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으로 들어오세요.”
옆으로 비켜서자, 그녀는 미안하다는 투로 내게 답했다.
“죄송하지만…, 저와 함께 가주실 데가 있습니다.”
“아, 내가 나가야 하는 거구나.”
“죄송….”
“그만하래도요.”
사과도 습관이라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럼 잠깐만 기다려요. 옷만 금방 갈아입고 나올 테니까. 복장은 뭐든 상관없죠?”
“예, 격식 따지는 자리는 아니니까요. 천천히 입으셔도 됩니다.”
곧장 방으로 돌아와 옷장에 있는 옷 중 아무거나 꺼내 입었다.
청바지에 후드티.
이 정도면 되겠지.
지갑과 스마트폰만 간단히 챙겨 밖으로 나갔다.
윤지안은 평상에 앉아 있었다.
먼 하늘을 쳐다보는 시선이 아련한 게, 꼭 시한부 선고받은 비련의 여주인공 같네.
“지안 씨?”
“아, 네!”
내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일어나는 윤지안.
“그럼 가시죠.”
“네.”
계단을 내려가니 문 앞에 익숙한 차가 서 있었다.
예전에 한 번 얻어탔던 그녀의 승용차.
“멀리 가는 건가요?”
“아닙니다. 여기서 대략…, 20분 정도 걸릴 겁니다.”
20분 거리라.
나는 조수석에 올라타 그녀에게 물었다.
“어디 가는 건데요?”
“고려 호텔입니다.”
고려 호텔.
우리나라 5성급 호텔 중 하나.
거기 VIP 라운지에서 내려다보는 야경이 참 멋졌지.
그런데 잠깐만.
“…호텔이요?”
뭐야, 뭔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던데, 이거 설마…?
“정확히는 고려 호텔 라운지입니다.”
“아, 그렇구나.”
김칫국만 요란하게 퍼마셨네.
“대학 생활은…, 할만하십니까?”
“나름대로 즐기고 있어요.”
최근 생활이 제법 재미있기는 하다.
모르는 마법을 배우는 것도 쏠쏠하고, 던전 실습은 느슨한 삶에 긴장감을 전해줘서 좋고.
임나은이나 신유정이랑 캠퍼스에서 투닥거리는 것도 생각보다 재밌다.
“잘 지내고 계시다니, 다행입니다.”
“…….”
오늘따라 이 여자가 영 이상하네.
잘 지내서 다행이면 다행이지, 왜 저렇게 아련한 표정을 짓는 건데?
점점 그녀의 표정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할 즈음, 차가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
20분 굉장히 빨리 가네.
직원에게 주차를 맡긴 뒤,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익숙한 로비 풍경이 나를 반긴다.
내게 여러모로 뜻깊은 곳.
그녀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눌리는 버튼은 가장 꼭대기인 24층.
라운지라더니…, 그냥 라운지가 아니라 VIP 라운지였네.
“어서오십시오.”
입구에서부터 예쁘장한 여직원이 안내를 해주었다.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창가 자리.
그곳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40대쯤으로 보이는 중년 사내.
알고 있는 사람이다.
친한 건 아니고…, 그냥 일 때문에 몇 번인가 만났던 사람.
김성태라고, 협회 총무부 부장이다.
별다른 욕심 없어 보이는 나른한 얼굴과는 달리, 권력욕이 상당했던 사람으로 기억하는데.
“아, 오셨군요. 반갑습니다. 저는 협회 총무부 부장 김성태입니다.”
“…김도진입니다.”
“일단 앉으시죠.”
원형 테이블에 나와 김성태, 윤지안이 각각 떨어져 앉았다.
“일단 식사부터 하실까요?”
“예, 그러시죠.”
대체 무슨 속셈으로 이곳까지 나를 부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비싼 밥 먹여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지.
일단 먹고 생각하자.
“음식은 미리 제가 주문해 두었습니다. 전부 고려 호텔에서 자랑하는 메뉴들이니, 마음에 드실 겁니다.”
“아, 네.”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블 위로 음식이 세팅되기 시작했다.
적잖은 크기의 테이블에 빈틈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빡빡한 세팅.
그가 말한 대로 고려 호텔의 시그니처라 불릴 만한 메뉴들이 전부 놓여 있었다.
“점심때라 시장하실 텐데, 일단 드시죠.”
“잘 먹겠습니다.”
곧장 식기를 집어 음식을 입에 집어 넣었다.
격식은 반 정도 무시했다.
김성태, 저 양반만 있었으면 그냥 손으로 먹을 수도 있었는데, 윤지안이 있으니까.
한 번쯤 이곳에서 이렇게 와구와구 먹고 싶었다.
매번 올 때마다 격식을 차려야 한다느니, 뭐라느니 해서 고상하게 먹는 데에 집중하느라 여기서 배불리 먹고 간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
“하하…, 배가 많이 고프셨나 봅니다.”
떨리는 음색에서 당황스러움이 느껴진다.
여기에서 이렇게 게걸스럽게 먹을 줄은 몰랐나 보다.
혹 윤지안이 이상하게 쳐다볼까 싶어 흘끔 쳐다봤는데, 어딘가 넋이 나가 있다.
김성태와 무언가 연관되어 있는 것 같은데….
테이블 위에 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말끔히 비워냈다.
거의 90%는 내가 먹은 것 같다.
이 정도면 식비만 100만 원은 넘게 나올 텐데, 나름대로 호강했구먼.
“디저트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따뜻한 커피 세 잔이 말끔히 정리된 테이블 위에 올려진다.
내 경험상 이제 슬슬 본론이 나올 타이밍인데.
“그래서 절 보자고 하신 이유가?”
“아, 오늘 김도진 씨를 뵙기를 청한 이유는 두 가집니다.”
그리 말하며 양복 자켓 안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확인해 보시죠.”
테이블 위에서 봉투를 집어 내용물을 살짝 꺼내 보았다.
어라, 수표네.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천만 원짜리 수표다.
그것도 세 장.
“특례 입학식 때 벌어진 습격 속에서 큰일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에 대한 보상입니다.”
“오….”
뒷돈 같은 거면 안 받으려고 했는데, 받아도 되는 합당한 돈이네.
급격히 통장에 살이 찌고 있다.
헌터 생활을 시작하면 그 정도야 우습게 벌 수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 먹고살기에 충분하다 못해 배부른 액수.
“아, 이거, 뭘 또 이렇게나 많이, 하하!”
“마음에 드시는 듯하니 다행입니다. 최대한 많은 보상을 챙겨드리기 위해 제가 힘 좀 썼습니다.”
“그러셨구나~ 이거 감사해서 어쩌죠?”
나는 봉투를 신줏단지 모시듯 후드티 배에 난 주머니에 쏙 집어넣었다.
김성태 부장의 일처리 방식은 몇 번인가 겪어봐서 잘 안다.
이렇게 기쁜 소식부터 일단 전하고, 그 뒤에 이제 진짜 원하는 바를 말하려는 거겠지.
“이유가 두 가지라고 들었는데, 다른 하나는요?”
“아, 그게 말입니다.”
김성태가 은근슬쩍 윤지안에게 눈치를 준다.
그러더니 멍하니 있던 그녀가 흐릿한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 도진 씨를 뵙는 게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엥?”
뜬금없이 갑자기 이게 뭔 소리래.
그녀가 뭐라 말하려던 찰나, 김성태가 말을 이어받았다.
“도진 씨도 아시겠지만, 우리 윤지안 씨는 감찰부 소속입니다.”
“그렇죠.”
“도진 씨처럼 유망주들을 케어하는 일은 저희 총무부에서 담당하는 일이고요.”
얘기만 들어도 무슨 뜻인지 알겠네.
“아…, 그래서 이제부터는 총무부에서 일을 대신하겠단 거군요?”
“맞습니다. 윤지안 씨가 최근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저 때문에요?”
“꼭 그렇다기보단…, 감찰부 업무에 도진 씨 케어까지 맡으려니 체력적으로 부담이 심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윤지안에게 물었다.
“지안 씨, 그랬어요?”
“예? 아….”
흠칫, 하고 몸을 떠는 윤지안.
이내 김성태와 눈을 슥 맞추더니 이내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최근 체력적으로 좀 힘이 들었습니다.”
“그랬구나…. 그럼 진즉에 저한테 말씀하시지.”
그랬으면 내가 힘 좀 써줬을 텐데 말이야.
뭐, 지금이라도 써주면 되겠지.
일이 술술 풀려가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김성태가 웃는 얼굴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서 오늘부로 제가 직접 김도진 씨를 케어할 생각입니다.”
“아니, 부장님께서 직접요?”
“예. 아마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케어를 맛보시게 될 겁니다.”
자부심 넘치는 말투.
본인이 직접 하겠다는 건 별거 없다.
나를 위해서인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본인을 위해서니까.
그냥 자기가 나와 가장 두껍게 연줄을 만들고 싶다는 거다.
그런데 어쩌지.
“아…, 김성태 부장님도 좋긴 하지만, 역시 저는 윤지안 씨가 더 좋은데요.”
내 대답에 온화했던 분위기에 살얼음이 끼기 시작했다.
김성태의 얼굴에 핀 웃음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고, 윤지안은 당황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총무부장 자리를 고스톱으로 딴 게 아님을 증명하듯, 그는 탁월하게 감정을 제어했다.
“하하, 이해합니다. 지금까지 윤지안 씨와 정이 많이 들었겠죠.”
“맞아요.”
“그래도 말씀드렸다시피 윤지안 씨는 업무가 과중한 탓에….”
그 정도 변명이라면 나도 다 방법이 있지.
이름하여 ‘해줘’ 작전.
“그럼 빼줘요.”
김성태의 얼굴에 물음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예? 갑자기 뭘 빼달란 말씀이신지….”
“지안 씨가 맡고 있는 업무요.”
일단 지안 씨의 과중한 업무부터 ‘빼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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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지금 빼달라는 게 윤지안 씨의 감찰부 업무를 빼달라는 겁니까?”
“예.”
김성태 부장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제 귀에는 협회의 직원을 개인 비서로 부려 먹겠단 얘기로밖에 들리지 않는데…, 제가 잘못 이해한 겁니까?”
“예, 잘못 이해하셨네요.”
개인 비서로 부려 먹는 건 지금이 아니라, 먼 나중의 일이거든.
그때는 우리 지안 씨가 협회 직원이 아닌, 내 소속이 되어 있을 테고.
지금은 뭐랄까…, 그때를 위한 사전 체험 정도?
“저는 제 케어를 담당할 사람으로 지안 씨가 아니면 싫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케어 업무에서 제외하는 게 아니라 감찰부 업무에서 제외해달라?”
“맞습니다.”
“하…, 김도진 씨.”
가볍게 한숨을 토해낸 김성태 부장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너무 무리한 요구란 생각은 안 드십니까?”
무리한 요구라….
말인즉, 지금 내 요구가 정도를 넘어서거나 지나치단 뜻인데.
“아뇨, 전혀요.”
난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걸.
아무래도 이 양반의 저울추가 여전히 잘못 되어 있는 듯하니, 내가 맞춰줄 필요가 있겠어.
“부장님.”
“…말씀하시죠.”
“현재 협회가 케어하고 있는 유망주들, 꽤 되죠?”
“그리 적지는 않습니다.”
내가 기억하기론 협회는 매년 30명 정도의 유망주들을 후원하고, 관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