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살 끄니까-176화 (176/450)

EP.176

사양산업 종사자

레이첼의 예측은 맞았다.

나스닥으로 한정한다면 말이다.

"억울해요?"

"그렇지 않습니다!"

"억울하다고 얼굴에 씌어있는데."

"What? What? 저의 얼굴 말인가요?"

하지만 내기의 대상은 코스피.

세계적 추세와 달리 완전히 내려앉았다.

'농담도 못 치는 성격은 여전하네.'

레이첼이 손거울을 꺼내 자신의 얼굴을 확인한다.

홍시처럼 물든 뺨밖에 안 보인다.

"저를 놀린 건가요?"

"놀린 걸로 쳐요."

"왜 당신은 항상……!"

"아, 진짜."

백지장처럼 하얀 피부.

감정이 하나도 담겨있지 않은 얼굴은 더없이 도도하게 느껴진다.

'이년이.'

하지만 어리다.

아무리 어른스러워봤자 나에게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에 불과하다.

따악!

꿀밤을 한 대 때린다.

이 정도로 말을 듣지 않으면 더한 짓도 해버릴 수 있다.

"강간해 버릴까?"

"네?!"

"길거리에서 스트립쇼라도 춰야 얌전히 말을 들을래?"

레이첼을 벽에 몰아세운다.

170cm의 여자 치고 큰 키지만.

'하이힐을 안 신어서.'

그리고 나는 깔창을 좀 꼈다.

여자 하나 윽박지르는 건 일도 아니다.

그것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이다.

내기에서 패배를 했거니와.

"죄송, 죄송합니다."

글로벌 스탠다드를 잘 알고 있다.

외지에서 까불다가 험한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걸.

치안이 지나치게 좋은 한국에서는 그럴 일 없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인다.

'따먹고 싶게 하네.'

저자세의 레이첼.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튀어나오려는 욕정을 간신히 억누른다.

"내기에 걸린 약속이 뭐였죠?"

"패배한 사람이 승리한 사람의 말을 따릅니다."

"잘 알고 있네요. 오늘 하루 말 잘 듣는 게 좋을 거에요."

험한 짓 당하고 싶지 않으면.

약간의 협박을 가미해야 고고한 공주님이 고분고분해진다.

표정이 굳은 채로 고개를 끄덕인다.

본인의 동의도 받았으니 자리를 이동하기로 한다.

'시선도 신경 쓰이고.'

길거리.

그것도 사람이 혼잡한 시내다.

데이트 폭력이라도 당하는 줄 알 것이다.

심지어 외국인이니 더 신경 쓰일 만하다.

이 하얀 망아지가 얼마나 난폭한지 모른다면.

"한국에 온지 며칠 됐죠?"

"……두 달이 조금 지났습니다."

"다녀본 곳은?"

"많이는 없네요."

많이 다뤄본 입장이다.

그만큼 이 망아지가 얼마나 까탈스러운지도 잘 알고 있다.

'사무적으로 대답하긴.'

쌀쌀맞다.

사람의 접근을 불허한다.

처음 만났을 때 꼬시는 걸 포기했던 이유다.

알고 보면 별 거 없다.

인간 관계가 서투르다.

자신의 안에 타인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부우웅~!

레이첼을 조수석에 태운다.

차를 타고 가는 길 내내 말이 없다.

'먼저 말을 꺼낼 줄도 모르지.'

상황 때문.

그 이전에 다른 사람과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걸 어색해 한다.

약간 경제 오타쿠다.

경제 이야기만 나오면 입이 술술 풀리는 주제에.

"일단 그 후줄근한 옷부터 갈아입을까요?"

"평범한 일상복입니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

"마음대로 하시죠!"

일부러 화제를 제한시킨다.

그러자 정면만을 바라본 채 최소한의 대답만 한다.

'그래, 누가 이기나 보자고.'

북풍과 태양.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기 위해서는 따듯한 햇빛이 필요하다.

끼익−!

먼저 외관부터 바꾼다.

백화점 명품샵을 한 바퀴 가볍게 돌아본다.

"어머, 너무 잘 어울리세요!"

"입고 나갈 테니 계산해주세요."

"네, 고객님!"

옷.

"와, 고객님 스타일이~!"

"잘 맞는 거 같아요?"

"혹시 모델분이세요? 제가 몰라 봬서 너무 죄송합니다 고객님~."

"신고 갈 거니까 계산이요."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부츠.

"제가 쥬얼리샵 10년 근무하면서 이렇게 보석을 위해 태어나신 것 같은 분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이거 다 엄청 비싼 명품인데 들러리가 돼버렸다."

"적당히 주세요."

"하이 고슈진사마!

액세서리.

하나하나 맞춰갈수록 레이첼의 숨겨진 고귀함이 드러나게 된다.

'예쁘잖아.'

예쁘장한 것이 아니다.

중세의 귀족처럼 범접하기 힘든 아우라가 흐른다.

"이것은 당신의 취미인가요?'

"반쯤은."

"상응하는 액수를 계좌로 보내겠습니다."

하나하나가 명품.

직원들이 침을 흘리며 비위를 맞춘 것은 VVIP이기 때문도 있다.

'보통 이 정도 사주면.'

알아서 보픈을 한다.

직원도 그럴지언데 선물 받는 여자는 꿈을 꾸는 기분이다.

그조차 언짢다.

자신을 놀리는 거라고 생각하는지 오히려 한기를 풀풀 풍긴다.

끼익−!

예상했던 바.

햇볕은 나그네가 외투를 벗기 전까지 쓸모 없는 노력처럼 비춰지기 마련이다.

"최대한 커트하지 않는 선에서 스타일 좀 만져줘요."

"알겠습니다! 저희 팀이 최선을 다해 모시도록 할게용!"

뷰티 살롱에 간다.

고급 메이크업샵으로 가격의 상한선이 없는 대신 스타일을 최고로 꾸며준다.

사각!

레이첼은 외모에 관심이 없다.

어떤 면에서는 소라 이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고객님 이 정도 선이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아니면 조금 더 힘을 줄까요?"

"……."

"고객님……? 혹시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이 있을까요?"

"원래 말이 없어요. 그대로 해주세요."

한국은 기본적으로 외모에 관심이 많다.

하도 외모만 신경 써서 문제일 정도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지만.'

외국은 그렇지 않다.

태어나기도 너무 똑 부러져서 기본 단장만 해도 품격이 있다.

"아름다운데?"

"저는 당신의 인형이 아닙니다."

"오늘은 내 인형이야."

"……."

하지만 사람은 꾸몄을 때 진가가 나타나는 법이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내 취향으로 바꾼다.

'입술 존나 두꺼운 거봐. 입술만 먹어도 하루가 가겠네.'

화장품이 묻지 않는 선에서 살살 쓰다듬는다.

거울 앞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그녀는.

으득!

이를 씹는다.

자신이 치욕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다.

아티스트 아주머니가 어쩔 줄을 모른다.

사각! 사각!

얼음장을 밟고 있는 기분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는 프로.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작업을 마친다

결과물은 상당히 만족스럽다.

"그런 목적이셨나요?"

"응?"

"저와 하룻밤을 즐기시려고 치장을 시킨 거군요."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 길까지 한기를 흘린다.

까탈스러운 공주님이다.

'오, 그런 쪽으로도 머리가 굴러가?'

큭, 죽여라!

이세계에 태어났으면 그런 말을 달고 살았을 것 같은 스타일이 되었다.

"그야 그러고 싶지."

"역시……."

"이 자신의 음란함을 모르는 엉덩이 사이에 나의 아기 씨를 듬뿍 넣어주고 싶다던가."

"??!!"

레이첼의 귓가에 음담패설을 다이렉트로 꽂아 넣어준다.

여유로운 척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당황으로 물든다.

'이 씹년이.'

원한을 잊은 것이 아니다.

마음 같아서는 확실하게 강간해서 미혼모로 만들어버리고 싶다.

주위 평판이 땅에 떨어진다.

월마트 일용직을 전전하며 유아 휴게실에서 쓸쓸히 수유 하는 모습을 봐야 속이 조금은 풀릴 것이다.

쪼옥!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이 아름다운 여자의 인생을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뜨려줘야 온전히 만족할 수 있다.

"반항 안 해?"

"할 수 없으니까요."

"이런 짓 당하는 게 싫어?"

"당연합니다."

"심장은 엄청 두근대는데?"

하얗고 가느다란 목에 손을 흘린다.

따듯한 피가 흐르고 있는 경동맥에서 맥박이 느껴진다.

'졸라 긴장하고 있는 주제에.'

겉으로는 완벽히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다.

역시 내가 인정하는 여자답다.

쪼옥!

쪼옥!

도톰한 아랫입술을 입안에 넣는다.

그대로 삼켜버리고 싶을 만큼 푹신한 식감이다.

'입술이 참.'

소라도 맛이 있다.

하지만 동양인과 서양인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레이첼이 조금만 적극적으로 달려든다면 야성적인 키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안타깝다.

"와, 키스한다."

"여자 개예뻐……."

"배우야?"

"꺄!"

대낮의 길거리에서 이런 장면을 찍는 건 흔히 겪는 일이 아닌데.

행인들의 발걸음이 멈춘다.

노골적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그 레이첼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오른다.

'아직은 자극이 너무 세겠지.'

숫처녀.

소라와 달리 어느 곳도 개발이 안된 천연기념물이다.

이대로 놀리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적당히 완급 조절에 들어간다.

터억!

차 안으로 피신한다.

아까 것으로 완전히 삐진 듯 입을 꾹 닫고 있다.

"맛있었어요."

"여성은 음식이 아닙니다."

"일단은 칭찬인데?"

"저에게는 아닙니다."

"그럼 좀 더 맛있는 것을 먹을까?"

그런 레이첼의 턱끝을 살살 긁는다.

경동맥과 꽤 멀리 떨어진 지점인 데도.

'남자도 모르면서 센 척하긴.'

긴장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심박이 아까보다도 배는 빠르게 뛰고 있을 것이다.

먹힌다.

이 응큼한 아가씨는 남자와의 첫경험을 상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에요?"

'네?"

"진짜 음식 이야기인데."

"……."

"맛있는 걸 먹으러 가보자고."

레이첼의 굵은 허벅지를 툭툭 두들긴다.

훌륭한 힙라인의 소유자답게 허벅지도 못지 않다.

본인은 부끄러운 듯 스커트를 붙잡는다.

수치심과 분노, 온갖 감정이 뒤엉켜진 얼굴을 하고 있다.

'복수는 이제 시작인데 말이지.'

물론 지금의 레이첼과는 상관없다.

내가 멋대로 마음속 한을 풀고 있을 뿐이다.

그만한 스크래치를 꼭 새겨주고 싶다.

조금 악취미가 될 정도의 트라우마를.

"음식은 가리는 거 있어요?"

"당신이랑 먹는다면 뭘 먹어도 맛있게 느끼지는 않을 겁니다."

"그 말 후회하게 해드리죠."

레이첼의 첫경험을 제대로 망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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