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8화 〉 31장 - 귀환
“그러고 보니 우리 아이 이름이요. 생각해둔 거라도 있나요?”
품에 안겨서 연신 웃음꽃을 치우던 율리아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입을 연다.
그냥 아가야, 하고 부르는 것보다 이름으로 부르는 게 좋다고.
율리아는 태교에 관한 책에서 그런 내용을 얼핏 본 기억이 났다.
그리고 이제 슬슬 아기 이름도 정해놓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도 들었다.
“글쎄요. 일단 예쁜 공주님이라면 하나 생각해둔 게 있는데.”
“진짜요? 뭔데요? 듣고 싶어요. 말해줘요.”
“클로디아.”
그러자 율리아는 연신 클로디아, 클로디아, 라고 반복해서 이름을 불러보았다.
몇 번을 그렇게 반복하던 마왕은 싱긋 미소를 짓고는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아! 하고 탄식을 흘리며 급히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움직였어요. 뭘까요? 마음에 든다는 걸까요? 아니면 난 남자인데 여자 이름이라니! 라고 타박이라도 하는 걸까요.”
“타박을 하는 거면 못된 아이네요. 부모님 앞에서 벌써부터 그러다니.”
물론 진짜 아들이라면 그런 성격을 지니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딸을 낳으면 엄청나게 왈가닥 성격을 지니는 게 문제가 될 뿐이지.
하지만 아직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율리아는 그저 쿡쿡 웃음을 흘리는 게 전부였다.
“아무튼 클로디아. 예쁜 이름이네요. 정말 공주님이라면 그 이름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왕자님이면요? 그 때는 무슨 이름을 쓰려고요?”
“아직 딸아이 이름만 생각했어요. 아들 녀석 이름은… 엄마인 당신이 생각해보는 거 어때요?”
“음… 글쎄요. 막상 이런저런 이름을 생각해두기는 했는데…. 갑자기 클로디아라는 이름을 들으니까 내가 생각했던 이름이 다 이상하게 느껴져요.”
어이쿠, 그러면 이거 딸 맞네. 클라우스는 그리 생각했다.
일종의 분기점? 혹은 이후 상황을 알 수 있는 지점이라고 보면 된다.
아기의 이름을 말할 때 클로디아, 라는 이름에 반응해서 ‘아들이면 이 이름으로 할래요!’ 라고 하면 나오는 아이는 아들, 반대로 반응이 없으면 딸이라고 할 수 있었다.
‘큰일이군. 이거 제 엄마랑 매일 같이 치고받고 싸우겠는데.’
율리아랑 판박이인데 거친 면이 조금 더 부각되는 공주님이다.
그런 딸이 엄마랑 한 번 말다툼을 시작하면 장담하는데 말로만 끝나지는 않을 거다.
예전 회차에서 한 번 7살 먹은 꼬맹이가 마왕성을 반파 시킬 뻔도 했다.
“아무튼, 우리 아가. 부디 생긴 건 엄마 닮고, 성격은 아빠를 닮으렴.”
“….”
엄마, 아빠의 불같은 부분만 쏙 가져가는 아이에요, 그 녀석.
생긴 건 엄마 말 잘 들어서 엄마를 쏙 빼닮을 텐데… 아, 이거 환장하겠네.
클라우스는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면서 이마를 긁적였다.
솔직히 말해서 아들보다는 딸이 좋은데, 그래서 은근히 딸을 원하고 있었는데.
그 딸의 성격을 또 생각해보니 차라리 조용한 아들이 나을 것 같기도 하다.
퉁퉁!-
“전하! 방금 경계를 지나 구 왕국 측에 다다랐습니다.”
마차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카엘라가 힘차게 입을 연다.
이제는 제국, 왕국 따위가 아니라 지역으로 바꿔서 불러야겠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구 제국, 내지는 구 왕국 식으로 부르고 있었다.
대륙 정벌이 끝난 지 반 년도 되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
해서 율리아도, 클라우스도 그 부분을 강제로 고치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하루는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여기 있는 모두가 제 집으로, 혹은 새로운 곳으로 가기를 원하고 있으니까요.”
“도착하는 즉시 선포식을 진행하고 바로 병사들을 돌려보내야겠어요.”
“동의합니다. 병사들이 너무 지쳐있어요. 얼른 집으로 보내주지 않으면 문제가 많이 생길 겁니다. 만에 하나 병사들이 폭력적으로 변하면 기껏 잠재운 민심이 요동칠 수도 있어요.”
“여태까지 계속 전투를 하면서 약탈을 거의 허용하지 않았으니까요. 보상도 없이 계속 싸웠으니 얼른 승자의 기분을 만끽하게 해주며 영웅으로 돌려보내야죠.”
아무리 충성심이 강한 병사들이라고 해도.
제대로 된 약탈 한 번 없이 전투만 치르면서 나아가는 건 무척 힘들다.
심지어 한 곳에 틀어박혀 싸운 것도 아니고 동부에서 서부 끝까지 가기도 했다.
어느 모로 봐도 이 이상 시간을 끌었다면 심각한 문제가 되었을 터.
해서 율리아는 도착하는 즉시 대륙 통일을 선포하고 그들을 집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구 왕국의 영토로 들어서고 또 다시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저 앞쪽에 구 왕국의 왕성이 모습을 드러냈을 무렵.
갑자기 앞쪽에서 약간의 소란스러움이 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싶었지만, 곧 환호성 소리가 들리는 것이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마왕이시여. 누구도 이루지 못 했던 업적입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마차 문이 열리고 율리아가 바깥으로 나서자, 그녀를 마중 나온 이들이 무릎을 꿇는다.
전원이 이전에 항복했던 인간 측 귀족들.
귀족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 자신들의 의무를 다 하려고 노력했던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선두에는 다넬 키엔마이어가 위치하고 있었다.
“각자의 일로 바빴을 터인데 이렇게 시간을 내서 나와 준 것인가.”
미소를 지으면서 그들 앞에 다가간 율리아가 어서 일어서라는 듯 손짓을 한다.
그에 인간 측 인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녀는 일일이 한 명, 한 명의 어깨를 두드려주면서 왕인 자신이 자리를 비웠음에도 훌륭히 제 업무에 충실한 이들을 치하했다.
확실히 클라우스에게서 나름 인정을 받았던 귀족들다운 자들이라고 볼 만 했다.
“카엘라 전사장.”
“네, 마왕이시여.”
“여기서부터는 저들과 함께 이야기를 좀 나누면서 가고 싶은데.”
“마차로 같이 이동하시려는 것입니까?”
“아니. 간만에 좀 걷고 싶군. 가능하겠나?”
“호위 문제는 딱히 없으니 가능은 하십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카엘라는 지금의 마왕과, 동시에 미래의 마왕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율리아가 누구의 아이를 배고 있는지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최고의 수컷이 최고의 암컷과 짝을 이룰 자격이 있는 만큼, 마왕을 안은 남자는 자신의 주군인 클라우스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자신이 충성을 바쳐야 할 존재가 또 하나 생겼다는 것이다.
제 주군의 아이라면 응당 보호해야 할 이유가 당연히 존재한다.
그렇기에 카엘라 입장에서는 당연히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말 등에 올라서 창칼까지 휘둘렀어. 아직 거동할 만하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뜻이 그러시다면 왕성까지는 걸어서 이동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카엘라가 손짓을 한다.
그러자 말에 올라있던 모두가 일제히 내려와서는 율리아와 같이 걷기 시작했다.
대륙 통일을 이룬 왕과 그 곁의 이들임에도 으스대거나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어디를 다녀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느낌만 주고 있을 뿐이었다.
“….”
그냥 단순히 수다를 떨기 위해서 무작정 걷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율리아는 이 타이밍에 ‘인간’ 신하들 곁으로 조금 더 다가가서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으며, 그걸 어떤 식으로 처리했는지.
인간들은 무엇을 원하고 새로운 왕에게 어떤 것을 기대하고 있는지, 전부 다 말이다.
“뭔가 상상하던 마왕과는 너무 다른 것 같아.”
고개를 돌리자 다넬 키엔마이어가 다가오고 있는 게 클라우스의 시야에 들어왔다.
“왜. 뭐 피에 미치고 살육하느라 바쁜 그런 왕을 생각했나?”
“예전에는 그런 생각을 없잖아 했었지. 어쩔 수 없었잖은가. 적들의 수괴인데. 좋게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반역이라고 해도 무방하니까.”
다넬 키엔마이어의 말에 클라우스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과거 저런 생각을 자신도 몇 번 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실제로, 초창기 율리아는 딱 그런 괴물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세상에 대한 분노를 피와 살육으로 풀어가던, 정말이지 ‘마왕’ 이라는 말이 딱 맞던 여자.
지금이야 마왕이 그냥 마족들의 왕이어서 마왕이라고 하는 거지만.
처음 그녀를 봤을 때는 악마들의 왕이라고 해도 전혀 모자람이 없다고 할 수 있었다.
“그보다 수인들은 뭐지, 클라우스? 포로라도 되는 건가?”
“아니. 저들이 마왕의 새로운 친위대 역할을 할 거다.”
“…이제 갓 항복한 자들에게 그런 중요한 위치를 맡긴다고?”
“그래. 그 중요한 위치를 수인 전사들에게 맡기는 거지.”
그러자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는 다넬 키엔마이어.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아아, 하고 탄식을 흘렸다.
아무래도 왜 저들을 친위대로 고용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다는 반응이었다.
“눈치 챈 건가?”
“처음에는 인질의 용도만 생각했는데, 그것만 따졌다면 굳이 전투가 가능한 인원들을 택하는 게 아니라 어린 수인들을 택하셨겠지. 굳이 위험 부담이 있는 자들을 친위대로 임명할 이유가 없으니까 말이야. 저들에게 원하는 걸 던져주신 거군?”
“정답이다. 수인들은 더 강해지기를 원하고, 지금 마왕 전하는 최강자라고 해도 무방하니까. 그 옆을 지키면서 그 분의 이끎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
“마왕께서 정말 그래주실까? 언제든지 송곳니를 드러낼 수 있는 자들인데.”
“저들이 전부 성장해서 이빨을 보인다고 해도 아마 30분도 안 돼서 진압이 될 거다.”
클라우스의 말에 다넬 키엔마이어는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율리아의 무용이야 2차 대륙 전쟁에서 보고를 듣기도 했고.
당장 이전에 마지막 발악을 하려던 귀족들을 직접 처단한 걸 보기도 했다.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로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피보라가 일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오싹했지. 저 분이 내 왕이 아니라 내 적이었다고 생각한다면….’
전쟁을 두 번이나 겪은 터라 이제 창칼이나 피, 그리고 죽음 앞에서 담담할 거라고 여겼는데.
그 율리아의 모습을 떠올리면 아직도 심장이 철렁거리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빠르게 항복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어. 더 저항했다면….”
“장담하는데 여기서 나랑 이렇게 넋두리 따위는 나누지도 못 했겠지.”
그러자 다넬 키엔마이어는 그게 맞다는 듯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왕국을 넘어 제국을, 그리고 수인들과 요정까지 전부 마법처럼 굴복했다.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 한 일, 심지어 항복한 자신조차 이건 너무 빠르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클라우스, 자네에게 평생 감사하며 살아야 할 것 같아.”
“그걸 이제 깨달은 네 녀석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다.”
낄낄거리며 다넬 키엔마이어의 등을 툭툭 치는 와중에.
카엘라가 슬쩍 클라우스의 옆으로 다가왔다.
“클라우스님. 마왕께서 대륙 통일 선포식을 하시겠다는데… 방금 장소가 정해졌습니다.”
“어디라고 하시지?”
이미 어디인지 클라우스 본인은 알고 있다.
마왕성도 아니고, 구 왕국의 왕성도 아니며 다른 대단한 곳도 아니다.
다른 이들 입장에서는 도대체 왜?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율리아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곳은 자신에게 있어서 제 2의 삶을 시작한 곳.
동시에 포기했던 모든 것을 되찾고 다시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곳이었다.
“아카데미에서 대륙 통일 선포식을 하시겠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