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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 지존은 서역에서 다시 산다-11화 (11/56)

〈 11화 〉 작은 체구의 팡틴.

* * *

“언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왕언니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로즈를 붙잡고 앙칼지게 얘기하는 소녀가 나타났다. 아멜리를 살짝 닮은 적금발의 짧은 머리를 한 아이였다. 체구가 작고 새침한 표정이 귀여운 애였다. 여인이라고 표현하기엔 풋풋한 느낌이 가득했다.

“팡틴? 날 찾았다고? 왕언니가?”

팡틴은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로즈를 찾기 위해 마을 전체를 뛰어 다니기라도 했는지 이마엔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래! 언니! 손님들이 로즈 어디 갔냐고 계속 물어 보는 바람에 귀에서 피가 나는 줄 알았어! 사내 놈들이 뭘 그리 징징대는지! 정말!”

지존은 갑자기 나타난 팡틴이란 소녀를 보고 로즈에게 물었다.

“이 앳돼 보이는 여인은 누구인가? 네 여동생인가?”

“어? 여동생은 아니고…”

로즈가 질문에 답하기도 전에 팡틴이 말을 끊었다.

“앳돼 보인다고? 흥, 나 열아홉도 넘었거든? 사람들은 맨날 날 어리게 봐서 열불난다니깐!”

그녀의 가슴은 로즈에 비하면 턱없이 작았는데, 그 탓에 사내들은 그녀를 어리다며 놀리곤 했다. 그것이 쌓여 지존에게 화를 내고 만 것이다.

“음… 그래. 미안하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인가? 나와 로즈는 식사를 하러 가던 참이었는데.”

“저녁이 들어가? 왕언니가 얼마나 화가 났는데! 당장 안 뛰어오면 다리를 부러트려 버릴 거래!”

로즈는 겁에 질린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 맞다… 왕언니한테 얘기 하는걸 깜빡 했다…”

팡틴과 로즈가 시끄럽게 이것 저것 떠드는 사이, 지존의 뱃속에서도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고블린을 때려 잡느라 기운을 쓴 탓에 아주 허기진 상태였다.

“이봐, 팡틴이라는 여인. 너 식사는 하고 돌아 다니냐? 지금 나는 아주 배가 고픈 때이다. 얘기는 식당에서 하지.”

“안 돼! 시간 없어!”

“양고기를 싫어하는가? 나는 아주 좋아한다만… 피에르, 양고기 괜찮게 하는 곳을 아는가?”

피에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팡틴의 앙칼진 음색은 수그러들었다.

“흠! 크흠! 양고기라고? 흠, 흠… 양고기 먹을 시간은 있지!”

“그래, 식사 하면서 얘기 하거라.”

그렇게 로즈, 피에르, 갑자기 나타난 여인 팡틴과 양고기를 먹으러 가게 되었다. 식당 주인과 피에르는 꽤 안면이 있는듯 했다.

“피에르 씨? 오랜만이시군요. 다음 강연은 언제죠? 그리고 이 분들은?”

“간만이오 주인장. 뭐, 어쩌다 알게 된 인연입니다. 다음 강연은 보름달 뜨는 날 정오에 느티나무 아래서입니다.”

피에르와 주인장은 인사를 나누었다. 양고기 요리집 주인장은 피에르가 간간히 설파 하는 옛 현자의 가르침에 깊은 관심이 있는 듯 보였다.

주인장은 돈 따위 받지 않고 내어드리겠다 했지만 지존은 그게 무슨 소리냐며 한사코 말렸다. 그러곤 양갈비 8인분을 주문했다.

중원에 있을 때엔 딱히 대식가적인 면모를 보인 적이 없는 지존이었다. 허나 지금은 학대 당하여 말라 붙은 가련한 신체를 지니고 있었다. 어찌나 허기가 지는지, 혼자서 양갈비 5인분을 먹어치울 작정이었다.

로즈와 피에르는 왜 그렇게 음식을 많이 시키냐며 눈이 휘둥그레했지만, 지존은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팡틴은 가게에 들어 오기 전까지만 해도 로즈를 찾아다니느라 쌓인 짜증이 풀리지 않은 표정이었다. 8인분을 시키는 지존의 통 큰 모습을 보고서야 느긋한 표정이 되었다.

팡틴은 로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언니야, 저 동방 남자 뭐야? 쟤 아빠 부자야?”

“잘 모르겠어. 근데 엄청나. 뭐라 말하긴… 부끄럽지만… 엄청나. 존이라고 부르면 된대. 그건 그렇고, 왕언니 엄청 화났어?”

“당연하지! 요즘 옆마을 시끄러운거 언니도 알지? 혼자 다니지 말라고 왕언니가 그랬잖아. 그 미친놈이 우리 마을에 올지 어떻게 알겠어?”

“하긴… 그러네… 얼른 왕언니한테 가봐야겠다.”

요리를 기다리느라 심심한 차에, 로즈와 팡틴이 귓속말을 하니 지존 또한 궁금했다.

“무슨 이야기들을 그리 하는가? 편하게 얘기해라.”

“응? 아, 그래 존. 별건 아니고…”

팡틴은 지존이 말을 꺼낸 것이 내심 기뻤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 같이 많은데, 뭐라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존?”

“왜 그러느냐?”

“어… 안녕! 인사가 늦었지? 아까 소리쳐서 미안해. 근데 넌 동방에서 왔어? 처음 본 얼굴인데.”

“동방에서 왔다고 해야 할까. 원래 나는 중원의… 아니다. 말 해도 알아 들을 리가 없겠구나. 나도 꼬맹이라 부른게 미안하구나. 그런데 너는 누구지? 로즈의 동생이 아니면 어떤 관계인가?”

“언니랑 동생처럼 친한 관계지! 나는 ‘미녀의 화원’ 의 차기 일등이 될 여자, 팡틴이야! 지금은 모든 손님이 로즈 언니만 찾지만 언젠가 사람들은 나만 찾게 될거야! 로즈 언니랑 나는 어렸을 때 왕언니가 거두어 주셨어. 우린 다 같이 살아. ‘미녀의 화원’ 에서.”

“‘미녀의 화원’ 이라… 기녀들의 가게 같은 거로군.”

“그렇지. 우리는 이 나라 최고의 기방을 만들거야.”

“꿈이 있다는 건 좋은 것이다.”

팡틴은 오랜만에 말을 많이 했다. 자신의 꿈을 얘기하면 사람들은 허황된 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 비웃었다. 지존은 그러지 않았다. 진지하게 얘기를 들어주니 팡틴은 자기도 모르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느새 양고기 요리가 나왔고, 넷은 식사를 시작했다.

부드럽게 익은 양갈비가 어찌나 살살 녹는지, 팡틴과 로즈는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꽤나 고급 요리인 탓에 평소에 먹을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존은 고기를 거의 물처럼 마셨다. 한창 때 소년의 먹성은 엄청난 것이었다. 게다가 소년의 몸으로 내공을 다루고 무공을 사용하니, 쌀을 가마니로 먹어도 모자를 지경이었다.

순식간에 양고기 5인분이 없어졌고, 지존은 피에르와 로즈, 팡틴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중원의 옛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좋은 기분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로즈가 말했다.

“존! 미안하지만 난 얼른 왕언니에게 가 봐야 할 것 같아. 오늘 내 하루를 사겠다고 했잖아? 그거 받지 않을게. 좋은 저녁도 대접 받았고, 사실… 음… 나도 꽤 좋은 경험이었어. 엄청나게 힘들긴 했지만…”

로즈는 말하다 말고 얼굴이 새빨게 졌었다. 지존을 품었던 기억이 그녀의 뇌리를 스친 것이었다. 목이 터져라 교성이 새어나온 적은 정말 처음이었다.

“여하튼! 다음에 또 보자? 당분간 이 마을에 있을 거지?”

“그럴 생각이다. 아직 서역의 풍습을 배워야 하니, 이곳에서 피에르에게 이것저것 배울 생각이다. 너는 좋은 여인이었다. 나도 또 보고 싶군. 그렇다면 다음에 만날 땐 값을 제대로 치루겠네.”

“그럴 필요 없대도? 그럼 이만!”

로즈는 지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얼른 뛰어나갔다. 치마를 걷어 올리고 후닥닥 뛰어가는 걸 보니 그녀들이 말하는 왕언니라는 여인은 정말 무서운 사람일 것이다.

팡틴은 예상 외로 로즈를 따라가지 않았다. 멋쩍은 표정으로 몸을 배배 꼬며 서 있는 팡틴의 모습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했다.

“너는 왜 로즈를 따라가지 않느냐?”

“음… 그게… 음… 몰라도 돼.”

“뭐, 말하고 싶지 않다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 피에르, 네가 데려온 이 집의 요리는 정말 훌륭하군. 혹시 자네 수행자가 아니라 미식가 같은 호사가 아닌가?”

피에르는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그러게 말이야. 걸식 수행을 한다고 이곳 저곳에서 얻어 먹다 보니 입맛만 고급이 되어 버렸어. 가끔 굶을 때도 있긴 하지만, 이 집 주인장은 내 강연이 좋았는지 항상 고기를 주더군. 감사할 따름이지. 하늘에게도, 주인장에게도. 옛 가르침에게도.”

피에르와 지존은 여관으로 향했다. 팡틴은 수줍은 얼굴로 둘을 계속 쫓았다. 지존은 그녀가 갈 길이 우연히 겹쳤으리라 생각했다.

여관의 문을 열고 들어갈 때가 되어서야 그녀에게 질문을 했다.

“팡틴? 왜 우리를 쫓아 오는가? 우리에게 할 말이라도 있는가?”

팡틴도 로즈처럼 수줍거나 부끄러우면 얼굴이 붉게 물드는 체질이었다. 양 볼이 새빨갛게 물든 그녀는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게… 궁금한 게 있는데…?

“뭐냐? 말해 보아라.”

“너도 로즈 언니가 좋지?”

“로즈는 좋은 여인이다. 그런데 그게 무슨 질문인가?”

"남자들이 로즈 언니만 보면 미칠려고 하잖아. 너도 그런가 싶어서… 남자들은 다 그래?"

"그야 로즈는 남자들이 좋아하는 풍만한 몸매를 했으니 그럴 테지. 나도 여느 남자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로즈만을 좋아 하는 건 아니다. 여인은 누구라도 각자의 무기를 숨기고 있는 법이다. 단지 꺼낼 줄 모를 뿐이겠지."

"그… 그래? 정말 그렇게 생각해?"

옆에서 듣고 있던 피에르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는 열려 있는 문을 휙 들어가며 말했다.

"역시 귀신이야. 여자를 홀리는 데에도 귀신이 따로 없군. 난 먼저 들어갈게. 오늘도 고마워. 난 방 위치를 바꿔야겠어. 오늘도 시끄러울 것 같군."

"..."

피에르가 사라지고 팡틴과 지존만이 남으니, 팡틴의 부끄러움은 더욱 거세졌다. 고개를 숙인 채 신발로 괜히 땅바닥을 문질러댔다.

"그… 존. 사내들은 왜 나한테 흥미가 없을까? 난 별로 못생기지 않았는데? 다들 내 얼굴 예쁘다고 해 줬거든? 근데… 다들 나한테 별로…"

"그건 네가 꼬마애 같아 보여서일 것이다. 애초에, 네가 남자를 알 나이더냐?"

팡틴은 발끈했다. 지존의 앞에 당당히 서더니 지존에게 말했다.

"꼬마애라고? 나 나이 다 찼거든? 로즈 언니랑 몇 살밖에 차이 안 나! 그리고 너도 나랑 키 차이 얼마 안 나잖아. 한뼘 정도 밖에 차이 안 나는 것 같은데?"

"뭘 말하고 싶은지 모르겠군. 난 이만 들어가겠다."

팡틴은 뒤돌은 지존의 옷자락을 잡았다.

"저기, 너… 로즈 언니의 하루를 샀다고 했잖아? 그런데 오늘 밤은 언니가 왕언니 때문에 가 버렸잖아. 그래서 어떡할거야?"

"잘 거다."

팡틴은 계속 우물쭈물 거렸고, 슬슬 졸음이 오기 시작한 지존은 문 안쪽으로 들어가려 했다. 고민이 많은듯 끙끙거리는 그녀는 결심을 하곤 지존에게 말했다.

"그러면…! 그러면! 로즈 언니 대신에 나랑 같이 자!"

"...?"

이 어찌나 당돌한 여자인가. 알몸으로 차갑게 식은 소년의 몸을 데운 로즈라는 여인도 당돌하기 그지 없다고 생각했는데, 팡틴은 더 했다.

중원에서 살아온 세월이 짧지 않다. 만난 여인도 많았고, 안은 여인도 많았다. 그러나 이렇게 당돌하게, 저돌적으로 잠자리를 함께 하자는 여인은 없었다.

몸을 팔려는 목적으로 유혹한 여인은 있었으나, 부끄러움을 이겨내면서 저런 당돌한 목소리로 말한 여인은 없었다.

'색목인 여인들이란 알 수 없는 존재로군…'

고블린을 죽이면서 충실히 내공을 사용한 날이다. 기운을 사용하면 금새 다시 들어차는 혈기 왕성한 청년의 몸이었다.

전투로 달아오른 몸에 양질의 영양이 공급되니, 다시금 기운이 솟는 것은 사실이었다.

팡틴은 그녀가 말한 대로 예쁘고 귀여운 얼굴을 했다. 그녀가 인기가 없는 까닭은 그녀의 체구가 너무 작았기 때문이리라. 나이에 맞지 않게 어려 보이는 인상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지존에게 그녀를 거절할 이유는 딱히 없었다. 오히려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혼탁하게 쌓인 기운을 얼른 게워내고, 새로운 양기를 불러 들여야 하는 참이었다. 그럴수록 중원에서 쌓아올린 내공을 점점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런 이유를 모조리 차치하고서라도… 사내의 몸은 이미 끓고 있었기도 했다.

세포가 끊임없이 분열하며 새 살을 만들고, 성장하는 시기의 몸. 계절에 비유하자면 봄이다. 봄은 생명의 계절인 법이다.

"그래. 알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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