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20)

“아…, 뭐야.”

뭔가 굉장히 기분 좋은 꿈을 꾸고 있었던 것 같은데.

캉캉!

“도진 학생, 괜찮아?”

“……?”

내가 혹시 어젯밤 술 마시고 집이 아니라 싸구려 모텔방에서 잠들었었나…?

아닌데.

분명 젊은 대리 기사 친구랑 즐겁게 얘기하면서 집까지 돌아왔고…, 그 뒤에 손님방에서 잠들었는데.

“여긴 어디여…?”

눈 뜨고 보니 전혀 다른 곳에 와 있다.

쿵쿵!

“도진 학생, 깼으면 문 좀 열어볼래?”

주변을 둘러보니 모텔방이 아니었다.

이리저리 어질러져 있는 것들을 보면 누군가 사는 집이 분명한데.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는 여자가 부르는 도진이라는 학생의 집인가.

“도진 학생!”

아.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문밖에 서 있는 여자부터 돌려보내야겠다.

문에 걸린 오래된 잠금장치를 풀어낸다.

“와…, 이거 내가 어릴 적에나 쓰던 거 아냐.”

감회가 새롭다.

단칸방에서 홀로서기를 시작했을 때 잠금장치가 꼭 이런 모양이었는데.

찰칵!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가자, 그곳엔 완숙미 넘치는 여인이 서 있었다.

“와….”

감탄이 절로 튀어나오는 외모였다.

30대 초중반쯤 되었을까.

커다란 가슴과 엉덩이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회색 원피스가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난감하게 만든다.

저게 바로 그 신도시 미시룩인가 뭔가 하는, 한창 인터넷을 달구고 있는 그 패션인가 싶다.

실례가 되지 않도록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목을 위로 끌어 올린다.

아가씨와 미시 사이의 그 어딘가에 있는 듯한 느낌.

커다란 눈망울과 오밀조밀한 붉은 입술이 시선을 잡아끈다.

그나저나.

이 여자, 키가 대체 얼마나 큰 거야…?

내 키가 분명 185cm쯤 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가 올려다볼 정도면 대체.

“도진 학생, 괜찮아…?”

나이에 맞지 않게 순수해 보이는 눈망울엔 걱정이 한가득 묻어나온다.

그녀의 걱정어린 물음에 내 몸이 자동으로 반응했다.

“아, 안녕하세요, 아줌마.”

아줌마란다!

멋대로 움직인 입이 나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여자한테 아줌마란 소리를 입에 담았다.

나이를 먹더니, 이 주둥이가 개념을 상실했나….

허나, 여인은 기분 나빠하는 기색조차 없어 보인다.

천사인가?

“반찬 주려고 올라왔는데 안에서 자꾸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려서….”

과연.

그녀의 손에는 다섯 개나 되는 반찬통이 들려 있었다.

이것들을 이 방에 사는 사람에게 가져다주기 위해 올라온 건가.

천사 아니야?

“어머, 이 땀 좀 봐.”

반찬을 한쪽에 내려놓은 여인이 옷 소매로 내 이마에 묻은 땀을 닦아주었다.

천사 맞네, 맞아.

“윽.”

여자와 몸이 닿아본 게 오랜만이라 그런 걸까.

이마 위로 살포시 닿는 여인의 살결과 향기가 몹시도 강렬하다.

얼굴과 얼굴 사이의 거리가 매우 좁다.

조금만 세게 숨을 내쉬면 상대에게 소리며, 냄새가 전부 전해질 정도.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

그 속에 그대로 빨려 들어가 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응?”

뭔가 이상하다.

그녀는 지금 나와 마주보고 있으니, 그녀의 맑은 눈동자 속에 비치는 것은 분명 나여야 할 텐데.

저건 대체 누구지.

“도진 학생…?”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녀와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이에 당황한 여인이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내 이름을 부른다.

“내 이름…?”

분명 여인이 부른 이름은 도진인데, 그게 왜 내 이름이야.

나는 왜 이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거지?

“으음, 어딘가 많이 안 좋은 걸까.”

여인의 두 손이 각각 나와 자신의 이마에 얹어졌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온몸에 긴장감이 엄습한다.

“아….”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나도 모르게 한쪽 벽을 짚은 채 비틀거리자, 그녀가 내 팔을 붙잡아주었다.

“도진 학생! 왜 그래, 어지럽니?”

“예, 조금요….”

얼떨결에 답하며 고개를 숙인다.

내리깔린 시선에 보여선 안 될 것이 보이고 있다.

배가 말도 안 되게 불어나 있다.

내 발이 어떻게 생겼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배, 배가…?”

벽을 짚고 있던 손을 뻗어 배를 직접 만져본다.

감촉이 그대로 전해지는 걸 보면 내 것이 맞다.

그렇기에 더욱 이상하다.

S급 헌터에 오르면서 환골탈태를 경험한 내 신체는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찔 수가 없게 되어 있을 텐데.

불현듯, 아찔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이 몸은 내 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그 생각을 품은 순간, 뇌 전체가 찌르르 하고 울리는 것이, 격렬한 통증이 전해졌다.

“끄윽!”

수십 년간 몬스터와 싸우며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고통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나조차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머리를 부여잡고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도진 학생!”

다급한 목소리로 주저앉는 여인 아니, 아줌마.

범람한다.

한쪽 구석에 틀어박힌 채 잠시간 유예되어 있던 기억이.

손시우가 아닌, 이 몸뚱어리의 주인 김도진의 생애가.

더없이 또렷한 형태로 주입되기 시작했다.

“끄르르륵…!”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새끼, 어젯밤 내 차를 운전해줬던 대리 기사 새끼가!

나 손시우의 몸을 들고 튀었다!

“이 개새…, 끼야아악!”

무려 20년에 걸쳐 쌓인 기억들이 쓰나미처럼 범람한다.

거기에 더해지는 분노가 쇼크를 유발한다.

이를 모두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판단한 정신이 수면 아래로 깊게 침잠한다.

“도진 학생, 도진 학생!”

시야가 점점…, 아득하니 멀어져 갔다.

다음화 보기

눈을 뜬 사내는 곧장 주변을 살폈다.

좁고 퀴퀴하던 자신의 옥탑방이 아닌, 딱 봐도 고급스러운 것들이 가득한 방 안.

“되, 된 거야?”

방심하기엔 아직 이르다.

방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의 얼굴이 중요했다.

그는 한쪽 벽면에 걸린 거울 앞에 섰다.

살에 이목구비가 뭉개진 처참한 얼굴 대신 근사한 미중년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소, 손시우.”

거울 너머에 손시우가 서 있다.

자신이 팔을 들면 똑같이 팔을 들어 올리고, 볼을 잡아당기면 똑같이 볼이 늘어난다.

“돼, 됐어. 됐다고!”

그제야 확신했다.

뒤늦게 각성한 SSS급 능력 등가교환.

그것으로 자신은 손시우의 몸을 빼앗는 데에 성공했음을!

“우, 우와아아앗!”

몸에 힘이 넘친다.

후웅! 후웅!

가볍게 주먹을 휘두를 뿐인데 거친 바람 소리가 귀를 때린다.

“이, 이게 S급 헌터의 몸인가…!”

그가 젊음이 부럽다고 말한 이유를 모르겠다.

이토록 쌩쌩하고, 강력한데 굳이 젊음을 되찾을 필요가 있었을까?

“흐, 흐흐흐.”

이 완벽한 신체를 보라.

여자들이 좋아하는 185cm의 장신, 지방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근육질 몸매!

숫자만 40대 중반일 뿐, 그의 신체와 외모는 30대 초반의 완숙한 남성의 모습을 고스란히 이어오고 있지 않은가.

160cm에 고도비만이었던 시절을 떠올리면 그야말로 이상에 가까운 수준이다.

“손시우는 이런 높이에서 살았던 거구나.”

공기의 질마저 다른 느낌.

“이젠 내 거야.”

손시우가 누렸던 모든 것들, 앞으로 누릴 것들 전부 자신의 것이 되었다.

비루했던 인생과는 안녕을 고하고, 호화로 가득한 삶을 누릴 때가 온 것이다!

“아, 그래.”

그는 곧장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것은 따로 있지 않던가.

‘한주희!’

한주희.

손시우와 더불어 네 명의 S급 헌터 중 한 사람.

온갖 마법을 주특기로 적을 떼로 섬멸하는 그녀에게 붙여진 별명, 스칼렛 위치.

전 세계를 통틀어 열 명의 최상위 마법사에게 주어지는 대마법사의 칭호를 지닌 자.

붉은 머리카락과 색기 넘치는 외모로 뭇 남성들의 가슴을 뒤흔든 그녀가.

‘지금 이곳에 있다!’

드넓은 복도와 수없이 많은 방문이 그를 반겼다.

“어, 어디로 가야 하지?”

넓어도 너무 넓다.

고작 세 명밖에 살지 않는 집이 이렇게 커야 할 이유가 있을까.

“어디지….”

각각의 방마다 귀를 기울여본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패스.

그렇게 하나둘씩 후보군을 줄여가고 있는데, 별안간 그의 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지금 뭐 해.”

“헉.”

놀란 나머지 뒷걸음질 치는 사내, 손시우의 눈에 들어온 것은 검정색 돌핀팬츠와 흰색 반팔티를 입고 있는 소녀였다.

‘손시우의 딸!’

손서연.

어머니인 한주희가 정열적인 느낌을 주는 미녀라면, 딸인 손서연은 차가운 인상을 간직한 냉미녀의 상이다.

허나, 공통점도 있다.

그 어머니에 그 딸이라고.

제 어머니와 비슷한 느낌의 색기가 흐른다.

‘어린데도 저 정도라니.’

다른 점이 있다면 나이가 어린 탓에 농염한 매력이 덜하고 풋풋함이 더해졌달까.

“뭐 하냐고.”

“어, 어?”

차가운 음성이 그의 상념을 일깨운다.

뭔가 이상하다.

‘왜 저렇게 차가워.’

분명 TV 프로그램에 나왔던 손시우 말로는 자기 딸이 그렇게나 잘 따른다고 했는데.

“남의 방에서 뭐 하는 거냐고 묻고 있잖아.”

아!

여기가 손서연의 방이었구나.

“아, 미, 미안! 그냥 잠깐….”

“…됐고, 나와.”

“그, 그래.”

엉거주춤하게 옆으로 물러나자.

쾅!

방문을 거세게 닫으며 들어가 버린다.

“…되게 무서워.”

고등학교 때 애들을 괴롭히던 일진보다 무섭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