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120)

아무튼.

칼라슈는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이곳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죽기 직전 마지막 힘을 짜내서 지금과 같은 형태로 만들었단다.

적어도 어쭙잖은 놈이 제 유산을 홀라당 털어먹지 못하게끔.

마침내 던전을 완성한 그는 이 던전의 이름을 짓고 숨을 거뒀다.

그 던전의 이름은….

“칼라슈의 시련.”

당황스럽게도 칼라슈가 우리에게 시련을 내리는 게 아니라, 이 던전 자체가 본인에게 시련이자, 실연이었기에 그리 지었던 것.

한마디로 자격 증명은 가짜 보스 룸을 파훼했을 때부터 끝났다는 거다.

“쓸데없이 긴장했네, 에이.”

석판에 담겨 있던 내용까지 모조리 정리를 끝마친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에 놓인 두 갈래의 길을 보았다.

고블린 칼라슈가 평생을 갈아 넣어 만든 방의 정식 명칭은 ‘착취의 방’.

내가 꿈꿨던 ‘섹스를 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착취의 방’은 말 그대로 착취에 목적을 둔 것.

방의 유일한 출구에는 길쭉한 관과 함께 게이지 바가 있다고 한다.

거기에 일정량 이상의 정액을 넣지 않으면 절대로 열리지 않는단다.

이 말을 보자마자 떠오르는 의문점 하나.

그렇다면 남자 혼자 자위해서 정액 밀어 넣으면 여자는 강제성이 없는 게 아닌가?

다행히도 우리 칼라슈 님은 그것까지 이미 다 계산을 마친 상태였다.

무슨 원리로 그게 가능한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남자 혼자서 빼낸 정액은 그대로 다시 배출되어 게이지 상승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단다.

말인즉.

“최소 대딸은 보장되어 있다는 건데….”

아쉬운 마음과 동시에 어쩌면 이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신유정과 윤지안.

양쪽 모두 섹스를 논하기에는 거리가 먼 사이.

들이박을 수 있다면 당장은 기분 좋을지 몰라도 그 뒤는 뻔하다.

서로 만나면 어색해 죽으려다가 결국 분위기마저 죽어버리고 소원한 사이가 되겠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한다 치고, 남은 건….

“어디로 가느냐가 문제네.”

석판에 쓰인 글에 따르면 왼쪽은 신유정, 오른쪽은 윤지안이 있는 방이다.

양쪽의 방 모두 들어갈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석판에 못박혀 있었다.

뭐라 그랬더라?

“나, 고블린 칼라슈는 일족의 몇 안 되는 순애파이기에, 하렘은 용납할 수 없다… 였나.”

미친놈.

좋아하고 싶다가도 꺼려지게 만드는 짓을 골라서 하고 있다.

어쨌든, 결국 하나밖에 못 간단 얘기다.

“아, 이거 고민되네.”

PTSD를 유발하는 앙칼지고 사나운 외모지만, 묘한 색기가 흐르는 신유정이냐.

아니면 이지적이고 단아한 외모를 지닌 비서 누나 스타일의 윤지안이냐.

솔직히 말해 어느 쪽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양쪽 모두 내 욕망을 자극하는 스타일이기에.

신유정은 앙칼진 성격을 길들여 말 잘 듣는 고양이로 만들고 싶고, 윤지안은 비서처럼 옆에 두고 끊임없이 야한 장난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고 싶은 느낌?

“지금으로선….”

그러나 선택은 조금 더 냉정하게 해야 한다.

본능보다 이성이 앞서야만 한다는 뜻.

잠깐의 고민 끝에 나는 왼쪽으로 발끝을 돌렸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니 답은 금세 나왔다.

“사실상 얘밖에 없지.”

신유정은 이미 날 구슬리기로 마음먹은 녀석이다.

심지어 조금 전에는 이 요망한 것이 내 입술에 뽀뽀까지 하고 도망치지 않았나.

더군다나 이 던전을 무사히 공략하면 더 큰 보상을 준다고 했잖아?

그거 미리 당겨 받는다고 생각하면 딱 맞아떨어지지.

그에 반해 윤지안과 나는 사무적인 관계일 뿐, 그 무엇도 얽매여 있지 않은 상황.

대딸만으로도 충분히 박살이 날 수 있는 얕은 관계에 불과했다.

그녀를 도모하기 위해선 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마침내 문 앞에 다다랐다.

“아, 이게 뭐라고 또 긴장이 되냐.”

어릴 적에 참 많이도 상상했다.

길거리를 지나가다 우연찮게 마주한 예쁜 누나, TV에 나오는 예쁜 연예인들과 함께 이 방에 들어가는 상상을.

마침내 그 꿈이 이루어진다 생각하니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후우, 진정하자.”

아직 내 꿈이 다 이루어진 건 아니다.

여기는 말 그대로 ‘착취의 방’.

‘섹스를 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과는 거리가 조금 있다.

이곳은 그저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한 곳이다.

내가 원하는 방을 직접 만들어낼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늠하기 위한 체험의 장 정도.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문고리를 손에 쥐고 천천히 돌렸다.

너무나도 손쉽게 돌아가는 문고리.

천천히 문을 열자, 아늑한 느낌을 주는 방과 적절히 배치된 가구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마침내 보인다.

이곳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내게 어쩔 수 없이 대딸을 해줘야 하는.

“김도진 씨?”

윤지안이.

“…….”

누군가는 말했다.

사람을 속이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무수한 진실 속에 교묘한 거짓 하나를 숨겨두는 거라고.

“던전을 공략하신 겁니까…?”

내게 조심스레 물어오는 윤지안을 보며 나는 실감했다.

칼라슈, 이 새끼가 나를 속였다.

* * *

“흐흐흥.”

푹신푹신한 침대에 드러누운 신유정은 조금 전부터 연신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그녀는 과감한 행동으로 김도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로잡은 건 아닌데,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새끼, 존나 설렜겠지?”

등을 돌리기 전 김도진이 짓고 있던 표정이 그녀를 더없이 기쁘게 했다.

자신의 키스에 당황하여 넋을 놓은 표정.

누가 봐도 자신에게 푹 빠진 모습이었다.

“생각보다 쉽겠는데.”

그녀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그려졌다.

김도진은 그녀의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홉고블린의 몸을 터뜨리다 못해 자신이 있는 곳까지 뜨거운 열기가 몰아치는 것을 눈앞에서 본 순간, 그녀는 생각했다.

자신의 찬란한 미래를 위해 김도진은 반드시 잡아둬야만 하는 인재 중의 인재라고.

그 정도 마법이면 막말로 자신과 김도진, 단둘이서 던전을 공략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흐흥, 그것도 좋겠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세간의 많은 관심을 받게 되겠지.

누군가는 두 사람을 보며 과거 환상의 커플이라 불렸던 손시우와 한주희를 떠올릴지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몸이 달아오른 신유정은 온몸을 배배 꼬며 침대 위에 놓인 베개를 끌어안고 마구 얼굴을 비벼댔다.

“아유, 이 복덩이!”

누가 알았겠나.

윗집 사는 방구석 폐인이 갑자기 각성해서 마법사가 되리라고.

베개를 끌어안고 한참을 들썩이던 신유정은 이내 뒤를 떠올렸다.

“키스보다 좋은 걸 해준다고 했는데…, 뭘 해줘야 되지.”

넋을 잃고 자신을 쳐다보는 김도진의 표정이 제법 마음에 들어 공수표를 남발하고 말았다.

어쨌든 무언가를 해주긴 해줘야 하는데, 대체 무엇을 해줘야 할까.

그녀와 친하게 지내던 여자애들은 빠르게 성경험을 쌓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그때는 한국 대학교에 입학하고 싶다는 바램뿐, 이성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그렇다고 성에 대해 아예 무지한 것은 아니다.

누구랑 섹스했다느니, 누구 자지를 빨아줬다느니 떠들어대는 발랑까진 친구들의 이야기를 숱하게 들어왔기에.

뭘 하면 좋아한다더라, 이건 별로 안 좋다더라 하는 것들도 다 전해 들었다.

“섹스…는 아직 이르고.”

섹스는 그야말로 최후의 일격이다.

김도진이 자신에게로 완전히 넘어왔다는 확신이 들 때 날릴 결정타.

“펠라? 이것도 좀….”

이건 본능적인 혐오감이 일었다.

남자의 자지를 입에 넣고 빨다니, 그런 걸 하는 여자들의 비위는 얼마나 강한 걸까.

하나둘씩 후보군을 지워가다 보니 남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래, 손으로 해주는 것 정도는….”

핸드잡 정도면 될 듯했다.

키스보다 더 큰 보상이고, 자신에게도 큰 부담이 없는 행위이기에.

“어떻게 하는 거랬더라?”

몇 번인가 여자애들이 이런 식으로 만지면 남자애들이 좋아 죽는다고 막 허공에다 대고 흔들었었는데.

“이, 이렇게였나?”

어설픈 손놀림으로 허공에다 대고 위아래로 흔들어대는 신유정.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유심히 봐두는 건데 하고 후회가 살짝 밀려왔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에이, 잘하고 못하고가 무슨 상관이야.”

잠깐 깜빡하고 있었다.

김도진은 여자의 손조차 잡아본 적 없을 방구석 폐인이라는 것을.

지금이야 나름대로 봐줄 만한 상태지만, 예전에는 정말 돼지 그 자체인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여자 경험이 있을 리가 없잖은가.

“대충 흔들어줘도 좋아 죽겠지, 뭐.”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해주는 것 아닌가.

그녀는 이성에 관심이 없었을 뿐, 제 얼굴이 사내를 유혹함에 있어 매력적인 무기로 작용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중, 고등학교 통틀어 받은 고백만 수십 번에, 온갖 기념일마다 책상 서랍이며 사물함에 초콜릿과 빼빼로가 가득 차 있었으니까.

자신이 매력적이지 않았다면 남자애들이 구태여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았겠지.

“그나저나, 이 새끼는 언제 오려고 이렇게 늦는 거야?”

마침 딱 좋은 보상까지 생각해뒀는데 너무 늦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방 안에 놓인 물건 중 하나가 별안간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뭐, 뭐야.”

곧장 몸을 일으킨 신유정은 방패를 들어 올렸다.

“저건….”

빛을 내뿜고 있는 물건은 장식장 위에 놓여 있던 투명한 수정구였다.

그녀는 방패를 앞으로 내민 채 천천히 수정구를 향해 다가갔다.

은은하게 새어 나오는 빛이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음을 확인한 뒤, 방패를 다시 등에 메고 수정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팟!

투명한 수정구 안에서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그것은 어떤 영상이었다.

아주 자극적이고, 외설적인 살색으로 가득 찬 영상.

뻣뻣하게 솟아오른 남근, 그리고 이를 향해 천천히 입을 가져가는 여자.

이윽고 열심히 목을 앞뒤로 움직이며 자지를 빨아대는 여자의 얼굴이 언뜻 비쳤다.

이를 확인한 신유정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윤지안…?”

자지 빠는 데에 열중하고 있는 여자는 다름 아닌 윤지안, 바로 그녀였다.

자꾸만 김도진을 챙겨주는 척하며 꼬리를 흔들어대던 불여우 같은 년.

그런 그녀가 누군가의 자지를 열심히 빨아대고 있었다.

그 순간.

신유정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만약 수정구 속 영상이 윤지안이 갇힌 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거라면, 수정구 속 사내는….

그녀의 머릿속에 생겨난 의문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려는 듯, 때마침 수정구의 시점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배, 가슴, 목.

서서히 타고 올라가 마침내 보인 것은 쾌감에 흐물흐물 녹아내린 한 사내의 얼굴이었다.

그것도 아주 익숙한 얼굴.

“기, 김도진….”

바로 김도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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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잊고 있었다.

칼라슈는 순애파 고블린이지만, 자기 순애를 이루지 못한 불쌍한 모태솔로라는 걸.

죽기 직전에 심술이 났겠지.

자기가 평생을 공들여 만든 아티팩트가 타인의 순애를 완성하기 위한 용도로 쓰인다는 게.

그래서 이런 심술을 부린 거다.

뭐, 이해는 간다.

나 같아도 그럴 것 같기는 해.

내가 쓰려고 만든 건데 정작 나는 이용도 못 해보고 죽는데, 다른 사람이 맛있게 이용한다?

생각만 해도 열받는다.

그래, 인정.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런데 어쩌나.

“그러니까…, 이 방을 나가기 위한 조건이 저, 정액이에요.”

나는 이쪽도 상관없는데.

자초지종을 들은 윤지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어이가 없겠지.

이 던전을 탈출하기 위한 조건이 정액, 그것도 여자가 직접 빼낸 정액이라는데 어떤 여자가 이를 쉽게 받아들이겠어.

“당황스럽고, 믿지 못하실 건 알지만….”

“아니오, 믿습니다.”

어라, 이렇게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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