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1 충격과 공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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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이 많았답니다. 왕성을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녀서 혼이 나기 일쑤였어요.”
“그래 보이더군.”
“마왕님께서 이해를 해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어요.”
“물론이다. 네 딸이니 당연히 그래야겠지.”
“아앙...♡ 역시 마왕님... 그와는 그릇이 달라요...!”
두근!
알현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유리아의 심장이 어제와 같이 뛰었다.
아양을 떠는 목소리는 분명 엄마의 그것.
어제처럼 신음소리가 아니었기에 더욱 확실해졌다.
게다가 대화내용... 저건 분명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렸을 때의 자신은 저 말마따나 호기심이 많았다.
물론 꼬마일 때 호기심이 없는 아이가 있겠느냐만... 저것 말고도 대화의 맥락은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인내심이 완전히 바닥난 유리아가 알현실 문을 뻥 찼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져나간 문짝.
유리아는 어두컴컴한 알현실의 옥좌 앞까지 달려갔다.
그리고는 곧바로 빛을 뿜어냈다.
화아악!
밝은 연두색 빛이 옥좌로 향하고, 유리아는 앉아있는 타이라트의 어깨를 뒤에서 주무르고 있는, 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살폈다.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금발머리, 큼지막한 파란 눈동자.
유리아 자신보다는 순한 아름다운 눈매까지...
“어... 어머니...”
40대 초반이라고 하기엔 믿어지지 않는 외모를 가진 자신의 어머니, 마가렛 엘레나르였다.
패닉에 패닉.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입을 살짝 벌린 채 풀린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는데, 마가렛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도도하게 앞으로 걸어왔다.
“왔니? 유리아. 내 딸... 마왕님께서 네가 도착했다고 말씀해주셨단다.”
풍만한 가슴 윗부분을 훤히 드러낸, 몸매를 두드러지도록 하는 딱 달라붙는 흑색 드레스를 입은 마가렛.
걸어올 때마다 곧게 뻗은 긴 다리가 얼핏 보이고, 굽이 굉장히 높은 검은색 하이힐이 관능미를 더해주었다.
드레스와 같은 색상의 웨딩장갑은 자신이 악에 떨어졌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많이 바뀌었구나? 머리카락도 그렇고... 그래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어. 어서 이리 오렴.”
“아니야... 넌 어머니가 아니야...”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리워하던 어머니가 맞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습 그대로.
아니, 흔들리지 말자. 요는 언제 왔느냐다.
저 어머니의 탈을 쓴 마물이 방금 도착했다면... 메릴의 귀가 쫑긋하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된다.
“후우... 후...”
간신히 감정을 조절한 유리아.
그녀가 마가렛에게 무언가를 물어보려 할 때, 타이라트가 먼저 선수를 쳤다.
“유리아는 마가렛 네가 어미의 모습으로 변신한 마물이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그 말에 마가렛이 한손을 입으로 가져가 호호 웃었다.
“어머, 정말 실망스럽네요. 변신한 마물이라니... 그래도 반은 맞았네요?”
“아직 아니니 지금 상황에선 틀렸다고 볼 수 있겠지.”
“그도 그래요.”
유리아는 지금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반은 맞아? 지금은 아니니 틀렸다?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마왕님, 예쁜 우리 딸이 너무 의심스러워하는 것 같은데... 제가 직접 입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어요?”
“허락하마.”
“감사합니다♡”
교태를 부린 마가렛이 유리아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농염한 미소를 지었다.
“엄마는 한 시간 전에 도착해 마왕님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어.”
“거... 짓말...”
“정 의심스럽다면 뭐든지 물어보렴.”
“무... 무슨...?”
“이 어미와의 추억들은 물론, 내가 널 배었을 때 꾸었던 태몽까지 전부 말해줄 수 있단다.”
“.....”
“말해달라고? 알았어. 왕국력 3017년, 난 버러지와의 교미 직후 널 배었단다. 석 달 뒤 마탑의 마법사 한 명이 내가 임신해왔다는 사실을 알려왔지. 왕국은 축제에 휩싸였어.”
나긋한 목소리로 유리아를 처음 수정했을 당시를 설명해주는 마가렛.
멍하니 이야기를 듣던 유리아의 몸이 휘청거렸다.
“아...”
어렸을 때 마가렛에게 자신이 언제 수정했고, 언제 처음 꿈틀거렸는지, 언제 처음 배를 찼는지 들었었다.
어떤 말을 하면 어머니의 뱃속에서 반응을 보였는지도 말이다.
그리고 지금의 어머니는 그녀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로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심지어 유리아 자신이 어렸을 때 어떤 사고를 쳐서 어떻게 혼났는지까지 상세히.
지금 저 사람이 어머니가 아니면 누가 어머니란 말인가?
오랜 시간 마가렛의 따사로운 말씀을 듣던 유리아는, 결국 눈앞의 여자가 어머니임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부정하고 있던 생각이 부정되는 순간의 느낌은 최악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리웠던 감정이 복받쳐 올라서 그 느낌을 순화시켜주었기 때문.
“어머니...”
눈물이 한 방울 또르르 흘러나왔다.
마가렛도 마찬가지. 그리움과 기쁨이 담긴 눈물을 흘렸다.
“유리아, 여긴 왕국이 아니란다. 엄마라고 불러도 돼.”
자신의 마음을 꿰고 있는 자애로운 마가렛의 말.
유리아의 입술이 떨려왔다.
“어, 엄마...”
“옳지. 우리 딸... 보고 싶었어.”
마가렛은 양팔을 벌리고 유리아의 목을 끌어안았다.
따스한 느낌. 이 느낌이 무척 그리웠던 유리아는 마가렛의 등에 팔을 두르고 엉엉 울었다.
그렇게 모녀는 다소 요상한 상황에서 재회했다.
한참 후, 어머니를 꽉 끌어안고 울던 유리아는 타이라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보기 좋은 상봉이로구나.”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타이라트의 마수에 걸려든 어머니를 구해야 한다.
유리아는 마가렛과의 포옹을 풀고, 그녀의 팔을 잡아 자신의 등 뒤로 옮겼다.
그리고는 타이라트를 향해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외쳤다.
“타이라트...! 엄마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모르긴 몰라도 타이라트는 여러 마물들의 능력으로 어머니를 세뇌했을 것이다.
정상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탈출해야 한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 사랑을 나눈 것밖에는 없지.”
“거짓말하지 마!”
“답답하구나, 유리아여. 이젠 믿을 때도 되지 않았나?”
“이 쓰레기 같은 자식... 읏!?”
유리아의 몸이 굳었다.
얇은 병을 딴 마가렛이 그것을 유리아의 코에 가져다댄 직후 일어난 일이었다.
‘어... 엄마...?’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
눈동자만 빼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비스트 슬레이어 상태의 자신이 마비 따위에 걸리다니.
하지만 그 이상한 일은 현실이었다.
유리아는 자신의 몸을 천천히 살피는 마가렛에게 의문스런 시선을 보냈다.
“유리아, 마왕님께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
어머니가... 타이라트를 두둔한다.
더군다나 자신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표정엔 경멸의 감정이 담겨있다.
그게 너무 슬펐다. 혈육인 자신보다 타이라트를 더 생각하는 것 같아서.
“마비약이 잘 먹혔구나. 잘했다, 마가렛.”
낮게 웃어재낀 타이라트의 말에, 마가렛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마왕님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답니다.”
유리아는 덜컥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설마 겁탈이라도 할 생각일까?
“겁을 먹었구나. 걱정하지 마라. 네게는 손 하나 대지 않을 테니.”
인자한 얼굴을 한 타이라트의 말이었다.
유리아는 움직이지 못하는 와중에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또 자신의 생각을 읽었다. 독심술이라도 익힌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메릴을 이용해 확인도 마쳤겠지? 마가렛은 인간이다. 그것도 오늘까지지만.”
이번에도 또다. 완전히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는 수준.
그나저나 오늘까지라니? 그게 무슨 말일까?
유리아는 자신의 뺨에 마가렛의 손길이 닿자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딸의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은 마가렛이 구슬픈 목소리로 묻는다.
“유리아, 왜 마왕님께 적대감을 갖는 거니?”
‘그야 당연히...’
유리아는 자신의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확실히 자신은 타이라트에게 과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예전엔 그가 왕국을 멸망시켜서, 주변 사람들을 남김없이 죽여서 복수의 칼을 갈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감정.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지혁의 정의에 동화된 상태에서 과거로 돌아왔다.
하찮기 그지없는 백성들이 많이 죽는 건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다.
무능한 아버지가 왕국을 다스리는 것도 싫었고, 자신에게 거짓말을 해왔기에 증오하는 상태다.
물론 예전의 앙금이 남아있긴 했다.
왕국이 멸망할 때 마음이 찢어졌던 그 느낌을 생생히 기억할 수 있다.
허나 지금은? 그 찢어지는 마음은 아무렇지도 않은 마음으로 바뀐 상태다.
인간들은 악. 당연히 죽어 마땅했으니까.
더군다나 어머니도 버젓이 살아있었으니... 굳이 적의를 가질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타이라트는 약육강식의 끝에 서있는 인물.
이 말인 즉, 자신이 선망하는 이상향을 만들 수 있는 존재다.
지혁처럼 절대자의 풍모를 보여주는 그러한 존재.
그렇다면 존경을 해야 하는데... 왜 자신이 지금 적개심을 표출하고 있는 걸까? 혼란스럽다.
지구의 옛 격언에 이런 말이 있었다.
강자는 모든 것을 갖고, 약자는 복수를 꿈꾼다고.
지금 자신이 하는 양이 딱 약자의 모습이었다.
그토록 싫어하는, 모기만도 못한 모습을 자신이 보여주고 있었다.
유리아는 마가렛에게로 향해있던 눈동자를 돌려 타이라트를 바라보았다.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
자신감 있는 표정이 더없이 어울린다.
하지만 그를 선망하고 싶지는 않다.
타이라트는 지혁이 아니기 때문이다.
강한 건 인정한다. 하지만 자신이 모셔야할 사람은 오직 지혁 뿐이다.
“어머? 유리아의 눈이 굳건해졌어요. 기특해...”
마가렛의 요염한 목소리.
타이라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속에 담아두고 있는 사람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기 때문이다.”
“누굴까요? 유리아가 연모하고 있는 사람은...”
“포악하지만 자비로운, 왕의 자격이 있는 사람이겠지.”
“마왕님처럼요?”
“처럼이라... 비슷하구나. 유리아는 며칠 안으로 모든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잡담은 이쯤하고 시작하지.”
“네~”
마가렛은 옥좌로 다가가 타이라트의 옆에 시립했다.
“딸에게 말해주어라. 지금부터 네가 뭘 할 예정인지.”
“알겠습니다♡”
주변이 환해지는 듯 한 화사한 미소를 지은 마가렛이 유리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유리아, 내 딸... 너는 인간이 싫지? 약한 주제에 세 치 혀로 사람을 지배하려는 데다, 책임은 지기 싫지만 욕망은 밖으로 표출하고 싶어 하는 그런 인간이.”
‘....?’
“차라리 마왕님의 명을 최우선 순위로 삼고, 약육강식의 법도를 따르는 마물이 더 낫다고 생각하잖니.”
‘그건...’
마물들은 다스리기가 쉽다.
강한 힘만 보여주면 알아서 기기 때문이다.
힘이 있다면 뒤통수를 맞을 염려 따윈 없다시피 봐도 되고, 강대한 존재인 마왕의 명을 무조건적으로 따른다.
또한 마물인 메릴을 보면 순수한 아이의 모습이 보여서 싸늘한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확실히... 인간보다 마물이 더 나은 것 같다.
“엄마도 인간이 싫단다. 인간이면서도 인간을 싫어한다니... 너무 모순적이지 않니? 그리고 나는 우리 예쁜 딸이 인간인 날 싫어한다고 생각하니 정말 끔찍해.”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자신이 마물인 메릴을 좋아하는 것처럼, 모든 인간이 싫은 건 아니다.
스스로의 위치를 알고 있는 깨어있는 인간이라면... 그리고 자신과 가까운 인간이라면 악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엄마는 마물들과 함께 있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 아주 자유롭거든. 정치 같은 인세의 복잡한 일에서도 벗어날 수 있고...”
어머니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데 왜 지금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일까?
어리둥절해하는 유리아를 향해, 마가렛이 생긋 웃으면서 옷을 벗었다.
풍만한 몸매를 창피한 기색 없이 드러내는 마가렛. 유리아가 당황해했다.
‘엄마! 지금 뭐하는...’
그러다가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마가렛의 굴곡진 복부 밑부분에 자리한, 시뻘겋게 빛나고 있는 불길한 문양으로.
“그래서 나는 마물과 같은 존재가 되려고 해. 마왕님의 권속이 되어 사명을 다할 거야.”
‘뭐... 라고...?’
자신이 대체 무슨 소리를 들은 걸까? 무슨 존재가 되겠다고?
“지금부터 인간의 껍질을 벗어던지는 이 엄마의 모습을 봐주었으면 좋겠어.”
완전히 나체가 된 마가렛이 타이라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를 향해 공손히 절을 한 그녀가 묻는다.
“마왕님, 마왕님의 옥체에 손을 대어도 괜찮을까요?”
그러자 타이라트가 인자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허락한다.”
“감사합니다♡”
천천히 타이라트의 곤룡포 밑으로 손을 가져가는 마가렛.
유리아는 떨려오는 동공으로 그런 마가렛을 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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