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진 씨는 그 부족한 실전을 미리 채우고 싶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내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긴 윤지안.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기는 합니다만….”
생각을 마친 그녀의 표정은 나쁘지 않아 보인다.
아니, 내 생각에 나름대로 동의하는 듯한 분위기마저 풍긴다.
“제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듯합니다. 며칠간 말미를 주시겠습니까?”
“그러세요.”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뭐, 이미 예상한 바였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우리를 감시하고 요구사항을 전달하는 연락책.
임시 면허를 발부하는 수준의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할 만한 권한은 없을 테지.
“입학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리 길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알겠습니다.”
적당히 이야기를 끝마칠 즈음, 주문해두었던 초밥 세트가 나왔다.
잘 먹으라는 말과 함께 초밥을 하나 집어 입에 넣었는데 맛이 상당히 괜찮다.
다른 건 모르겠고, 밥 위에 올라간 생선이 아주 싱싱하다는 건 알겠어.
맛있는 걸 먹고 있으려니까 문득 아줌마 생각이 났다.
운동하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때 듣기로 초밥을 좋아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의식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아줌마와 보냈던 한 달 전의 뜨거운 밤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 번 끝까지 도달했으니 아줌마와 언제든 섹스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들떠 있었는데.
“에휴.”
다 내 착각이었지.
섹스는커녕 만나는 것조차 쉽지 않게 되어버렸다.
사이가 어색해졌을 때도 꾸준히 이어가던 새벽 운동마저 소홀해진 이후, 지난 한 달 동안 아줌마와 얼굴을 마주한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
분명 화가 난 건 아니다.
내게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쪽지도 그렇고, 이따금 지나칠 때의 표정을 봐도 그건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추측하건대, 부끄러워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섹스할 때 한 마리의 암캐와도 같았던 제 모습을 받아들이는 걸 힘들어하는 걸지도 모르지.
지금까지는 아줌마에게도 시간이 필요하겠다 싶어 그대로 두었다.
하지만 이제는 슬슬 말을 걸어봐야 하지 않을까.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아줌마가 이대로 나와의 거리감이 익숙해지기 전에 다시 한번 좁혀야 할 때다.
이 초밥이라면 대화의 물꼬를 트는 데에 훌륭한 수단이 되어줄 것 같은데.
짧지 않은 생각들을 정리하며 고개를 들어 올리자, 윤지안이 불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아, 그…, 표정이 어두우시길래 혹시 초밥이 입에 안 맞으시는지….”
“에이, 그런 건 아니고요.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랬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얘기는 거기서 끝이 났다.
윤지안은 딱 봐도 쓸데없는 소통을 질색하는 타입으로 보였고,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먼저 달라붙어서 조잘대는 타입은 아니었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초밥을 두 세트 포장했다.
그녀는 이것까지 자신이 계산하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아줌마한테 줄 선물인데, 남의 돈으로 계산한 걸 가져다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예, 상부에 잘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볍게 목례를 나눈 뒤, 그녀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아무리 걸어도 그다지 숨이 차지 않은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올라 아줌마네 집 문 앞에 다다랐다.
곧장 초인종을 향해 뻗어가는 손을 한 번 붙잡고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에야 다시 손을 뻗었다.
띵-동
“네에, 나가요!”
오랜만에 듣는 아줌마의 목소리.
예민해진 귓가에 발걸음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온다.
이윽고 열리는 문.
“누구…, 아, 도진이구나….”
묘한 표정을 짓는 아줌마.
저걸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까.
사람의 감정을 읽는 데에 제법 능숙한 나조차도 읽어내기 힘든 표정을 하고 있다.
“어, 어쩐… 일이니?”
한 가지 확실한 건 아줌마는 지금 나를 무척이나 어려워하고 있다는 거다.
아니, 어려워하는 걸 넘어서 날 경계하고 있는 듯한 눈빛이다.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저런 모습을 보니까 힘이 쭉 빠진다.
내가 너무 성급하게 다가갔었나.
고개를 살짝 숙이며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아줌마에게 내밀었다.
“그냥 이거 드리려고 왔어요.”
“어머, 초밥…?”
“예전에 운동할 때 아줌마가 초밥 좋아하신다고 하셨던 게 생각나서요.”
“그걸 기억하고 있었니…?”
“그러게요.”
차라리 기억하지 말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
아,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뭐랄까…, 고백도 하기 전에 매몰차게 차여버린 듯한 느낌?
온몸의 기운이란 기운은 쪽쪽 빨려 나가는 것만 같다.
머릿속에 몽글몽글 떠올랐던 생각들이 전부 사라지고, 그냥 빨리 집에 가서 눕고 싶어졌다.
“넉넉하게 사 왔으니까 유정이랑 드세요. 그럼 전 올라가 볼게요….”
“도, 도진아…?”
등을 돌려 계단을 오를 때 당황 섞인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몸뚱어리는 젊어도 정신이 늙어서 그런가, 이런 거 하나에 괜히 섭섭하네.
* * *
“야, 집중 안 하냐?”
“미안….”
오늘도 신유정의 지휘, 감독 아래 열심히 근육을 쥐어 짜낸다.
오늘따라 유독 집중이 흐트러지는 건 조금 전 윤지안과 임시 면허에 대해 나눈 대화 때문.
결과부터 말하면 임시 면허 발급은 해주기로 했다.
근데 조건이 붙었다.
첫 번째는 던전에 들어갈 때 헌터 협회 직원 중 한 사람이 보호 및 감시역으로 붙을 것.
이거야 뭐 윤지안이랑 가면 되는 거니까 딱히 불편할 일은 없을 것 같고.
두 번째는 내가 마법사 직업군인 것을 고려하여 앞에서 상대의 공격을 막아줄 전위를 최소 한 명 이상 영입하여 파티를 이룰 것.
이 부분도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는 간다.
마법사는 다재다능하지만, 혼자서 모든 걸 할 수 있는 직업군은 아니니까.
그들이 진가를 발휘하는 건 앞에서 든든하게 적의 공격을 막아줄 전위가 존재할 때다.
헌터들 사이에는 그런 말이 있다.
마법 시전 시간과 파괴력은 정비례한다.
전위가 앞을 막아서는 시간 동안 준비된 마법 한 방이 극적인 효과를 거두기에 생긴 말.
헌터 협회에서는 원한다면 적절한 전위를 소개해준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전위를 구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기에.
내 앞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신유정, 바로 그녀가.
두 시간의 운동을 끝마치고 샤워 후 돌아가는 길, 나는 그녀를 향해 넌지시 말을 꺼냈다.
“유정아.”
“왜.”
“혹시 나랑 던전에 들어가 보지 않을래?”
“뭐? 던전?”
내 말에 신유정의 한쪽 눈꼬리가 치켜올라간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하는 듯한 표정.
나는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임시 면허에 대한 얘기부터 전위를 구해야 한다는 말까지.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들은 신유정은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너…, 진짜 헌터 협회가 아끼나 보다?”
내가 생각해도 얘네들이 날 참 아끼는 것 같기는 해.
“그런가…?”
근데 굳이 내 입으로 자랑할 필욘 없겠지.
“흠흠, 그러니까 결국 넌 나랑 같이 가고 싶다는 거 아냐. 협회에서 전위를 추천해준다고 했는데도 거절했고.”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이 전해진다.
“응, 가능하면 아는 사람이랑 가는 게 편하니까.”
한국 대학교에 입학했을 정도면 신유정의 재능은 어느 정도 보장이 된 셈.
더군다나 내 운동을 가르치며 틈틈이 본인 운동을 이어 나가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녀의 신체 능력치가 얼마나 뛰어난지 말이다.
거기다 그녀는 여자 아닌가.
시커먼 남자 놈이랑 둘이서 파티를 짜라고? 이제 그런 건 사양하고 싶다.
“흐으음…, 그렇단 말이지.”
고민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은근슬쩍 올라간 입꼬리가 보인다.
아마 마음속으론 이미 답을 정해둔 것 같은데 괜히 저러고 있다.
“뭐…, 스케줄만 맞는다면 같이 못 가줄 것도 없지.”
완곡한 승낙의 표현.
“내가 협회에 얘기해서 너 괜찮은 시간으로 잡을게.”
“그러던가.”
신유정은 내가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돌려 은근슬쩍 웃고 있고, 나는 대놓고 환하게 웃고 있다.
넌 모를 거다.
내가 어떤 생각으로 너와 함께 던전에 들어가려는지.
아, 그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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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정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들어왔다.
주방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던 서정희가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왔니?”
“어, 흐흐흥.”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엄청 신나 보이네.”
서정희의 물음에 신유정은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그 자식이 설마 협회에서 눈여겨볼 정도로 대단할 줄이야.’
단순히 마법사라서 특례 입학을 위해 학원도 끊어준 줄 알았더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아예 협회에서는 김도진을 미래의 유망주 중 하나로 보고 있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의 비위를 맞추듯 임시 면허를 미리 발급해줄 리가 없다.
“엄마, 돼지…, 아니아니, 김도진 말이야.”
“어, 어어…, 도진이가 왜…?”
김도진의 이름이 들리자 눈에 띄게 당황하는 서정희.
하지만 들뜬 신유정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조금 전에 있었던 일들을 신나게 떠들어댔다.
그가 생각보다 훨씬 더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고, 이로 인해 헌터 협회에서도 그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까지.
그리고 그런 그가 자신을 콕 집어서 던전에 가고 싶다고 말한 것 또한.
“그래서 조만간 그 자식이랑 던전에 들어가게 될 것 같아.”
그중에서 그녀를 가장 기쁘게 한 것은 김도진의 태도였다.
협회에서 어련히 훌륭한 전위를 구해준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자신을 택했다.
‘공들인 게 효과가 있네.’
그녀의 속에서 김도진에 대한 인식이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도진이가 그렇게 대단했구나….”
서정희가 감탄하듯 말하자, 신유정이 장난스럽게 말을 뱉었다.
“걔한테 미리 침이라도 좀 발라둘까 봐.”
“어…?”
이를 들은 서정희의 눈빛이 일순 흔들렸다.
“아니, 협회가 그리 호의적이라는 건 걔가 엄청 뛰어나다는 거거든?”
“…그래서?”
“그러니까 미리 침을 발라두는 거지. 왜, S급 헌터 한주희랑 손시우도 어릴 때부터 같이 던전에 들락날락하다가 사랑에 빠져서 결혼까지 갔다잖아.”
신유정은 살면서 남자에 흥미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그저 높은 등급의 헌터가 되기만을 바랐다.
그들의 삶이 부러웠다.
어딜 가나 주목받고, 존경받는 그들의 찬란한 삶이.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추악한 몬스터와 얼굴을 맞대고 싸우는 것도 감내할 수 있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남자에 대해 깊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새끼…,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지도?’
살이 빠지면서 생긴 것도 점점 볼만하게 변하고 있고, 능력은 헌터 협회가 반할 정도.
제 말이라면 껌뻑 죽고, 얼마든지 쥐고 흔들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하기까지 하다.
만약 녀석이 협회가 기대한 만큼 성장을 이룩한다면?
‘진짜 괜찮겠는데…?’
계속 생각하다 보니 정말 나쁘지 않아 보였다.
지금부터 같이 던전도 가고, 수업도 들으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제 입맛에 맞게 길들인다면?
말 잘 듣는 강아지로 만들어 결혼까지 골인하면 자신을 빛내줄 트로피 중 하나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스읍…, 좋은데.”
구미가 제대로 당겼다.
‘진짜 한 번 해봐?’
어차피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지금처럼 적당히 잘해주면서 거리감 좁히고, 함께 던전도 가고, 수업도 들으면서 같이 있는 시간을 늘려가면 그뿐이다.
그러다 김도진이 정말로 뛰어난 마법사가 되면 홀라당 먹어버리면 그만이고, 아니면 적당히 파티의 딜러로만 사용하면 되고.
어느 쪽이든 손해 볼 건 없는 상황.
‘좋아, 하자.’
생각을 정리한 신유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서정희에게 말했다.
“엄마, 앞으로 걔 좀 더 잘 챙겨줘.”
“…왜? 언제는 제발 그만 좀 챙기라더니.”
옛날에는 제 엄마가 왜 그렇게까지 김도진을 챙겨주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부터는 아니다.
먼 훗날 그녀에게는 사위가, 자신에게는 남편이 될 녀석인데 반찬 정도 넉넉하게 챙겨주는 게 무에 대수일까.
“걔 나중에 엄마 사위가 될지도 모르니까 팍팍 챙겨줘, 팍팍. 알았지?”
“…….”
신유정은 어차피 그녀가 어련히 알아서 잘 챙겨주리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