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피비린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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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 얼큰하게 돌아 몸이 달아 올랐다. 약쑥으로 만들었다는 푸른 빛의 술은 언제 잔에 담겼었냐는 듯 순식간에 사라져가길 반복했다.
주인장은 잔을 닦으며 찬드라를 걱정스레 쳐다봤다.
“술이 과하신 건 아닙니까?”
그러나 이 정도로 찬드라가 취할 일은 없었다. 그녀는 고래를 술을 겨뤄도 거뜬히 이길 사람이었다.
찬드라는 대꾸도 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그것은 일종의 남자다움을 연기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무리 말술이라 하셔도 식사도 하지 않으시곤 그렇게 술만 드시면 안 좋습니다. 게다가 여인 분이신데…”
“......?”
“제가 요깃거리 좀 내오도록 하죠. 이건 돈 받으려는 거 아니예요. 술을 많이 팔아 주셨으니, 그만한 장사꾼의 호의라고 하면 될까요.”
“......”
주인장은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 요리를 시작했다. 칼이 도마에 부딛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규칙적이고도 빠른 그 소리는 주인장의 요리 실력이 보통은 넘는다는 걸 가늠하게 했다.
잔잔하면서도 목가적인듯 들리기도 하는 요리 소리가 조그만 상점 내부에 울려퍼졌고, 두 손님은 말 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아까부터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노인 하나와 찬드라 얘기다. 노인은 언제나 그렇듯 평온한 표정이었으나 찬드라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술기운 탓이 아니었다.
‘내가 여자인 걸 어떻게 알았지? 망토도 뒤집어 썼고, 목소리도 거의 내지 않았는데?’
자신이 여인인 걸 들켜서 좋았던 적은 딱히 없었던 것 같다. 이건 고향에서도, 이곳에 도달하기까지의 여로(??. 나그네 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문에 숨기고자 하는 것에는 나름대로 도가 트였다고 생각했는데 쉽게 간파당해 버리니 나체가 된 듯 부끄러웠다. 그녀의 갈색빛 건강한 피부는 붉으스름한 우림의 땅빛이 되었다.
얼굴이 붉어져 물이 끓는듯 그녀의 몸에서 증기가 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술맛도 모른 채 앉아 있으니 금새 요리가 나왔다.
주인장의 솜씨는 아까 칼소리의 박자감에서 유추한 것이 맞았다. 예사 솜씨가 아닌 것으로 접시 위에 예쁘게 올려져 있으니 군침이 절로 돌았다. 부끄러움이 어디 간듯 녹아버리고 식욕이 돌았다. 취기가 돌면 식욕도 강해지는 법이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소시지 구이와, 새콤한 야채절임, 짭짤한 치즈 조각 몇개, 신선한 올리브유에 살짝 볶아낸 양배추, 양이며 식재료의 품질이며, 주인장의 인심은 보통이 넘는 것이 확실했다.
배고프고 취기도 훌륭하게 돌고 있는 와중에 솜씨 있는 사람이 만든 요리가 눈 앞에 있으니 다른 잡생각은 모두 사라졌다.
‘내가 여인인걸 들키건 말건 무슨 상관이냐, 서역 요리는 단조로워 보이긴 해도 재료 맛이 제대로 살아 있을 것 같이 생겼구나! 일단 먹고 보자.’
상시 불안한 마음이 함께하는 긴 여정길이었다. 거친 음식, 맛 따윈 고려하지 않은 음식으로 끼니를 떼운 나날이었다.
좋은 술과 좋은 음식이 함께하니 접시가 금새 비워졌다. 소세지라는 건 어째 그렇게 맛이 좋은지! 어떻게 만들었길래 살코기보다 잡육을 뒤섞어 창자에 채운 이 요리가 맛이 그토록 좋은지 놀라웠다.
치즈 같은 것은 찬드라의 고향에도 있었으나 소세지는 처음이었기에 더욱 신나는 식사였다.
단련을 소홀히 하느라, 제대로 먹질 못해서, 휴식이 부족해서 빠져 있던 찬드라의 근육에 다시 힘이 들어차는 듯 했다.
하누만(Hanumān. 힌두 신. Dronagiri라는 뭄바이의 산을 뽑아 들었던 설화로 유명함.)에게서 태산을 빼앗아 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훌륭한 식사를 대접받은 그녀는 기분이 좋아져 물었다.
“내가 여인인 건 어떻게 알았소?”
주인장은 잠시 뜸을 들였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했다. 찬드라는 그게 고민할 일인지 의아했다.
“그냥… 장사를 오래 하다 보니, 알기 싫어도 알게 되는 거죠. 사람 상대하는걸 많이 하면 자연스레 그리 되지 않습니까.”
“...역시 그런가. 주인장은 음식 솜씨만 좋은 게 아니고 관찰력도 뛰어난 것 같군. 그나저나 방금 먹은 소세지 말이요. 직접 만든 거요? 맛이 상당한데.”
“......”
소세지 맛을 칭찬한 것이 대답을 꺼릴 것이라도 된단 말인가. 칭찬으로 한 말일 뿐인데 그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그는 뭔가 캥기는 것이 있기라도 한 듯, 잠시 멈춘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뭔가 말 실수라도 했나? 갑자기 왜 말이 없고 그렇소?”
“... 아! 아닙니다. 옛날 생각이 갑자기 났거든요. 손님 때문에 그런 것 아닙니다. 예전에 소세지 맛으로 시비를 걸던 분이 있었는데, 갑자기 그 손님 생각이 나는 바람에… 하하, 이거 실례 했습니다.”
이렇듯, 때때로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였다. 허나 이야기를 하다보면 이런 것 쯤은 대수롭지 않게 넘길 정도로 참 생각이 깊은 자라고 느껴졌다. 또, 말투 사이사이에 친절함이 배여 있으니, 찬드라는 이 주인장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한참 그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약쑥으로 담근 푸른 술 한병이 바닥을 드러내었다.
“주인장, 요리 솜씨가 너무 좋아서 하는 말인데, 여기는 꼭 술을 먹어야만 올 수 있는 곳이요? 이 소세지랑 치즈는 매일 먹고 싶은걸. 이 마을에 있을 동안은 매일 오고 싶을 정도라구. 그냥 식당처럼 오고 싶단 말이오.”
그는 잠시 고민하고 대답했다.
“... 매일 와주신다면야 좋죠. 다만 제 가게는 술 위주로 파는 곳이라, 식재료가 금방 떨어질 수 있답니다. 아니면 손님께서 식재료를 가져오셔도 좋아요. 그거에 맞춰서 요리해 드리죠.”
“그럼 여기 있을 동안, 저녁은 항상 이곳으로 결정이군.”
“멀리서부터 오신 여장부께서 이렇게까지 극찬을 해 주시니 영광이 아닐 수 없군요. 강게스(Gángēs. 희랍어로 갠지스 강을 의미함.)의 장사 분을 손님으로 모신 건 처음인데, 저도 언젠가 그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 보고 싶어요.”
찬드라는 강게스라는 말을 듣자마자 눈이 땡그래지며 기뻐했다. 서역의 사내가 어찌 그 대단한 강의 이름을 알고 있단 말인가. 갠지스는 천축인에게 젖줄이자 피가 돌게 하는 혈관이었다. 갠지스가 가지는 상징성은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것을 언급한 것 만으로도 그녀는 기뻤던 것이었다.
“강가(Gagā. 힌디어로 갠지스 강을 의미함.)! 강가를 말하는 건가? 주인장은 견문이 넓기가 정말 강가의 모래와도 같군!”
“하하. 손님께서는 칭찬이 너무 과하십니다. 항하사(???. 지극히 큰 수를 의미함.)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에겐 어떤 말을 해도 박식하고 방대한 견문을 바탕으로 한 농담이 나왔다. 그런 순발력과 해학을 가진 이와의 대화는 즐겁지 아니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 자신이 여인이라는 것을 들키고도 이토록 편안한 대화를 이어 나간 일은 거의 없었다. 여행길에서도, 고향에서도 말이다. 그래서 더 즐거운 것도 있었다.
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으니 바닥난 술병이 아쉬워 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 새 병을 따게 되었다. 그녀는 약쑥으로 담근 술을 또다시 절반이나 마셔 버리고서야 여관으로 돌아갔다.
찬드라가 돌아 가고서도 여전히 노인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주인장은 식기와 술잔을 닦으며 조용히 미소지었다.
찬드라가 어찌 자신이 여인인 것을 알아 챘느냐 질문을 했을 때, ‘장사를 오래 하다 보니…’ 같은 말로 어물쩍 넘겼다. 그 이유도 물론 있겠으나,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후각이 예민했다. 주인장은 그녀의 체취에서 피 냄새를 맡은 것이었다. 누구의 피 냄새도 아닌, 그녀 자신의 피 냄새를.
*
‘쇠발톱’ 을 처음 사용할 날이다.
상황에 따라 사용하게 될지, 그저 안타까운 마음에 목마르기만 할지는 모르겠지만, 쇠발톱을 품고 밤거리를 나가는 건 처음이라는 뜻이다.
날다람쥐 잭은 상기된 얼굴을 애써 무표정함으로 감추며 걸어나갔다. 코트 속에 숨어 있는 쇠발톱을 만지작 거리면서.
그는 어디에선가 덜컥 멈추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밤이 깊어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도시는 밤이슬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귀뚜라미 소리가 도심 속 화단에서 울려퍼졌다. 그 외의 소음은 없었다.
그가 멈춰선 곳은 높은 탑이 있었다. 잭은 지긋이 무릎을 굽히곤 높이 뛰어올랐다. 뛰었다기보다는 치솟았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였다. 뒷꿈치에 고장력 용수철이라도 달아둔 것인가? 초원의 영양도 그처럼 탄력있게 날아 오르진 못할 것이었다.
누가 지은 별칭인지는 몰라도, ‘날다람쥐 잭’ 이라는 이름은 그의 재빠름에 어울리는 작명이었다.
탑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니 얼마 안 가서 밀회를 즐기는 연인을 찾을 수 있었다. 자신의 악명이 주변 마을까지 공포로 떨게 하는데, 그런 와중에도 은밀한 만남을 즐기다니,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아니, 아니지.’
그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가증스러웠던 것은 찰나의 감정 이었다.
‘만찬을 눈앞에 두고 신께 감사 기도를 올린다.’
신심 가득한 신자가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처럼, 그는 그 연인들에게 내면에서부터 일어나는 감사를 표했다.
골목 으슥한 곳에서 두 연인은 서로 부둥켜 안았다. 남자와 여자 모두 젊고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남자는 허리춤에 멋드러지게 장식된 검을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꽤 지위 높은 가문의 자제인 듯 했다.
두 연인은 서로 키스하며 속삭였다.
“자기… 우리 언제까지 몰래 만나야 해?”
“조금만 기다려 줘. 아버지 설득도 이제 거의 끝나가. 내년이면 우리도 결혼 할 수 있을거야.”
“정말로?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 이렇게 밤에 만나는 거 너무 무서워.”
여인이 소름끼쳐하며 무섭다고 하니 사내는 남자답게 가슴을 당당히 펼치고 말했다.
“흥. 그 미친 살인마 때문이야? 이 오빠 검술 실력 알지? 난 이 검만 차고 있으면 세상에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아. 내가 지켜줄게. 영원히.”
사내는 여인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그리곤 곧이어 키스를 했다. 키스를 할 때는 세상에 단 둘만 남겨진 기분이었다. 세상의 어떤 걱정도 서로의 타액을 섞으며 혀를 애무할 땐, 화로에 떨어지는 눈송이처럼 녹아버렸다.
‘쇠발톱 녀석은 운이 좋군. 처음부터 두마리 피맛을 보니.’
날다람쥐 잭은 탑에서 뛰어내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바닥을 쳐다보는 것으로도 오금이 저려올 높이였는데, 그는 아랑곳 하지 않고 뛰어내렸다.
어느 건물 옥상에 떨어진 그는 멀쩡한 모습이었다. 떨어질 때는 솜뭉치가 떨어진 듯 어떤 소음도 없었고, 두 다리의 뼈는 어떤 충격도 받지 않은 듯 했다.
다시 건물과 건물 사이를 나는 듯 하며 이동했다. 실로, 날다람쥐라는 별칭은 그 이외에 누구에게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재빨랐다.
어느새 두 연인이 밀회를 즐기는 골목길의 건물까지 도달했다. 역시 소리는 나지 않았기에, 두 연인은 달콤한 키스만을 즐기고 있었다.
‘하늘이시여. 은혜로이 내려 주신 두 살덩이와 저에게 강복하소서.’
그는 정신적 미소와 군침을 흘리며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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