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다음에도 또 불려가야 할 곳이 있어서."
"아쉽구나. 모처럼 좋은 술 벗을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조금은 아쉬웠다.
돈도 많이 주고 술도 주고 같이 술 마시면서 말동무도 해주는 손님은 쉽게 만날 수 없으니까.
"저도 아쉬우니까 서비스 하나 해드리죠."
"서비스..?"
"아. 다음에 또 불러 달라고 드리는 덤 같은 겁니다."
"호오. 또 점이라도 봐주려는 건가?"
"중원에서도 인기가 많은 점이었습니다. 아마 신교의 하늘께서도 마음에 드시리라 생각합니다."
"운명의 상대에 대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호오.. 운명의 상대라.. 반려를 말하는 건가?"
"꼭 반려를 의미하는 것 만은 아닙니다. 때론 평생을 함께할 친우, 모시게 될 주군, 등을 맞대고 싸울 수 있는 동료. 이런 자들이 나타나기도 하니까요. 그래도 절반 이상은 반려가 나타나긴 합니다."
"제법 흥미가 당기는구나."
뭐 이걸로 점 보러 왔다가 서로가 운명의 상대가 아닌 걸 보고 깨진 커플이 한둘이 아니긴 하지만 그 얘기는 하지 말자.
"이 경우엔 아무래도 신상 정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냥 외형, 특징, 제가 본 미래의 장소. 그 정도는 묘사해 드릴 수 있지만 정확히 누구냐고 물으시면 곤란합니다. 저도 알 수 없으니까요."
"그대의 능력엔 참 까다로운 점이 많아."
"아무렴 미래를 읽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천마의 말에 대답하며 품속에서 주먹만한 크기의 구슬 하나를 꺼냈다.
사실상 점을 볼 때 제일 중요한 물건이다.
목패나 다른 물건들은 어떻게든 다시 구할 수는 있지만 이건 다신 못 구한다.
"아. 그리고 실례가 안된다면 머리카락 한 가닥만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여깄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우웅
머리카락을 구슬 위에 올리고 작동 시키자 구슬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야명주?"
"아닙니다."
이래서 자주 안 꺼내는 물건이다.
무림에서 야명주는 굉장히 비싼 물건이니까.
특히 유명해지기 전에는 품속에 꽁꽁 숨겨 놓고 몰래몰래 쓰느라 엄청 고생했었다.
설마 천마가 겨우 이런 주먹만한 크기의 야명주를 탐내진 않겠지.
마교 지하 창고에도 쌓여 있을텐데.
-우우우웅
구슬이 빛을 내며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다.
내공이랑은 다른 기운. 나는 대충 천기(天氣)라고 부르고 있다.
잘 보이지 않는 얇은 기운이 저 하늘 위의 구름으로부터 뻗어와 이 작은 구슬로 내려오며 안쪽에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면.. 한번 봐보겠습니다.."
의식이 구슬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았다.
* * *
-짹짹
주변의 배경은 꽤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꽃은 화사하게 피어있고 햇빛도 잘 비치는 정원까지 있는 저택이 보이고 있었다.
[바람도 따뜻하고 꽃까지 피어있는 걸 보면 봄인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저택이 보이네요.]
[저택이라..]
생각해보니 천마는 따로 집이 있나?
궁금하긴 하지만 물어보진 않기로 했다.
무림인들에게는 주거지 문제도 꽤 중요한 편이라.
"일단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시간도 널널하니까요."
이 공간에서 새로 만들어진 몸을 움직여 저택 안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이 공간은 천기에 의해 만들어진 일종의 가상 공간.
이 안에서 나는 다른 존재의 눈에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유령과도 같은 상태라고 보면 된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 보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보자 천마를 닮은 4명의 아이들이 싸우고 있었다.
"소아야! 찻잔에 숨겨둔 다과 너가 먹었니?!"
"나, 나 아니야! 정운 오라버니가 그랬어!"
"왜 갑자기 날 걸고 넘어져?!"
"오빠들 싸우지 마아.."
'...'
아무리 천마의 자식이라지만 남매는 남매인걸까.
참 생각 이상으로 평범한 남매다 싶었다.
"그래. 내가 먹었다 어쩔래. 때리기라도 할 거야?"
"이익..! 대련장으로 따라와! 저번의 설욕을 갚아주고 말 테니!"
'..자식 맞네.'
뭐랄까
자식 교육도 참 천마답다 싶었다.
[2남 2녀를 두셨습니다. 금실이 좋으신가 봅니다.]
[호오. 본녀가 가정을 꾸리다니 꽤 재밌는 미래구나. 대체 어떤 사내가..]
이렇게 생각하니까 좀 궁금하긴 하다.
대체 뭐하는 사내길래 그 천마랑 가정을 꾸린단 말인가.
그것도 자식을 4명이나 낳을 정도면 금실도 장난 아닐텐데.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제발 부부싸움은 하지 말아주세요..'
부부싸움이라도 하는 날에는 중원이 발칵 뒤집힐지도 모른다.
아무쪼록 제발 평화롭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면 이번엔 그 사내를 찾아보겠습니다.]
[그래. 본녀도 궁금하구나.]
아이들을 뒤로 하고 저택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쿵!
한참 저택을 뒤지던 와중에 내가 있던 곳까지 진동이 전달되어왔다.
이후로도 계속 울리는 걸 보면 아마 아까 말한 대련이 진행중인 것 같다.
'..걔네가 나보다 강하겠네.'
이런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저택을 계속 뒤져봤지만 어째서인지 아이들의 방과 천마의 방은 보였지만 남편의 방은 보이지 않았다.
'집에서 잘 안 지내는 사람인가?'
사이가 나쁘다고 하기에는 자식이 무려 넷인데.
아니면 모종의 이유로 사이가 좋았다가 헤어졌다는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지금 들어온 공간은 천마의 운명의 상대를 찾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
어쩌면 운명의 상대가 남편이 아닐지라도 어쨌든 이 공간에 천마의 운명의 상대는 존재하게 되어있다.
[아직 못 찾았느냐?]
[..조금 힘들군요.]
[흠..]
바깥이지만 천마의 목소리에서 약간 조바심이 나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된 이상 할 수 없다.
조금 아깝지만 쓸 수밖에.
'만들기 꽤 힘든 건데.'
품 속을 뒤져서 부적 하나를 꺼냈다.
구슬 속 공간이라 부적을 작동시킬 천기는 넘치고 넘쳤다.
기운을 불어넣고 부적을 던지자 부적이 한쪽 방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곧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천마에게 말을 전하며 서둘러 부적을 쫓아갔다.
그러자 부적이 날아간 곳은 다름 아닌 천마의 방이었다.
아까 분명 그 안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그 방.
'안에 뭐가 있나?'
부적을 따라 방 안에 들어가자 이번엔 방 안의 책꽂이 뒤쪽으로 부적이 날아갔다.
아무래도 저 뒤에 비밀 공간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유령과 비슷한 상태인 만큼 나도 책꽂이를 넘어가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
-꿀꺽
뭔가 불길했다.
심상치 않았다.
대체 왜 운명의 상대를 찾는 데 지하실까지 들어가야 한단 말인가.
뭐 희대의 죄인이라 숨어 살아야 하는 처지라도 되는 건가?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동안 이 공간 안에서 전쟁터에도 몇 번 갔다온 적이 있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지하실? 대체 왜?'
본능적으로 걸어 들어가기 싫은 비주얼의 계단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아무것도 안하고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눈 딱 감고 들어가서 확인만 하자.
의외로 별거 아닐 수도 있으니까.
'후.. 진정하자.'
애써 가슴을 토닥이며 계단으로 한참을 내려가자 다시 한번 상당한 잠금 장치의 문이 앞을 막아 서고 있었다.
나는 그냥 통과할 수 있지만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여기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으리라.
아니 그보다 정말 외부의 침입을 막는 용도가 맞나?
'이래선 안에서도 나오기 힘들..'
..불길한 상상이 머릿속을 스쳐갔지만 애써 무시하며 걸음을 마저 옮겼다.
그 뒤로도 몇 번의 잠금장치를 지나고 끝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지가 본인의 사지보다 두꺼운 사슬에 의해 단단하게 묶여있는 한 인영의 모습을.
'..우욱.'
진짜 그동안 별에 별 꼴을 다 봐왔지만 이건 색다른 쪽의 역겨움이었다.
생긴 건 멀쩡하던데 설마 이런 짓을 할 줄이야.
'하..'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이 공간이 그저 가상 공간에 불과 하다는 것.
저 사내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이 미래가 실제로 오지 않기를 기원했다.
그리고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일단 이쪽도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얼굴은 확인해 봐야 한다.
'잠시만 실례할게요..'
사내에게 다가가자 사내가 몸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
나를 못 느낄텐데?
기분 탓인가?
"아으.. 으.."
사내의 입으로부터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목소리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신음소리였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사내의 얼굴을 확인해보자
-쿵!
"헉..! 허억..!"
화들짝 놀라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사내의 얼굴은 굉장히 익숙한 것이었다.
다름 아닌 내 것 이었으니까.
-철컹 철컹!
"으아.. 으아아.."
사내가.
아니 '나'가 나를 똑바로 보면서 사슬에 묶인 팔을 휘적이고 있었다.
무서웠다.
보기 힘들었다.
머리는 푸석하고 몸은 비쩍 말랐고 피부 또한 햇빛을 전혀 받지 못한 것처럼 창백했다.
'뭐야?! 뭐냐고?!'
왜 내가 여기 있는 건데?!
왜 '내'가 저런 꼴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데?!
설마 내가 천마의 운명의 상대라는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