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도록 마주치지 않아야 할 것 같다.
“사장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 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 때, 또 누군가가 다가왔다.
40대 중년의 여인이 손에 걸레를 쥐고 있다.
‘가사도우미구나.’
마침 잘 됐다.
“흠흠, 그…, 안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TV에서 보았던 손시우의 말투를 최대한 따라 해본다.
“사모님이라면 2층 서재에….”
“음. 그럼 일 보세요.”
“아, 네.”
그렇게 가사도우미와 헤어진 뒤, 아래로 향하는 계단 앞에 선 손시우.
‘뭔가 이상해.’
머리가 텅 빈 듯한 느낌이다.
원래 깨어나면 분명 기억의 범람이 일어날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었는데.
기억의 범람은커녕 텅 빈 듯한 이 감각은 대체 뭘까.
‘이러면 안 되는데.’
기억이 없다면 곤란해진다.
S급 헌터가 갑자기 기억상실증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으으, 젠장.”
머릿속을 무언가가 꽉 막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 몰라.”
지금은 복잡한 생각보다 한주희가 우선이다.
TV와 인터넷으로만 보았던 그녀를, 드디어 실제로 마주하는 순간 아닌가.
2층으로 내려간 손시우.
3층과는 달리 문이 몇 개 없어 서재를 찾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듯했다.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문에다 귀를 대본다.
서걱서걱
예민한 귀에 볼펜 움직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온다.
‘여기다.’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이 문 너머에 한주희가 있다.
자신을 지독한 상사병에 빠트린 여인.
“크흠.”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가볍게 문을 두드린다.
똑똑
“들어와요.”
다시 한번 숨을 길게 내뱉은 뒤, 문고리를 잡아 돌린다.
문이 열리고, 넓은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사이에, 그녀가 앉아 있다.
붉은 머리카락, 날카로운 눈매와 눈 밑의 점, 오똑하게 솟은 콧날과, 도톰한 입술.
모든 게 그대로다.
TV나 인터넷에서 보았던 그대로의 한주희가 눈앞에서 생생하게 움직이고 있다.
“무슨 일이에요.”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녀가 무미건조한 말투로 물음을 건넸다.
당황한 손시우.
“어, 어…, 왜, 왜긴!”
TV에서 나오는 그들은 여전히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잉꼬부부였으니, 조금 더 적극적인 태도로 대답했다.
“당신 보고 싶어서 왔지.”
손시우 특유의 당당한 말투를 사용해가며 그녀에게 어필했다.
이러면 감동한 한주희가 벌떡 일어나서 다가오겠지.
머릿속으로 행복 회로를 마구 돌리고 있을 때, 그녀의 음성이 뒤를 이었다.
“봤으면 이제 가줄래요? 보시다시피 바빠서.”
“어, 어…?”
뭐지.
이게 아닌데.
들어오고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눈을 마주친 적 없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아, 예쁘다.’
인터넷 사진과는 다른 그녀의 무미건조한 얼굴마저도 예쁘다고 새삼 반하고 있을 때.
“더 볼일 없으면 나가줘요.”
“…….”
축객령이 떨어졌다.
터덜거리며 복도로 나온 손시우의 얼굴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공식 석상에 얼굴을 비출 때마다 이보다 더 사이 좋을 수 없는 잉꼬부부였는데.
분명 그랬는데.
그 순간, 그의 머릿속을 뒤덮고 있던 작은 문 하나가 열렸다.
“윽!”
가벼운 현기증이 인다.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것은 부부 관계에 대한 기억들.
매몰차게 거절하고 냉대하는 한주희의 모습들이 연달아 떠오른다.
이를 종합하면 두 사람의 부부 생활은 딱 두 가지로 정의가 가능하다.
7년째 섹스리스, 쇼윈도 부부.
“…이, 이게 무슨.”
믿기지 않는다.
대한민국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는 S급 헌터이자, 국민 헌터 손시우가.
집안에서는 가장 대우조차 받지 못하는 외톨이라니.
“아, 아니야. 아니라고…!”
자신이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었다.
열렬히 사랑하는 모습이 부러워서, 그것을 자신이 가지고 싶어서 이 몸을 빼앗았는데!
그런 손시우가 알고 보니 7년째 섹스도 못하고 벼랑끝으로 내몰린 찬밥 신세라고?!
“아, 아니야아아악!”
그가 절규했다.
“시끄러워요, 당신.”
“아빠, 시끄러워.”
“멍!”
2층과 3층, 그리고 정원에서 들려오는 가족 구성원들의 차가운 목소리에.
“흡.”
손시우는 벌어진 입에 제 주먹을 밀어 넣고 소리 없이 울부짖었다.
* * *
눈을 떴을 땐 차가운 물수건이 이마 위에 얹어진 채였다.
“으음.”
주변을 둘러봤지만, 역시나.
좁고, 퀴퀴하고, 꾸리꾸리한 냄새마저 나는, 어질러진 옥탑방의 모습이 나를 반긴다.
중구난방으로 떠오르는 기억 때문에 여전히 머리가 어지럽다.
가까스로 상체를 반쯤 일으켜 보니,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회색 원피스를 입은 채 쭈그리고 앉아 냉장고를 정리하고 있는 아줌마의 뒤태가 보인다.
“와….”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만지면 손가락이 그대로 살에 파묻힐 것만 같은, 커다란 엉덩이가 시선을 자극한다.
한 번만 만져보고 싶다는 충동이 인다.
제멋대로 나가려는 손을 꾹 붙잡고 있을 때, 이불이 약간 위로 솟아올랐다.
시발, 섰다.
“어머, 깨어났니?”
타이밍도 좋지.
냉장고 정리를 끝마친 아줌마가 뒤로 돌아선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줄 순 없단 생각에 황급히 몸을 옆으로 살짝 돌린다.
“아, 아줌마.”
처음 보았을 때 완숙한 아가씨라 생각했던 눈앞의 여인은 아줌마가 맞다.
그것도 나와 동갑인 여자애를 딸로 둔, 내 원래의 몸과 비슷한 나이대의 유부녀.
내 곁으로 다가온 아줌마가 상체를 숙이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면으로 된 원피스의 앞섶이 벌어지고, 아줌마의 가슴골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건 어쩌면 신종 고문이나 폭행이 아닐까.
“열은 떨어졌네. 다행이다.”
휴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아줌마.
갑자기 눈을 좁히더니 내 머리에 약하게 꿀밤을 먹인다.
“요 녀석,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아니.”
“죄, 죄송해요.”
나도 모르게 사과를 하게 된다.
정확하게는 이 어리숙한 김도진이란 놈의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한다.
“어디 더 아픈 데는 없고?”
“예, 딱히….”
범람했던 기억도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눈앞의 아줌마에 대한 정보도 하나둘씩 떠올랐다.
서정희.
고아원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와 오갈 데 없는 자신을 인근 지역의 반의반도 안 되는 월세만 받고 거둬준 은인.
얼굴과 몸매만 봐선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스무 살 딸을 슬하에 둔 애엄마.
“흐흥…, 안 아프면 됐어. 이번만 봐줄 테니까 건강 관리 잘해야 한다?”
금세 풀어진 얼굴로 떡진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아줌마.
여인의 따스한 손길과 눈길을 받은 적이 대체 얼마만이지.
까딱하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다.
“고맙습니다, 아줌마.”
“우리 도진이 다 컸네? 솔직하게 고맙단 말도 할 줄 알고.”
“하, 하하.”
이 몸의 원주인은 등신이었다.
아니, 등신이다.
하루종일 집밖으로 안 나가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는, 뭐라더라.
아, 히키코모리.
오직 게임 아니면 인터넷 아니면 TV뿐인 삶.
월세는 어떻게 벌었나 했더니 RPG 게임을 통해 아이템을 팔아서 충당하고 있었다.
고작 몇십만 원에 불과한 돈.
원래였으면 아무리 빠듯하게 살아도 한 달 먹고살기 불가능한 수준의 돈인데, 눈앞의 천사 같은 아줌마가 월세 싸게 받고, 매주 반찬 가져다주니 고마운 줄도 모르고 그저 처묵처묵 하면서 인간답지 않게 생존하고 있었다.
“그럼 아줌마는 가봐야겠다. 귀찮다고 밥 거르지 말고 꼭 챙겨 먹어야 한다?.”
“하하, 예.”
이 몸뚱어리만 봐선 아무리 귀찮아도 밥은 안 거른 것 같은데.
“나오지 말고 누워 있어.”
“넵.”
그렇게 반쯤 누운 자세로 떠나가는 아줌마의 뒷모습을 보았다.
걸을 때마다 커다란 골반과 엉덩이가 마구 씰룩거린다.
“아.”
젠장, 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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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되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의문.
왜?
온갖 떠오르는 ‘왜?’의 향연에 대한 답들은 모조리 이 몸의 기억 속에 잠들어 있었다.
왜 몸을 바꾸기로 결심했는지 마음을 먹기까지의 과정을 천천히 살펴본 나는.
“이거 완전 또라이 아냐.”
그 새끼를 욕할 수밖에 없었다.
놈은 내 몸이 내 마누라, 한주희의 남편이기 때문에 빼앗고 싶었던 거다.
오직 내 마누라랑 이렇고, 저런 짓들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허허.”
처음에는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기분이었다.
감히 내 마누라를 노려?! 하는 생각으로 놈을 찾아가 멱살이라도 잡으려고 했는데.
그게 안 된다.
“상태창.”
[상태창]
이름: 김도진
성별: 남
나이: 20세
키/몸무게: 160cm/120kg
[근력: 5] [체력: 2] [민첩: 2] [마력: 1]
특성:
[특성 등가교환에 의해 성사된 거래가 활성화 중입니다.]
상호불가침 [2022.06.09]~[2025.12.31]
발설 금지 [2022.06.09]~[2025.12.31]
“햐….”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부분이 가관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나이, 키/몸무게.
“스무 살.”
입밖으로 내기만 해도 죽어버린 꿈과 희망이 부푸는 것만 같은 나이.
강제적인 교환이라곤 하나, 스무 살의 몸에 들어왔다는 것만은 더없이 마음에 들었다.
160cm에 120kg이라는 작은 키와 말도 안 되는 몸무게가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 해결 방법이 없진 않으니 일단은 넘어가고.
두 번째 가관은 능력치다.
단 한 개도 두 자릿수를 넘기지 못한 처참한 능력치.
“마력이 1인 거야 그러려니 하겠는데….”
마력은 원래 마법과 관련된 계열의 특성이 아니면 1에서 시작하는 게 맞다.
아니, 다른 것도 어떻게든 꾹 참고 넘어갈 수 있다.
단 하나, 체력만 빼고.
“대체 어떻게 해야 체력이 2인 건데….”
오랜 헌터 생활을 끝마치고 자연 속에서 살아가다 임종을 앞둔 헌터의 모습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