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6화 〉 737.약속하지. 이재원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걸세.
완연한 가을
숲속 한가운데 노랗게 물든 거대한 단풍 나무가 모습을 오연히 자리를 지키고 서있었다.
성인 남자 한 명이 양팔을 최대한 벌려 안아도 전부 감싸지 못할 정도로 두터운 두께
올려다보는 것만으로 경이로움이 절로 느껴지는 높이까지
이름 모를 나무는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를 느끼게 하는 특이한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저벅 저벅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 거대한 단풍나무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새하얀 머릿결
살아온 세월을 상징하는 옅은 잔주름
세월을 빗겨간듯한 강건한 덩치
그리고 검객임을 짐작할 수 있는 옆구리에 메어져있는 투박한 검집 하나
중후한 인상을 가진 노년의 검객이었다.
저벅 저벅
노년의 검객은 일정한 보폭으로 걸음을 떼기 시작하였다.
자로 잰듯 딱 맞춰 걷는 걸음걸이만 보아도
남자의 경지가 낮지 않음을 어림짐작할 수가 있었다.
분명 상당히 지고한 경지에 오른 검객이리라
그렇게 얼마나 걸음을 옮겼을까
뚝
이내 남자는 걸음을 멈춰세웠다.
거대한 단풍 나무 코앞에서 말이다.
그다음 말없이 단풍나무를 응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노랗게 물들어있는 화려한 단풍잎을 감상하였다.
그리고 이내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눈에 보이는 계절의 변화를 보는 것이
그리 나쁘지 않은듯 하였다.
그렇게 얼마나 감상을 이어갔을까
덥석
남자는 검집에 손을 올렸다.
그다음 왼쪽다리를 앞으로 뻗은 후
몸을 살짝 기울인 뒤 자세를 낮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호흡을 고르기 시작하였다.
한 호흡
꽈악
검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두 호흡
앞으로 뻗은 왼쪽다리에 힘을 주기 시작하였다.
세 호흡
사아아악
발검拔劍을 하여 그대로 단풍나무를 향해 휘둘렀다.
네 호흡
착
휘둘렀던 검을 그대로 회수하여 곧바로 납검을 하였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말이다.
스르륵
이내 검을 납검한 노년의 검객은 낮췄던 몸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리고 가만히 응시하였다.
검을 휘둘렀던 단풍나무를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응시하였을까
끼이이이익
단풍나무에서 무언가 맞물리는듯한 기괴한 소음이 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이내 한쪽으로 기울어지면서 그대로 넘어가기 시작하였다.
콰콰콰쾅
얼마 지나지 않아 귀가 따가울 정도의 굉음이 터져나왔다.
우우우우웅
그리고 땅이 울리기 시작하였다.
거대했던 단풍나무의 몸체는 그대로 바닥과 충돌하며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발생한 까닭이었다.
이내 수백년의 세월을 품고 오연하게 서있던 거대한 단풍 나무는 그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늙을대로 늙은 노년의 검객에 의해서 말이다.
".............."
노년의 검객은 자신이 만들어낸 광경을 담담한 표정을 지은 채 그저 가만히 응시하였다.
아무런 일도 없다는듯이 말이다.
짝 짝 짝 짝
그때였다.
어디선가 찰진 박수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휙
노년의 검객은 재빨리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유쾌하다는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중년의 남자를 말이다.
"대단하군."
중년의 남자는 노년의 검객을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왔는가."
남자의 말을 들은 노년의 검객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검이 무척이나 좋군, 검제劍帝."
남자는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떼었다.
"그저 무뎌진 칼일 뿐일세."
노년의 검객,검제 윤제겸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하하하하, 겸손이 지나치군."
중년의 남자는 재밌다는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겸손이 아닐세. 자네도 그리 생각하지 않나? 검마劍魔."
"물론 나에 비하면 무딘 칼은 맞네. 하지만 이는 내가 강한 것이지. 그대가 약한게 결코 아니라네."
검마劍魔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나름의 위로를 하였다.
"그걸 위로라고 하는겐가?"
윤제겸은 어이없다는듯 그에게 물었다.
무슨 위로가 저따위란 말인가
"미안하군. 내가 거짓말에는 재주가 없어서 말이야."
검마는 능글맞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놀리려는 것인지. 진담인지 참으로 어렵구려."
윤제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 시작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저자의 장난기 어린 태도는 사람을 헷깔리게 만들었다.
"난 언제나 진지하다네. 검제여"
"그럼 진담으로 받아들이겠네."
윤제겸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찾아온 겐가?"
"너무하는군. 내가 용건이 있어야만 자네를 찾는 줄 아는가?"
"그렇지 않고서야.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 이를 자네가 찾아올리 만무하지 않은가?"
"뭐, 전해줄 것도 있기도 하고 겸사겸사 얼굴도 볼 생각이었네."
"무슨 말인가?"
윤제겸은 검마를 바라보며 곧바로 용건을 물었다.
궁금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구태여 자신을 직접 찾아온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받게."
그때 갑자기 검마가 품안에서 조그마한 쪽지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그에게 던져버렸다.
덥석
윤제겸은 곧바로 그가 던진 쪽지를 받아들였다.
"이게 뭔가?"
"펴보게."
검마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 말을 들은 윤제겸은 고이 접어져있는 쪽지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조그마한 쪽지 안에 빼곡히 적혀있는 글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지령!'
그 모습을 본 윤제겸은 알 수 있었다.
쪽지에 적힌 것들이 자신에게 내려온 지령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흐음"
지령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윤제겸을 입을 꾹 다문 채 정독을 하기 시작하였다.
한 글자라도 놓치지 않겠다는듯이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고 이내 무겁기 그지없는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상상이상으로 흉악한 계획에 망설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뿐일세."
"하지만......아무리 그래도...."
"원수가 누구인지 잊지말게나. 검제劍帝여"
검마는 망설이는 검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잊지않고 있네.....내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인생에 있어 하나밖에 남지 않은 낙을 앗아버린 무뢰배를 말일세....하지만 자네의 계획에는 살해당하는 이는 이재원뿐이 아니지 않는가?"
윤제겸은 난감한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자신의 원수가 이재원이라는 사실은
진실을 목도한 후 단 한번도 잊은 날이 없는 사실이었다.
그를 죽이고 싶었다.
처참하게 그를 죽여 이미 고혼이 되어버린 손녀의 넋을 달래고 싶은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마교와 손을 잡을 수 있었다.
평생토록 협만을 부르짖으며 마교를 경멸하였던 그였지만
마교와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직 이재원을 죽여버리기 위해서 말이다.
그는 다짐하였다.
어떠한 지령이 떨어진다해도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망설이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 다짐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바로 쪽지에 적혀져있는 지령서 때문이었다.
지령서에는 거사 당일 취해야할 행동들이 상세히 쓰여져있었다.
그리고 그 행동들을 도저히 납득 할 수 없었다.
이재원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수뇌부들이 죽어버릴지도 모를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
"납득하지 못하겠다는건가?"
검마는 납득가지 않는다는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윤제겸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는 말일세."
자신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이재원이었다.
손녀를 간살해버린 직접적인 원흉을 제거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죄없는 수뇌부까지 죽이라니
어찌 이런 지령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정마대전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천무맹의 전력을 깎아내리고 싶은 자네들의 얄팍한 술수로 보이는군."
윤제겸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자네는 크나큰 착각을 하는 것 같군."
검마는 고개를 살며시 저으며 말을 이었다.
"전력을 깎아낼 생각이란 말은 부정하진 않겠네. 애초에 내분을 일으키기 위해 자네들의 일에 끼어든 것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수뇌부들을 죽이자는 것은 단순히 전력을 깎기 위한 선택은 아닐세. 엄연히 자네의 복수를 위한 일이란 말일세."
".........자세히 설명해보게."
"자네의 원수는 이재원 뿐만 아닐세. 모든 사태를 알고도 방관하기만 하였던 썩어빠진 수뇌부들 또한 자네의 원수란 말일세."
".............그게 무슨 말인가"
"주소양에게 듣지 않았는가? 간살 사건을 장삼에게 뒤집어 씌우고 천무맹의 명예를 지키려고하는 그들의 추악한 모습을 말이야. 아마 자네 손녀의 사건 또한 쉬쉬거리며 넘어갔을걸세. 언급이 될수록 천무맹의 명성은 땅에 곤두박질치고 말테니까 말이야."
검마는 무미건조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길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게나. 한 사람이라도 자네 손녀의 이름을 아는 이가 있는지 말일세. 그들은 정보를 통제하였네. 그리고 자네의 손녀의 존재를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어버렸네. 그녀를 두번 죽였다는 말일세. 그런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검마는 올곧은 시선으로 윤제겸을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자네의 원한은 고작 그정도밖에 안되는 것인가?"
그리고 타박하듯 말을 이었다.
"자네 손녀를 죽게 만든 것은 이재원 뿐 아니라 천무맹 그 자체기도 하네. 썩을대로 썩은 천무맹 말일세....그리고 썩은 것을 뿌리 뽑기 위해선 모든 것들을 갈아엎을 필요가 있네."
으드득
그 말을 들은 윤제겸을 이를 빠득하고 갈기 시작하였다.
틀리지 않았다.
그가 하는 모든 말들이 말이다.
주소양을 통해 수뇌부들이 그간 얼마나 권력지향적으로 행동하였는지 알 수 있었던 윤제겸이었다.
그렇기에 공감할 수 있었고 분노할 수 있었다.
검마가 말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천무맹은 썩었다.
그리고 그 썩은 것들로 인해 손녀딸은 죽음은 완전히 묻혀지게 되었다.
범행을 저지른 것은 이재원이었지만
범행을 묻은 것은 천무맹 그 자체인 것이다.
그렇기에 갈아 엎어 버릴 필요가 있었다.
수뇌부들을 전부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이내 윤제겸의 눈빛에 살기가 어리기 시작하였다.
"꽤나 멋진 눈빛으로 바뀌었군. 검제."
그 모습을 본 검마는 만족스럽다는듯이 말을 이었다.
마교의 협력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꼬장꼬장한 정파인으로서의 기질을 버리지 못했던 윤제겸이었다.
평생토록 협을 위해 달려온 그에게 그 기질을 버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원한을 자극을 하였다.
평생 협을 추구하던 그가 증오하던 마교와 손을 잡을 정도로 극심한 원한을 말이다.
그리고 그 자극은 아무래도 성공적인듯 하였다.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
심유하고 현기 어리던 눈빛이 아닌
저열하고 끔찍한 살기가 어려있는 눈빛으로 말이다.
".....하겠네."
이내 윤제겸은 살기 어린 눈빛을 반짝거리며 말을 이었다.
검마劍魔의 제안을 수락한 것이다.
"잘생각했다네. 원한이란 그리 풀어야하는 법일세."
검마는 흡족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선택이 실로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 약속을 해주게나."
그때 윤제겸이 흡족하게 웃음 짓고 있는 검마劍魔를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말해보게나."
"내 원한을 이용하여 천무맹의 전력을 깎는 것을 막지 않겠네. 내 원한을 이용하여 정파의 집결을 방해한다는 계획 또한 개의치 않겠네. 마교천하를 만들어 중원을 지배한다는 계획 또한 신경쓰지 않겠네."
윤제겸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단, 무슨 일이 있어도 이재원이 끔찍한 복수를 해주겠다고........내 원한이 제대로 청산해주곘다고...약속을 해주게나."
윤제겸은 핏발 선 눈빛으로 검마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의 눈에는 거대한 살기가 그대로 담겨있었다.
씨익
그 모습을 본 검마는 입가에 진한 미소를 흘렸다.
복수심의 미쳐버린 정파 최고 명숙의 모습이 꽤나 재밌게 느껴졌기 떄문이었다.
"약속하지. 이재원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걸세. 그리고 자네의 원한은 무슨 일이 있어도 청산될걸세."
검마는 그에게 약속하였다.
이재원의 끔찍한 최후를
그리고 윤제겸의 완벽한 복수를 말이다.
"믿도록 하겠네. 검마劍魔"
윤제겸은 검마를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그의 눈빛에는 신뢰가 가득 담겨있었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내는 아닐세. 검제劍帝"
검마는 재밌다는듯한 미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그러더니 이내 생각난듯 갑작스레 말을 내뱉었다.
"앞으론 검마劍魔 대신 검인劍人이라고 불러주겠나?"
"검인劍人!?"
"마음에 드는 호칭이 생겨서 말일세."
검마 아니 검인劍人은 입가에 미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검 그 자체로서 표현되는 검인劍人이라는 호칭이 꽤 나 마음에 든듯하였다.
"그리하겠네. 검인劍人이여"
윤제겸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곧바로 호칭을 바꾸었다.
딱히 어려운 부탁으로 느껴지지 않은 탓이었다.
"고맙네."
검인劍人은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 들어도 괜찮은 울림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