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지존은 서역에서 다시 산다-52화 (52/56)

〈 52화 〉 오랜만에 먹는 빵은 맛있다.

* * *

마크의 냉담한 표정은 몇초간 더 이어졌다. 그는 그제서야 지존을 쳐다보곤 입을 열었다.

“그쪽이 우리보다 실력이 좋아 보이는데 우리한테 오고 싶진 않을테고…”

지존은 말을 끊었다.

“아니, 나는 지금 모험을 할 생각은 없다. 그래서 길리엄이랑 프레데릭을 너희 쪽에 합류 시키고 싶은 생각이다. 난 지금 해야 할 일이 좀 생겼거든. 아니, 생겼다기 보다도… 다른 할 일이 많아서 말이야.”

대머리에 거구인 샘록은 가슴께만 대충 가리고 있는 조끼를 입고 있었다. 샘록은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근육질의 몸에 얼굴도 울퉁불퉁해서, 언뜻 보면 꼭 화난 표정 같기도 했다.

“돈보다 중요한 일, 있어? 무슨 일?”

베티도 의문을 표했다. 샘록과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우리가 함께 하자는데 거절 할 셈이야?’ 라고 말하는 듯한.

“뭔 일인데, 급한 거야?”

“미친 놈이 요즘 난리를 피운다는 이야기 들어 봤나? 연쇄살인범 말이야. 별칭도 경박하더군. 날다람쥐. 그 놈을 잡아 족칠 생각이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중요한 건?”

“아멜리라는 여자애를 찾아야 돼.”

“아멜리?!”

아멜리라는 이름이 나오자 베티와 샘록, 심지어 마크까지도 표정이 바뀌었다. 베티는 아멜리라는 여자애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여자애가 맞는지 궁금해했다.

그녀는 인상착의와 특징에 대해 설명했고, 놀랍게도 그건 지존의 기억 속 아멜리와 일치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동쪽 항구 도시의 부둣가에 있다고 했다.

그들은 세이렌이라는 해상의 몬스터에게서 상선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은 적이 있었다. 그 임무는 꽤 여러번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부둣가에 위치한 술집이며, 식당이며 자연스레 자주 다니게 됐었다.

그 부둣가의 술집에 아멜리가 있었다.

아멜리는 손님들의 사소한 것까지 기억하고, 언제나 친절하고 웃는 얼굴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여자 경험이 거의 없는 젊은 뱃사람들은 아멜리가 자신을 좋아하는 줄 착각해서 계속 온다고 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멜리는 모두에게 친절하다는 걸 깨닫고 눈물과 함께 맥주를 들이키지만 말이다.

이 설명까지 듣고 난 뒤에 지존은 확신했다. 그녀가 말하는 아멜리가 자신이 찾는 아멜리라고. 하지만 성급하게 그녀를 찾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기억 속에서, 아멜리는 무척이나 불우한 가정사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를 얼른 찾아서 행복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베티의 설명을 들어 보면 굳이 그럴 필요도 없는 것 같았다. 이미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것 같았으므로.

그녀를 만나러 가는 건, 날다람쥐 일이 끝난 뒤에 생각해봐도 충분할 것 같았다.

쓸만한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마크의 표정이 조금은 다채로워졌다. 그는 지존의 생각대로 길리엄과 프레데릭을 기다리고 싶어했다.

앞으로 며칠, 그들이 마을로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의사를 비추었다.

모험가 길드에 오길 잘 했다. 루돌프를 실수로 죽인 것으로 길리엄과 프레데릭의 앞길을 막은 것 같아서 막막했는데, 마크 일행과 대화한 것으로 두가지를 얻었다.

동료 둘을 좋은 곳으로 추천해 보내는 것과 아멜리에 대한 정보까지.

“그럼, 며칠 후에 동료가 오면 숙소로 찾아가겠어. 물론 그쪽 의사도 들어 봐야 하겠지만.”

“알았다.”

마크는 고개를 끄덕였고 지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접수원 메리에게 걸어갔다. 마침 그녀와 상담하고 있는 모험가는 없었다.

“오랜만이오 메리.”

그녀는 누구에게나 그렇듯 친절하게 화답했다.

“아! 모험은 잘 끝내고 오셨나요? 성함이…”

“존.”

“네! 존 님. 이제야 기억 났네요. 무슨 일로 오셨죠? 설마 또 저번처럼 고블린 눈알 뭉치를 들고 오신 건 아니겠죠?”

메리의 농담에 지존은 가죽 주머니 하나를 카운터에 올렸다. 메리는 흠칫 놀라며 토끼눈이 되었다. 그것은 그저 단순한 은전 뭉치로, 메리에게 장난을 좀 친 것이었다.

“파스칼이랑 얘기를 좀 해야겠는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우선은 제가 먼저 접수를 받아야 파스칼님이랑 대화하실지 아닐지 알 수 있거든요. 절차대로…”

지존은 손짓으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은전 몇개를 꺼내 메리의 손에 쥐어주었다. 메리는 돈과 지존의 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많이 급하신가봐요.”

그녀는 일어서 협회 내부로 들어갔다. 이윽고 파스칼이 나와 그에게 손짓했다. 이리로 오라는 뜻이었다.

그를 따라 방에 들어갔다. 온갖 서류들로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꽤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 했다.

“보이지? 나 시간 없어. 무슨 일로 불렀어?”

“그리핀을 잡아 왔는데, 이런 경우에는 등급을 올릴 수 있는지 궁금하군.”

고작 이런 것 때문에 자신을 부른 건지 짜증내 하는 눈치였다. 말했듯이 파스칼은 어지간히 바쁜 사람이었다.

“아, 그거야 서류 제출 하고 심사 기다려서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뭐 그런 거가 궁금한 게야? 동료들이랑 같이 잡은 건가? 동료들도 같이 왔나?”

“먼저 왔지. 급하게 볼 일이 있어서 말이야.”

파스칼의 인상은 더욱 구겨졌다.

“뭐? 안될 말씀이야. 다 같이 와야지. 혼자 뒤통수 치고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놈들이 많아서 그런 건 안돼. 모집했던 사람들 다 데리고 와야돼. 그래야 심사가 들어가.”

“나라고 이런 당연한 거 물어보고 싶겠나? 그게 안 되니까 그런 거 아닐세. 한 명이 올 수가 없게 됐어.”

“왜?”

“...”

“죽었나 보구만? 이런… 흠… 상심이 크겠군. 아끼던 사람인가?”

“아니, 그런 건 아닐세.”

고민 끝에 루돌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적잖이 놀란 파스칼은 앞으로의 행보를 어떻게 할 것인지 질문했다.

앞서 말한 대로, 지존은 모험보다 중요한 일이 많았기에, 루돌프가 죽은 것으로 명성이 깎이던 말던 별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대답하니, 파스칼이 말했다.

“그러면 그냥 심사 넣고 보상 기다리면 될 것 아닌가? 뭘 복잡하게 생각하고 그래?”

“...동료 걱정이다. 루돌프가 개새끼로 이름 높다곤 하나, 모험 중에 죽은 거는 말이 좀 달라지겠지. 여하튼 얘기를 좀 해보니 윤곽이 보인다. 이번 모험은 중단 된 거로 해야겠다. 보상은 못 받더라도 말이다.”

“보상금이 꽤 넉넉할 텐데.”

“상황이 애매해. 아무튼, 동료들하고도 얘기 좀 해보겠네. 시간 내줘서 고맙소.”

지존은 방을 나와 마크 일행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길드를 나섰다. 화원의 여인들이 피에르에게 잘 조치를 취하고 있는지 둘러 보기로 했다.

화원은 여느 때와 다르게 활기가 돌았다. 피에르가 화원에 온 것으로 여인들의 지루한 일상에 한 가지 재미가 생긴 것이다.

연쇄살인범에 대한 공포 때문에 밖으로 다니기도 꺼림칙한데, 피에르를 돌보면 돈도 생기고, 심심하지도 않고 일석이조인 것이었다.

이불에 돌돌 말려서 끙끙거리고 있는 피에르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여인들을 믿고 맡겨도 좋을 것 같았다.

며칠 안에 돌아 오겠다고 로즈와 팡틴에게 얘기했다. 식량을 조금 챙겼다. 붕붕이를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구름까지 솟아올랐다.

벌써 여러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졌고, 소문이 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그럼에도 더 이상은 붕붕이를 보이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구름 위를 날며 길리엄과 프레데릭을 향했다.

*

며칠이 흘렀다. 붕붕이를 타고 하늘 높이서 길리엄과 프레데릭이 도착했을 만한 곳을 두리번 거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프레데릭이 먼저 붕붕이와 지존을 발견했다. 과연 실력 있는 궁수는 일상에서도 시야가 탁 트여 있는 듯 했다.

“존! 여기다!”

옆에서 길리엄도 손을 흔들었다.

길리엄과 프레데릭의 앞에 멋지게 착지했다. 이젠 붕붕이도 사람에게 공격하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는지 두 사람을 보고서도 시큰둥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람에게 위협을 하면 지존에게 따귀를 맞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에 가까웠다.

“어떻게 됐나?”

길리엄도 프레데릭처럼 걱정이 많긴 매한가지였다. 모험 중에 사람이 죽는 일은 그렇게 엄청난 일은 아니지만, 루돌프의 죽음은 조금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루돌프의 부(?)는 그놈 죽음에 대해 그다지 신경 쓰지 않더군. 오히려 앓던 이 빠진 사람처럼 말했다. 부자관계가 썩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즉, 말하자면 우리한텐 별 일이 없다는 거지. 그리고 길드의 파스칼이랑도 얘기를 좀 했다.”

“파스칼한테도 루돌프 얘기 한 건가?”

“그래. 놀라긴 해도 뭐… 어쩌겠나. 금새 담담해지더군.”

“...”

챙겨온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말린 고기나 곡물 가루 같은 맛없는 보존식만 먹은지 한참이 지났다. 빵이며 잼 같은 음식을 오랜만에 먹으니 그 맛이 새로웠다 길리엄과 프레데릭은 눈 깜짝할 새에 사람 팔뚝만한 빵을 해치워 버렸다.

배부르게 먹고 나니 생각이 조금 긍정적으로 변했다. 이런 때에 전달하면 좋을 새로운 소식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다.

마크 클레망이라는 사람, 그리고 그의 동료 베티와 샘록에 대해 말을 꺼냈다. 길리엄은 그닥 관심이 없다는 듯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그와 반대로 항상 무뚝뚝하고 시큰둥한 편인 프레데릭의 표정은 달맞이꽃처럼 초롱해졌다.

“음... 사람이 필요하단 말이지?”

프레데릭이 빵 하나를 더 꺼내 씹으며 질문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