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10장-가족
"자. 이제 들어보자꾸나. 뭐가 그리 불만이어서 스승이 폐관수련에 들어가자마자 밖으로 떠났는지."
"그.. 원래 처음엔 기다리려고 했었는데."
"기다리려던 마음이 몇 시간 만에 바뀌었다니 재밌구나. 내가 들어간 당일에 바로 나간 것으로 아는데."
'...'
-삐질삐질
괜히 변명해보려다가 상황만 더 악화됐다.
기다려보려고 했는데 너무 오래 걸릴 거 같아서 나왔다고 변명하려고 했는데 당일 바로 도망친 걸 알고 있었을 줄이야.
'...후우.'
그래.
이제 와서 변명할 것도 없다.
그냥 솔직하게 자수하고 광명찾는 게 낫겠지.
"...심심해서 뛰쳐나갔습니다."
"...?"
"스승님이 폐관 수련을 2년 반에서 3년 정도 들어가신다고 했는데 그동안 스승님도 없이 그 산에서 혼자 지낼 생각을 하니 심심해 죽을 것 같아서 뛰쳐나왔습니다."
"..."
나는 그렇게 말하고 눈을 바닥에 내려 깔았다.
아마 이제 스승님은 불같이 화내시겠지.
-스윽
-움찔!
그리고 마침 스승님이 손을 뻗어서 내쪽으로 가져오는 게 느껴졌다.
몇 대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며 곧 다가올 고통을 대비했고
-쓰담쓰담
"...그랬구나."
"...?"
대비했던 것이 무색하게 느껴지는 부드러운 손길에 의아해 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 부분은 내 신경이 좀 부족했구나. 혼자 있는 걸 그렇게 싫어하는 아이가 그동안 혼자서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지. 최소한 그동안 할 거라도 던져줄 걸 그랬구나. 그러면 그나마 나았을텐데."
"아, 아뇨 괜찮아요! 딱히 혼자 있는 걸 싫어하지는.."
"폐관수련에 들어가기 전 산 밑의 상인에게 주기적으로 생필품을 가져다 달라고 요청했었는데 그걸 미리 말해줄걸 그랬구나. 네가 깜짝 놀라길 바래서 말하지 않았는데 이 경우엔 오히려 독이 됐어."
"...네?"
그런 게 있었다고?
난 당연히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 그걸 왜 말을.."
"조금만 기다렸으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뛰쳐나갈 줄이야 나도 알았겠느냐."
"..."
어쩌면 산밖에 나와서 고생하지 않아도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래도 산밖에 나왔으니까 당아영도 만나고 여행 다니면서 검후님이나 여소천도 만났으니 마냥 나쁘다고 볼 수는 없긴 한데..
"네가 그렇게 바깥 세상 바깥 세상 노래를 부르길래 내가 수련을 마치고 나오면 같이 나가자고 하려고 했더니 네가 불길하다며 말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어."
이러면 진짜 나는 뭘 한 거지.
그냥 기다렸다가 스승님이랑 나왔으면 훨씬 안전했을텐데.
'아, 아니야. 그때 이미 중원은 난리가 나있었을 거야.'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 평행세계의 중원도 썩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
딱히 내가 혈교를 막는데 중요한 공헌을 한 것 같지는 않지만 혈교와 중원이 전쟁을 벌이고 있는 건 그 세상도 똑같을 터.
그 상태의 중원을 제대로 여행 다니며 즐기긴 힘들 테니 미리 나와서 즐길 건 다 즐긴 게 더 좋을 거다.
...그렇게 믿고 싶다.
아무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스승님의 반응도 부드럽게 끝난 것 같으니 이제 안심해도 되겠..
-쑤욱
"이제 내가 잘못한 건 끝났으니 네가 잘못한 걸 이야기해 보자꾸나."
"어."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스승님의 허벅지에 배를 대고 누워있었다.
그리고 이 자세 대로면..
-짜악!
"악!"
"우선 한 대다. 남겨 놓은 편지에 스승 험담이란 험담은 다 써놨더구나. 혼자서 요리나 빨래도 못하는 노처녀라느니 괴팍한 할망구라느니 처음 봤을 때 내 제자가 자결이 하고 싶었던 건 줄 알고 깜짝 놀라지 않았느냐."
"그, 그건.. 악!"
-짝!
"왜 그러느냐. 계속 말해보거라. 이 스승이 나이가 있어서 귀가 잘 들리질 않는구나."
처음 산 밖으로 뛰쳐나갈 때 많이 흥분해서 편지를 좀 과격하게 쓰긴 했다.
사실 그땐 '내가 다시 돌아오나 봐라' 의 마음이 컸고 돌아오더라도 스승님이 나오기 전 돌아와서 내가 나갔다 왔던 흔적들을 다 지워 놓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별생각 없었는데..
-짝!
"으극!"
그때는 상황이 이렇게 될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설마 일이 생겨서 못 돌아갔는데 스승님이 이 넓은 중원에서 나를 찾아서 올 거라곤 단 1만큼도 생각 못하고 있었지.
-짝!
"자, 이제 준비운동은 된 것 같으니 몇 대 맞을지 골라 보거라."
"...이제 준비 운동이요?"
"내게 맡긴다면 말리진 않으마. 제자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효도를 하겠다는데 그 정도는 받아줘야지."
-삐질삐질
부모님 최고의 가불기 중 하나. 몇대 맞을래.
나는 그걸 지금 20살 넘게 쳐먹은 뒤에도 당하고 있었다.
그것도 옆에 애인이랑 모르는 여자 한 명을 두고.
'도, 도와줘요.'
나는 슬그머니 당아영에게 눈빛으로 도움을 요청했지만..
"저, 저는 집 수리할 인부들을 모집하러 가볼게요!"
'브루투스 너마저!!'
아까 당아영이 스승님에게 시달리던 것을 모른체한 복수이기라도 한 듯 그녀는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저 구석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흡혈귀 여자는..
"..."
'...저건 뭔 시선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빨리 저 여자를 무림맹에 넘겨서 정보를 캐내던가 해야 하는데 그쪽 소란은 언제쯤 잠재워질련지.
"뜸이 꽤 길구나. 스승의 재량에 맡기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느냐?"
"아, 안돼요! 잠시만요!"
"10초 주겠다. 10.."
"여, 열대 맞을게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스승님의 눈치를 봤다.
과연 내 도전의 결과는 어떨까.
합격? 불합격?
-싱긋
밝게 웃는 스승님의 표정을 보며 가슴에 안도감이 올라왔고
"30대만 맞자꾸나."
-짜악!
결국 스승님에게 계속 손발이 닳도록 빈 뒤에야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
.
.
"멋대로 도망친 제자의 훈육도 끝났으니.. 그거나 가져와 보거라."
"...그거요?"
"네가 평소에 잘 가지고 놀던 구슬 말이다. 설마 잊어버리진 않았겠지."
"아. 그거요."
나는 스승님의 말을 듣고 품속에서 푸른 구슬 하나를 꺼냈다.
아마 이걸 말하는 걸 거다.
안에 이상한 기운을 품고 있어 천기를 읽을 때도 여러번 유용하게 썼던 물건.
"에이 절대 안 잃어버렸죠. 항상 품속에 가지고 있었다고요."
"...이리 줘보거라."
스승님이 들어가기 전에 사용법을 제대로 배웠었다면 더 잘 써먹을 수 있었을텐데 몰라서 아무렇게나 썼던 게 조금 아쉬웠다.
사실상 저 구슬 덕분에 제대로 된 점쟁이 노릇을 해왔던 거니까.
구슬을 본 순간 스승님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 같았지만 우선 스승님에게 구슬을 건넸고 스승님은 그 구슬을 눈에 가까이 가져다 대며 유심히 살폈다.
스승님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구슬을 살펴보고 계셨는데 나는 혹시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 점점 불안해졌고
"...하아."
-깜짝!
절대 좋게 들리지 않는 한숨 소리에 나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30년이라. 3년 동안 잘도 이만큼 날려 먹었구나."
"그, 그게 무슨 말인지.."
"이 구슬에 저장 중이던 기운을 네가 30년치를 날려 먹었다는 말이다. 고작 3년 동안."
"..."
이건 진짜 내가 잘못했는데?
물론 그런 걸 미리 안 알려준 스승님도 잘못이 아예 없다고 하긴 그렇지만 스승님이 내가 산 밖으로 뛰쳐나가서 점집을 차렸을거라고 예상이나 했을까.
간식이나 사먹을까 싶어 카드를 줘놨더니 건물을 긁어놨으면 당연히 혼내리라.
30년이 뉘집 개 이름도 아니고.
"...후우. 괜찮다. 지금까지 기다린 세월을 생각하면.. 다시 숲에 들어가서 네 정기까지 끌어모으면 30년보단 빠르게 복구.."
"...지금은 못 돌아갑니다."
"...뭐라?"
"그게.."
나는 스승님에게 지금 중원의 돌아가는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네가 온 세계와는 또 다른 세계에서 이상한 요괴들이 침입했고 그들이 혈교를 점거한 뒤 그 행세를 하고 있는 중이라는 거냐?"
"대충 비슷합니다."
"그리고 그놈들의 수작을 막지 못하면 이 세계가 멸망하고?"
"예."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증거가 제법 많아서 안 믿기도 뭐하구나. 저 처음 보는 종류의 강시나.. 네 혼에 새겨진 이상한 각인이나.."
-움찔!
성녀님과의 계약을 의미하는 것 같은 말에 잠시 몸을 움찔했다.
"...그리고 계속 물어보려다 말았는데 그 흰머리들은 대체 무어냐. 그 사이에 폭삭 늙기라도 한 것이냐."
"아. 이건 그런 흰머리가 아니라서 그냥 뽑으면 됩니다."
"그런 거였나. 일부러 염색이라도 했나 했더니."
그 말이 끝나자 스승님은 자연스럽게 나를 무릎에 앉히더니 내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꾸우욱
"...스승님. 이 자세는 불편한데요."
-툭 툭
"이대로 계속 있을 것도 아닌데 잠시 참거라. 이 정도는 금방 뽑으니."
스승님의 신체 조건 상 아무리 몸집이 작은 나라도 무릎에 앉히긴 불편했는데 다행히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았다.
"음. 됐다. 역시 머리카락은 흰머리 없이 까매야 건강해 보이지 않느냐."
"...나중에 스승님도 나면 제가 뽑아드리겠습니다."
"글쎄. 그런 날이 올지는 모르겠구나."
머리카락 정리가 끝나자 스승님이 나를 밀어내 불편했던 자세에서 벗어났다.
-스윽 슥
"아무튼 그런 사정이라면 당장 산으로 돌아가긴 힘들 것 같긴 하구나. 멸망이라는 게 무슨 소린진 모르겠지만 그 이름 대로라면 아무리 산속이라도 영향이 없진 않을 테니."
"...그런데 왜 자연스럽게 제 귀를 파주고 계십니까?"
"내가 그 안에서 네 걱정을 얼마나 했는지 아느냐.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빨래는 잘 해서 입는지. 옷은 제대로 입는지.."
"그건 제가 할 말입니다?!"
누가 누굴 걱정해?!
평소에 집안일 하는 게 누군데?!
전 스승님 없어도 잘만 먹고 잘 살거든요?!
"그러는 스승님이야말로 그 안에서 먹을 건 잘 드셨습니까?"
"벽곡단 맛은 아느냐?"
"잘 못 먹었다는 건 알겠습니다."
수행하는 사람들은 저 맛없는 걸 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 걸까.
그리고 이어질 말은 굳이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아도 안다.
가족이니까.
-벌떡
"뭐 원하는 요리라도 있으십니까? 기왕 속세로 나왔으니 좋은 식재료로 만든 거나 드시죠."
"네가 해주는 거라면 뭐든 괜찮을 것 같구나."
"요리는 당아영이 더 잘하는데요."
"실력보단 만드는 사람이 중요한 것 아니겠느냐."
어차피 물어보기 전부터 무슨 요리를 할지는 정해져 있었다.
산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식재료로 할 수 있는 요리는 한정적이라 어차피 가짓수 자체가 별로 없는데다
어차피 스승님이 뭘 제일 좋아하는지는 다 알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