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9화 〉 질투심에 못 이겨 심한 장난을 친 아델의 엉덩이를 때찌하는 세화, 말리려다가 그러려니 하는 실비아와 유리아 #2
* * *
새벽녘에 눈을 뜬 나는 침대에서 내려오려다가, 다리가 꽤나 무겁자 아래를 보았다.
그리고는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아델이 내 다리에 찰싹 달라붙어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마치 날 놓치지 않겠다는 듯, 이빨로 허벅지를 약하게 깨문 상태로 잠들어있었다.
얘는 또 언제 왔대.
아델의 밝은 금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준 난, 그녀를 조심스레 떼어내고 방에서 나왔다.
식당으로 가보니 주방에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메릴...! 메릴! 그러면 안 된다니까? 반죽 튀잖아...!”
“네에에!”
유리아의 질책어린 목소리, 그리고 천진난만한 메릴의 목소리가 뒤섞여 들려온다.
나는 이번엔 세화의 방으로 갔다가, 문 앞에서 대화소리가 들리자 귀를 쫑긋했다.
“미리 악의를 집어넣어보면 안 되나?”
“정의감이 투철한 사람의 마음에 극상성의 감정이 확 밀고 들어오면, 적응은 물론이고 아예 미쳐버릴 걸요? 서서히 녹여서 주인님의 마력과 잘 동화되도록 해야 되고, 그렇게 진심으로 영혼을 바치겠다는 마음을 먹어야 영원한 권속이 돼요.”
“그래...?”
진중한 말투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세화와 실비아.
아이테르 침식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니, 스텔라를 떨어뜨릴 방법에 대한 주제로 토론을 하는 것 같다.
“언니도 알잖아. 언니가 어떻게 점점 변해갔는지. 나중엔 살인까지 즐거워했으면서 왜 순진한 척이에요?”
“야... 그렇게 심하게 말하면 내가 뭐가 돼? 꺄아악! 허리 간지럽히지 마...!”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세화도, 유리아도 실비아와 아델이 오니 더욱 활기차진 것 같다.
알현실로 향한 나는 잘 정돈된 옥좌에 앉아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화륵!
동시에 내 앞에서 시뻘건 불꽃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미약한 불씨에서부터 커지기 시작한 그 불꽃은, 곧 이족보행 금수의 모습이 되더니, 머리에 뿔이 달린 거대한 마물로 형상화되었다.
마물들의 수좌라 불리는 발록이었다.
쿠웅!
활활 타오르는 전신으로 주변 온도를 후끈하게 달구는 발록.
자신의 무릎 한 쪽을 꿇은 녀석이 고개를 조아렸다.
마왕님을 뵙습니다.
이놈은 포탈을 타고 오는 것도 요란스럽단 말이지.
대놓고 등장한다며 여기저기 알리는 꼴이다.
자신감의 발로인가? 근데 멋있긴 하다.
“오랜만이구나. 그간 잘 지냈느냐?”
예, 마왕님. 어제 문후를 드리고 싶었으나 원치 않으시다기에...
지금도 딱히 부른 적은 없는데.
이놈은 백날 타오르는 불꽃답게 열정이 넘친다.
그래도 감격스럽구나.
“잘 와주었다.”
감사합니다.
“전선의 전황은 어떠하지?”
순탄합니다. 왕비님들께서 도움을 주신 덕분에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전보가 울렸고, 말파스가 아몬의 고성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어서인지 적들의 사기가 말이 아닙니다. 왕비님 두 분께서 추가로 입성하셨으니, 이젠...
“마음을 놓지는 마라. 말파스 이놈은 아주 음흉한 놈이니.”
예, 마왕님.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알현실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밖에서부터 여우 잠옷을 입은 아델이 눈을 부비며 들어왔다.
“지혁 씨... 왜 여기 계셔요? 근데 방 안이 왜 이렇게 뜨겁... 흐아악!”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칭얼거리다 기겁하는 아델.
뒤를 돌아본 발록의 얼굴을 보아서임이 분명했다.
“세, 세상에... 세상에...!”
천천히 발록에게 접근하여 녀석의 얼굴일 빤히 쳐다보다가, 내 쪽으로 달려와선 옆에 있는 옥좌에 폴짝 앉는 그녀였다.
발록을 향해 곧게 뻗은 검지를 내민 아델이 말했다.
“지혁 씨, 저 못생긴 마물은 대체 누구지요...? 어제 먹었던 빵이 올라오려고 하는군요!”
“발록이라고 하는 마물입니다. 모든 마물들의 수좌격인, 아주 강한 녀석이죠.”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럴 줄 알았다뇨?”
“마물들은 못생긴 순으로 힘이 강하잖아요.”
엄청난 편견이로다.
발록이 알아들었다면 화가 났겠군.
지금도 아델의 표정과 행동을 대충이나마 파악하고는 이를 악물고 있긴 한 것이 웃겼다.
아델의 뒷목을 살살 주물러준 내가 발록에게 명했다.
“오후에 전선에서 보지.”
.... 예... 소인은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화르륵!
불로 화해 사라진 발록.
손부채질을 하고 있던 아델이 불만 가득한 투로 물었다.
“못생긴 주제에 표정도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제게 불만이라도 품었던 건가요?”
“그냥 뭐... 약간 삐친 거죠. 마물들을 잘 대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오래 볼 사이인데.”
“아휴... 알았어요. 제가 참아야지요.”
“마침 잘 오셨네요. 할 말이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오늘 시간을 내어 이블 발키리들에게 마력을 나누어줬으면 좋겠습니다.”
아델이 고민에 빠졌다.
딱 보니 세화나 유리아에게 둘러주기엔 껄끄러운 것 같다.
아니, 유리아는 메릴을 소개시켜줬으니 예외겠지.
어떻게 설득을 해야할까 생각하던 나는,
“좋아요. 하지요.”
아델이 흔쾌히 고개를 주억거리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쉽게 둘러준다고? 뭔가 수상하다.
미심쩍은 눈빛을 한 내가 물었다.
“세화를 포함한 모두에게 둘러주실 건가요?”
“물론이지요.”
“정말...? 아무런 보답도 바라지 않고?”
“참내... 지혁 씨. 저는 쪼잔한 사람이 아니에요. 세화와 유리아 언니는 이제 저의 암... 아니, 자매잖아요.”
“방금 암퇘지라고 하려 했죠?”
“지혁 씨! 제가 해드린다고 했잖아요. 일단 어서 제 옆에 누우셔요.”
화제를 돌리는 아델.
씨익 웃은 나는 아델의 옆에 누워, 그녀의 뺨을 어루만져주었다.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나요?”
“지혁 씨도 참... 걱정이 태산이시네요. 제가 무슨 흉계를 꾸민다고 그러시지요?”
“믿겠습니다.”
세화와 유리아를 암퇘지라고 칭하긴 했지만, 자매라고는 자각하고 있다.
면피용으로 던진 말이 아니었다. 눈빛을 보니 진심으로 그리 여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심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
화아악!
침실 안을 가득 메우는 묵빛 기운.
아델의 마력을 받아들인 실비아는, 자신의 힘에 취했는지 어마어마한 기세를 마구 뿜어내고 있었다.
지구에서 공수해온 과일을 냠냠 먹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델이 말했다.
“침실이 망가지겠어요. 진정하셔요.”
그에 퍼뜩 정신을 차린 실비아가 기세를 거둬들였다.
“미, 미안... 근데 아델... 이거...”
“어떠신가요?”
“대단해...! 세 배 이상은 강해진 것 같아...”
세 배라... 이 정도면 보통인가?
신에게 비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기존 상태에서 세 배라면 마계에선 적수가 없을 것이었다.
“이렇게 퍼주는 것이 맞는 일인지 잘 모르겠네요. 감사인사도 없이... 아휴...”
대놓고 생색을 내는 모습이 퍽 귀엽다.
실비아 또한 같은 생각이었는지, 자그맣게 실소를 터뜨리고는 아델에게 다가갔다.
“고마워, 아델.”
“별 말씀을요. 포도 드실래요?”
“난 괜찮아. 너 많이 먹어.”
“제 성의를 무시하는 건가요? 아 하셔요.”
“진짜 괜찮은데...”
“어허...!”
아델이 못마땅한 소리를 내자, 실비아가 마지못해 입을 살짝 벌렸다.
그런 실비아에게 기어이 포도를 먹인 아델이 말했다.
“절 지켜줄 생각이시라면 여기 있어도 좋아요.”
“지켜준다니...?”
“아이 참... 유리아 언니가 제 힘에 취해선 덤벼들지도 모르잖아요.”
실비아가 헛웃음을 켰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냐는 듯, 그녀가 아델을 나무랐다.
“아델, 여기엔 주인님도 계시는데... 유리아가 과연 네게 해코지를 하려고 할까? 게다가 유리아는 너한테 메릴도 소개시켜줬잖아.”
사실 아델은 유리아보다는 세화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실비아도, 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딱히 언급하지는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나 간다?”
“어, 언니...! 잠깐 기다리셔요...!”
아까의 기세등등하던 태도가 온데간데없어진 아델이 실비아를 잡아채려고 했지만,
워낙 순발력이 뛰어난 실비아였기에 아델의 손을 손쉽게 피해버리고 말았다.
“이이...!”
분한 듯 주먹을 부들부들 떠는 아델.
날 바라보며 무언가 말을 하려던 그녀는, 곧이어 유리아가 들어오자 얼굴을 폈다.
“제가 엄청 사랑하는 유리아 언니가 오셨군요! 메릴은 어디 있지요?”
순식간에 태세가 전환되는 게 어이가 없다.
“메릴은 지금 자고 있는데...”
“그거 이상하네요. 메릴은 저와 자기로 약속했는데요...”
“네 네 거려도 금방 까먹어버리는 게 어린아이잖아.”
유리아의 대답에 아델의 분위기가 팍 죽었다.
“그렇지요... 어쩔 수 없네요...”
“다행히 메릴은 한 번 자면 깊게 잠드는 편이니까... 나중에 데려올게.”
그 말에 아델이 좋아라하며 마력을 일으켰다.
다시금 자욱하게 깔린 묵빛 기운은, 마치 아델을 챙겨주는 유리아에게 포상을 주듯 그녀의 코와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력을 받아들인 유리아가 당황해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델의 특수하기 그지없는 마력이 몸속으로 들어오자, 유리아의 눈빛이 쾌락으로 물들었다.
실비아처럼 힘에 잔뜩 취해버린 것이다.
“이건...”
일순 말을 잇지 못한 유리아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당장에라도 화살을 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런 유리아를, 아델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제 특별한 마력이 어떠시지요?”
유리아는 아델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꼭 안아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콧대가 높아진 아델이 말했다.
“저와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여기 있어도 괜찮아요.”
또 세화가 신경 쓰이니 유리아에게 넌지시 제의를 한다.
그냥 대놓고 날 지켜주세요! 하고 말하지, 굳이 돌려서 말할 이유가 있나...
“미안. 마물들한테 전황 보고를 받아야 해서... 다음에 같이 놀자. 고마워, 아델.”
아델의 정수리에 키스를 해준 유리아는, 아델이 무어라고 칭얼거리기도 전에 방을 나가버렸다.
그런 유리아를 지켜보던 아델이 폭삭 늙어버린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지혁 씨는 제 옆에 있을 거지요? 세화가 절 핍박하는 모습을 가만 두고 보지 않을 것이지요?”
“세화가 왜 아델을 핍박하겠습니까. 오히려 앞선 둘처럼 고마워하겠죠.”
“.... 그건 모르는 일이지요.”
네가 이상한 짓만 하지 않으면 된단다.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는 아델.
얼마 지나지 않아 세화가 웃는 낯으로 들어와 인사를 한다.
“안녕? 아델.”
그녀를 본 순간, 아델이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애써 시선을 피하려는 행동.
피식한 세화가 물었다.
“인사 안 해줘?”
“아, 안녕...”
“밥은 먹었어?”
“먹었는데에... 이, 일단 이것부터 받아...”
스으으으...!
한손을 뻗은 아델의 손바닥 안으로 모이는 마력.
아델은 둥그런 원형체가 된 그 마력을 세화에게 날려 보냈다.
투쾅!
마치 미사일을 발사하듯, 무지막지한 속도로 말이다.
실비아, 유리아를 강화시킬 때와는 전혀 다른 양상.
아델만의 소심한 복수였다.
세화는 그런 아델의 손속에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델의 행동을 예상했다는 듯 마력을 홱 낚아채, 마치 과일을 먹듯 한입 베어 물었다.
푸화악!
그와 동시에 세화의 몸에서 엄청난 마기가 피어올랐다.
쿠구구궁!
성 전체가 진동할 정도로 강대한 힘.
앞선 둘처럼 흐트러진 마력을 흡수한 게 아니라, 농축된 마력을 먹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온 신경을 집중해 아델과 세화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아델이 무언가 손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에서부터 비롯된 행동이었다.
‘괜찮은 것 같군.’
두 사람의 몸 내부에 흐르는 마력은 정상.
세화를 보니 눈을 감은 채로 자신의 기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순식간에 진동을 잦아들게 한 그녀가 진중한 투로 감사를 전했다.
“고마워, 아델.”
“.... 으응...”
끄덕도 없는 세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아델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소심하게 공격을 행한 것이 미안했는지, 귤을 하나 들고는 세화에게 내밀었다.
“귤 먹을래...? 너, 너한테는 특별히 큰 걸로 줄게...”
그래도 다행이었다. 공격을 하긴 했지만, 공과 사는 아는 것 같아서 말이다.
세화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진짜? 나 주는 거야?”
“응...”
“귤은 작은 게 맛있는데...”
“이, 이거 엄청 맛있는 건데...! 그럼 먹지 마...!”
“아냐. 먹을래. 입에 넣어주라.”
가까이 다가와선 입을 앙 벌리는 세화.
고르고 새하얀 이빨 양옆으로, 뾰족해진 송곳니가 보인다.
인간이었던 시절이 엊그제 같았는데, 감회가 새롭다.
조심스레 귤을 깐 아델은, 한 조각을 뜯어 세화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러자 입을 오물거려 귤을 씹어 삼킨 세화가 아델을 꼭 끌어안더니,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작은 것보다 훨씬 맛있네?”
“거봐... 내가 맛있다고 했잖아... 이 바보야...”
“응, 내가 틀렸어.”
“내, 내 말만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구... 앞으로 잘해... 알았지이?”
“물론이야. 잘 부탁해, 아델.”
예전의 그녀였다면 바보라는 소리를 들은 순간 당장 달려들었을 텐데...
마왕님은 왕비의 품격을 갖춘 세화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요.
아델은 한 발 물러서서 양보를 해주는 세화가 기꺼웠는지, 눈을 지그시 감고 가만히 있었다.
절로 아빠 미소가 지어지는 분위기다.
이대로만, 사고만 치지 말고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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