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런 꼴이 되는 게?
"나, 나한테 뭘 원하는 거야."
"아아.. 아아아아.."
'내'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발음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입을 뻐끔 거리고 있었다.
"도..망..가..?"
"으으! 으으으으!"
"맞아..?"
'내'가 미친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도망가라고?
왜?
어차피 이 공간에서 나는..
-오싹!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올라왔다.
무언가가 저 위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분명 이 공간에서 나는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 무적의 상태일 텐데 그 믿음에 구멍이 뚫리고 있었다.
-덜덜덜덜
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움직이지 않았다.
도저히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무언가'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는 지금. 실시간으로 어마어마한 공포감이 몸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으으! 으으으!!"
'내'가 필사적으로 팔을 휘저으며 뭐라 하는 게 느껴졌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어느새 마지막 문 앞까지 다가오고
마지막 문이 열리던 그때
-화악!
"허억..! 허억..! 헉..!"
"괜찮나? 얼굴빛이 너무 안 좋아져서 건드렸는데 혹시 실수했나?"
눈앞에 천마의 얼굴이 보였다.
몸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
.
.
"진정됐나?"
"돼, 됐습니다. 잠시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무얼. 천기를 읽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겠지. 딱히 사과할 필요는 없네."
아직도 두근두근 뛰고 있는 심장에 손을 대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머리가 새하얘지는 말이 들려왔다.
"그래서 내 남편의 모습은 봤나?"
"아..."
바보같이 입이 벌려지고 머리는 새하얗게 물들어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지하에 감금되어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 생각해 보니 4명의 아이들의 모습 모두 천마를 닮긴 했지만 내 모습 또한 닮아있었다.
"아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그때
입이 열린 건 생각보다 앞선 본능적인 몸부림이었다.
"훤칠하게 키가 크고 잘생긴 미남이었습니다. 긴 백발을 지니고 있었고 무공을 익힌 몸인지 근육 또한 탄탄해 보였습니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 특징의 외모를 댔다.
"흠.. 백발이라.. 북해빙궁 쪽인가.."
"저, 저는 그저 외모만 말했을 뿐입니다."
미안하다 빙궁.
일단 나부터 살아야지.
맹세코 의도한 건 아니었어.
.
.
.
이후 천마는 내 상태가 영 좋지 않은 걸 느꼈는지 금방 돌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때부터 내 인생이 제대로 꼬이기 시작했다.
이 빌어먹을 무협 세계에 빙의한지 어느덧 10년 째.
"..저기 스승님. 속곳은 좀 스스로 빠시면 안됩니까?"
"귀찮다."
"하.."
나는 괴팍한 스승 밑에서 구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부러워 할지도 모르겠다.
외모 자체는 경국지색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미인을 스승으로 두고 그런 여인의 속옷을 만질 수 있는 기회가 흔하진 않을 테니까.
다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스승님.. 저도 남자입니다.. 최소한의 여인으로서의 조신함이라던가 그런 건 없는 겁니까?"
"호오, 너는 이 스승을 여인으로 보고 있는 게냐?"
"그런 의미가 아니잖습니까.."
생긴 것만 예쁘지 다른 부분에서 여인으로서의 매력을 느낄 부분이 없다.
혼자서 밥도 제대로 못 지어, 빨래도 못해, 성격은 또 괴팍하고, 해가 중천에 떠도 일어날 기미도 없고..
저런 꼴을 10년 동안 보고 있으면 천년의 사랑도 식을거다.
-철퍽 철퍽
"그냥 됐습니다. 지금까지 백 번 도 넘게 말했던 것 같은데 이제 와서 말해 뭐하겠습니까. 어차피 들을 생각도 없으시겠죠."
"잘 아는구나."
내가 제자로 들어온 건지 가정부로 들어온 건지.
원래 이 세상에서 제자가 스승의 수발을 드는 건 상식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성인데 이 정도로 무방비하다니.
적어도 처음 약속했던 대로 밥은 안 굶고 있지만 내 쪽도 손해가 너무 컸다.
-힐끔
붉은색과 하얀색이 적절히 섞인 중원식 복장
마루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반사되어 화사하게 빛나고 있는 풍성한 황금색 머리카락
전생에서 모니터 안으로 봤던 웬만한 서양 여자들도 압살해 버릴 정도의 크기를 자랑하는 몸매까지.
'쓸데없이 눈만 높아져가지고.'
저런 여자를 10년 동안 보고 있으니 미래가 걱정된다.
웬만한 여자는 눈에 차지도 않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스승님. 물어볼게 있는데 말입니다."
"무어냐."
"저는 언제 쯤 하산할 수 있습니까?"
무려 10년이다.
강산이 한번 바뀔 정도의 시간.
빙의 후 나이도 어느덧 약관인데 슬슬 강호로 나가봐야 할 때 아닌가.
"어림도 없는 소리! 네가 아직도 바깥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 모양이구나!"
"그건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빙의 전에 무협 소설을 거의 안 읽긴 했지만 보통 위험한 세상이 아닌 건 알고 있다.
시비 한번 잘못 걸리면 목이 날아갈 수 있는 그런 동네.
본인한테 시비가 안 걸려도 무림인끼리 싸우는데 휘말려서 불구가 될 수도 있는 그런 동네.
살벌한 동네인 건 알고 있지만
"평생 산속에서만 지낼 순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살아서야 재미가 없다.
내가 뭐 산속에서 무공 수련을 하고 있는 거면 밖에 나가서 찬란한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마음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수련이라도 할 수 있지
점성술 같은 애매한 걸로 그런 인내심 같은 것도 없다.
딱히 성취 같은 게 느껴지지도 않고.
산 속에서 지내는데 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기껏해야 내일은 무슨 고기를 먹을 수 있을까 알아볼 수 있는 정도다.
"..그렇게 이 산 속이 싫더냐?"
"싫다고 까지 할 건 아니지만 심심하고 무료하긴 합니다. 삶이 별로 재미가 없달까요."
현대 지구에서 인터넷으로 전 세계의 엔터테이먼트를 즐기던 입장에서 이런 산 속의 삶은 무료함 그 자체였다.
"이대로 산속에서 늙어 죽는 것보단 위험해도 강호에서 삶을 즐겨보고 싶습니다. 사람도 만나고 술도 마시고 여행도 다니면서 속세의 맛있는 음식도 먹어보고 싶습니다."
"..3년만 기다리거라 3년만. 그 뒤엔 바깥 세상으로 데려가 줄 테니."
"저번에도 그렇게 말하시곤 사흘만에 다시 올라오지 않았습니까."
"쯧.. 처음 데려왔을 땐 말도 잘 들었던 그것이 언제 저렇게 컸을까."
이날도 이렇게 조용히 넘어갔지만
바깥 세상을 향한 내 열망은 계속해서 차오르고 있었다.
.
.
.
어느날 스승님이 갑작스러운 선언을 하셨다.
"폐관 수련에 들어가겠다."
"..예?"
폐관 수련.
문을 걸어 잠근 뒤에 바깥과 격리돼서 벽곡단만 먹으면서 수련에 열중하는 것.
그걸 스승님이 갑자기 하겠다고 하신다.
"갑자기요?"
"슬슬 때가 되었거든."
"어.. 얼마나요?"
"길게 잡으면 3년. 짧으면 30개월 정도로 보고있다."
2년 반에서 3년.
꽤 긴 시간이다.
"..그러면 저는요?"
"당연히 기다려야지. 제자가."
3년을 혼자서 기다리라고?
아무것도 없는 이 산 속에서?
"..."
키우고 있는 작물이 있으니 굶어 죽진 않겠지만 스승님이 안 계시면 그동안 고기도 못 먹는다.
3년 동안 풀떼기나 먹으면서 지내라니
내가 무슨 도사도 아니고.
이게 말이 되는..
'..잠깐만.'
이거
탈출할 기회 아닌가?
"무사히 원하시는 경지에 오르시길 간절히 빌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바로 넙죽 엎드렸다.
"제 걱정은 전혀 하지 마시고 수련에만 열중하시지요. 저도 이제 약관이니 혼자 사는 것쯤은 일도 아닙니다."
"어째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스승님이 원하시던 성취를 앞두고 있다는데 어찌 제자로써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른 속내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
"하하 제가 스승님을 혼자 두고 어딜 가겠습니까. 무려 10년 동안 먹여주고 길러주신 은인의 뒤통수를 칠 배은망덕한 놈은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스승님의 옥체에 상처 하나도 남길 수 없는 것쯤은 스승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스승님은 신기한 사람이었다.
심기체가 일그러져 있다고 흥미롭다고 데려와서는 무공이라도 알려주나 싶었더니 알려준 게 하늘의 기운을 받고 기록을 엿보는 점성술이었다.
순천(順天)과 역천(逆天). 그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요술.
[좋게 말하면 하늘의 기운을 받는 것이오 나쁘게 말하면 감히 하늘의 기록을 엿보는 것이니 그야말로 요술(妖術)이로다.]
말이 좋아 미래를 보는 거지 사실 이 철과 피의 대지에서 살아남는데 좋은 기술은 아니다.
내 미래는 볼 수 없는 데다 칼 든 일반인도 상대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조르고 졸라서 부적 몇 장 정도 쓸 수 있긴 하지만 이것도 영 시원치 않다.
액운이나 불행을 막아주고 행운을 불러주는 부적은 쓸 수 있지만 도사들처럼 뭐 땅을 접는다던가 바람을 일으킨다던가 이런 건 하기 힘들었다.
지금 그나마 몸을 지키는데 쓸 수 있는 거라고는.. 달릴 때 체력 소모가 덜 되는 것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