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5 옛사랑에게 안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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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릴은 성 어디에도 없었다.
산속의 집으로 돌아갔나 싶었던 유리아는 타이라트의 알현실을 찾아갔다.
여전히 과묵하게 책을 읽고 있는 그.
유리아는 복잡한 심경을 가진 채 그에게 다가갔다.
“마가렛은 만났느냐?”
“마, 만났어...”
“표정을 보아하니 설득의 설 자도 꺼내지 못했겠군. 너도 느꼈나보지? 마가렛은 인간으로 돌아가기 싫어한다는 것을.”
여전히 자신의 마음을 잘 읽는 타이라트.
자존심이 상했다.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여길 박차고 나갔는데 되려 기가 죽은 채로 돌아와서.
잠시 이를 악물고 부들대던 유리아가 주제를 돌렸다.
“메릴은 어디 있어?”
“그 아이의 위치를 왜 내게 묻지?”
“넌 마왕이잖아. 마물이 어디 있는지 정도는 알 거 아냐.”
“그런 전지전능함은 없다. 그 아이의 집에 있나보지. 메릴은 밤에 몰래 요리연습을 하니 그때까지 기다려보도록.”
산속은 외출범위 밖이다. 얌전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주억거린 유리아는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다 문득 며칠 전 타이라트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메릴은 불쌍한 아이니 잘 대해주라는 말.
동시에 메릴의 부모님이 2년 전에 죽었다는 것도 기억났다.
“메릴의 부모는 왜 돌아가셨어? 같은 마물에게 잡아먹힌 건가?”
“인간에게 죽었다.”
그 말에 유리아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직 성장해야 하는 아이인데 부모를 사지로 내몰다니... 이 나쁜 자식...”
“오해를 하고 있구나. 나는 메릴의 부모에게 그 아이를 잘 보살피라는 명령만 내려놓았다. 전투엔 참가하지 않도록 했지. 네 말처럼 메릴은 성장기 아이니까.”
“.... 그럼 왜...”
“제 멋대로 오해한 것에 대해 사과부터 하거라.”
“.....”
확실히... 자신은 선입견을 가진 상태로 타이라트를 쏘아붙였다.
메릴을 만났을 때 가졌던, 마물에 대한 선입견처럼.
사과하기엔 껄끄럽지만... 메릴의 과거를 듣고 싶으니까 눈 딱 감고 창피함을 감수하자.
“미, 미안해...”
“훌륭하구나.”
“뭐가?”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지. 힘이 있는 존재일수록 더더욱. 네 정중한 사과, 고맙게 받아들이마.”
유리아는 다정해진 타이라트의 말투에 마가렛을 만난 직후부터 심란하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칭찬까지 해주니 왠지 모르게 기쁜 것도 같았다.
하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이제 알려줘. 메릴의 부모가 왜 죽었는지.”
책을 탁 덮은 타이라트가 말했다.
“마계는 항상 극야가 지속되는 곳이다. 메릴의 부모는 그 아이가 해를 보지 못하는 것을 늘 안타까워했지. 메릴 또한 해님을 보고 싶다며 칭얼거렸고.”
메릴은 한 번도 해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녀의 부모님이 봉변을 당했다는 소리인데...
“메릴의 부모는 그녀를 위해 중간계의 경치가 좋은 일출 장소를 찾아보려다가 인간들에게 죽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그럼... 메릴은 인간이 부모를 죽인 사실을 알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같은 인간인 자신을 잘 따른다는 말인가?
정말 착하고 순수한 아이였다.
아무리 마물이 약육강식의 법도를 마음속 깊이 이해하고 있다고 해도 그러기는 쉽지 않을 텐데.
유리아는 여기 있으면 있을수록 자신의 가치관이 뒤바뀌는 것을 느꼈다.
인간에게 여러 종류가 있듯, 마물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정서가 있다.
사랑을 하고, 화낼 줄 알며, 슬퍼할 줄도 안다.
이런 희로애락 외에도 여러 다양한 감정을 느낀다.
여기에서 힘 있는 자의 명령을 무조건적으로 따르니 문제가 생길 여지가 거의 없다.
저번에 마물은 인간보다 낫다는 말에 공감했었는데, 지금 또 공감이 된다.
“알려줘서 고... 마워... 이만 돌아갈게.”
“그래.”
타이라트는 다시 책을 펼치고 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돌아가겠다고 말했던 유리아는 옥좌의 계단 앞에서 손을 꼼지락거렸고 말이다.
그녀를 흘끗 살핀 타이라트가 물었다.
“할 말이 더 있나?”
“뭐...?”
“가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유리아가 흠칫했다.
타이라트의 집중하는 모습이 지혁의 멋진 모습과 닮아 멍하니 보고 있었는데...
괜히 얼굴이 붉어진 유리아는 순식간에 변명거리를 생각해냈다.
“아, 그... 메릴을 보고 싶어.”
“그러니 산까지 외출범위를 넓혀 달라?”
“마, 맞아... 그래줄 수 있어?”
“불허한다.”
유리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지금까지 말도 잘 들었는데 보상을 내려줘야 맞는 게 아닌가?
아니, 엄밀히 말하면 가지 말라는 곳에만 안 가고 매번 타이라트의 속을 썩였지만.
어쨌든 기분이 나쁘지는 않고 조금 섭섭했다.
자신을 사고뭉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괜히 반항심이 든 유리아가 몸을 돌리고 일부러 구두소리를 크게 내며 알현실을 나갔다.
방으로 돌아온 유리아는 신경질적으로 발을 차면서 구두를 벗어던졌다.
침대에 털썩 누운 유리아가 생각했다.
‘진짜 짜증나... 자존심 내팽개치고 부탁했는데 그것도 안 들어줘?’
속으로 꿍얼대던 유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감정기복이 너무 제멋대로가 되는 기분. 이래도 되는 걸까 싶다.
한참동안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던 유리아는, 자신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반색하며 달려 나가 문을 열었다.
벌컥!
“우와앙!”
문이 열림과 동시에 들려오는 요상한 비명소리.
아래를 바라보니 메릴이 철퍼덕 넘어진 채 겁을 먹고 있었다.
깜짝 놀란 유리아가 그녀를 얼른 안아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미안해. 놀랐어?”
“네엥... 놀랐어요...”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양팔을 벌린 채 유리아에게 들려 있던 메릴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떴다.
“저 보고 싶었어요? 정말요?”
“응. 엄청 보고 싶어서 목이 빠져라 기다렸어.”
“헤헤...”
해맑은 미소를 짓는 메릴.
누가 자신을 찾아주니 기쁜 모양이었다.
유리아는 메릴을 침대에 내려놓고 빗을 꺼내 그녀의 꼬리를 빗겨주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세 개의 꼬리. 무척 귀엽다.
“어디 갔었어?”
“산속 집이요. 청소하느라 조금 늦었어요.”
“청소?”
“누가 자고 간 흔적이 있었거든요.”
그 말에 유리아가 걱정스런 얼굴을 했다.
“누군데? 뭐 훔쳐가기라도 했어?”
“그건 아니에요. 그냥 잠만 잔 것 같아요. 처음 맡아보는 냄새였는데... 엄청 끔찍했어요.”
“떠돌이 마물이라도 나타난 건가?”
“몰라요.”
침입한 흔적을 발견했는데도 태평한 메릴이었다.
유리아는 이 순진무구한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이 정말 싫었다.
“그냥 여기서 살지. 나랑 같이.”
“마왕님이 싫어하셔요.”
“내가 말해주면 되잖아. 저번처럼...”
메릴이 짧은 다리를 교차하며 엄청난 고민을 했다.
“우웅... 집 지켜야 되는데...”
침입자는 메릴이 집을 지키고 있다면 좋아라할 것이다.
메릴은 엄청 약하니까. 죽이고 빼앗아 자신의 보금자리로 삼으려 할 테지.
유리아가 슬픔이 가득한 표정을 연기하며 물었다.
“넌 내가 싫어?”
“아니요! 엄청 좋은데요?”
“그런데 왜 나랑 같이 있기 싫어해? 엄청 서운하다...”
메릴은 유리아의 표정을 보고 안절부절 못했다.
그녀가 허겁지겁 고개를 주억거리며 유리아를 달랬다.
“유리아 님이랑 같이 있을게요! 저랑 숨바꼭질하면서 놀아요! 요리도 같이 만들고... 그러니까 울지 마세요!”
“약속했다?”
“네! 약속...”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메릴.
유리아가 방긋 웃으며 손가락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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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성을 들쑤신 두 사람은 요리연습이라는 핑계로 주방까지 마구 헤집어놓았다.
온갖 먹거리를 양산한 둘은 식탁으로 가 음식의 맛을 보았다.
유리아는 지구에서 지혁을 위해 여러 음식을 연습한 전적이 있었고, 메릴도 재능이 있어서 음식의 맛은 나름 괜찮았다.
그렇게 깔깔거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메릴의 귀가 쫑긋했다.
같은 종족을 감지했다는 의미. 그 정체는 물론 타이라트일 터였다.
끼이익...
식당 문이 열리며 예상대로 타이라트가 등장했다.
의자에서 폴짝 내려간 메릴이 그에게 달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마왕님! 안녕하세요!”
타이라트는 메릴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어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메릴이 배시시 웃더니 식탁의 음식들을 가리켰다.
“유리아 님이랑 제가 만들었어요!”
“알고 있다.”
“어떻게요?”
“시끄럽더구나. 온갖 주방용품이 떨어지는 소리가 다 들렸느니라.”
메릴이 시무룩해졌다. 마왕에게 방해가 됐다고 생각하니 슬픈 모양.
발끈한 유리아가 일어나 따졌다.
“시끄럽다니... 요리사가 꿈인 아이이고 네가 여기서 연습해도 된다고 허락했잖아!”
“시끄러운 것을 시끄럽다고 하지, 그럼 무어라고 하느냐?”
“어린아이의 마음도 생각해줘야지!”
“흐음...”
한 차례 턱을 쓰다듬은 타이라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로군. 사과하마, 메릴.”
그에 메릴의 얼굴이 무척 밝아졌다.
유리아는 타이라트가 곧바로 자신의 말을 인정하고 사과하니 제법 놀랐다.
저 자존감으로 똘똘 뭉친 남자가 미안하다는 말을 하다니... 신선했다.
절대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자비인가?
가슴이 두근거린다. 저 여유로움은 닮고 싶긴 하네...
‘지금... 부탁해볼까?’
현 상태의 타이라트는 다소 온화해보였다.
그렇다면... 부탁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았다.
“저기...”
“음?”
“메릴의 집에 침입자가 들었대. 혼자 가면 위험하고... 난 산속으로는 갈 수 없으니까... 메릴과 여기서 함께 지내도 돼?”
“침입자라니? 무슨 소리지?”
“몰라. 메릴의 집에서 하룻밤 자고 도망친 것 같아. 불안하니까 나랑 며칠 살게 해줘.”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던 타이라트.
유리아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허락하겠다.”
그 말에 유리아는 안도를, 메릴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
두 사람의 다른 반응에 피식한 타이라트는 마력으로 수저를 가지고 와 스프를 뜨려고 했다.
그러자 메릴이 화들짝 놀라 그를 제지한다.
“마왕님! 새 걸로 가져올게요!”
“번거롭잖느냐. 되었다.”
“그래도... 식었는데...”
메릴의 걱정을 무시한 타이라트가 스프를 입으로 가져갔다.
맛을 음미한 그가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렸다.
“맛있구나.”
그 말에 메릴이 신나하며 방방 뛰었다.
유리아의 얼굴엔 희미하게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그녀는 현재의 상황이 마치 가족들의 일상 같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가장인 타이라트, 아내인 자신, 그리고 귀여운 딸 메릴.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포근한 기분이 그 감정을 밀어낸다.
그녀가 풋풋한 생각을 하는 사이, 한 차례 더 스프를 뜬 타이라트가 메릴에게 말했다.
“침입자가 왔다면 내일 수하들을 보내 조사를 해야겠구나.”
“우웅... 남들이 저희 집에 오는 건 싫은데... 아, 마왕님하고 유리아 님은 오셔도 돼요!”
“허면...”
타이라트는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유리아가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며 나가고 싶다는 마음을 여실히 표현했다.
메릴을 당겨와 그녀의 귀를 접은 유리아가 잽싸게 말했다.
“집만 조사해보고 바로 돌아오면 되잖아. 절대 도망가려고 하지 않을게. 난 아직 엄마도 설득하지 못했어.”
“정 그렇다면 산까지 허용해주마.”
“저, 정말...?”
설마 승낙해줄 줄은 몰랐는데 이게 웬 떡이람?
“그래. 메릴과 함께 들러보아라. 위험한 일이 있다면 곧바로 보고하도록 하고.”
기쁜 마음을 애써 삼킨 유리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알았어... 너는 안 가?”
“널 믿겠다.”
두근!
유리아의 가슴이 좋은 느낌으로 뛰었다.
인정을 받으니 뭔가 뿌듯했다.
그녀는 돌연 갈팡질팡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이라트에게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자신이 예상하고 있는 게 맞는지.
귀를 접혀 버둥거리고 있는 메릴의 얼굴을 감싸 끌어안은 유리아가 용기를 냈다.
“진실을... 알고 싶어.”
앞뒤를 다 뺀 물음임에도, 타이라트는 유리아의 질문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아직이다.”
“.....”
반발하고 싶지만 그러면 타이라트가 화를 낼지도 모른다.
유리아는 결국 알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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