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 무림치매대응반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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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하다 보면 말이 나오지 않는게 있을거야. 그걸 굳이 이야기 하려고 용 쓰지 말고. 계속 생각을 바꾸면서 이것저것 이야기 해 보게.”
“어…으으음….”
뭔가 생각을 떠올리기도, 그걸 입밖으로 만들어내기도 힘들다.
“제 원래 나이는 여기 오기 전에 스물넷이었고…. 아, 이건 말 할 수 있네요. 원래는 지금 해동이라고 부르는 곳의 사람이었습니다.”
해동 이야기 말고 내가 대충 마흔 근처라는 이야기는 전에 연이나 다른 애들한테도 했던 이야기이니 문제없이 말 할 수 있다.
“오호. 그래. 그리고 또?”
“어….”
내가 미래에서 왔다는거 말고 할 수 있는 말이 또 뭐가 있을까? 역사를 알고 있다? 명은 곧 망한다?
“저는 지금보다 뒷 세대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훗날의 사람이라는 거지?”
“예 맞습니다.
구체적인 시기는 불가능하고 대충 미래인이라고 하는건 되는건가보다.
“명은 곧 망합니다.”
“허어…. 역시.”
“그리고….”
남명으로 쪼그라들고 청이 일어나 망한다거나 그런건 역시 입 밖으로 낼 수 없다. 명나라가 망한다는건 전달할 수 있어도 그건 안되는 것 같다. 아, 하긴. 나라가 망한다는 건 역사적으로 수십번이나 벌어진 일이니까 내가 미래인이라는걸 밝히지 않더라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다.
“어으….”
이후로는 마찬가지였다. 현대 한국의 이야기나, 구체적인 역사의 사건진행 같은 떡밥은 입에 올릴 수 없었다. 답답해죽겠네 이거.
“됐네. 이제 그만하시게.”
“…예.”
“확실히, 자네에게 작용하는 강한 금제를 느낄 수가 있구만. 내 짐작대로, 자네역시 당대의 천명을 받았음에 틀림없어.”
“그게 티가 납니까?”
“티가 난다기 보다는, 내가 직접 황상의 꼴을 봤으니까.”
황상을 직접 대면하여 그 꼴을 봤다니 둘러선 내 여자들이 술렁거린다.
“왜들이래? 나 의선이야 의선. 황실이고 명문대파고 내 얼굴 한 번을 못봐서 안달이라고. 황상도 보자면 충분히 볼 수 있어.”
정말 백년이상 살아온 노괴라면 그 정도야 일도 아니긴 할거다. 그래서 직접 본 만력제도 뭔가 더듬더듬 말을 못했다거나 뭐 그런것들이 있는건가?
“황상은, 글쎄. 시기상으로는…. 아니, 아니다. 네놈 이야기부터 하자. 보통 이렇게 천명을 받은 인간들이 아무것도 할 생각을 못하고 축 늘어지는건 천명에 본격적으로 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었어야 할 사람이 살았거나, 살았어야 할 사람이 죽었거나. 단순하게 그것만이 아니라 자네 의지도 좀 문제가 있겠지만….”
짚이는거? 엄청많지. 내가 이짓거리 하면서 살려낸 사람을 따지면 손발 다 동원해도 셀수가 없다. 살아야 할 사람이 죽은건…. 내 손에 죽은 동창의 환관이 거기에 해당할지도 모르지.
“어긋난 천명을 바로잡고자 한다면…. 글쎄다. 관련있는 사람들을 다 처리한들….”
“불가.”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때문에 살아난 애들을 다 죽이라고? 무슨 말도 안되는….
“애초에 그건 가능하지도 않으니 눈깔에 힘 주지 말아라. 불가에서도 이야기 하듯 옷깃만 스쳐도 억겁의 인연이라는데, 그렇게 처리할것 같으면 네놈이 살린사람들, 죽인사람들, 그에 관련되어 가지처럼 뻗어나간 수많은 사람들을 휘둘러야 할텐데…. 어차피 엎어진 물이니라. 살아있는 것들이야 그렇다손 쳐도. 죽은 놈들을 살릴수도 없는 노릇 아니냐.”
“그렇죠.”
“혹시, 짐작가는 내용이 있느냐?”
“천명 말씀이십니까?”
“그래. 자네가 받은 천명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대항을 하건 순응을 하건 할 터인데.”
글쎄다. 내가 무슨 능력이 있는것도 아니고, 천명같이 거창한걸 왜 날 잡아다가 주는건지도 모르겠다. 여기 넘어오기 전에 뭔가 막 빛으로 가득 찬 공간에서 자칭 신이라는 존재가 등장하고 니가 거기가면 뭐 이거저거 해야된다 오더를 받은것도 아니고.
“…하나만 묻지.”
“두개 물어보셔도 됩니다.”
“아니, 나 같은 사람이 자꾸 천명에 대해서 알아봐야 좋을 것이 없네. 그저 자네의 판단을 도와주기 위함이지. 자네가 제대로 뜻을 세우고, 내가 그것을 도와줄 사람이라면야 별 문제가 없을테지만…. 하여간. 자네가 후대 사람이라니 물어보는데, 자네가 있던곳에…. 무림이 있나?”
아.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쳐가는 상쾌함이 느껴졌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을것 같다. 이게 내 천명이구나.
“없습…니다.”
“호오, 가닥을 잡은 것 같군?”
“네에…. 거창하게 천명에 대해서 이해했다기 보다는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뭔데 오라버니? 응?”
기분이 썩 좋지 않다. 대체 어떤 존재가 그런걸 주는건지 모르겠지만 멋대로 사람을 여기까지 끌고 와서 천명이니 뭐니. 사람 팔자를 뒤틀어 놓는지. 이름이라도 알면 쌍욕을 박아 주겠는데. 이걸 이렇게 무기력하게 따라갈 수 밖에 없는건가 싶다.
“이게…. 그….”
“불편하다면 구체적인건 이야기 하지 않아도 괜찮네. 사실 내가 알 필요도 없고.”
흠…. 그렇다면 이야기 하지 않는 편이 좋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당장에 나를 막아세우려고 할 지도 모르고. 그치만 이미 내가 있던 곳에는 무림이 없다는 이야기 까지 나오고 그 직후에 뭔가를 눈치챈 것 처럼 대오각성을 했으니 내가 말 하나 마나 대충은 눈치 챌 것 같다.
“무림의 멸망.”
그러느니 차라리 까놓고 지혜나 빌리자. 오래 사셔서 그런지 머리는 좋으신것 같으니까.
“…네?”
“삼랑….”
화란이와 린이가 헉 하는 소리를 낸다. 까놓고 말해서 나는 크게 상관없다. 우연과 우연이 몇 십번쯤 겹쳐서 연이를 구해낸 뒤로 가급적이면 전 무림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였던건 사실이지만, 거창한 대의를 가지고 움직였던 것은 아니다. 그냥 황실쪽에서 무림을 없애려고 수를 쓰는게 마음에 안 들었으니까 엿 먹이는 차원에서 그랬던 거지.
“…그게 자네가 받은 천명인가.”
“말씀드렸듯 확실하게는 모르겠습니다. 당장 떠 오르는건 그게 다네요.”
“그렇게 느꼈다면 그게 맞는 것이겠지. 황상의 천명은 알 수 없지만, 자네와 대치될 수도 있겠군.”
“황상께서 어떤 천명을 가지신지는 모르십니까?”
“지금 네놈이 느끼는 그것도 명확하지 않아. 그냥 마음 내키는대로 사는것이 전부니까. 애초에 신적인 존재의 의지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다 자신하는 것 또한 어리석은 일이지.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닐세.”
“이렇게…. 천명을 받은 사람이라고 해야할지, 아무튼 그런 사람이 많습니까?”
“글쎄, 그것도 모를일이야. 그저 등선을 멈추고 오래 살았을 뿐인 내가 알아봐야 얼마나 알겠는가?”
어째, 아까는 본인이 굉장히 대단한 사람이라고 뻐기면서 자랑했던 것 같은데. 왜 갑자기 없어보이는 척이신지.
“자네도 머리가 복잡할 것 같으니, 생각을 좀 정리하고 나면 다시 이야기 하세. 내 알기로 천명을 받은 이가 우후죽순 나타난다면 이는 곧 난세를 의미함일세. 아마 세상이 크게 혼란해 지겠지.”
“그건….”
의식하지 못하고 이후의 세상에 대해서 명이 대충 망하고 청이랑 맞다이를 놓다가 혼란해진다는 뭐 그런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더니 또 머릿속에서 얼어붙은 듯 스톱이 걸린다. 염병할.
“아, 됐네. 천기를 자꾸 알아봐야 좋을 것이 없다니까. 자네는 또 자네 처들과 할 이야기가 있을테니 나는 이만 일어나 보겠네.”
“쉬실 곳을 내어드리겠습니다.”
“아닐세.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
“혹시 의선께서는 저를 적대하실 생각이십니까?”
나한테는 이게 중요했다. 이 정도쯤 되는 인물이 나를 적대한다면 상당히 심각해질 것 같아서.
“…천명일세. 천명. 자네는 신적인 존재의 안배야. 내가 적대할 팔자라면 적대할 것이고, 도울 팔자라면 돕게 될 걸세. 인간이 미루어 짐작하는것은 역효과만 난다는 거야.”
“...네?”
그럼 뭐 내 의지는 상관 없다는거 아닌가? 내가 천명과 반대방향으로 가면 또 이렇게 무기력하고 찐따가 되는 상황이 될텐데….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음….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혹시 인간이 그저 천명에 휘둘리기만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다시 잘 생각해 보게. 그렇다면 직접하지 뭐하러 인간에게 맡기겠는가?”
제 말이 그건데요. 지들이 직접하지. 씨벌.
“자네가 천명에 대항하고 있다고 한건,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뜻이 아니야.”
“그럼요?”
“선택받은 인간이 의지를 가지지 못하고 흐리멍텅하게 분탕질을 친다? 그런 측면에서 봐야할까. 그것도 애매하군.”
“뭐가 그렇게 애매한게 많습니까.”
“내가 받아 봤어야 말이지. 아무튼 직무유기같은걸세. 사리사욕을 추구하고 뭐 그런….”
뭐지. 생활을 좀 대국적으로 하라는건가. 내 무공을 생각하면, 내 천명은 명의 황실과 관계있는건 확실하고…. 지금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내가 느낀대로 무림이 이후의 역사에 등장하지 않도록 하는 기초 작업? 그런 느낌의 뭔가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런데 황실에서 무림을 없애버리려고 한다면 나랑 겹치는거 아닌가? 황상은 무림을 살리고 보존해야 하는건가.
“자, 생각은 많겠지만 내가 가고 나면 생각하시게. 아마 금방 또 보게 될테니까.”
“어디로 가십니까?”
“황궁으로 가 봐야지. 자네도 봤으니 본격적으로 황상도 진찰해 볼 생각일세.”
천기니 어쩌니 하면서 깊이 관여하는건 안좋다고 했으면서요.
“그건…. 뭐. 알게 뭔가. 내 의지지. 이날 이때까지 살면서 내가 궁금한건 참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일세.”
“등선 안하시도록 조심하십시요.”
“악담을 해라.”
“필요한 일 있으면 기별주시구요.”
“됐어. 나오지 말게. 거지놈 데리고 바로 갈거야.”
의선은 손을 휘휘 저어 보이고는 밖으로 나섰다. 아, 그거 안물어봤네. 연이가 나한테 여자를 갖다 붙이는게 왜 역효과였다는건지.
“자네가 할 생각이 없는데, 옆에서 자꾸 쪼아대면 더 하기 싫을것이 아닌가? 그러면 점점 더 늘어지게 되어 있네. 황상처럼 말이지. 스스로 꼬리를 만 개꼴이 되는거야.”
“아…. 예.”
“그러니 제일매화는 제발 성질좀 죽이고 다소곳이 좀….”
“의선!”
연이가 꽥 소리를 지르며 따라 나서는 시늉을 하니 의선이 머쓱하게 웃고는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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