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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 지존은 서역에서 다시 산다-10화 (10/56)

〈 10화 〉 브론즈.

* * *

“이게… 뭐냐? 돌아버리겠군.”

“증거가 있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오. 원래는 귀를 잘라올까 했는데 실수로 칼이 없어서… 이거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만…”

접수원 메리와 파스칼이 그렇게 반응하니 지존도 멋쩍었는지 말을 흐렸다. 좀… 과했나?

지존이 챙겨온 것은 고블린의 눈알이었다. 고블린을 잡다 보니 알아서 빠진 것도 있었고, 칼 없이도 잘 뽑혔기 때문이었다.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아 생기가 가득하고 탱글탱글한 고블린의 눈은 핏물이 가득 묻어 있었다. 염소 눈처럼 가로로 째진 동공들이 꼭 무언가를 쳐다 보고 있는 듯 했다. 메리가 입을 막고 도망칠 만도 했다.

“25개라… 최소한 13 마리 이상은 잡았다는 게로군.”

“몇마리 더 잡은 것 같소만, 잡다보니 터지기도 하고 해서 멀쩡한 것만 챙겨 왔소.”

“... 그래… 좋아… 그럼 이걸 너 혼자서 잡았단 말이지? 무기도 없이?”

“무기 챙기는 걸 까먹고 말았다네. 그래서 그냥 때려 잡았지.”

“...”

파스칼은 고민이 들었다. 승급을 시켜 주긴 해야 할 것인데, 고블린을 맨손으로 여러 마리 패죽일 정도의 실력자라면 최소한 골드 등급 정도는 될 것이다. 하지만 한 번에 단계를 넘어 승급하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이런 사례가 드물기도 했고, 이런 실력자가 나타난 적도 없었다. 조그만 시골 마을인지라 골드 등급의 모험가가 처리할 몬스터도 딱히 없었다.

파스칼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그래… 좋아… 믿어주지. 말 한것은 지킨다. 브론즈 등급으로 승급 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잠시 서류를 만들어야 하니 앉아 있어.”

파스칼은 뒤편으로 돌아갔고, 창백한 안색의 미녀 접수원이 돌아왔다. 화장실에 가서 구토를 하고 온 것 같았다.

“이거 미안하게 됐군. 모험가 라는 사람들은 다들 이런 줄 알았다네.”

“아닙니다 하하… 잠시 기다려 주세요.”

미녀 접수원 메리는 과연 프로답게 미소를 띄며 말해 주었다.

그러나 메리와 달리, 파스칼의 말을 들은 다름 모험가들은 미소를 지을 수 없었다. 어디서 굴러 들어온지도 모르는 말뼈다귀 같은 애새끼가 하루만에 브론즈 승급이라고? 이건 질투라기 보단 자존심의 문제였다.

칼을 닦고 있던 모험가 몇이 지존에게 시비를 걸었다. 다들 얼굴에 흉터도 많고, 새까맣게 그을린 피부를 하고 있었다. 꽤 거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리라.

“어이 검은 머리.”

“?”

지존이 왜 부르냐는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니 그들은 침을 탁 뱉었다.

“쯥, 어디서 사기를 치는거냐? 어디 푸줏간에서 염소 눈알을 훔쳐 온 거지? 승급 격려금 받고 다른 마을로 튀려는 거잖아? 너 같은 놈이 한 둘인줄 알아?”

승급 격려금이라니.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승급을 하면 돈도 주는 것인가? 그런데 그런 계획은 없다네. 애당초 다른 마을로 갈 생각도 없고. 여관도 며칠분을 벌써 계산했단 말이네.”

“하!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러면 네 실력을 입증해 봐라. 대련이다.”

쾅!

놈들은 칼등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성을 냈다. 미녀 접수원 메리는 토끼눈을 하고 뛰어나왔다.

“모험가님들! 싸움은 안 됩니다!”

소란을 들은 파스칼은 서류를 쓰다 말고 나왔다. 그는 모험가와 지존 사이에 서서 말리는 메리에게 말했다.

“괜찮아 메리. 실내에서만 안 싸우면 된다. 오히려 잘 됐어. 저 녀석들 심정도 이해가 가거든.”

“파스칼씨? 하지만 모험가들이 싸움박질 하는 걸 싫어 하셨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저기서라도 저 녀석이 증명을 하지 않으면 내 체면이 서질 않아. 자격도 없는 녀석을 승급 시켰다며 사람들이 날 원망할지도 모르지. 그건 질색이야. 저 검은 머리 녀석 말대로 고블린을 혼자 잡은 거라면 아이언 등급 모험가 쯤이야 쉽게 상대할 테지.”

파스칼은 잔뜩 흥분한 모험가들을 말리며 말했다.

“이봐들! 진정해! 내 성격 알지? 싸움 싫어하는 거 말이야. 근데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 너희들 싸움 말리지 않을게. 그런데 여기서 싸우진 말라고. 여긴 길드 건물이야. 부숴지면 책임 질 거냐?”

“......”

“어허! 날 왜 그렇게 노려보는거야? 자, 자, 밖으로 가자고. 내가 심판을 봐 주도록 하지. 어떠나 꼬마? 모험가들이랑 한바탕 해 볼 거냐?”

지존은 어젯밤 결투를 떠올렸다. 결투라는 것은 생사를 걸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것은 결투인지, 그저 대련인지 알 수가 없었다. 확실히 하고 싶은 지존은 파스칼에게 물었다.

“저 녀석들을 죽여도 되는 거요?”

순수한 궁금증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 질문은 상대 모험가들을 크게 자극했다.

“이 미친 자식이!!! 죽일 수는 있냐? 좆만한 새끼가 건방 떨고 있네. 죽일 수 있으면 죽여봐라!”

파스칼은 고래고래 소리치는 모험가들을 간신히 말렸다.

“그만! 이건 결투가 아니야! 그냥 대련이다! 상대방을 죽여선 안돼! 자! 싸울 거면 밖에 나가!”

지존, 화가 난 모험가 셋, 파스칼, 구경꾼 여럿은 길드 건물 뒤꼍에 있는 공터로 모였다. 근처에 지나가던 사람들도 발을 멈추고 무슨 일인지 살펴보고 있었다. 예상 외로 사람들이 모이니 파스칼은 소리쳤다.

“이봐요들! 이거 싸움이나 결투 뭐 그런거 아니고요! 모험가들끼리 기술 시범을 보이는 겁니다! 싸움 아니예요! 신고하면 안돼요! 다들 아셨죠?”

그렇게 지존과 모험가 셋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가장 목청 크게 소리치던 녀석이 제일 먼저 나왔다. 녀석의 이름은 카림.

동네에서 알아주는 건달 출신인 녀석은 요 근래 감빵에서 나왔다. 정신 차려서 새 삶을 살겠다는 카림은 모험가가 되기로 했다. 하지만 모험가 생활은 생각만큼 쉬운 것이 아니어서, 별다른 수익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바짝 독이 올라 있던 차에, 지존이 냅다 승급을 해 버리니 화가 치밀은 것이다.

뒷골목에서 잔뼈가 굵은 놈이다. 주먹질엔 자신이 있었다. 주먹 실력으로는 실버급 이상이라 자타가 공인했다.

카림은 툭툭 스텝을 밟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덤벼 봐. 동방 원숭이. 뭐? 죽여도 되냐고? 웃기지도 않아.”

“화 났다면 사과하지.”

“허세는. 씨발놈이.”

“...”

카림은 권투 자세를 취했다. 서역에서는 예로부터 스포츠로써도, 양아치들의 폭행 수단으로써도 인기 있는 것이 바로 권투였다.

중원에서 일생을 보낸 지존에겐 난생 처음 보는 무술이었다.

'자세가 상당히 높군. 제자리를 통통 튀기는 보법이 참 독특하구나.'

권투에 흥미가 생긴 지존은 내공은 일절 사용하지 않고 카림을 상대하기로 했다.

“벼룩에게 권법을 배웠느냐? 잘 뛰는군.”

“이 새끼! 이익!”

미친 황소가 들이받듯 카림은 오른 주먹을 뻗었다. 정통으로 맞으면 장정도 쓰러질 매서운 주먹질이었다.

하지만 지존은 중원에 있는 온갖 무술을 상대해 본 사람이다. 난생 처음 본 권법이라 한들 달라질 것은 없었다.

살짝 몸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 카림의 주먹은 허공을 때릴 뿐이었다. 그러기를 수 차례, 지존은 권투라는 새로운 무예에 대한 흥미를 잃어 버렸다.

“너무 뻔한 공격만 하는구나.”

“피하지만 말고 맞서 싸워! 겁 먹어서 주먹 드는 법도 까먹었냐?”

검도 삼배단 이라는 말이 있다. 맨손의 무술가가 검법가와 비등하게 싸우려면 그의 단수보다 세배 이상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검의 무서움이 과소평가된 말이지만, 어쨌거나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칼을 든 녀석은 맨손인 녀석보다 무조건 강하다.’

만고불변의 법칙이다.

지존은 카림의 공격을 하나하나 피해가며 위치를 옮겼다. 지존은 어느새 카림이 장비를 벗어둔 곳에 도달했다. 가방을 뒤지는 와중에도 카림의 주먹은 소나기처럼 퍼부어졌지만, 지존은 태연자약한 얼굴로 공격을 피해버렸다.

그는 가방 속에 있는 단도를 꺼내어 카림에게 던졌다.

“죽일 각오로 덤벼 보아라. 주먹질이 네 전부는 아니잖느냐?”

지존은 나름의 배려로 무기를 건넨 것인데 카림의 입장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어찌가 화가 났는지 얼굴에 혈관이 가득 불거져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 개새끼! 죽어!”

내심 그가 칼을 들면 무언가 달라지길 바랬다. ‘팬텀 소드’ 같은 스킬을 한번 더 보고 싶었다.

단도를 든 카림의 공격은 고블린이 휘두르는 몽둥이질에 비해 하등 나을 것이 없었다. 그저 직선적이고 단순한 공격 뿐이었다. 뒷골목을 지나치는 선량한 사람에게나 통할 저급한 단검술이었다.

“벼룩이 칼을 들어도 벼룩일 뿐이구나.”

“닥쳐어어!!!”

“이건 부인각 이라는 발차기다.”

적의 무릎께를 밀어차는 기초적인 발길질이다. 단순하지만 내공을 실어 차면 적의 무릎이 박살나는 기술이다. 하지만 벼룩의 무릎을 부숴 봤자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지존은 카림이 넘어질 정도로만 차버렸다.

제 힘을 이기지 못한 카림은 그대로 자빠지고 말았다. 턱을 땅에 찍더니 기절까지 해 버렸다.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무지막지한 놈이로군.”

“귀신 들린 놈인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저럴 수가 있겠어.”

“눈빛 봐 눈빛. 진짜 귀신 아니야?”

“어쨌든 고블린을 죽였다는 건 사실인 것 같군.”

팔짱을 끼고 그들을 바라보던 파스칼이 말했다.

“이 정도면 뒷말 나올 일도 없겠군. 들어가자. 서류만 다 쓰면 넌 브론즈급 모험가다.”

그렇게 지존은 브론즈급 모험가가 되었다. 누구도 그의 승급에 토를 다는 일은 없었다.

아, 한 사람 있었다.

카림은 승부의 결과를 납득하지 못했다. 브론즈급 등록증을 가지고 돌아가려는 지존의 뒷통수에 도끼를 후려쳤다.

결코 그의 뜻대로 되진 않았다. 지존은 번개처럼 뒤돌아 그의 손을 걷어찼다. 어안이 벙벙한 그에게 따위를 날렸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내공 따윈 들어 있지 않은 허술한 따귀였다.

조잡한 반격이었지만 턱에 정확히 들어간 따귀는 그를 다시 벌러덩 눕게 만들었다.

“다시 잠들어 있거라 벼룩아.”

철썩 소리와 함께 지존에게 시비를 거는 모험가들은 단 한명도 생기지 않게 되었다.

*

여관으로 돌아가니 피에르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 이런 꼴로 돌아다닌 거냐? 진짜 귀신이냐 너는?”

“나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겠나?”

“일단 목욕탕부터 가자! 으윽, 피냄새!”

목욕탕에 들어가니 사람들은 역시 웅성거렸다. 검은 머리는 재수 없다는 중얼거림은 어딜 가도 따라다녔다. 그러나 지존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쳐다보면, 그 사람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머리카락에 늘어 붙은 고블린 피는 쉽게 지워지질 않았다. 피에르가 뜨거운 물을 끼얹으며 한참을 씨름하고 나서야 지존의 몰골이 사람처럼 되었다.

“씻고 나니 배가 고프다. 저녁 식사를 하러 갈까.”

“계속 돈을 쓰기만 해서 되겠어? 고블린 잡는거, 그거 임무도 아니었다면서?”

“임무는 아니었지만 길드의 파스칼이라는 사람이 브론즈 등급이라는 걸로 승급을 해 주었다. 승급을 하면 격려금이 나오는 모양이야. 덕분에 돈을 좀 벌었다.”

“벌써 브론즈 등급이 된 거냐… 넌 진짜 엄청난 녀석이네.”

“로즈도 데려가야겠다. 먼저 여관에 가자.”

로즈와 함께 잤던 방에 들어갔다. 로즈는 파리한 얼굴로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지존의 정력을 받아낸 여파가 아직도 가시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로즈, 뭐 하고 있나? 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가자.”

“꺅! 언제 들어 온거야? 꼬마, 아니, 존! 옷은 또 왜 그렇게 얼룩졌어? 구멍도 엄청 뚫렸네?”

“먹으면서 얘기하지. 나와라.”

피에르, 로즈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어떤 식당에 들어갈지 고민하며 길거리를 걷던 중, 누군가 로즈의 치맛자락을 홱 잡아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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