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87 1088. 거부할 수 없는 조건
또각 또각 또각
모용란은 도도하기 그지없는 걸음걸이를
천천히 옮기기 시작하였다.
그 천박할 정도로 커다란 둔부를
이리저리 흔들어대면서 말이다.
그리고 선우는 그런 그녀의 뒷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갑작스레 자신을 불러낸
모용란에 대한 의아함이 든 까닭이었다.
'별안간 내게 할 이야기라는 게 뭐지?'
도저히 유추할 수가 없었다.
접점조차 없는 자신에게
할 이야기란 것에 대체 무엇인지 말이다.
당진철의 모습으로는 그녀와
몸조차 섞었을 정도로
진한디 진한 관계를 맺은 전력이 있었지만
선우의 모습으로는
모용란과 이렇다할 접점조차 없었다.
최악의 남편을 죽인 천하제일인.
최악의 남편을 별안간 잃게된 미망인.
딱 이정도의 관계인 것이다.
원수라면 원수라고 할 수 있었고
은인이라면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유추할 수 없었다.
모용란이 품고 있는 생각이
대체 무엇인지
자신을 불러낸 저의가
대체 무엇인지 말이다.
그렇기에 그저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이끄는대로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걸음을 옮겼을까
뚝
곧이어 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서
작은 정자 앞에서 걸음을 멈춰세웠다.
"이곳입니다. 대협."
걸음을 멈춰세운 모용란은 선우를 돌아보며 입을 떼었다.
"아, 네에."
선우는 수긍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곧이어 두 사람은
정자 안쪽에 마련된
작은 탁자에 서로 마주보는듯한 자세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가만히 서로를 응시하기 시작하였다.
누군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곧이어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침묵이 흘렀을까
"........하실 말씀이 무엇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이내 선우는 침묵을 참지 못하고 곧바로 용건을 물어보았다
차오른 호기심을 참지 못한 까닭이었다.
"죄송합니다, 대협, 제가 결례를 범하였군요. 할 말이 있다며 대협을 불러놓고 이리 뜸을 들이며 입을 다물고 있으니 말입니다.."
모용란은 송구한듯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결례라뇨, 아닙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지요."
선우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채 손사래치기 시작하였다.
"대협께서는 참으로 상냥하시군요. 무례한 저를 이리 배려해주시니.........."
모용란은 무척이나 감격에 젖은 표정을 지은 채
송구하다는듯 말을 이었다.
'뭐야...이 얘, 왜 이래?'
그 모습에 선우는 의아한듯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그녀의 행동에
당혹스러움을 느낀 것이다.
재수없을 정도로
오만한 여자가 바로 모용란이었다.
자신의 위명이 천하를 뒤흔들 정도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위명에 굴복하여
스스로 낮추며
저 자세를 취할 정도로
자존심이 없는 여자는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송구하다는듯한 태도를 취하는
모용란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말이다.
"배려랄 것도 아닙니다."
선우는 손사래치며 입을 떼었다.
"본디 의식하지 않았을 때 본연의 상냥함이 드러나는 법이지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리도 금칠을 해주시는 지 모르겠군요."
"금칠이 아닙니다, 그저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했을 뿐이지요."
모용란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전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니요, 전 장 대협이 무척이나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용란은 부담스러우리만큼 확고한 눈빛으로 그를 마주보기 시작하였다.
"무림 역사상 최악의 위선자이자 극악무도한 살인마였던 이재원을 죽이고 천하제일인이라는 위명을 빼앗은 건 물론 역적의 무리들로부터 황실의 평화 또한 지켜내시지 않으셨나요? 뿐만 아니라 마교의 침공으로부터 연약한 민초들을 몇 차례고 구해내시기도 하였고 말입니다."
모용란은 담담한 어조로
선우의 업적을 술술 불기 시작하였다.
마치 들으라는듯이 말이다.
"....민망하군요."
선우는 민망한듯 볼을 긁적이며 입을 떼었다.
분명 그녀가 한 말 중 틀린 말은 없었다.
모든 것들이 자신 스스로 이뤄낸 업적들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남의 입을 통해
그런 말을 하나둘 듣다보니
민망함과 뻘쭘함이 상상 이상으로 거대하였다.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죽은 독왕을 연기하며 당가는 물론 온 세상마저 속이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분이 어찌 대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뚝
순간 볼을 긁적이던 선우가 움직임을 그대로 멈추었다.
그리고 차분한 눈빛으로 모용란을 응시하기 시작하였다.
싸늘하리 만큼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로 말이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모용 부인."
선우는 싸늘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시치미 떼실 필요 없습니다. 장 대협.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요."
모용란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선우를 마주보며 말을 이었다.
"독왕이 마교의 첫 침공때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도, 당신이 당가의 안정을 위해 독왕행세를 하였다는 사실도, 실질적인 실권자가 독왕이 아닌 독서시라는 사실도, 저와 밤을 보냈던 사내가 사실은 독왕이 아닌 당신이라는 사실까지 전부 말입니다."
모용란은 알고 있는 바를 그대로 내뱉기 시작하였다.
".......당황스럽네."
당황스러웠다.
설마하니 모용란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까닭이었다.
그녀가 입밖에 내뱉은 말은
측근 중에서도 최측근을 제외한다면
아무도 모르는 극비 중에 극비였다
그런 극비를 어찌 저리도 상세하게 알고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당황스러울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정체는 극비 중에 극비일테니까요."
모용란은 동의한다는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떼었다.
"누구지?"
"뭐가 말이죠?"
"그 사실을 누구에게 들었냐는 말이야."
선우는 싸늘하기 그지없는 눈빛을 반짝이기 시작하였다.
알려져선 안될 극비가
새어나가게 되었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였다.
말이 새어나간 진원지를 찾아
그대로 축출해야하는 것이다.
"지금은 중요한 건 누구에게 들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수습하느냐가 아닌가요? 괜찮으시겠어요? 제가 이런 극비를 알게 돼도?"
모용란은 담담한 어조로 입을 떼었다.
"날 협박할 생각인가?"
선우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되물었다.
"그럴 리가요. 얄팍한 비밀 하나를 알았다고는 하지만 제가 어찌 천하에서 가장 강한 남자를 협박할 수 있겠어요?"
모용란은 손사래치며 부정을 하였다.
"만약 그런 짓을 했다간 저와 딸은 물론이고 모용가의 식솔들까지 떼 몰살을 당할게 뻔한데 말이에요"
장선우는 강하였다.
규격외
천외천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려질 정도로
강대하고 또 강대하였다.
존재 자체가 반칙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만약 얄팍한 비밀을 빌미로 그를 협박한다면
모용가는 그 날로 씨몰살을 당하게 될 게 뻔하였다.
협박이라는 건
본디 급수가 맞는 상대끼리 가능한 법이었다.
새어나가면 안될
비밀을 알아낸다고 해도
몰락한 모용가따위가
천하제일인을 협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의문이로군. 협박할 생각이 없다니 말이야."
선우는 의외라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전 그렇게 품위없는 여인이 아니에요. 어찌 우아한 귀부인이, 다른 이의 약점을 붙들고 협박을 할 수 있겠어요?"
모용란은 새침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꺼낸 저의가 뭐지? 협박할 생각이 없다면 속으로만 품고 있어도 되었을텐데?"
"협박이 아닌 제안을 하기 위해서예요."
모용란은 별빛과 같은 눈빛을 반짝이며 입을 떼었다.
"제안이라...그게 협박과 뭐가 다른 지 모르겠군."
선우는 싸늘한 미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협박은 약점을 빌미로 강제를 하는 행위지만 제안은 다르지요. 받아들여주신다면 좋겠지만 거절해도 무방한 이야기입니다."
"..좋아....이왕 말을 꺼내셨으니 들어나보도록 하지...내게 무슨 제안을 할 생각이지?"
선우는 무미건조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저와 제 딸을 받아주세요."
모용란은 결연 어린 눈빛으로 선우를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떼었다.
"받아달라는 건 어떤 의미지?"
"말그대로의 의미예요. 당신에게 충성을 바치겠어요. 부디 저희 모녀를 받아주세요."
"납득이 안되는군."
선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떼었다.
"뭐가 말인가요?"
"내게 충성하려는 네 태도가 말이야."
선우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꽤나 큰 비밀을 알게 되었고 협박까진 아니더라도 그 비밀을 빌미로 좋은 조건을 제시할 수도 있을거야.. 그런데 어째서 내게 충성을 바치려고 하는거지? 그것도 당진철의 모습으로 너를 범한 내게 말이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별안간 충성을 바치겠다는
모용란의 저의가 말이다.
그녀는 드러나선 안될 비밀을 쥐고 있었다.
협박까진 아니더라도
입을 다무는 대가정도는 요구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에 서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가를 요구하는 대신 충성을 맹세하다니
'분명 나에 대한 악감정이 그득 차 있을 텐데....'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용란의 마음 속에는 자신에게 악감정이 가득차 있을 것이다.
남편인 이재원의
치부를 밝히고 죽이기까지 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박탈시켜버린 장본인이면서
독왕 행세를 하며 그녀를 범한 난봉꾼이기도 한 까닭이었다.
자신을 싫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해가 안돼...왜 내게 충성 맹세를 하는거지?'
그렇기에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그녀가
자신을 모실 생각을 하게 되었는 지 말이다.
선우는 의문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대답을 요구하는듯한 모습이었다.
"그게 최선이라는 걸 깨달았으니까요."
"최선?"
"모용가는 약해요. 너무 약하여 약간의 바람만으로도 완전히 가라앉혀질 정도지요. 그렇기에 모용가에게는 강자의 그늘이 필요해요....누구보다 강하고 위대한 초월적인 강자의 그늘이 말이에요."
"그 그늘이 나라는 말인가?"
"당신은 관과 무림, 상반된 두 가지 세상에서 정점에 오른 위대한 존재예요. 무소불위의 군왕임과 동시에 천하에서 적수가 없는 천하제일인이기도 하니까요."
모용란은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잇기 시작하였다.
"그런 당신의 그늘 속이라면 태풍이 몰아친다해도 굳건히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의외로군, 그 높다란 자존심을 굽힐 줄이야."
연왕의 후예라고 뻐기며
오만하고 자만하던 모용란이었다.
그런 그녀가 자존심을 굽히고
스스로 약자임을 인정하고
그늘 밑으로 들어가길 간청하다니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하였을 것이다.
"자존심만으로는 모용가를 재건할 수 없으니까요."
모용란은 담담한 어조로 입을 떼었다.
"그래, 나를 이용하겠다는 건가? 충성을 대가로 모용가를 재건하기 위해."
"맞아요. 그리 할 생각이에요."
모용란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을 하였다.
"솔직하네, 이용한다는 말을 그렇게 대뜸 인정할 줄이야."
"속에 칼을 품는 것보단 겉으로 드러내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도 그렇군."
선우는 유쾌한듯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녀의 강단이 꽤나 마음에 든 까닭이었다.
과연 명가의 귀부인다운 강단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어. 모용란. 그건 너와 네 딸의 충성이 생각보다 그리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진 않다는 거야."
선우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이미 내겐 충성스러운 이들이 많아. 너희들의 충성이 그리 매력적이지 않을만큼 말이야."
충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모용란의 제안은
그리 매력적인 제안은 아니였다.
두 여자보다 충성스러운 이들은 넘칠정도로 많았으니 말이다
"내 밑으로 들어오고 싶다면 좀더 구미를 당길만한 조건을 들고와야 할거야, 모용란."
선우는 진중한 눈빛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의 구미를 당기게할 만한 조건이라면 가지고 있어요."
"있다고?"
"네에, 당신이 결코 거절치 못할 최고의 조건이 말이에요."
"그게 뭐지?"
"백문이불여일견이라고 하죠."
모용란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말로 설명하기보단 직접 보시는 게 어떠신가요? 직접 보신다면 당신도 결코 거절치 못할 거예요."
그리고 진한 미소를 짓기 시작하였다.
왠지 모를 섬뜩함이 느껴지는 기묘한 미소를 말이다.
움찔
그리고 그 미소를 마주한 선우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알 수 없는 오한이
등골을 그대로 훑고 지나가버린 까닭이었다.
".........직접 본다면 거절치 못할 조건이라 확실히 구미가 당기긴 하는군."
이내 선우는 수긍하듯 말을 내뱉었다.
알 수 없는 오한이 느껴지긴 하였지만
호기심을 가라앉히진 못한 까닭이었다.
"좋아, 직접 가보도록 하지."
선우는 담담한 어조로 입을 떼었다.
그녀의 호언장담에
직접 가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분명 후회치 않을 거예요."
모용란은 미소를 지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알 수 없는 오한을 느끼게 하는
섬뜩한 미소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