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협지 안으로 들어와버렸다-1102화 (1,103/1,419)

EP.1102 1103. 두근거림.

터벅 터벅 터벅 터벅

바깥으로 나온 운설은 터덜거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생각이 많아지니

자연히 걸음이 느려질 수밖에 없던 것이다.

'내가...후배님을 좋아한다고?'

요랑은 말하였다.

자신이 사실은 선우를 사랑하고 있다고.

하지만 차마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핑계를 만들어 애써 부정하고 있다고 말이다.

'......말도 안돼....그럴 리 없잖아..내가 어떻게 후배님을..'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자신이 어찌 선우를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이 차이만 따져도 무려 백 년이야! 백 년! 무려 증손자뻘이라구!'

나이 차만 한 세기에 가까운 차이가 났다.

따지고본다면 증손자뻘이라 지칭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그를 사랑한다니

어찌 말이 될 수 있겠는가.

'게다가 .....후배님은...호색한이잖아?....내가 그런 후배님을 사랑할 리 없잖아..

본디 세상 모든 여자들은

자신만을 바라봐주고 사랑해주는

단 한 명의 남자를 사랑하는 법.

자신 또한 다르지 않았다.

한 여자에게 정착하지 않고

수 많은 여자들을 사랑하는 태생적인 난봉꾼이자

바람둥이인 선우는

이상형의 기준에 완전히 벗어난 존재인 것이다.

그런 그를 사랑할 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래....요랑님이 비약하신 것 뿐일거야.....그저 좋은 후배로 볼 뿐 사랑하는 건 아니니까...'

요랑은 영물이기에

인간의 감정이 무지할 수밖에 없었다.

친애의 감정과 애정을 혼동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엄연히 다르면서도 비슷한 부분이 존재하는 것들이니 말이다.

'난 사랑하지 않아..않는다구...전부 요랑님이 착각한 거야..'

그렇게 운설은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이며 합리화하기 시작하였다.

모든 건 요랑의 착각이라고

그녀가 잘못 본 게 분명하다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되뇌이며

합리화해도 도저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건 핑계야

단호했던 요랑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까닭이었다.

-좀더 네 감정에 솔직해져봐

-좋아하면 안될 핑계만 찾고 있잖아?

-넌 선우를 사랑하고 있어.

끊임없이 떠올려지고 또 떠올려졌다.

요랑이 했던 말 한 마디 한 마디들이 말이다.

그리고 그 떠올려지는 요랑의 말들은

운설을 의심을 품게 만들었다.

스스로의 감정을 속이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좋아하는 감정을 감추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의심을 말이다.

'아니야..그럴 리 없어...내가 감정을 속이다니...'

애써 부정하지만 여전히 확신할 수 없었다.

만에 하나라는

일말의 가능성이 그 확신 갖지 못하게 만든 까닭이었다.

'머리 아파.'

두통이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생각이 많아지고 머릿속이 복잡해지니

절로 과부하가 걸린듯 하였다.

'이대로 있다간 머리가 터질 거야......휴식이 필요해.....정리할 시간이...필요해!'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혼자만의 공간이었다.

혼자만의 공간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타박 타박 타박 타박

운설은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터덜거리며 전과는 비교조차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매끄러운 움직임이었다.

거처에 한시라도 빨리 닿고 싶다는 그녀의 의지가

보법으로 발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스르르륵

그렇게 그녀는 매끄럽기 그지없는 보법을 밟으며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거처가 있는 곳을 향해서 말이다.

*********

뒹굴 뒹굴 뒹굴 뒹굴

거처에 도착한 운설은 침상 위에 올라 뒹굴고 또 뒹굴었다.

머릿속의 복잡함을 잊어보려 발악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뒹굴거리고 발악을 해도

복잡한 머릿속이 도저히 안정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골이 아파오는 부작용이 느껴지는듯 하였다.

'이러다간 끝도 없어....제대로 마주해야해...요랑님 말대로..'

벌떡

곧이어 운설을 몸을 일으켜세운 채 눈을 빛냈다.

결심을 한 것이다.

핑계를 전부 배제하고

제대로 마주해보자고

선우라는 남자에 대한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말이다.

'....조건들을 전부 배제하고...후배님에 대해 생각해보자....그럼 정말 좋아하는 지 알 수 있을 거야.'

운설은 모든 조건들을 잊기로 하였다.

나이 차가 어마어마하다 못해 증손자에 가까울 정도로 난다는 둥

등선을 위해서 인간의 감정을 배제했다는 둥

난봉꾼을 사랑할 리 없다는 둥

요랑이 지적한 모든 핑계들을 배제하기로 한 것이다.

'후배님의 얼굴은 내 취향인건가?'

취향이냐 아니냐로 묻는다면

취향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천생 무인인 그녀에게는

기생오라비처럼 뺀질뺀질하고 비리비리한 남자보단 선우처럼 시원스럽고 남자다운 얼굴이 더욱더 호감가는 외모였으니 말이다.

'....후배님의 육체는...내 취향인가?'

이 또한 합격이었다.

육 척에 다다른 커다란 키.

머리가 소두처럼 느껴질 정도로 떡 벌어진 어깨.

커다란 돌덩이가 옹골차게 박혀있는듯 우람하기 그지없는 대흉근

쇠줄을 꼬아엮은듯 촘촘하기 그지없는 팔근육

통나무와 다를바없는 두터운 하체근육까지

무인으로선 최상의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이가 바로 선우였다.

그런 그의 육체를 어찌 싫어할 수 있겠는가

화아아아악

그때 운설의 얼굴이 잔뜩 붉어지기 시작하였다.

선우의 몸을 상상하니 괜스레 부끄러움이 물밀듯 차오른 까닭이었다.

'....수치스러워...'

처녀에게 외간 남자의 육체를 상상하는 일은

상상이상으로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절로 얼굴이 붉어지고 부끄러움이 물밀듯 차오르는 것이다.

'.....아니야.....검증을 위해서라면...이건 당연한 일이야.'

절레 절레

곧이어 운설은 격렬히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취향에 부합하는 지 알아야

불호의 여부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지 않겠는가

'성격이 매력적인가?'

매력적이었다.

그와 같이 있으면 즐겁고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가볍다보긴 어려운 게

진중해질 땐 그 위압마저 느껴질 정도의 무거움을 내보였다.

시의적절하게 무게감을 다르게 주는

변화무쌍함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런 성격이 어찌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직위는..'

무려 왕이었다.

황제를 제외한다면 만인지상에 가장 가까운 위치에 서있는 것이다.

'무력은....'

천하제일검이라고 불리우는 선우였다.

실제로 운설 또한 동의하고 있었다.

근시일내에

자신을 뛰어넘고 진정한 천하제일검에 올라서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재산은....'

요랑에게 듣기론 당가주의 비자금으로

수 백만냥을 착복했다고 들었다.

게다가 그는 북경성을 제외한다면 가장 부유한 성인 사천성을 다스리는 왕이었다.

매년 거둬들이는 세금만 따져도 천문학적인 액수에 가까울 것이다.

'명성은..'

최악의 위선자이자

전대 천하제일인 이재원을 손수 징벌하였으며

마교의 침입으로부터 무림을 구한 영웅이었다.

그 명성이 중원 전체를 아우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완벽하잖아.'

운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객관적으로 하나하나 따져보니

완벽해도 너무 완벽하였다.

시원스럽고 남자다운 외모

커다란 키와 옹골차게 들어 차있는 돌덩이같은 근육들

만인지상에 가까운 높디 높은 직위

황금을 물쓰듯 쓸 수 있는 어마어마한 재력

천하제일검에 가까운 강대한 무력

중원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거대한 명성까지

여인이라면

반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할 정도로의 조건을 갖춘 완벽한 초인인 것이다.

'나...사실..좋아하고 있는 거 아니야?'

사실은 선우를 좋아하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쪽으로 저울추가 점점 기울여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싫어할 이유가 없는 남자였다.

그렇다면 좋아하고 있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만약에..정말..만약에....진짜로 그를 좋아하는 거라면...'

운설의 얼굴이 점점 더 붉어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어떻게 해야하지?'

의문이 들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정말로 선우를 좋아하고 있는 것이라면

자신은 대체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어떻게 행동하고 말해야하는 걸까

말로 표현해야하는 걸까?

행동으로 표현해야하는 걸까?

아니면 모든 사실을 감춘 채 침묵을 해야하는 걸까?

'모르겠어...하나도 모르겠어.'

도저히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뭐가 맞는 지 도저히 판단이 서지 않은 까닭이었다.

"후우우우우우."

곧이어 운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애초에 너무 이른 고민이야.'

이른 고민이기도 하였다.

진짜로 자신의 감정은 아직까지도 미지수였다.

정말로 선우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요랑의 속삭임에 넘어가

그렇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좋아할 때의 고민은 너무나 부질 없는 고민이었다.

'그래...좀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자...섣부른 판단은...되려..독이야...'

가벼이 머리를 털어낸 후 굳게 다짐하였다.

좀더 시간적 여유를 두고 마음을 추스리자고

이성을 찾고 제대로 판단을 하자고

섣불리 판단해봤자

제대로 된 판단이 나올 리 없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당분간은 후배님과 마주치지 말자.'

적어도 마음이 정리될 때까진

만남을 자제해야할듯 싶었다.

이렇게 싱숭생숭한 상태로 마주해봤자

마음만 더 복잡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굳은 다짐을 마친 그 순간

움찔

몸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하였다.

익숙한 기운이 감지된 까닭이었다.

'이..이곳으로 오고 있어!'

익숙한 기운은 자신의 처소쪽을 향하고 있었다.

방문 의사가 명백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어째서?...어째서!?'

이해할 수 없었다.

대관절 이곳에 오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게 한창 당혹스러움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똑 똑 똑 똑 똑

"선배님"

그리고 곧이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기 시작하였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그 물음에 운설은 답하지 못하였다.

어떻게 해야할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없는 척 할까?'

소용없을 것이다.

이쪽이 기척을 느끼고 있듯

저쪽도 마찬가지로 기척을 느끼고 있었을테니

'들어오라고 할까?'

이 또한 무리였다.

도저히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다짐하지 않았던가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 마주치지 말자고 말이다.

'이대로 되돌려보낼까?'

최선의 선택지이다.

애써 찾아온 사람을 되돌려보내는 건

미안한 일이지만 싱숭생숭한 상태로

그를 마주했다간 무슨 사단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안돼요."

결심을 마친 운설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어째서 입니까?"

"......그...그러니까.."

운설은 더듬거리기 시작하였다.

급한 마음에 거절할 결심만하고 마땅한 핑계를 생각해내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땀냄새가..너무나서...씻어야할 것 같아요...이제 막 외출하고 왔거든요..."

운설은 쥐어짜듯 변명을 하기 시작하였다.

땀냄새 때문에 마주하기 힘들다.

씻어야한다.

이보다 좋은 변명이 어디있겠는가

"그리 냄새가 나는 것 같진 않은데요?"

"...저한테는 충분히 느껴져요....엄청 고약해서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예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환골탈태 이후

체내에 노폐물따윈 전혀 없는 그녀였다.

땀 냄새가 고약할 리 만무한 것이다.

"이 고약함이 해결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없어요!"

운설은 단호하게 언성을 높여 말을 이었다.

'제발..돌아가주세요.'

그리고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이만 얌전히 돌아가달라고 말이다.

"그렇군요."

그런 그녀의 마음이 전해진 것일까

곧이어 납득했다는듯한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하아아아.'

그 목소리에 운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 시작하였다.

아무래도 자신의 간절함이 통한듯 싶었다.

"그럼 씻고 나오실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예에에에?!"

순간 운설은 당혹스럽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언성을 높였다.

저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기다리겠다니?

"저..저..씻는데..완전 오래 걸려요!....하루종일 걸릴지도 몰라요!"

"그래도 기다리겠습니다"

"어떻게 그래요....그냥...다음에..오시는 게.."

"전 오늘 꼭 선배님과 대화를 나눠야겠습니다."

목소리는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의지가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어떻게...'

운설의 얼굴이 울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아무래도 봐도 돌아갈 생각이 없어보이는 말투였다.

자신이 나올 때까지

몇 시진이고 기다릴 태세인 것이다.

'..그냥 피곤하다고..가라고 할껄..'

그녀는 깊은 후회를 하였다.

처음 핑계를 잘못대었음을

".......알겠어요....그럼..들어와서 기다리고 계세요."

이내 운설은 울상이 된 얼굴로 입을 떼었다.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한 까닭이었다.

끼이이이익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열린 문틈 사이로

한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요근래 자신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든 장본인이자

당분간 마주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한 남자.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

선우는 환한 미소를 지은 감사를 전하였다.

두근

그리고 그 미소를 마주한 운설은 심장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창피함과 수치심에 두근거렸던 때와는

전혀 다른 두근거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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