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깊지는 않다.
대략 마흔 계단쯤 내려갔나.
마침내 발이 끝에 닿았다.
눈앞에 보이는 건 캄캄한 어둠.
곧장 마력을 끌어모은다.
「라이트(Light).」
짙게 내려앉은 어둠 속으로 빛이 스며들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성인 두어 명 정도가 나란히 서서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기다란 통로.
벽면에는 석판에서 보았던 언노운 텍스트와 더불어 마력 줄기가 그어져 있다.
“뭐야, 이건.”
갑자기 기운 빠지네.
하다못해 고블린들이 득실대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고작 나타난 게 통로뿐이라니.
혹시 함정이 있나 살펴도 봤지만, 눈에 닿는 곳까지는 아무런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가볼까.”
분명 석판의 마지막 글귀에는 이 길의 끝에 닿으면 새로운 길이 열린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여기는 그냥 지나가는 통로에 불과할 수도 있다.
광원을 머리 위에 고정시켜 둔 채 길을 따라 걸었다.
마침내 마주한 첫 번째 글귀.
곧장 거기에 담긴 마력을 빨아들였다.
“나는 마계 출신 고블린, 칼라슈다…?”
마계.
마왕이나 마족들이 사는, 판타지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세상을 말하는 건가.
몇 걸음 앞에 놓인 글귀를 연달아 읽어내렸다.
“태어난 지 1년,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 번째, 네 번째.
“비정상적인 지능을 타고 태어난 나는 모두에게 따돌림을 당했고…, 그런 나를 구해준 것은 근처를 지나가던 서큐버스였다…?”
서큐버스.
만나본 적은 없지만, 들어본 적은 있다.
나긋한 말투와 성난 몸매로 남자를 유혹해 정기를 쪽쪽 빨아먹는다는, 남자에게 정말 위험하지만, 웃기게도 남성 헌터들의 이색 랭킹 중 꼭 토벌하고 싶은 몬스터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사상 최강의 악마.
왜 사상 최강의 악마냐면, 남자들 중에서 서큐버스를 잡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어서다.
사내로 이루어진 파티는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정기가 쪽쪽 빨려서 미라가 되기 일보직전의 상태로 나온다던가.
그래서 서큐버스가 나오는 던전은 여성으로 이루어진 파티를 꾸려 공략한다고 하더라.
“스읍, 서큐버스라….”
남들이 한창 서큐버스에 대해 떠들어댈 때, 나는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왜냐고?
그땐 내 옆에 인간 서큐버스가 한 명 있었거든.
젊을 때의 한주희는 제 붉은 머리칼만큼이나 정열적인 여자였다.
중이 고기 맛을 알면 절에 빈대가 안 남는다고 했던가?
서로가 처음이었던 우리는 그때부터 섹스가 주는 쾌락에 빠져서 숱하게 몸을 섞었다.
특히 헌터들은 던전 공략을 하다 보면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질 때가 있는데, 이게 가시지 않은 상태로 밖으로 나오면 그때마다 곧장 호텔로 가서 아침이 올 때까지 박고 싸기를 반복했었다.
“그때가 좋았지.”
젊었고, 뜨거웠던 그때가 참 좋았는데.
“아니, 이게 아니지.”
서큐버스 떡밥 한 마리에 대체 어디까지 새는 거야.
“정신 차리자, 정신.”
지금 떠올려봤자 아무런 의미 없는 기억들이다.
지금의 나도 그때 못지않게 행복하지 않나.
아줌마도 있고, 앞으로 공략할 신유정도 있고.
심지어 젊음까지 있잖아?
“앞으로 잘하면 돼, 앞으로.”
과거의 기억은 반면교사를 위한 교훈쯤으로 남겨두면 그뿐이다.
나는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다.
그 뒤는 우리 짭시우 님께서 알아서 다 해주시겠지.
믿습니다, 짭시우!
찬란한 인생을 남겨주고 떠난 그분께 감사를 전하며 멈춰 있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뒤에 남아 있는 글귀들도 대부분 비슷했다.
칼라슈라는 고블린이 태어난 이래로 걸어온 행적들이 차곡차곡 담겨 있다.
서큐버스에게 겨우 구원받은 칼라슈는 그녀의 제자로 들어가게 되고, 그녀로부터 연금술과 마법을 배우게 되었다는 내용이 구구절절 적혀 있다.
“함께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서큐버스님께 사랑을 느끼기 시작했다…, 잉?”
갑자기 분위기가 사랑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머릿속에 가득 차오르는 의문을 차곡차곡 쌓으며 일단은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묵묵히 글귀들을 읽어나갔다.
“서큐버스님은 남자의 정기를 양식으로 삼는 마족. 나는 내 정기를 바치겠노라 고백했지만…, 거절당했다.”
아이구, 저런.
“서큐버스님은 내가 이성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블린이라는 종족이 내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그랬구나.
“하루는 술을 진탕 마시고 서큐버스님께 애원하듯 매달렸다. 제발 내 정기를 가져가 달라고…, 그러나 또 거절당했다. 그것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못을 박았다.”
이거 은근히 몰입되네.
자고로 불구경, 싸움 구경, 사랑 구경이 최고의 구경거리 아닌가.
물론 각 단어 앞에 ‘남의’라는 단어가 꼭 붙어야 한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남의 건 즐거운데 내가 당하면 그것만큼 기분이 더러운 게 또 없거든.
그래서 다음 내용은 뭐지?
“수 개월을 고민하고 답을 내렸다. 나는 서큐버스님을 절대 포기할 수 없노라고….”
이 새끼 이거 근성 있네.
다음부터 본격적인 구애의 시작인가?
몹시 궁금하다.
다음 글귀는 어디에….
“어라, 뭐야.”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문이 나타났다.
주변을 급하게 둘러보니 내가 어느덧 끝에 도달했음을 깨달았다.
“그럼 이게 마지막인가?”
대문에 적혀 있는 마지막 글귀.
무언가 찝찝하다.
앞으로 한참 남은 것 같은데 왜 이게 마지막이지?
석연찮은 기분을 느끼며 마지막 글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윽고 들어오기 시작하는 마지막 내용.
“나는 생각했다. 서큐버스님이 자의로 내 정기를 빼앗을 수 없다면…, 빼앗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면 되는 것 아닐까?”
“…….”
예상치 못한 결론이 나왔다.
이전 글귀에서 서큐버스를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하길래 몇 번이고 부딪혀서 마침내 사랑을 쟁취하는 내용을 기대했건만.
“갑자기 로맨스 대신 호러가 튀어나오네.”
꺼림칙한 기분에 문에 가져간 손을 살포시 뗐다.
그러자 철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한다.
석판에 적힌 대로다.
문이 열리고 드러난 건 또 다른 길이었다.
지나온 길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길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는 점과 함께 갈래길 사이에 또 다른 텍스트가 담긴 석판이 세워져 있다는 것 정도.
“대체 뭔지 모르겠네….”
마지막 글귀를 본 이후로 뭔가 석연찮다.
칼라슈를 자식으로 생각하는 서큐버스가 정기를 빼앗을 수 없다고 말했고, 놈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빼앗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겠다고 다짐했지.
“…….”
갑자기 주변을 둘러싼 공기가 끈적하게 느껴진다.
혹시…,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에이, 설마.”
입밖으로 꺼내기에도 민망한 생각들을 지워내며 갈래길에 놓인 석판 앞에 섰다.
이게 진짜 마지막 텍스트다.
과연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가즈아!”
찝찝한 기분을 털어내고 용감하게 손을 뻗는다.
석판에 적힌 제법 많은 양의 텍스트가 내 머릿속에 흘러들어온다.
“…….”
이후의 내용을 모두 듣게 된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고블린 칼라슈.
토막내어 읽어내려간 그의 일대기가 머릿속에서 하나로 뭉쳐진다.
한평생 사랑해온 서큐버스에게 거절당한 이후 그가 걸어온 발자취가, 뇌리에 각인된다.
그는 훌륭한 연금술사였고, 대마법사였다.
어딜 가도 높은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선택한 길은 낭만.
안정적이고 안락한 길을 걷기보다, 사랑과 낭만이 넘치는 가시밭길을 택했다!
“으허허헝!”
아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고 말았다.
“있었어….”
어릴 때.
부모님을 여의고 고아원에 머물렀던 적이 있다.
대략 열여섯 즈음이었나.
그때 나와 또래 친구들은 만화책 보는 것을 한창 즐겼다.
꿈과 희망이 넘치는 소년 만화, 호쾌한 액션 만화, 웃긴 코믹 만화….
그중 우리를 가장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19금 만화였다.
청소년의 성적 호기심을 자극하다 못해 터뜨리게 한 성진국 일본의 만화.
흔히들 떡인지라고 하는, 온갖 꼴릿한 상황이란 상황은 다 뭉뚱그려 놓은 일본의 자랑거리.
보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한없이 그곳에 빠져들었었지.
이따금 방을 함께 사용하는 친구들끼리 이불 위에 누워 얘기하곤 했다.
‘네가 본 것 중에 어떤 상황이 가장 꼴렸어?’라고.
그럴 때마다 나는 언제나 이 상황을 1순위로 꼽았다.
생판 모르는 남녀도 일단 한번 발을 들이면 그냥 나올 수 없게 만드는 곳.
상상 속에서 TV에 나오는 예쁜 연예인들을 수도 없이 그곳에 집어넣곤 했지.
그러나 절대 현실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곳이기에,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잊고 있었는데.
“있었다고….”
이 세상에 절대라는 말은 없다는 듯이, 내 앞에 나타났다.
어릴 적 내 꿈.
한 번이라도 들어가 봤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던 그곳을.
“찾았다아아아아!!”
나는 마침내 찾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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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후우….”
자아.
일단 진정하자, 진정.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고 말았다.
어릴 적 찾아 헤매던 꿈을 마침내 현실에서 발견한 기쁨이 너무 큰 탓이다.
“어우.”
아무것도 안 했는데 숨이 턱턱 막힌다.
나는 석판에 등을 기댄 채로 주저앉았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서큐버스에게 고백을 거절당한 칼라슈는 흑화했다.
끈질기게 고백하는 게 아니라, 그녀와 맺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기로 결심한 거지.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 중에는 일정 조건을 만족해야 발동하는 것들이 간혹 존재한다.
칼라슈는 그러한 아티팩트들을 보며 생각했다.
일정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면 나갈 수 없는 방을 만들어낸다면?
“크으, 역시 대마법사의 머리는 남달라.”
그래, 거기서부터 칼라슈의 연구는 시작되었다.
주요 골자는 잡혔다.
그는 일정량 이상 정기를 빼내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서큐버스와 함께 그곳에 들어가 그녀에게 마음껏 착취당하리라 마음먹은 것이다.
하지만 연구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작은 목걸이나 반지 같은 아티팩트가 아니라 커다란 공간 전체를 아티팩트로 만드는 것은 지금껏 그 누구도 시도해보지 못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아니, 우리 칼라슈 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묵묵히 걸어 마침내 전인미답의 경지를 개척하는 데에 성공하신 것이다!
그는 크게 기뻐하며 서큐버스를 데리러 가려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오랜 세월 실험에만 몰두한 그는 마침내 마주한 거울로부터 보고야 말았다.
자신의 살날이 고작 며칠 남지 않았다는 것을.
“크흡…!”
아, 또 눈물 날 것 같아.
칼라슈 님은 고블린이다.
고블린의 기대 수명은 고작해야 30년.
대마법사의 경지에 도달하여 종의 한계를 뛰어넘기는 했지만…, 이마저도 한계에 다다랐다.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아침마다 발딱 솟아올라야 할 자신의 자지가 서지 않았음을…!
모든 게 부질없어진 그는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딱 한 번, 서큐버스의 얼굴을 보기 위해 힘겨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는 보고야 말았다.
고블린 칼라슈 인생 최악의 비극을.
먼발치에서 보게 된 서큐버스는 작은 아이를 안고 있었다.
그것도 자기를 꼭 닮은 아이를 말이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우리 칼라슈 님께서 공간형 아티팩트를 만드느라 평생을 바치는 동안, 서큐버스는 누군가와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은 것이다!
“이, 이 나쁜년…!”
사실 나쁜년은 아니긴 해.
솔직히 이거 만들자고 수십 년이 넘는 세월을 갈아 넣은 칼라슈가 등신…, 아, 이게 아니지.
내 꿈을 현실로 만들어준 은인이라 억지로 공감하고 싶은데 이게 쉽지가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