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 무림치매대응반 102
* * *
“그러고 서 있지 말고 다들 앉아.”
“어…응.”
“네.”
바람같이 의선을 떠나보내고, 본채 안에 남은건 미묘한 어색함이었다. 음.
“미안해. 언젠가는 이야기를 해 주려고 했는데.”
“으응…. 아냐. 오라버니. 비슷하게는 이야기 해 줬었고…. 그거랑 관계없이 오라버니를 따르려고 했었으니까.”
“맞아요. 삼랑. 신경쓰지 마세요.”
“혹시나 싶어서 물어보는데, 삼이는 내가 아는 삼이가 맞지?”
처음부터 니가 알고지낸건 나였다고 이야기를 해 줬어도 이런 이야기를 실제로 들으니 또 아리까리 한가보다. 서령이가 눈치를 보면서 물어보는 이야기에 맞다고 고개를 주억거려줬다.
“믿기 힘들지만, 주인님께서 어느 시대에서 오셨든 중요하지 않아요. 지금 같이 있어서 좋으니까요.”
“주공께서 저희를 살려내신게, 그렇게까지 주공께 부담이 되고 있을줄은….”
“아니, 그런거 아니야.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한거고….”
거 의선영감은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가지고서는….
“그치만…. 오라버니는 나한테 떠밀린거나 마찬가지인걸.”
“너는 좀 반성을 해야지.”
그치. 연이는 반성을 좀 해야지.
“…오라버니가 하라는대로 할게….”
이게 그, 여친과의 다툼에서 승리한 남자가 받을 수 있다는 프리 소원권인가? 하여간 그건 좀 있다가 이야기 하기로 하고.
“당장은 이 정도 밖에 말할 수 없는것 같아. 혹시나 이런 금제가 풀리게 된다면 더 이야기 할게.”
“저…. 문주님.”
“왜? 주선.”
“문주님은 정말로 무림을 말살시킬 생각이신가요?”
궁금하긴 할거다. 말은 주선이가 꺼냈지만 주변을 쭉 돌아보니 연이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도 궁금해 하는 것 같다.
“그럴 생각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천명이라니까.”
“그치만, 문주님.”
“잠깐. 다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는데, 일단 들어봐.”
“네에….”
나는 주선이에게 손짓을 해서 내 쪽으로 가까이 오게 한 다음에 무릎위에 앉혔다. 주선이는 작게 꺅 소리를 내고는 내 위에 주저앉아 몸을 긴장시켰다. 허리춤에 손을 두르고 뒤에서 끌어안아서 못움직이게 만들었다.
“지금부터 무공을 익히고 있는 사람을 다 찾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도륙을 낸다던가 하는 시산혈해를 만들생각은 전혀 없어. 지금까지 우리가 맞서왔던 황실의 방식과 비슷한 형태로 갈거야.”
“그러면 독을…?”
“아니 그런거 안한다니까.”
천명이고, 뭐 그에 대해서 거창한 대의가 내 안에 생겼다거나 그런건 아니다. 그런데 뭔가, 내 안에서 조금 내려놓는 순간 어떤 직감이 슬쩍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돌아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든다. 이것도 ‘천명’을 주는 존재의 당근인걸까?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냥 돌아갈 수 있을지도? 같은 느낌으로 살짝 머리에 떠 오른거니까. 내가 돌아가고 나면 본래의 장삼은 어떻게 되는건지 뭐 그런 생각들이 잠깐 머리를 채웠지만 일단은 눈 앞에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런건 나중에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죽이지도 않고, 독도 아니라면 어떤 방식으로…?”
“황실의 방식과 비슷하다는건 전체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야.”
황실이 무림을 말려죽이려고 쓴 수는 사실 간단했다. 그냥 시간. 시간을 길게 잡고 윗대가리에서 부터 차근차근 조진거다. 재능으로 뚫고 나오는 애들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한 손이 열 손을 못 당하는 법이다. 진짜 개세지경의 고수가 아닌 이상에야 각 문파의 무력을 책임지는건 결국 평타강사로부터 체계화된 교습법을 통해 국영수를 중심으로 예습복습을 철저히 한 양산형 무림인들이다. 황실은 일타강사들 중심으로 독을 뿌려서 그 순환 고리를 조져놓은거고.
효과는 지금에와서 내가 따라하려고 생각해 보면 굉장하다. 이미 무림은 대충 멸망한 상태라고 봐도 무방하니까. 당장 이름만 들어도 치를떤다는 마교가 동네 양로원 수준이지 않았나. 나름의 무력은 갖추고 있었지만 그나마도 정규군을 상대하기 위한 훈련병력이었다. 것 참. 황실과 동창 때문에 죽을뻔 했던 경험이 있어서 그 쪽을 적대하는 노선으로 움직였었는데. 이런 이유로 표면적으로나마 같은 노선을 타게 될 줄이야.
사람을 죽이진 않을거다. 동창애들처럼 독으로 어떻게 할 생각도 없다. 경제나 전통, 명분 같은 부분에서 무림을 서서히 무너뜨릴 생각이다. 적어도 내가 있던 시대에 무림이 실존한다는 이야기는 없었으니까 그때까지 무림을 전설로 만들면 되는거겠지.
“…대충 이런 이야기다. 혹시라도 나와 맞서 무림의 안녕과 평화를 지키겠다면 말리진 않을게.”
“…오라버니, 그런 일은 없어. 그렇지?”
연이가 풀죽은 목소리로 확인하듯이 모두를 둘러보며 물었다. 내 품안에 붙들려 있는 주선이를 포함해서 내 여자들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주인님께서도 그들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응. 무공이 없어지고 나면 평범한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인데…. 아 물론 세상에 적응하려면 힘이야 들겠지만.”
세상은 이제 곧 있으면 근대로 접어들고 봉건질서는 끝난다. 통신과 물류의 발달로 자국 안에서 조차 각 지역에 대행자가 있던 시기에서 벗어나 세계각국이 전 지구를 대상으로 물고뜯는다. 한반도까지 그 영향이 미치려면 조금 더 있어야 겠지만 이곳 중원은 지금도 벌써 급물살을 타고 있다.
“우리 주선이도 앞으로 큰 역할을 해야 할거야.”
“네,네에?”
“은월문과 연계해서 문파들의 곳간을 털어줘야겠어.”
“…네에….”
“지금 네 경지라면 충분히 할 수 있겠지?”
“네. 가능합니다.”
나는 주선이의 허리춤에 올려뒀던 손을 올려서 가슴 아랫쪽을 슬금슬금 쓰다듬었다. 간지러운 느낌인지 주선이가 몸을 이리저리 빼려고 시도했다. 물론 나한테 차단당했지만.
“앞으로 너희들이 할 일이 많아. 바빠질거야.”
“네!”
내가 퍼져있을때 보다 다들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연이는 빼고. 저 할머니는 진짜 손 많이 간다.
그녀들과의 관계도, 현대인스러운 측면에서 형성하려고 생각했던 경향이 있었다. 무슨 말이냐면, 하다못해 짐승같은 성욕이라도 대놓고 풀어서 육변기 역할이라도 줬어야 한다는거다.정서적으로다가, 내가 사랑하고 아끼고 있고, 개개인의 의견을 존중하고, 쏘 스윗한 밀어를 속삭이고 그런건 천부인권이 보편화된 미래시대의 선진국 이야기다. 나와 말이 통하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침대에서 뒹군다고 해도 정서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는건데, 내쪽에서 내 여자들이 보내는 신호를 잘 못 생각하고 있었다는거지.
연이가 달거리를 시작했다고 기뻐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결국 후대 생산이라는 쓸모가 생겼다는거다. 내가 그녀들의 무력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내가 무림을 정복한다거나 문파를 차린다거나 그런 목적이 없었으니까 발생한 일이긴 했지만 내 여자들은 아주 어릴때부터 주먹질 칼질 해온 무인이었고 할 수 있는것도 그것 뿐인데 정작 내가 그런게 필요하지 않았던거다. 지금 시대는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생산인력이다. 아무리 무가에서 태어나고, 무림인으로 살았어도 내 여자들이 생각하는 여자의 가치는 내 생각과 판이하게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내 여자들을 공평하게 사랑해주겠답시고 분위기 잡고, 친절하게 대해주고, 잠자리에서도 부드럽게 배려하고 이런 액션 하나하나가 사실 내 여자들에게는 방치하는거나 다름없는 수준의 불안감을 조성했던 것 같다. 그거 말고는 쓰임새도 없는것 같은데 도통 나한테 뭐가 필요한지는 모르겠으니까. 내가 내 여자들에게 줬어야 하는 확신은 뭐가 뭔지도 모를 정서적인 안정감같은게 아니라 나한테 쓸모있고 필요한 사람이라는 확신이었을 것이다.
“자윤이는 마의하고 협의해서 인체에 무해한 산공독을 연구해봐.”
“네, 주공!”
인체에 무해하면 ‘독’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일단 현용의 산공독처럼 중독당하자 마자 음! 산공독인가! 같은 느낌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천천히 내공의 형성을 방해하는 약이 필요할 것 같았다. 특히 무공에 입문하는 어린 아이들에게 악영향이 없으면서도 세력형성은 방해할 수 있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으로.
“화란이는 내일 윤성이좀 잡아와라.”
“네, 삼랑. 그런데, 윤성이 금제를 풀어 주셨다면서요?”
“어. 그렇긴 한데…. 그냥 물어보기나 해. 한판 낄건지 말건지.”
“네. 제가 잡아 올게요.”
윤성이한테 폼은 있는대로 잡고 금제를 풀어 줬는데 벌써 쨌으면 다시 잡아와야 할 판이다. 쪽팔리게. 화란이와 윤성이는 하오문, 그러니까 그때 지양회라고 했었나? 걔들 쪽으로 산공독을 깔아야 할 것 같다. 그래야 중국 대륙 전역에 깔 수 있을테니까. 산공독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봐야겠지만…. 음. 지금 우리쪽에서 나가는 치료약도 손을 좀 대야 할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은 주선이에게 무영문의 기본적인 은신술을 배워서 주선이의 일을 도와줘야 해.”
“응. 오라버니.”
“그래, 삼아.”
“네…주인님.”
린이와 서령이는 무영문 애들하고 같이 사천 인근 문파들부터 하나하나 털면 될 것 같고. 터는 거 갖고 뭐 할지는 따로 고민을 좀 해봐야지. 재물이나 비급따위가 목표가 아니라 터는 것 자체가 목적이니까.
“연이 너는 아냐. 근신 좀 하고 있어.”
“응….”
일단 연이는 당분간 내 옆에 묶어놔야겠다. 연이는 사실 뭘 연습하고 어쩌고 할 필요 없이 그냥 어디 떨궈놔도 전략병기같은 존재기때문에 당장에 딱히 뭘 지시할 내용은 없었다. 프리롤로 두면 사고를 뻥뻥치고 다니는데다, 멘탈을 좀 잡아 줄 필요도 있고. 아무래도 좀 더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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