄은 몰랐는지 당황해서 횡설수설하며 옆으로 떨어져 앉는 백현아.

“흐흥….”

뒤에서 익숙한 느낌의 콧노래가 들리는 건 왜일까.

사람을 가득 태운 버스가 교문을 나선다.

정차하는 구간마다 다섯 명씩 짝을 이룬 팀이 배정된 심사관과 함께 버스에서 내린다.

곧이어 우리의 차례가 다가왔다.

버스에서 내려 낯익은 길을 따라 균열 앞으로 향한다.

행성 주위를 도는 위성처럼 내게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며 함께 걸어온 그녀가 균열 앞에서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안전과 관련된 익히 알고 있는 수칙들이라 말하는 쪽도, 듣는 쪽도 한 번 더 주지하고 넘어가자는 느낌이 강했다.

“그럼 차례대로 입장할게요. 입장한 순간부터 심사는 시작된다는 거, 잊지 않도록 해요!”

탱커인 엘레나와 신유정이 차례로 균열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다음은 전위와 후위를 오가는 서연이가, 바로 그다음은 임나은이 뒤따랐다.

마지막으로 내 차례.

“아, 도진 학생!”

균열에 손을 뻗으려는데 그녀가 나를 불러세웠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야릇한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건넨다.

“제가 개인적으로 도진 학생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는 거…, 아시죠? 오늘 좋은 모습 기대할게요?”

해석하면 뒤에서 지켜보고 있을 테니 저번처럼 멋진 실력을 보여줘라, 이건가.

아무래도 그때 느꼈던 감동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은 모양.

그런데 어쩌지.

애석하게도 오늘은 그때와 같은 임팩트는 보이지 않을 텐데.

적당히 애태워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려 했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남 주기엔 아깝고, 그렇다고 먹자니 또 아쉬운 계륵 같은 존재로 두고 있으려니까 감질맛만 나서 못 참겠다.

“교수님.”

한 걸음 더 다가가 그녀를 완연한 높이에서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아….”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몽롱하게 변한다.

야릇한 무언가를 기대한 걸까.

“조언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에 실망한 그녀가 새초롬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본다.

“조언…이라고요.”

“예, 조언.”

그녀의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좋아요. 도진 학생의 조언, 한번 들어보고 싶네요.”

어디 한 번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의, 별 대수로울 것 없다는 말투.

나는 웃으며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날 붙잡아두고 싶다면 유혹하는 순서를 조금 바꾸는 게 좋을 겁니다.”

그녀의 얼굴 주변에 넓게 퍼져 있던 여유가 조금씩 덜어지기 시작했다.

오른손을 뻗어 검지로 과하게 풀어낸 단추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가슴을 콕 찍는다.

그러니까…, 가슴은 가슴인데, 부풀어 오른 유방 말고 딱딱한 뼈가 느껴지는 평평한 곳.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이 속에 든 것들을 전부 털어놓는 겁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매끈한 피부 위에 닿아 있던 손가락을 떨어뜨리며 말을 잇는다.

“비로소 서로의 살을 맞댈 수 있겠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지금까지의 육탄공세는 전부 헛수고였노라고.

나는 그녀가 크게 상처 받지 않도록 잘 돌려서 말해주었다.

세상에 나처럼 따뜻한 사람이 또 있을까.

언제, 어디서든 남자를 녹여버릴 준비를 하고 있던 것처럼 뇌쇄적인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조언이었네요.”

자존심이 상한 걸까, 아니면 자신의 방법이 틀렸음을 받아들인 걸까.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다.

내가 백현아 교수도 아니고,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은 이상에야.

던전 안에서 팀원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마지막 말만 빨리 하고 끝내자.

“그리고 오늘은 저번과 같은 모습은 볼 수 없을 거예요.”

“…흐응, 이유는요?”

이유라.

딱히 없다.

굳이 꼽자면….

“던전이 너무 쉽거든요.”

우리 팀의 전력에 비해 던전의 난이도가 너무 낮게 책정되었다는 것 정도일까.

벙찐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를 향해 한 번 웃어준 뒤, 곧장 균열 안으로 들어섰다.

* * *

어둠이 깊게 내려앉은 야심한 밤.

김도진은 평상에 앉아 스마트폰을 꺼내어 서정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도진 학생: 서정희! 보고 싶다아아악!!]

까톡!

슬슬 잠자리에 들기 위해 TV를 끄고 침대에 누운 서정희는 때마침 메시지를 읽고서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아하핫….”

서서히 찾아오던 수마에서 깨어난 그녀는 옆으로 누워 애틋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다 답장을 보냈다.

[정희: 벌써 열두 신데 자야지? 내일도 학교 가야 하잖니.]

까톡!

[도진 학생: 엄마 모드의 잔소리는 정중히 거절합니다.]

까톡!

[도진 학생: 올라와서 차 한 잔만 마시고 가요.]

까톡!

[도진 학생: 정희 씨 주려고 아주 좋은 찻잎을 구해놨어요.]

“음….”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이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생전 차에 대해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아이가 찻잎까지 구해두었다고 말하니 마음이 동했다.

얇은 슬립웨어에 가디건만 위에 걸친 뒤, 곧장 옥상으로 향한다.

“정희 씨!”

옥상에 올라오기가 무섭게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

김도진은 평상에 작은 식탁을 펼쳐두고 그 앞에 앉아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머나.”

식탁 위에는 내용물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주전자와 예쁜 찻잔이 놓여 있었다.

투명한 주전자 안에는 예쁜 노란색을 머금은 찻물이 담겨 있었다.

찻잎을 준비해두었다더니, 정말 제대로 준비한 모양.

김도진은 놀란 그녀를 향해 제 맞은편을 가리키며 손짓했다.

“얼른 앉아요. 차는 식으면 맛이 떨어져요.”

“그, 그래.”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의 맞은편에 앉은 서정희.

“응…?”

그녀의 시선이 김도진의 뒤에 살짝 가려져 있는 화분으로 향했다.

발로 대충 빚어 만든 듯한 투박한 화분 위에 은은한 광채를 뿜어내는 노란 꽃 한 송이.

가만히 보고 있으면 하염없이 보게 될 것만 같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꽃.

그러나 어딘가 이상하다.

‘뭔가 많이 비어 있는 것 같은데…?’

사방으로 활짝 피어있어야 할 꽃의 일부분이 휑하다.

마치 누군가가 손으로 뜯은 것처럼.

그녀는 흠칫 놀라며 투명한 주전자에 담긴 찻물을 바라보았다.

공교롭게도 같은 노란색이다.

‘설마 찻잎이라는 게…, 저 꽃잎은 아니겠지?’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닐 것이다.

찻잎이라는 건 말리고, 시들리고, 덖는 등의 과정을 거쳐 탄생하는 것 아닌가.

다짜고짜 꽃잎을 떼다가 이런 맑은 빛깔의 차를 만들 수 있을 리가 없다.

“자아, 한 잔 따라줄게요.”

김도진은 주전자를 들어 찻잔에 노란 찻물을 붓는다.

쪼르르르….

맑은 노란빛 찻물이 담긴 찻잔을 곧장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김도진은 신신당부했다.

“쭉 들이켜요. 귀한 거니까 한 방울도 남기면 안 돼요.”

“그래. 잘 마실게…?”

따뜻하게 데워진 찻잔을 손에 쥐고 천천히 찻물을 입에 흘려 넣은 서정희.

혀를 타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찻물에서 오묘한 맛이 전해졌다.

쌉싸름한 듯, 달콤하고, 달콤한 듯, 시원한 좀처럼 갈피를 잡기 힘든 풍미.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입속에서 아우러지는 전체적인 맛이 굉장히 중독성 있다는 것이다.

“차가 굉장히 독특하네…? 이 찻잎, 이름이 뭐니?”

맛이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

크게 비싸지만 않는다면 두고두고 한 번씩 마시고 싶을 정도.

김도진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달맞이꽃이에요.”

“달맞이꽃…? 그걸 차로 우리면 이런 맛이…, 으응….”

달맞이꽃이라는 말에 잠시 번쩍 뜨였던 그녀의 눈꺼풀이 금세 무겁게 내려앉았다.

“왜 이러지…? 갑자기 졸음이…, 엄청….”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머리를 빙빙 돌리는 그녀.

김도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쓰러지듯 떨어져 내리는 그녀의 머리를 받쳐주며 입을 열었다.

“밤이라 졸려서 그런 거예요. 달맞이꽃이 불면증에 좋거든요.”

“그렇…구나.”

그녀는 김도진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럼 조금만…, 자고….”

말도 채 끝내지 못하고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김도진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내 등에 업고서 아래층으로 향했다.

신유정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아 열고 집으로 들어가 안방 침대에 그녀를 살포시 내려놓는다.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문을 닫고 옥상으로 돌아온 김도진은 제 등 뒤에 감춰두었던 화분을 들어 올렸다.

원래 열두 장이었던 꽃잎이 여섯 장으로 줄었다.

조금 전 그녀의 차 한 잔에 여섯 장을 단숨에 우려낸 탓이었다.

“흐음…, 남은 여섯 장으로 뭐 하지.”

이것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무궁무진하여 무엇 하나 고르기가 쉽지 않다.

“뭐, 당장 급한 건 아니니까.”

김도진은 손에 쥔 화분을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숨겨둔 뒤, 맑은 시선으로 훤히 보이는 야경을 바라보았다.

“흐흐.”

그녀는 알까.

자신이 차로 우려 마신 찻잎의 정체가 평범한 달맞이꽃이 아니라, 백 년에 한 번 꽃을 피워낸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영화(靈花) ‘백 년 달맞이꽃’이라는 것을.

아마 모를 것이다.

그것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열 번이 될까 말까 하는 수준의 귀한 꽃이라는 것도, 그것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부자들이 수두룩하다는 것도.

한 장만 섭취해도 잔고장에 시달리는 늙은 몸도 윤활유를 칠한 것처럼, 새로운 활력을 솟게 할 정도로 뛰어난 효능을 자랑한다는 것도.

그리고 그녀가 그런 귀한 꽃잎을 한 장도, 두 장도 아니고 무려 여섯 장을 한꺼번에 집어삼켰다는 것도 말이다.

아무렴 평생 몰라도 되는 일이다.

다만, 궁금할 뿐이다.

다음 날 아침 깊은 잠에서 깨어난 그녀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김도진은 그것이 몹시도 궁금했다.

등록된 마지막 회차입니다

 이른 새벽.

삐비비빅- 삐비비빅-

해가 채 떠오르기도 전에 울린 알람 소리에 신유정은 잠에서 깨어났다.

채 가시지 않은 수면기를 씻어내기 위해 대충 세수를 한 뒤, 그녀는 집을 나섰다.

“후우…, 후우…!”

가벼운 조깅으로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제치며 앞으로 달려 나간다.

이는 며칠 전부터 추가된 그녀의 새로운 운동 루틴이었다.

조깅을 시작한 이유는 단 하나.

‘엘레나에게 질 순 없지!’

같은 팀원이자, 동일 포지션인 엘레나에게 자극받았기 때문.

신유정은 지금까지 제 체력이 약하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자신의 장비보다 무거운 타워 실드를 들고 움직이면서도 절대 자신보다 먼저 지치는 법이 없는 그녀를 보며 부족함을 느꼈다.

그녀는 단 한 가지도 지고 싶지 않았다.

같은 포지션에게는 더욱.

그래서 운동량을 늘리기로 했다.

오전이나 오후 체력단련 시간을 더 늘릴까도 생각해 봤지만, 이내 포기했다.

‘도진이랑 있을 시간이 줄어드는 건 안 돼.’

지금보다 더 붙어 있어도 모자랄 시간에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을 줄이라니, 그건 있어서는 안 되는 일.

그렇다고 이대로 지고 있자니 그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고민 끝에 그녀는 선택했다.

‘자는 시간을 줄이자!’

그녀의 평균 수면 시간은 대략 여섯 시간.

그중에서 한 시간을 더 희생하기로 마음먹었다.

“후우…!”

남들의 몇 배나 되는 속도를 유지한 채 한 시간 내내 달린 그녀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가는 데 30분, 오는 데 30분.

한 시간 꽉꽉 채워 달린 그녀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평소처럼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

평소 같았으면 문을 딱 열었을 때 주방에서 밥 짓는 소리와 함께 군침 도는 음식 냄새가 풍겨와야 하는데, 오늘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기 때문.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어서 씻고 나오라며 말하는 엄마 대신 반기는 불 꺼진 주방.

이내 그녀는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늦잠 자나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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