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무림치매대응반 29
* * *
“그 사람들이 욕한다고 검후께서 피가납니까 뼈가 부러집니까?”
“그만. 이미 충분히 알아 들었네. 그래. 사과를 하고 오지.”
뭐 지 잘못한거 사과하러 가는데 포스 오지네 진짜. 그리고 돌아오지 말라니까? 내가 멀뚱멀뚱 쳐다보는 사이 검후는 일어서서 옷차림을 가다듬었다.
“혹시, 얼굴을 가릴것이 좀 있나?”
“잠시만요.”
등짐 어디엔가 우리 애들이 얼굴을 가리기 위해 평소 사용하는 면사가 들어있었다. 조금 뒤적거리다 보니 금방 찾을 수 있어서 적당히 두어장 잡히는대로 건네 줬다. 하나 주면 정 없다고 할까봐.
“고맙네.”
“별말씀을요.”
검후는 별다른 말 없이 토굴 밖으로 나갔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 주려다가, 그만뒀다. 한두살먹은 애도 아니고 알아서 잘 하겠지. 어색하던 사람이나가고 나니까 공기마저 탁 트이는 느낌이다. 얘들은 언제 오려나.
“오라버니! 검후는 어딜 가는거야?”
“봤냐?”
“어디가는 거냐니까?”
여윽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주변에서 연이가 매복하고 있었나보다. 기특하기도 하지. 흐뭇한 마음을 담아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다가 아무리 그래도 나이든 어르신께 하는건 아닌 것 같아서 손을 내려놓았다.
“왜 섭섭하게 손을 내려? 기왕 올린거 쓰다듬으면 되는거지.”
“아니 그래도 좀….”
“쓰읍….”
경공섭물로 내 손을 부드럽게 감싸 올려 자기 머리위에 턱 올려놓는다. 내공으로 혼을 흔들면 셀프로 쓰담쓰담도 되겠지만 이렇게 까지 하는데 딱히 뺄 필요도 없어서 동글동글한 머리통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서 검후는 어디 갔냐니까?”
“아, 맞다. 그거 물어봤었지. 자기가 뭐 검각 사람들한테도 죄를 짓고 직전제자 뼈도 해먹었다고 자책하고 있길래 욕이나 좀 먹으라고 검각으로 보냈어.”
대화는 못 들었나? 그 위치에 있었으면 검후가 기막을 쳐 놓은것도 아니고 충분히 들었을텐데.
“그랬구나. 난 또 오라버니가 마음에 안든다고 내 쫓은줄 알았지.”
“내가 마음에 들고 말고 할게 뭐가 있어.”
사실 반쯤은 그게 맞나 싶긴하다. 의도적으로 다시 오라는 말은 안하려고 노력했으니까. 솔직히, 이 정도면 물에서 건져놓은 수준은 되는거 아닌가. 보따리는 연이와 화란이에게만 줘도 충분하다.
“저 왔어요. 어? 삼랑. 검후는요?”
“검각에 가서 욕먹으라고 등떠밀어 보냈어.”
“예에에?”
“아니, 뭘 그렇게 놀래?”
“언니 이것좀 받아줘요. 저는 뒤따라가서 살펴보고 올게요.”
오리로 추정되는 손질된 조류를 네 마리 던지고 화란이도 바람같이 뛰쳐나갔다. 뭣 때문에 저렇게 황급하게….
“아무래도 감정이 격해지다 보면 서로 다툴일도 생기고, 혹시나 검후가 검각에 악감정을 가지게 된 것 아닐까 걱정하긴 했어.”
“화란이가?”
“응.”
“우리도 가 봐야하나?”
“아직 검후가 경지를 갈무리 할 정신은 아닐테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화란이 혼자면 충분할거야. 우리는 오리나 굽자.”
“그냥 내공으로 익히지 왜?”
“오라버니가 기왕 장작불도 피워놨잖아. 직화는 또 직화의 맛이 있으니까.”
그건 동감이다. 아, 생각하니까 숯불 갈비가 땡기는데 남해 내려가면 터잡고 숯가마나 하나 만들어 봐야겠다. 숯불 느낌만 나면 충분하니까 대충 만들어도 추억하기에는 좋겠지.
“아, 혈라마어쩌고 하던 이야기는 어떻게 된거야?”
“오라버니는 참, 오라버니 일도 아닌데 뭐 그렇게 관심이 많아?”
“궁금하잖아? 이 중원무림을 혼란에 빠지게 한 암약단체라는 놈들이.”
“나나 화란이는 우리 몸이나 좀 더 궁금해 해주면 좋겠는데 말이지.”
“그거는 어흠….”
따지자면 나도 사십대인데 할매들 훅훅 들어오는건 가끔 적응이 안된다.
“확실히 혈라마들 느낌은 난대. 걔들 강시질하느라 뇌쪽 건드리는건 기가막히게 하거든.”
“그럼 서장으로 가 봐야 하나?”
“뭐하러 가 거길. 날씨도 더럽고 먹을것도 마땅찮은데.”
아니, 이거 나만 궁금해? 어? 나만 궁금한거냐고. 처음 나랑 돌아다니기 시작했을때는 진짜 무슨 중원 무림의 큰 비밀이라도 파헤칠것 마냥 그러더니. 에라이!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오라버니, 급할것 없어. 정 궁금하면 검후처럼 소싯적에 날렸던 여고수들이나 계속 치료하자.”
“그게 의미가 있나?”
“그러다 보면 소문이 나지 않겠어? 그럼 급한놈들이 우리 잡으러 뛰쳐나오겠지.”
“무방비로 습격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걱정하지마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절대 안다치게 할 테니까.”
“난 니들이 다치는것도 싫어. 싸움질 하는것도 싫고.”
아직 내가 얘들한테 열정이 불타오르는 연심을 느끼고 그런건 아니지만, 하루하루 죽어가던 눈빛을 봤던 입장에서 젊어졌다고 해도 피튀기고 싸우는 인생으로 돌아가는건 그냥 인간적인 입장에서도 좀 별로다. 이 중원무림이 진짜 쟝글이고, 약하면 죽고, 서로 물고뜯는 세상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치만 모처럼 다 포기하고 죽어가던 인생의 끝자락에서 돌아왔으니까, 좋은게 좋은 식으로 평온하게 살면 좋겠다. 겸사겸사 나도 옆에서 같이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좋고.
“음…지금은 좀 감동인데.”
“지금은이면 다른때는 감동이 아니었나?”
“쬐에끔?”
실없는 소리에 그냥 피식거리고 말았다. 긴 나뭇가지로 흩어진 장작을 한 번 더 그러모아 주고 다시 내려놓았다. 장작 덕분에 훈훈한 열기가 감도는 토굴안에 불 튀는 소리만 들린다. 이런게 좋은거지. 불멍도 하고. 불 위에 오리기름 떨어져서 맛있는 냄새도 나고. 내가 정말 개쩌는 경지를 이뤄서 연이나 화란이와 오래도록 살 거라면 적어도 우리한테 손을 썼던 세력에 대해서 파악하고 감시하는 정도로는 경계를 하고 있어야 된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워낙 오래전부터 시작된 일 같아서, 조금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죽기전에는 알 수 있겠지.”
“죽기전이라니 참.”
“오라버니는 젊어서 잘 체감이 안될 수 있지 뭐.”
나도 사실은 저 멀리 미래에서 온 거라 니들 생각과는 다르게 정신연령이 좀 있는 편이거든! 하고 속으로만 소심하게 이야기 해 본다. 내 안에서 아직도 그 기억이 그냥 꿈인건지 이게 꿈인건지 제법 디테일한 것 까지 생각나는 그것을 꿈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건지. 내가 느끼고 있는 자아연속성은 한국인이기도 하고. 하여간.
“내 경험상, 왠지 그놈들이 우리를 눈치채면 귀찮게 만들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래.”
“결국 오라버니가 그러는건 불안해서 그러는거 아냐?”
“그렇지…?”
“아휴 정말. 나도 화란이도 그렇게 오라버니가 쩔쩔매면서 걱정해야 할 그런 사람이 아니라니까. 검후는 쪼끔 걱정될지도 모르겠다.”
“검후 걱정을 내가 왜 하냐.”
“진짜 버리고 가게?”
“버리긴 또 뭘 버려. 무슨 관계가 있다고.”
“에이, 그래도 사람이 그러는거 아니다? 몸도 섞어 놓고서는. 다른 사람눈에 눈물나게 하는거 아니야.”
뇐네 종특인지 연이도 그렇고 화란이도 쓸데없는 곳에서 오지랖을 부리는 경향이 있다. 사실 연이가 화란이를 냅다 주워온것도 불쌍하니까 치료했다는 오지랖의 발로였고. 아니면 내가 너무 미래인 기준으로 사고를 해서 매몰찬건가?
“영웅은 삼처 사첩도 흠이 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고향에 있는 정실을 뺀다고 해도 아직 첩자리는 넉넉하게 남았잖아?”
“니들 둘은 벌써 처고? 그리고 고향에 정실 없다니까.”
“아무렴, 우리가 오라버니를 어떻게 키웠는데.”
키우긴 뭘…아, 내공을 뻥튀기 해 줬구나. 그래 무림에서 내공 키워줬으면 다 키운거지. 인정한다.
“생각만해도 너무 불쌍하잖아. 머리털 나고 부터 검각에서 컸는데 부모형제자식같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필요없다고 하니 그 속이 어떻겠어.”
“정작 연이 너는 스스로 떠났으면서.”
“나랑은 경우가 좀 다르지.”
다르다면 다르긴 하다. 연이는 어쨌거나 무림명숙의 대우를 받으면서 열악하나마 무림맹의 시설에서 관리를 받았고 검후는…. 대우를 못 받은것도 없잖아? 보니까 검각에서 온갖 좋다는건 다 먹인 모양인데. 그러고도 패악을 부리고 개지랄을 내놔서 우리보고 그냥 좀 없는 사람 칠테니까 데리고 가라고 한거고.
“아무튼! 오라버니 옆에 있겠다고 하면 그냥 못이긴척 받아주란 말야.”
“그거야 내 마음이지 왜 네가….”
“오리나 먹어. 오라버니 오늘 기운써서 그런지 볼이 홀쭉해.”
“너도 그렇고 화란이도 그렇고 자꾸 날 먹일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건량이라도 그렇다. 시도때도 없이 먹인다. 쪼끔 질린다 싶으면 사냥도 해오고. 지금도 오리 다리를 하나 부욱 뜯어서 식을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내 손에 쥐어준다.
“…미안해. 옛날 사람이라서 그런가봐.”
“아니 또 그런 이야기는 아니고….”
이거 나 찔리라고 이런 소릴 하는건지 진짜 나이 생각나서 우울해지는건지. 나이가 몇살이건 여자는 여자라고 도통 종잡을 수가 없다.
그냥 이런 저런 잡생각을 다 떠나서, 배경을 다 걷어내고서도 연이의 외모와, 성격과, 나한테 헌신하는 그런 것들. 받았으면 줘야한다는 인지상정적인 그런것도 아니고. 또 주절주절 생각이 새는데. 그냥 끌리고. 좋다. 이런게 귀찮다거나 하는 배부른 생각이 아주 없는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나는 연이와, 화란이와 함께 보내고 있는 이 시간들이 행복하고 좋다. 여기 무림에 떨어지기 전의 인생까지 포함하더라도.
“미안하면 검후도 같이 가자. 응? 우리 아니면 그 할망구가 어디가서 또 살 비비고 살겠어. 걘 얼굴에 객사할 팔자라는게 써 있다니까?”
“내가 미안한거랑 그게 뭔…. 됐다. 됐어. 말을 말아야지.”
연이가 쥐어준 오리다리를 붙들고 한입 베어 물었다. 소금만 뿌려서 직화로 구웠는데도 손질을 잘 했는지 잡내도 하나 없고 맛이 끝내준다. 한입 가득 미어터지게 오리고기를 물고 북적북적 씹고 있으니 연이가 무릎에 손을 얹고서는 함박웃음을 짓는다. 진짜 나 먹는거만 봐도 배부른가.
“그럼 같이 가는거다?”
“혹시나 여기로 돌아오면 제대로 물어보고.”
“응응!”
왠지 물어보나 마나일것 같은 느낌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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