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무림치매대응반 12
* * *
“진짜요? 아니아니, 진짜?”
“오라버니….”
“실수야 실수.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진짜로?”
“확실히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어. 응. 확실히.”
아까 초화란을 보고는 뭔가 필이 왔나보다. 아니, 그런데 이게 지금 뇌세포의 손상으로 발생하는 증상일텐데 치료를 한다고 해서…. 아닌가? 뭔가의 기작으로 그냥 막혀있는거라면…. 실제로 종리연은 기억이나 판단력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기도 했고. 흠 잘 모르겠는데.
“어떤놈 작품인지는 모르겠지만 머리를 아주 잘 썼어. 약간의 공력과 고독(??)이외에도 여러가지 독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아.”
“그걸 느낄 수가 있어?”
“나도 몰라, 그냥 느껴지는걸 어떡해. 잘 설명은 못하겠지만.”
이론적인 부분에도 빠삭한 종리연이 이렇게 까지 말 한다면 정말 느낌적인 느낌으로 눈치챈거다. 하기사 이게 암약단체 놈들의 제조로 인한 인공적인 현상이라면 아마 옛날 그 시대의 지금과는 비교도 안되는 고수들이 눈치 못채도록 만들어야 했을테니까. 사람을 아득하게 초월해버린 종리연의 경지로도 어렴풋하게만 알아 볼 수 있는거라면 정말 굉장한거다.
“어떻게 할거야?”
“그건 오라버니가 결정해야지.”
“내가?”
“어딜 아녀자가 대장부의 행보를 이래라 저래라 하나?”
아니, 그런것 치고는 제법 자기 편할대로 부려먹고 있는 느낌인데.
“일단 그 보자기나 풀어봐.”
“아, 그래 이거 풀어봐야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쳐다봐 주니 종리연이 말을 돌리고 싶은 듯 받아온 비밀금고 내용물을 풀어보란다. 내것도 아닌데 나더러 풀어보라니. 이거 뭐 풀면 독이 뿜어진다거나 그런건 아니겠지? 보자기를 풀고 안에 들어있던 작은 목합을 열었다.
“오오…. 이거 만금장거네?”
“응. 옛날 무림맹 외당의 활동자금이야.”
“이게?”
그동안 했던 이야기로 보면 종리연이 무림맹 외당 출신이 맞는 것 같은데. 그나저나 찾을 돈이 있다고 했던게 슈킹한 공금이었어? 만냥단위 전표가 아주 그냥 다발로 있는것이….
“왜 무림맹에서 조사를 진행했다고 했잖아.”
“그랬지.”
“표면적으로는 외당이 해체되었지만 내가 마지막 외당주로 밀지를 받은 상태였어. 그때 받아둔 활동 자금이지.”
“그럼 그 당시 무림맹의 외당 사람들은?”
“그 중에 하나가 오늘 본 진룡회주야.”
“다들 나이가 있구만.”
“스읍…. 오라버니. 나이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지?”
말하다가 존대가 나와도 쓰읍. 나이 이야기가 나와도 쓰읍. 나이 생각을 하는 것 같아도 지랄. 아. 거 사람 피곤하게.
“어쩔 수 없었어. 마지막으로 외당을 유지할 때가 십여년전인데, 도무지 젊은 놈들이 따라 오지를 못하더라고.”
내공수련이라는 특성이 있으니 나이가 들면 어련히 강해지게 마련이다. 영약이나 신공절학으로 그 갭을 초월하고, 개인의 오성에 따라 나이와 무관하게 활약하는 무림고수들도 있었지만 대체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즉슨, 이 할매들이 외당무사로 현장을 구를게 아니라 적당히 밑에 현장직으로 부릴만 한 고수들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종리연이 이렇게 되기전에 위화감을 느낀 부분도 아마 그런 것들이겠지.
“하여간 이 돈은 이제 무림맹에 제대로 기록도 안 남아있을 돈이야. 내 개인재산도 좀 들어 있어서 그냥 우리끼리 쓰면서 살아도 괜찮아.”
“그…. 음…. 자제분들은…?”
그 동안 피하고 있었던 민감한 주제인데. 돈을 보니 결국 그 이야기를 꺼내게 된다. 내가 다 먹어도 되는 돈이라지만 왠지 음…. 좀 그렇잖아?
“걔들은 이런거 없어도 잘 살거야. 걱정할 필요 없어. 죽은 남편은 데릴사위여서 별 볼일 없다지만 세가가 알아서 챙기겠지. 나도 남겨줄 만큼 남겨줬고.”
“그렇구나.”
“그래서, 치료해 볼까 말까?”
결국 여기서 치료한다는건, 초화란이 정상이 될 거라는 가정을 하고 생각해야겠지? 잠재적으로는 무림맹의 외당 멤버를 복구할까 말까라는 건데.
“너는 어때?”
“자꾸 내 의견 물어보지 말구. 오라버니가 어쩌고 싶은지를 묻는 거라니까?”
“글쎄다. 내 의견이 중요한지 잘 모르겠는데….”
진짜로. 종리연이 하고싶다고 하면 내가 뭐 말릴 수단이 있는것도 아니고. 지금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는 전표다발도 나더러 쓰라고 하지만 결국 종리연의 돈이 아닌가? 무림맹…은 뭐 이제 슈킹친거니까 떼놓는다고 치고.
“오라버니. 나도 이런쪽으로는 잘 몰라서 어떻게 설명은 못하겠는데 말이야.”
“어?”
“그…. 나도 이게 궁금하긴 한데, 오라버니가 하지 말자면 그냥 안 할거야. 지금에 와서 남아 있는 고수들 다 모아본다고 뭐가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거야 뭐. 그렇지. 이미 50년 가까이 무림을 손 위에 올려놓고 차근차근 고수들을 보내고 새싹들 밟아가며 농락해 왔다면 지금에 와서 어떻게 되빠꾸를 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고 봐야지.
“오라버니와 처음 몸을 섞었을때도 이야기 했지만, 난 그냥 궁금한거야. 이걸 알아 냈다고 뭐 무림맹에 가서 명명백백하게 밝힐거야 어쩔거야? 그랬다가 칼 맞을 수도 있는데.”
선배님께서 칼 맞는다고 다치시긴 하겠어요?
“하다가, 위험해지면 관둘테니까 걱정하지마. 어딜 가든 내 한 몸은 지킬 수 있다구?”
대충 무슨 말 하는지는 알겠다. 종리연의 얼굴이 벌개져 있으니까. 내가 하라면 할거고 하지 말라면 안할거다 뭐. 그러니까 본인을 나한테 종속된 뭐 그런 취급을 해 달라. 이런 느낌인 것 같은데.
“그렇기는 하다만, 그래서 초화란을 치료하면 무슨 이득이 있는거야?”
“이득? 없는데?”
그럼 왜 그걸 치료를….
“불쌍하잖아?”
불쌍하냐 아니냐를 물으면 불쌍하긴 하지. 치매노인이 안 불쌍한 경우가…. 있다. 얼굴 맞대고 악다구니를 쓰면서 똥오줌 받다 보면 안 불쌍해 지긴 한다. 아 어쨌든, 불쌍하니까 치료해준다? 흠.
“뭐 같이 이걸 파 볼 생각이 들면 옛 무림맹 외당 동료로서 좋은거고. 아니라도 편하게 보내줄 수는 있겠지.”
“치료 안되면 죽일거야?”
“머릿속이잖아? 치료하다가 잘못되면 아마 죽을거야. 느낌에 그런 장치도 안해놨을리가 없어.”
살벌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네.
“나도 정신 들었을때는 죽고싶거나, 어떻게 회복할 수 없을까, 이렇게 될 때 까지 무얼하고 살았나, 그런 생각들만 했었어. 초화란도 마찬가지겠지. 돌보는 사람도 봤잖아?”
하긴 나도 무림맹 안에서 돌보는 사람 포지션이었고, 최종단계가 아닌 2단계에서 정말 오만정이 다 떨어진 표정으로 치매노인을 돌보는 식솔들을 봤었으니까 알 수 있다. 아까 그 마님이라고 불린 사람은 정말로 피곤에 쩔어 죽어가는 것 같았다. 아, 그런데 왜 안집어넣은 거지? 어느정도 명망이 있는 무림인이라면 거의다 거기 집어 넣을텐데.
“화란이는 하오문 출신이라고 옛날부터 무림맹에서 그렇게 좋은 취급은 못 받았어. 대외적으로는.”
“대외적으로는?”
“걘 그거 말고도 숨겨진 신분이 하나 더 있거든. 하여간 무림맹도 노친네들 하나 둘 벽에 똥칠하면서 죄다 맛이갔으니까 나름 예우라면 예우인것도 못 받았을거야. 아니면 본인이 정신이 있을때 거부라도 했거나.”
“흐으음….”
“고민되면 그냥 하지 마. 여기서 맛있는거나 먹고 저어기 중심가쪽에 큰 객잔 별체라도 빌려서 며칠 놀다가 떠나자.”
“그렇게 말을 하면 내가 또 뭐가 되냐?”
불쌍해서 치료해 주자고 하는걸.
“나야, 오라버니가 하자는대로 따를 뿐. 이미 몸도 마음도 모두….”
“누가 들으면 진짠줄 알겠다. 에휴. 그래 치료해봐라. 궁금증을 풀든 노망난 고수 하나를 편히 보내든 뭐라도 되겠지.”
“알겠어. 오라버니가 명하시니 따라야지.”
내가 명한적 없는데. 왜 자꾸 나한테 떠넘기려는 것 같고 그렇지. 아, 이건 자괴감이나 자격지심 그런건 아니다. 그거는 많이 느껴봐서 아는데 이거 보다는 쪼끔 더 음험한 느낌이 드는 감정이다. 지금 이거는 그냥 어, 음. 얼타는 느낌에 가까운거지.
지금 생각난거지만 그때 정소소한테 알리러 가는것도 저지당하지 않았던가. 흠.
“무슨 의심이 그렇게 많아?”
“어? 음, 아냐.”
“오라버니한테 무턱대고 믿어달랄 생각은 없으니까 얼른 이야기 해 봐.”
“그, 정리되면 이야기 할게.”
이게 참. 의식을 안하려고 계속 생각은 했는데. 눈 앞에 수십만냥은 거뜬한 전표더미가 있으니까 왠지 생각이 복잡해진다. 종리연을…. 음. 종리연이 맞다는 가정하에 아닌가? 종리연이 반로환동한 건 맞나? 하긴 환골탈태가 아니고서야 그 정도로 고수가 될 리는 없으니까. 그럼 뭘까? 사실은 무림맹 외당이 다 살아 있고 혹시 내 체질이 특별해서…. 으음…. 진짜 왜지? 생각할 수록 오리무중이다.
아. 그냥 집에 가고 싶다. 솔직히 해남정도면 그냥 대충 박혀 살아도 아무도 모를텐데.까놓고 말해서, 아직 뭐 종리연이랑 죽고 못사는 정이 쌓인것도 아니고, 이 전표다발로 돈 맛을 본 것도 아니니까 그냥 서로 갈길가도 괜찮은거 아닌가? 그런소리하면 죽이려나? 똥수발이나 들고 하던 일상에서 갑자기 비일상으로 내던져지고 나니 정신을 못차릴 지경이었는데, 찬찬히 생각해보면 이거 너무 편한 이야기 아닌가? 세상에 조건없는 호의가 어디있어. 아무래도 써먹을 일이 있으니까 나같은 무명소졸을 구슬르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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