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9화 〉 28장 - 체하지 않도록
클라우스가 전선으로 이동하는 군을 따라 왕성을 떠난 지 며칠이나 지났다.
괜스레 명령을 뒤집을까 걱정한 율리아는 클라우스가 가는 당일에 그와 만나지 않았다.
물론 그런 마음을 품은 것을 바로 후회했고 이제라도 쫓아가볼까 생각도 했지만.
클라우스는 벌써 왕성을 벗어나 제국 국경으로 진군중인 아군으로 향했다고 한다.
‘…너무 빠르잖아. 가기 싫다고 했으면서 조금은 늦장을 부려도 좋았을 텐데.’
클라우스 딴에는 자신의 명령을 성실하게 이행하기 위한 것이라지만.
막상 정말로 그가 빠르게 떠나버리자 괜스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가기 싫다고 그리도 당당하게 말해놓고 이런 건 솔직히 반칙이 아닐까.
은근히 자신의 명령에 불복종한다거나 늦장을 부리는 모습을 기대했는데.
아무래도 이 남자는 그런 부분까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조그마한 한숨을 내뱉으면서 조심스레 제 배를 쓰다듬어본다.
여전히 미약하기 짝이 없는, 그러나 분명하게 느껴지는 제 안의 생명.
작게는 자신과 그가 이룬 사랑의 결실이자, 크게는 이 대륙의 유일한 왕이 될 후계자.
아직 아들인지 딸인지 알 수도 없는지라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름은 무엇으로 해야 할까, 아빠를 많이 닮을까 엄마를 많이 닮을까. 그런 사소한 것부터.
나중에 커서는 어떤 왕이 될까 하는 조금은 먼 미래까지 말이다.
“전하. 요청하신 자료들을 가져왔습니다.”
문이 열리면서 플랑슈가 서류들을 한 아름 가득 들고 찾아온다.
보기만 해도 절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내용들이 빼곡히 들어찬 서류들.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겉부분을 보아하니 왕국의 재정 상태에 대한 것들 같았다.
그걸 둘러보던 율리아는 인상을 찡그리더니 곧 다른 서류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다시 두 서류들을 일일이 확인하곤 하아, 한숨을 내뱉는다.
“역겹네.”
리르와 붉은 독거미 측이 착실하게 모은 정보들.
그 중에는 당연히 귀족들이 거두던 세금과 왕성에 바치던 세금에 대한 기록도 있었다.
조사 결과 엄청난 양의 세금을 거두면서 정작 국고로 들어온 것은 그 반의반도 되지 않는다.
이것으로 용케 1차 대륙 전쟁에서 살아남았고, 여태까지 버틴 것이다.
아무리 제 영지에 관한 부분은 그 귀족이 우선권을 지닌다고 하지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그 영지는 먼 옛날 결국 왕실에게서 하사받은 나라의 땅이다.
본인이 피땀 흘려 이룩한 것도 아니고 그저 물려받기만 한 것들이 마치 왕이라도 된 것처럼 으스대는 꼴이나, 그런 것으로 나라를 말아먹는 꼴을 이렇게 서류들로 알 수 있을 정도.
‘도대체 클라우스는 이런 놈들을 데리고 어떻게 우리 동부와 7년을 싸운 거지?’
차라리 이것들이 돕기라도 했으면 말을 안 한다.
듣기로는 클라우스를 계속 모함하여 급기야 한 번은 사령관직에서 내쫓기도 했다는데.
그리고 남부의 절반이 함락당하며 멸망까지 코앞에 이르렀다고 하던데.
이런 쓰레기들을 데리고 버틴 것만이 아니라 기어코 승리를 달성하고 말았다.
정말로 그게 사람으로서 가능한가? 인간이니 마족이니 뭐 그런 것을 떠나서.
아무리 뛰어난 자라고 해도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일인데 그게 가능해?
율리아로서는 그런 의문이 당연히 들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그를 아주 잠깐 의심하기도 했었다, 너무나도 뛰어난 자라서.
그런 이가 다른 이도 아니고 자신에게, 아무 것도 없는 자신에게 온 게 이상해서.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에게 의지했고 그 다음으로는 나도 이 남자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싶다는 열망을 느끼면서 정말 엄청나게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이후에는 인정받고 싶다는 걸 뛰어넘어서 이 남자에게 걸맞은 여인이 되고 싶었고.
마지막으로는 이 남자를 품고도 남을 그런 왕이 되고자 하는 그런 마음을 품었다.
‘…그런데 정말 그게 가능할까 싶네. 너무 대단하잖아.’
그렇게 생각하던 율리아는 아! 하고 탄식을 흘리고는 급히 제 뺨을 찰싹였다.
설마 벌써부터 그런 걱정을 하게 되다니, 절대 일어날리 없는 일을 걱정하고 있다니!
클라우스 덕분에 바로 여기까지 온 주제에 아주 조그마한 의심조차 하는 건 본인이 저 역겨운 귀족들과 똑같은 놈들이라고 인정하는 것이었다.
“전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옆에 조용히 서있던 플랑슈가 슬쩍 옆으로 다가온다.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마왕이 갑자기 제 뺨을 찰싹이니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다.
그에 율리아는 별 것 아니라고 말을 하려다가, 다른 말을 꺼냈다.
“플랑슈.”
“네, 전하.”
“너는 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지?”
“무슨 말씀이신지 미천한 제가 바로 파악하지 못 했습니다.”
“클라우스, 그 남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거야.”
갑작스러운 질문, 그에 플랑슈는 두 눈을 깜빡이다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몸짓.
그에 율리아는 미소를 짓고서는 손을 내저으면서 말을 이었다.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어. 그냥 솔직하게 네 감상을 듣고 싶은 것이다. 너는 내 시종장이기도 하나 한때는 그의 메이드이지 않았는가. 혹시나 가까이 지내면서 나는 모르는 뭔가가 있을까 그게 궁금한 것뿐이니 편하게 말해줬으면 한다.”
“….”
잠시 더 침묵하던 플랑슈는, 살짝 고개를 들고서는 왕의 질문에 대답했다.
“전하.”
“그래.”
“저로서는 감히 전하의 곁을 지키는 반려 분에 대한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
“죄송합니다.”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율리아는 단번에 플랑슈가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그 남자는 오롯이 당신만의 것인데, 당신을 바라보는 남자인데 뭐가 걱정이냐는 것.
남들이 그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품든, 어떤 평을 내리든, 어느 말을 하든 간에.
결국 율리아 본인이 하는 생각이, 평이, 말이 그에 대한 모든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세상이 그를 의심해도 나만이 믿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요.
세상이 그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을 지니지 않아도 본인이 다른 생각을 품는다면 그는 이전과 똑같이 배신을 당하여 또 한 번 실망을 할 것이다.
플랑슈의 간단한 말 한 마디는, 율리아의 머리와 가슴 속에서 그렇게 번져갔다.
“…아하하.”
“….”
“왜 클라우스가 갑자기 너를 메이드라고 데려온 건지 이해가 되는구나. 그리고 왜 전 시종장이 그대에게 시종장 자리를 맡겨도 되겠다고 판단을 내렸는지도.”
“송구합니다.”
“아니다. 오히려 내가 아주 미련한 질문을 해서 너를 곤란케 했구나. 방금 전 일은 없던 것으로 해주기를 바라바, 플랑슈 시종장.”
“저는 그 어떤 말도 듣지 못 했습니다, 전하.”
플랑슈의 말에 율리아는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주인에 그 메이드라고 했던가, 확실히 클라우스가 그저 외모만 보고 메이드를 뽑았을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 있던 서류들을 한쪽으로 치워둔 율리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왜 그러냐는 뜻으로 플랑슈가 슬쩍 다가오니 마왕은 당연한 거 아니냐면서 의자 위에 대충 아무렇게나 걸쳐두었던 겉옷을 입었다.
“외부 시찰이다. 이번에는 조금 멀리 가볼까 한다.”
“호위병들은….”
“거추장스러워. 그대 하나면 충분할 것 같다, 플랑슈.”
“…알겠습니다. 허면 조용히 준비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원래라면 이렇게 위험한 짓을 벌이는 왕을 막는 게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플랑슈 입장에서는 그럴 이유가 없는 것이, 일단 율리아가 지닌 실력이 자신조차도 감히 끼어들 수 없는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클라우스에게서 이미 율리아가 어딘가로 나서려 한다면 막거나 호위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단순한 수행 업무만 하면 된다는 말까지 들었다.
클라우스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충실히 이행할 준비가 되어있는 플랑슈로서는 율리아의 시찰을 막을 이유도, 그리고 명분도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오늘은 왕성을 벗어나 인근 영지를 시찰할 생각이었다.
클라우스와 있을 때에는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던 율리아였지만, 이제는 지양하고 있었다.
일단 마왕이 나타났다고 하면 긍정적인 방향이든 부정적인 방향이든 소란스러움이 일어나니까 말이다.
잠시 후, 왕궁의 뒷문이 열리면서 율리아와 플랑슈가 재빠르게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모습을 몰래 주시하다가 어딘가로 전서구를 날렸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율리아는 주변 풍경을 감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동부와는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또 묘하게 다른 느낌이 드는 서부.
기후 부분도 그렇고 확실히 동부보다는 이곳이 살기에는 조금 더 좋은 느낌이 들었다.
다만 기후는 좋은데 그 땅을 지배하고 있는 것들이 심각한 하자를 지닌 놈들이라.
그래서 동부보다도 더더욱 살기 힘든 곳이 되어버린 땅이지만 말이다.
“오늘도 왕국민들을 돌아보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귀족들이 거의 대부분 사라졌으니 그들의 빈자리를 어떻게 느끼는가 봐야지.”
율리아의 대답에 플랑슈는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영지를 지키고 있던 이들에게 출입증을 내밀었다.
둘의 정체를 수상하게 여기는 병사들이었지만 일단은 출입증에 문제가 없고, 원래 이곳을 맡고 있던 귀족은 사라졌기에 마땅히 자신들을 벌할 이들도 없었다.
문제만 일으키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서 안으로 들어선 두 여인은 왕성과 비교하면 무척이나 작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삶의 터전이자 규칙을 지닌 곳을 둘러보았다.
“분명 땅도 비옥하고 교통도 좋은 곳인데 다른 게 전부 낙후되었군.”
“수탈이 심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해도 일단 알을 낳게 먹일 생각을 해야지, 알만 낳으라고 계속 보채기만 하는 것과 다를 게 없구나.”
진심으로 혀를 차면서 율리아는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한 차례 전쟁이 휩쓸고 간 터이라 피난을 갔던 이들도 많았기에 아직 영지가 무척 조용했다.
언젠가는 이곳도 다시 번창할 그런 모습을 기대하면서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율리아는.
“으음.”
한 차례 탄식을 흘리고는 갑자기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제 배를 통통 두드리더니 ‘아가. 놀라지 말고 잘 보렴.’ 이라고 중얼거렸다.
직후-.
콰직!!-
율리아의 손이 한 차례 휘둘러지며, 그리고 그 손에 일렁이던 마력들이 춤추면서.
주변에 세워져있던 집들과 벽들이 그대로 허물어지고 두 동강이 나면서.
마지막 남은 벌레들 중 반이 그 자리에서 으스러진 육편이 되어 흩날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바, 발각된 건가! 어, 어디서 노출이….”
미처 왕국을 빠져나가지 못 했거나 겨우 도망쳐서 몸만 숨기고 있던 귀족들.
왕궁에 심어둔 극소수의 제 편에게 간신히 정보를 건네받았다.
직후 싸울 수 있는 모든 병사들과 기사들을 불러 모아 이곳 영지로 들어왔다.
몰래 들어올 수가 없었기에 경계를 서고 있던 자들이나 지나가던 마을 사람들까지 전부 죽여 없앤 후 뒤를 밟았는데, 그 모든 노력이 무색하게 너무나 쉽게 들키고 말았다.
“노출? 아, 노출. 플랑슈, 고생했다. 모르는 척 하느라.”
“별 것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답하며 플랑슈가 출발 때부터 품에 안고 왔던 검을 슬쩍 율리아에게 내민다.
언젠가 클라우스가 말했던, 임신 초기에는 조금 우울해하거나 답답해하던데 그걸 풀어줄 놈들이 알아서 나타날 터이니 너는 그냥 관망만 해도 된다고.
그 부분을 떠올리면서 플랑슈는 ‘혹 도망치는 놈이 있나 주변을 막겠습니다.’ 하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자, 그럼.”
플랑슈가 내어준 검을 뽑아든 채, 율리아는 너무나도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벌레 새끼들이 전부 도망을 쳤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는데.
빈틈 한 번 보여주었다고 앞뒤 생각도 안하고 이렇게 달려들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이런 머저리들을 데리고 버텼다는 클라우스가 또 한 번 용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한동안 욕구 불만이었는데, 이런 식으로라도 좀 풀어내야겠네.”
왜 율리아가 이전 회차들에서 피에 미친 악귀라고 불렸는지.
지금의 다른 이들은 전혀 모른다고 해도 아마도 저들은 알게 될 것이다.
토막이 나서 사방에 흩뿌려지는 제 사지를 바라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