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2화 〉 693.내가 걱정하는 건 언가주다.
모락 모락
뜨거운 차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였다.
당진설은 찻잔을 부드럽게 들어올린 뒤
향을 맡았다.
그러자 찻잎 특유의 깊은 향이 후각을 자극하기 시작하였다.
꽤나 상등품의 차잎이었다.
후르릅
충분히 차향을 음미한 당진설은 그대로 차를 들이켰다.
"오라버니께서는 여전히 백호은침白毫銀針을 좋아하시는군요."
탁
이내 찻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당진설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냐."
선우는 차가운 표정을 지은 채 그녀에게 물었다.
어째서 자신을 찾아왔는지 말이다.
"동생이 오라비를 찾지 못할 이유라도 있나요?"
당진설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떼었다.
"구태여 찾아올 정도로 사이가 좋은 건 아닐텐데?"
"오라버니는 저를 평생 안 볼 생각이셨나요?"
"반목하는 관계라면 굳이 볼 필요는 없지."
"매정하시네요."
"당연한 말이다."
선우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굳이 그녀와 사이좋게 지낼 필요 없었다.
정마대전이 끝날 때까지 명목상 동맹 관계만 유지할 정도의 친분이면 충분한 것이다.
"어째서 저희의 사이가 이렇게 멀어지게 된걸까요?"
당진설은 안타까움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입을 떼었다.
"저희, 그래도 우애가 꽤나 깊은 편이 아니었나요?"
"말은 똑바로 해야지."
선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우애가 깊은 게 아니라 이해관계가 일치했을 뿐이다."
그리고는 단호한 표정으로 선을 그어버렸다.
그저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우애를 연기했을 뿐
두 남매가 각별하게 우애가 깊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 말씀하니 되려 서운하네요......"
당진설은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시덥지 않은 말을 할거면 돌아가도록 하거라. 너와 말장난으로 시간을 보낼 생각따위는 없으니"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렸다.
쓸데없는 감성팔이에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진설은 그런 선우를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살며시 좌우로 저였다.
말을 길게해봤자 반발심만 키울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알겠어요. 용건만 말하죠."
당진설은 무미건조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재경각주를 처벌해주세요."
"기각한다."
선우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곧바로 기각시켜버렸다.
고민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말했을텐데? 재경각주에 대한 처벌은 없다고 말이다."
"천무맹을 적을 돌릴 생각인가요?"
"누누히 말했을텐데? 내 가족을 위협한다면 누가 되었든 당가의 적이다."
"그게 당가를 망하게 하는 지름길이 된다해도 말인가요?"
"안위를 위해 가족을 파는 순간 이미 당가는 망한 것이나 다름없다."
"명예를 위해 패망의 길로 들어선다는 말인가요?"
"이해가 안되는구나. 어째서 당가가 진다고 확신하는 것이냐?"
"당가와 천무맹은 세력의 크기만 따져도 세 배이상 차이가 나요. 게다가 여론까지 천무맹을 지지하고 있는 상황이죠. 이런 상황에서 당가가 유리하다고 생각하시는건가요?"
"그래도 질 것 같은 느낌이 들지는 않는구나."
선우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
당진설은 말없이 선우를 노려보았다.
"오라버니는 변했어요."
그리고 이내 천천히 입을 떼었다.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지."
"멍청하게 변했다는 말이에요."
당진설은 날카롭게 쏘아붙이듯 말을 이었다.
"아니면 오만에 취하신건가요? 현경에 올랐다고 뭐라도 되는 것 같으신가요?"
"말했을텐데. 의지를 관철할 수 있다면 그건 오만이 아닌 자신이라고 말이야."
"오라버니는 의지를 관철할 능력이 없어요."
"그걸 네가 어찌 알지?"
"모두를 지켜낼 수 없을테니까요."
당진설은 맹독을 품은 독사같은 눈빛으로 선우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오라버니는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몰라요. 하지만 대다수 당가의 식솔들은 죽음을 면치 못할거예요. 오라버니가 현경에 고수라한들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이상 모두를 지켜낼 수 없을테니까요."
"............"
"전쟁이 일어나면 세가는 망할거예요. 오라버니의 쓸데없는 고집때문에 말이에요."
"지킬 수 있다."
선우는 확고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내가 확신조차 없이 강짜를 부린다고 생각했더냐?"
선우는 우습다는듯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확실히 자신 혼자라면 그녀 말대로 모두를 지킬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당가의 식솔들 대부분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혼자가 아니었다.
모두를 충분히 지킬 수 있는 거대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스웠다.
식솔들을 빌미로 자신을 협박하는 당진설의 모습이 말이다.
"궁금하네요. 그 끝없는 자신감의 원천이 말이에요."
"믿는 건 내 자신과 당가의 저력이다."
"북해빙궁인가요?"
당진설은 선우의 말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시치미 떼지 않으셔도 돼요. 오라버니께서 뒷배로 북해빙궁을 삼았다는 건 이미 알고있는 사실이니까요."
당진설은 날카로운 눈빛을 반짝거리며 입을 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당가의 전력으로 천무맹에게 대항할 생각을 품을 리 만무하지 않겠어요?"
당진설은 확신에 찬 눈빛으로 선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확신하였다.
선우의 태도 변화의 원인은 북해빙궁과 동맹관계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말 잘듣던 당가에서 반기를 들리 만무하기 때문이었다.
"어리석어요.....정말 어리석어요."
당진설은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뭐가..어리석다는 거지?"
"천무맹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오라버니가 너무나 어리석어요."
"천무맹으로부터 독립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천무맹은 중원에 있는 모든 문파들의 지지를 받고 있어요. 지지를 하지 않으면 사마외도라는 낙인이 찍혀버리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지지는 곧 천무맹의 영향력이고 자산이랍니다. 그 거대한 영향력에서 당가가 오롯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
"못할 것도 없지."
"그 자만에 가까운 자신이 너무나 어리석어요. 오라버니는 진심으로 북해빙궁따위로 천무맹에게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자원이 풍족하다는 것 외엔 볼 것 없는 미개한 이들로 말이에요?"
당진설은 비웃음 가득한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오라버니께서는 큰 착각을 하고 있어요. 북해빙궁의 전력을 과대평가하고 있다고요. 그들과 손잡는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같이 망해갈 뿐이랍니다."
당진설은 안타까움이 가득 묻어나는 표정을 지은 채 말을이었다.
"망할 지 안 망할지는 두고봐야 아는 법이 아니겠느냐? 외인인 네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후우.."
당진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귀를 못알아먹으니 답답함이 치솟았기 때문이었다.
이성적이고 실리적인 오라버니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옹졸하고 고지식한 반푼이만 남은 기분이었다.
"어리석어요."
당진설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직접 눈으로 봐야만 알 수 있다니 말이에요."
콰콰콰콰콰쾅
우우우우우웅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마어마한 굉음이 터져나오고 건물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제 시작됐나보네요."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당진설은 태연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그녀의 태연한 태도를 마주한 선우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무지몽매한 오라버니를 위한 제 선물이랍니다."
선우의 물음에 당진설은 고혹적인 미소를 흘리며 입을 떼었다.
"제대로 말하지 않는다면 핏줄이라해도 용서치 않겠다."
선우는 살벌하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쇄애애애애애액
더불어 위협적인 살기를 줄줄 흘리기 시작하였다.
"빙궁주에게 언중기를 보냈어요."
당진설은 뱀같은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아마 지금쯤 팔다리 한 두군데는 부러지지 않을까 싶네요."
벌떡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문쪽으로 재빨리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한시라도 빨리 북궁연에게 달려갈 심산이었다.
"저라면 빙궁주에게 가는 걸 추천하지 않아요."
당진설은 그런 선우를 만류하였다.
"동맹 세력 간의 기싸움에 당가가 끼어들어서야 되겠어요?"
우뚝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걸음을 멈춰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당진설을 바라보았다.
당진설은 꽤나 사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감이 절로 드는 미소였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더냐?"
선우는 북풍한설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저 깨닫게 해주고 싶은 것 뿐이에요. 오라버니가 품고 있는 희망이 얼마나 덧없는지 말이에요."
"넌 지금 큰 실수를 한 것이다."
"그저 당가를 올바르게 만들고 싶을 뿐이랍니다."
당진설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게 올바른 당가란 천무맹의 영향력 아래 개돼지처럼 사육당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냐?"
"개돼지라뇨. 표현이 과격하네요. 그저 당가가 제 분수에 맞게 살길 바랄 뿐이에요."
"참으로 독이나 다름없는 아이로구나."
"칭찬 고마워요. 오라버니."
당진설은 재밌다는듯 미소를 지었다.
독인에게 독과 같다니
세상에 이보다 찬란한 찬사가 어디있겠는가
저벅 저벅
이내 선우는 몸을 돌려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잠깐만요! 어디를 가시는 거죠?"
선우가 걸어가는 것을 본 당진설은 당혹스럽다는듯 그에게 말하였다.
"빙궁주에게 갈 생각이다."
"말릴 생각인가요?"
"말리지 않는다면 죽고 말테니까."
선우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금 간다면 오라버니께서는 명분을 잃고 말아요. 인지하고 계신건가요?"
빙궁주가 선발대를 전멸시켰을 때
당가에는 단순한 동맹 세력 간의 기싸움으로 사건을 일축하였다.
또한 끼어들 명분이 없다는 이유로 빙궁주에 대한 처벌을 회피하였다.
천무맹의 강력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끼어들게 된다면 빙궁주를 편애한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고 당가는 명분과 신뢰를 잃고 말 것이다.
악수惡手 중에도 최악의 수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 말릴 생각을 한단 말인가
어불성설이었다.
"당가를 핏물로 물들일 수는 없지 않겠느냐?"
그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선우는 여전히 확고한 태도를 취하였다.
마치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듯이 말이다.
"빙궁주가 그리도 걱정되십니까?"
"무슨 말을 하는 지 모르겠구나."
선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반문하였다.
"내가 걱정하는 건 언가주다. 이대로 냅뒀다간 죽고 말 것이다."
선우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뭐..라고요!?"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당진설은 멍청한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목숨이 위험할까 걱정되는 게 언중기라니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란 말인가
저벅 저벅
선우는 멍청히 서있는 당진설을 무시한 채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재빨리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잠...잠깐만요!"
이내 정신 차린 당진설이 선우를 다급히 불렀지만 그는 이미 자취를 완전히 감춘 뒤였다.
집무실에는 벙진 표정을 짓고 있는 당진설만 오롯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
콰콰쾅
굉음이 터져나왔다.
부웅
더불어 거대한 거체가 공중에 붕 뜨기 시작하였다.
쿵
그리고 이내 거체는 충격음을 내며 연무장 바닥에 그대로 처박혀버렸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연무장 바닥에 처박힌 남자, 언중기는 미친듯이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하였다.
경악스러울 정도로 강대한 힘에 기쁨의 쾌락이 차올랐기 때문이었다.
강하였다.
미친듯이 강하였다.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할 만큼 말이다.
어찌 인간이 이렇게까지 강할 수 있다는 말인가
경외마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더럽게 단단하네."
그때 짜증이 서려있는 목소리가 언중기의 귓가에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자신을 바닥에 처박아버린 장본인의 목소리였다.
언중기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벌떡
그리고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말하지 않았소? 단단한 강시공이야 말로 언가의 자랑이라고 말이오."
언중기는 짐짓 자랑스러운듯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그 단단함이 내게는 짜증이 되네."
북궁연은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언중기의 단단함에 짜증이 치밀어올랐기 때문이었다.
분명 공격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자신이었다.
자신은 그보다 빨랐고 셀수도 없는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셀수도 없는 공격을 당했음에도 언중기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단단하였다.
현경의 고수인 자신의 공격을 그대로 버텨낼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금강불괴金剛不壞에 도달한 건가?"
북궁연은 차가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금강불괴는 그저 거쳐가는 단계일 뿐. 본 가주가 추구하는 경지는 좀더 위쪽에 있는 경지일세."
"귀찮게 됐네."
북궁연의 고운 아미를 더욱더 찌푸렸다.
아무래도 비무가 길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하하하하하.......너무 귀찮게 생각지는 말게나."
언중기는 함박 웃음을 터트리며 그대로 앞으로 몸을 쏘아보냈다.
쿵 쿵 쿵 쿵 쿵
마치 한 마리 무소가 돌진하는듯한 착각이 들 정도의 위압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북궁연은 손에 냉기를 집약시켰다.
그러자 손이 새하얗게 물들더니 찬란한 빛을 내기 시작하였다.
북궁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휘둘렀다.
콰콰콰쾅
이내 굉음이 터지고 충격파가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천지를 뒤흔들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