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 무림치매대응반 8
* * *
아침. 아침인가? 잘 분간은 안간다. 동굴안이니까. 어제는 결국 그대로 기절하듯이 잠드는가 했지만, 종리연이 잠든 나를 기어이 한 번 더 깨워서 들썩거렸다. 나도 이십대 팔팔한 몸이지만 종리연은 비슷하게 젊은 몸이라도 고수니까. 음. 벌써부터 의무방어전을 걱정하고 싶진 않은데.
“이제 일어났군.”
“아..예.”
“후우…. 아침수련을 오랜만에 했더니 상쾌하네. 자네는…. 아니 됐네.”
방금 그 상당히, 뭔가 고개를 흔드는 듯 한 느낌. 신경쓰입니다만?
“애초에 규칙적으로 수련을 했다면 아무리 그래도 아직까지 그 지경일리는 없지.”
아니 제가 뭘요.
“괜찮네. 하나하나 해 가면 되니까. 늦었으면 좀 어떤가?”
그리고는 입 꼬리를 부드럽게 올려 미소를 만들어냈다. 음. 촛불때문에 시야가 좀 시원찮기는 해도 엄청 예쁘다는건 알 수 있다. 괜히 나도 멋쩍어서 같이 웃어줬다.
“일단 씻으면서 이야기 하세.”
대체 이단은 언제 나오는건지 어제부터 자꾸 일단을 찾고 계시지만 서늘한 동굴이라고는 해도 자다깨서 영 찌뿌등했기에 그녀를 따라 다시 욕조로 들어갔다. 그리고 몸을 섞는 와중에도 계속 궁금했던 화제를 드디어 끄집어냈다.
“그래서, 이제 앞으로 어쩔거에요?”
“흐음…. 조금 무거운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네만, 며칠정도 내 몸을 즐기다가 들어도 괜찮은 이야기인데.”
그럼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떠날거라는 뜻인가?
“그런 표정 하지 말게. 그대로 잡아먹고 싶어 지니까.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자네는 선택을 해야 할 것이야. 물론, 나도 선택을 해야겠지. 내가 조금 미뤄두고 싶은건 아직 내가 결정 못한 부분도 있고 해서일세. 어때. 들어보겠는가?”
“으음…. 그렇게 까지 말씀하시면, 그냥 지금 듣고 싶네요.”
“호오…? 어째서?”
“이미 궁금한 것이 생겼는데 미뤄두고는 아무래도 찝찝해서 즐거움이 반감될 것 같아요.”
“그도 그렇군. 좋아. 그럼 이야기 하지.”
우리는 어제 처음 욕조에 들어왔을때와 다르게 바짝 붙어 앉아서 서로의 몸을 만지작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상공께서는 아마 어리니 모를 수 있겠지만, 당금의 무림은 이상한 부분이 많네.”
“어떤부분이요?”
“고수가 없어. 물론 노친네들이 죄다 노망이 났으니 심득이나 오의가 제대로 이어지지 못할 가능성은 있네만, 명문이 괜히 명문이겠는가.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고수가 없네.”
제대로 통계를 내 본것은 아니지만, 50여년 전 부터 강호를 누비던 노고수의 입장에서는 확실히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 느껴질 만큼 절대고수의 수가 적어졌다.
“신진들 중에서도 말일세, 오룡이니 칠봉이니 소꿉장난하듯 아웅다웅 하는것들이 아니라도 한 둘은 궤를 벗어난 불세출의 기재들이 등장을 하기 마련인데….”
듣고보니 조금 이상하긴 하다. 여기 무림맹에서 기초 소양교육으로 받았던 고수들 리스트 중에 젊은 사람의 비중이 극히 적었던 느낌적인 느낌이….
“나만 하더라도 말일세, 내 자랑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서른을 앞두고 있었을때 이미 화산파내에 상대가 없어 비무행을 따로 나와야 할 정도였다네.”
“대충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개인의 수련을 존중하지 않고 획일화된 조직과 규율. 어디 무림인이라는 종자가 남의 말을 잘 듣는 것들인가 하면, 그럴리가 없지 않나. 명문대파고 세가고 할 것 없이 하나같이 고만고만해져 버렸어.”
왠지 듣다 보면 입시위주교육 취업위주교육의 폐해 같기도 하고?
“무림맹은 조사에 들어갔네. 아무래도 뭔가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단 말이지.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세대가 없어지고 나면 큰 일이 날거라고 생각했어.”
“큰일이요?”
“정사마 가리지 않고 이 중원 각지의 칼든놈들을 모아보면 수십만은 될 터인데, 제어할 절대자가 없다면 어찌 되겠는가? 호시탐탐 기회를 보는 세외는 말 할 것도 없네. 어떤 형태의 결말이 되건 휩쓸리는건 민초들이야. 무림인들 자체가 문제인 것은 인정하지만 관이 어찌할 수 없는 부분도 있는거니까.”
그 부분은 뭐 내가 잘 모르니까 넘어가고.
“그리고, 이것이 누군가, 혹은 어떤이들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는 결과라고 한다면 그것은 더욱 무서운 일이지 않겠나?”
“그건…. 확실히 그렇겠네요.”
여전히 뭐가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중원무림을 걱정하는 노선배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거려 줬다.
“그런데 그러던 중에, 맹주도 노망이 났네.”
“에...예?”
“그 총명하던 무림맹 총군사 제갈현묵도 하물을 덜렁거리며 벽에 똥칠을 했지.”
“그것 참….”
치매야 원래 돈 많고 적고, 똑똑하고 아니고를 안따지긴 하지….
“참으로 공교롭단 말일세. 분명 무언가 의도적으로 작용한 흔적은 찾지 못했네. 허나, 분명 무언가 있어. 나는 맹의 조사가 흐지부지 되고 나서도 외당 소속의 동료들과 계속 조사를 진행했지.”
“그럼 그러다가…?”
종리연은 대답없이 씁쓸한 미소를 띄워보였다. 본인도 그러다가 치매가 발병했다는거다.
“거창하게 복수를 하겠다거나 그런것은 아니네. 그저 궁금할 뿐이야.”
그래서 그거랑 내가 선택해야 할 내용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
“그러면 제가 뭘 도와드려야 하는 건가요?”
“자네가 도와줄 것은 딱히 없네.”
엥? 이건 또 뭔 소리야?
“도와주면 좋고 아니어도 좋고.”
그럼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신 겁니까?
“옛날 이야기긴 하지만 나도 남편이 있었고, 아이도 있고. 그러나 그 안에서는 철저히 혼자였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말이지.”
“그래서요?”
“생각을 해 보니까, 그렇게 된 관계가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울 수 있는건 아니더군.”
“….”
“그 안에 있을 만 한 고수들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일걸세. 다들 어릴때부터 사람잡는 법이나 배우다 보니 그런쪽으로는 글러처먹은거지. 나도 그랬네.”
점점 더 오리무중인데.
“그래서 제가 선택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그으…. 음.”
뭐지? 뭔데 이렇게 뜸을 들이시는거지? 나는 그녀의 고민을 기다리며 가슴을 조물락거렸다. 음. 극상의 감촉이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그 이상으로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다.
“가만히 좀 있게. 고민하고 있지 않나.”
“하시던 고민은 그대로 하시면 됩니다.”
나는 만질테니까.
“자네를 보고 있자니 이도저도 다 바보같구만….”
“원래 세상일이 다 그런거 아니겠습니까?”
“아마 자네를 제거 하려고 한 것도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놈들이겠지. 내가 계속 들쑤시고 다녔으니까 혹시 나한테 뭐라도 들었을까봐.”
“그렇군요.”
“험…. 그래도 말일세. 그…. 내가 무공뿐만 아니라, 무림제일화의 용모도 되찾지 않았나?”
“그렇지요.”
“찾을 수 있는 전표도 제법 꿍쳐 두었고, 제법 할 수 있는 것도 많은데….”
아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대체?
“크흠…. 내가 또…. 그렇게 된다면 그때도 상공께서 돌봐줄텐가?”
“그럽시다.”
“그리 간단하게 답할 문제는 아닐세!”
“아니 뭐, 저보고 나가 싸우라는 것도 아니고 그 정도는 해 드릴 수 있죠.”
정말로. 날더러 무림의 비사를 같이 조사해달라고 하면 불가능하지만 그거라면 해 줄 수 있지. 원래 하던거니까. 아, 물론 지금 종리연이 나한테 프로포즈 비슷하게 했다는건 당연히 아는데, 딱히 내가 여기서 뭐 뺄것도 없으니까.
“그렇군. 그런 남자였지.”
종리연은 더는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끌어안았다. 까짓거 동굴안에서 누가 보는것도 아니고, 다시 종리연을 안아들고 침상으로 옮겨 한바탕 뒹굴었다.
어제보다 한층 더 강렬한 광풍이 휘몰아 친 후, 침상위에 적당히 널부러져서 숨을 고르며 종리연의 머릿결을 쓰다듬고 있는데 뭔가 생각난 것 처럼 얼굴을 들이민다.
“그러고보니, 자네 내공 말일세.”
“아, 어제 이야기 하려다가 말았죠?”
어제 종리연과 처음 관계를 가질때 내공이 이상하게 반응을 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줄도 모르는 기운들이 혈맥들을 건드리며 전신을 돌아다녔다. 종리연이 말하길 딱히 사이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서 그러려니 했는데 오늘도 똑같이 그러니까 신경이 좀 쓰이긴 한다.
“지금도 날뛰고 있구만.”
“그러네요.”
아버지가 어디서 주워오신 운기토납법이라고 했는데 영 사이비는 아니었는지 어쨌거나 꾸준히 좌공을 하면 쌓이기는 했다. 구결이나 운공법에도 딱히 의심가는 부분은 없다고 해서 적당히 짬이 생길 때 마다 하고는 있었는데….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다. 종리연과 세번을 했는데 할 때 마다 기운이 미쳐날뛴다. 이게 그렇다고 또 딱히 막 제어가 안되고 폭주하고 그런 느낌은 아닌데.
“실례지만 혹시 따로 기록해둔 서책이 있는가?”
“본가에 가면 있을걸요?”
“어차피 한 번 가기는 해야겠군. 짐작이 맞다면 상공께서 생각보다 쉽게 고수가 될 수도 있겠어.”
“제가요?”
“…그보다 언제까지 그렇게 노선배 대하듯이 할 생각인가?”
“사실 노선배잖아요….”
“그런건 이제 잊어버리게. 이 팽팽한 살결을 보란말일세. 어디로 봐도 이제 내가 노선배는 아니지 않나?”
거 주책이다. 본인 말투나 먼저 좀 바꾸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게 어떨까 싶지만 왠지 입밖으로 냈다가는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아서 촛불그림자가 일렁이는 동굴 천장만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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