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120)

그러나 속까지 환하게 웃고 있지는 않은 듯했다.

짙은 화장으로도 차마 숨길 수 없을 만큼 두꺼운 핏줄이 관자놀이 부근에 솟아오른 걸 보면 말이다.

“여자로선 조금 자존심 상하는 상황이지만…, 그래서 더 마음에 드네요.”

그녀는 아쉬운 눈길로 나를 슥 훑어보더니, 이내 무릎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팔찌에 걸린 마법, 뭔지 알 수 있겠어요?”

“아마도요.”

팔찌에 마력을 살짝 집어넣어 희미하게 각인된 마법진의 문양을 더듬어 보았다.

열두 개의 획으로 이루어진 기초 마법 실드(Shield.)

일부 마법은 마법진의 획을 더하고 빼는 것으로 개량할 수 있다.

그중 대표적인 마법이 바로 기초 마법 중 하나인 실드다.

획을 더함으로써 마력의 소모량을 늘리는 대신, 단단함을 더 늘릴 수 있다.

이 마법진에도 그렇게 개량된 실드 마법이 내장되어 있다.

열두 개의 획을 두 번 중첩하여 새김으로써 초급 마법 수준까지 끌어올린 개량형 실드가.

“초급 수준의 실드 마법이 내장되어 있네요.”

“역시….”

알아볼 줄 알았다는 듯, 그녀가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덧붙여 말하자면, 내장된 실드 마법은 세 번까지 쓸 수 있어요. 각각의 쿨타임은 1분, 횟수를 모두 사용하고 나면 48시간 동안 충전 상태로 돌입하게 돼요.”

그녀의 설명 마지막에 살짝 놀랐다.

“충전형이었어요?”

“후후, 맞아요.”

마법이 각인되어 있는 아티팩트는 교체형과 충전형으로 나뉜다.

교체형은 장비에 마석을 박아 넣고 마석의 에너지가 다하면 교체하는 방식이다.

충전형은 그와는 반대로 내장된 마력을 전부 사용하면 주변의 마력을 빨아들여 스스로 충전하는 방식이고.

어느 쪽이 더 비싸냐면 당연히 후자다.

매번 비싼 마석을 갈아주지 않아도 된다는 데에서 오늘 편리함과 효율이 어마어마하기 때문.

뭐, 그렇다고 교체형이 충전형에 비해 나쁘다는 건 아니다.

그만큼 가격이 싸서 가난한 초보 헌터들이 사용하기에 부담이 덜하니까.

아무튼.

뜻밖의 대어를 낚았네.

정확한 가치를 알아보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

단순히 그녀의 애간장을 태우기 위해 취한 행동이었는데 말이지.

초급 실드 마법이 내장된 충전형 팔찌면…, 한 400에서 500만 원 정도 하려나.

희희낙락하는 사이, 그녀가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다름 아닌 그녀의 명함이었다.

“거기에 적힌 제 번호, 저장해줄 수 있죠?”

맺어진 인연을 이대로 끊어지게 두고 싶지 않다는 신호.

나는 웃으며 그녀의 명함을 받았다.

“물론이죠.”

애초에 나도 끝낼 생각이 없었거든.

* * *

기나긴 서류 업무의 끝.

윤지안은 두 팔을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으으응…!”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보며 옅은 미소를 그렸다.

지난 며칠간 그녀를 힘들게 만든 서류.

그것은 김도진에 대한 것이었으니.

“이 정도면 만족하시겠지….”

그녀가 지금까지 열심히 작성한 것은 다름 아닌 보상안이었다.

큰일을 겪은, 그리고 해결한 이에 대한 보상안.

2학기 특례 입학식.

그곳에서 커다란 사건이 벌어졌다.

빌런의 습격.

사실 습격만 놓고 보면 유난 떨 일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유난을 떨어야 하는 일은 맞는데, 워낙 비일비재한 일이라 다들 그러려니 넘어가게 되었다고 해야 할지.

그러나 이번만큼은 조금 달랐다.

‘습격의 규모가 심상치 않았어.’

외부에만 무려 오십에 달하는 인원이 습격을 가했다.

심지어 입학식이 열리는 강당 내부에는 고위 마법사까지 있었고 말이다.

그뿐인가?

대체 언제부터 계획했는지, 강당 바닥 밑에 텔레포테이션 마법진까지 설치해 두었다.

‘아찔했어.’

만약 그 마법진이 무사히 발동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곳에 있는 모두가 험한 꼴을 피하지 못했으리라.

또한 한국 대학교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으로 기록되었을 터다.

아니, 고작 그 정도가 아니라 지금까지 수많은 고위 헌터를 배출해온 한국 대학교의 몰락으로 이어졌을지도.

이를 막아낸 것은 김도진이었다.

물론 임철웅 교수 등 다른 이들의 조력도 없지는 않았으나, 최초로 텔레포테이션 마법진을 발견해낸 이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그였다.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걸까.’

교묘하게 숨겨져 있어 교수들조차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는데 말이다.

궁금하긴 했으나, 찾지 못할 답이었다.

그가 직접 알려주지 않는 이상 캐내는 건 불가능할 테니.

‘더군다나 그 모습….’

그녀는 오랜만에 마주했던 김도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의 충격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김도진의 원래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알고 있기에 더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세상에 숱한 사건이 벌어졌고, 이에 대한 보상은 헌터 협회가 주관했다.

그러다 보니 정해진 매뉴얼이란 게 있어 보상 정도를 책정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그녀는 매뉴얼을 따르지 않았다.

오직 김도진에 한해서만.

안 그래도 뛰어난 그의 활약을 더욱 부각시켰다.

그가 텔레포테이션 마법진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 그리고 봉인 마법으로 닫힌 문을 열지 못했을 때 벌어졌을 최악의 상황을 몇 번이나 강조하여 적어 넣었다.

이유는 단 하나.

그의 보상을 최대치로 땡기기 위해!

‘빨리 보고 올리고 퇴근하자.’

그것 하나만을 위해 그녀는 요 며칠간 누구보다 일찍 출근해서 가장 늦게 퇴근했다.

드디어 일을 마쳤으니, 결재받고 오랜만에 일찍 퇴근해 늘어질 생각에 신이 난 그녀는 발걸음도 가볍게 총무부의 문을 두드렸다.

엄밀히 말해 이번 일은 감찰부 소속인 그녀가 아닌, 총무부에서 처리할 일이었다.

그런데 김도진이 껴있는 바람에 그녀가 하게 되었을 뿐.

그녀는 곧장 총무부장의 자리로 가 가볍게 인사를 건넨 뒤, 서류가 담긴 바인더를 건넸다.

“이번 사건에 대한 보상안입니다. 검토 후 결재 부탁드립니다.”

40대 중년의 사내, 총무부장 김성태는 보상이라는 단어에 일단 눈살부터 찌푸리고 봤다.

그러다 문득 서류를 건넨 사람이 자기 부서 직원이 아님을 깨달았다.

인상적인 얼굴이었기에 그의 기억에 남아 있다.

‘감찰부 윤지안이었나….’

감찰부 소속이 보상안 결재를 위해 찾아왔다라.

그는 금세 얼마 전에 있었던 사건 하나를 떠올렸다.

“아, 이거 그…, 특례 입학식 때 벌어진 습격에 대한 보상안인가?”

“예, 맞습니다.”

김성태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그려졌다.

마침 잘 됐다.

그녀에게 전할 말도 있었으니.

“흐음.”

그는 보상안을 꼼꼼히 훑어보았다.

매뉴얼에 입각한 아주 정상적인 범위 내에 있는 보상.

그러나 한 가지, 김도진에 대한 보상이 그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이…, 김도진 씨 보상 말인데, 좀 과하지 않나…?”

교묘하다.

아주 과했으면 냅다 까버렸을 텐데, 선을 넘지는 않았다.

“뒤에 참고 자료를 보시면 충분히 납득이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으음….”

확실히 일리가 있다.

고작 입학생이 해결했다곤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나열되어 있었으니.

잠시 고민하던 그는 흔쾌히 결재 서류에 서명했다.

그리고 살포시 웃고 있는 윤지안을 향해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남겼다.

“안 그래도 할 말이 있었는데, 아주 잘 왔네.”

“예? 어떤….”

“그, 지금 그쪽에서 케어하고 있는 김도진 씨 말인데.”

불길한 예감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부터 우리가 케어하기로 했으니까, 감찰부에선 손 떼.”

“예?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당황한 그녀가 무어라 말하려 하자, 김성태가 불쾌하다는 듯이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애초에 유망주 케어하는 건 총무부에서 담당하는 일이잖아.”

“그거야 그렇긴 합니다만….”

“원래 우리 일 우리가 하겠다는데, 뭐 문제라도 있나?”

문제가…, 있을 리 없다.

그의 말대로 유망주 케어는 원래 총무부에서 담당하는 일이었으니.

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다.

그들이 순리대로 일을 처리하기 위해 그를 데려가려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가져가려면 진즉에 가져갔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껏 관망만 하다가 이제야 데려가려는 속셈이야 뻔했다.

‘침을 발라두고 싶은 거겠지.’

이번 사건을 통해 김도진의 주가는 더욱 상승했다.

아니, 상승이 아니라 떡상했다.

현재 총무부에서 케어하고 있는 모든 유망주를 더해도 그 하나만 못할 정도로.

그러니 이제 내놓으라는 거다.

크게 자랄 거목인 걸 알았으니 거기에서 열릴 과실은 전부 자기들이 따먹겠다는 심보.

얄밉고, 교활하다.

그러나 명분이 없다.

원래 같았으면 찍소리도 못하고 내어줘야 했다.

그런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 더 질척거렸다.

“…상부의 지시입니까?”

부디 아니기를 바랐다.

그럼 조금 억지를 부려서라도 붙잡을 수 있을 테니.

“건방지네.”

김성태는 제가 느낀 불쾌한 감정을 그대로 눈에 담아 그녀에게 쏘아보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뭐, 이해는 해. 지금까지 지낸 정이 있을 테니 헤어지기 아쉬울 거야.”

그는 대인배인 양 허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쩌나. 이미 상부에서 허락한 일인데.”

“……!”

“내일쯤이면 정식으로 공문 내려갈 테니까, 김도진 씨에 관한 거 전부 내 책상에 올려놔.”

조롱 섞인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더 할 말 있나?”

“없…습니다.”

“그럼 나가봐.”

그녀는 힘겹게 고개를 숙인 뒤, 총무부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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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찾아온 주말.

이게 참 신기한 게, 월화수목금토일 전부 쉴 때는 주말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대학에 다니기 시작하니까 주말이 아주 각별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랜만에 늘어지게 쉬어볼까 하고 매트리스에 누워서 TV를 켰는데.

탕탕탕!

“도진 씨, 안에 계십니까?”

누군가 찾아왔다.

정중한 말투와 낯익은 목소리.

나는 곧장 일어나 닫힌 문을 열어주었다.

문 앞에 서 있는 이는 예상대로 윤지안이었다.

“지안 씨가 여긴 왜….”

오랜만에 그녀를 보니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그러나 동시에 궁금했다.

이 황금 같은 토요일 아침부터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잘 지내셨습니까?”

“저야 뭐…, 나름 잘 지냈는데, 지안 씨는요?”

“예, 저도 잘 지냈습니다.”

의구심이 들었다.

잘 지냈다는 사람 표정이 영 별로라서.

안색이 어두운 게 커다란 근심을 안고 있는 듯한데, 대체 뭘까.

나랑 관련된 건가?

“근데 토요일 아침부터 어쩐 일이에요? 지안 씨도 쉬는 날 아닌가.”

“맞습니다. 그런데 급한 사안이라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죄송….”

고개를 숙이려는 그녀의 이마를 손으로 막아섰다.

“어허, 고개 좀 숙이지 마요. 지안 씨도 쉬는 날 반납해가면서 온 거잖아요.”

그녀의 얼굴에 분홍빛으로 변했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줍음이 느껴지는 말투.

캬.

이래서 사람은 잘생기고…, 아니, 일단 사람처럼 생기고 봐야 하는 거다.

옛날의 뚱뚱한 모습으로 이런 말 해봤자 고마워하긴 했어도 저렇게 얼굴을 붉히진 않았을 거 아니냐고.

어라, 지금 반응이면 지지부진한 관계를 조금 더 진척시킬 수도 있다는 거 아닌가?

갑자기 의욕이 샘솟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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