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8화 〉 28장 - 체하지 않도록
페르디난트와 에슐리가 이끄는 마족군은 쾌속 진격을 거듭하고 있었다.
온갖 요새들과 방어 병력으로 도배가 되어 있던 왕국의 국경 지역과는 다르게.
왕국에서 제국으로 넘어가는 경계에는 그 어떤 방어물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군대가 이동하기 편한 도로만이 곳곳에 깔려있을 뿐이었다.
덕분에 예상한 것보다도 훨씬 더 빠른 시일 내에 제국 영토로 들어서게 되었다.
“예상보다도 너무 빨리 도착한 것 같군.”
병사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이, 중간 지휘관들을 바라보면서 페르디난트가 입을 열었다.
적들도 생각이 있다면 그나마 방어가 용이한 국경 지역에서 어떻게 저항이라도 하지 않을까.
그게 그나마 가장 적은 병력과 자원으로 가장 오랜 시간동안 버틸 수 있는 길인데.
제국 측에서는 그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 채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페르디난트의 의문에 몇몇 지휘관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설사 제국은 저항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아직 왕국에 남은 저항 세력이.
혹은 비교적 제국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는 요정들이 게릴라 전술이라도 쓸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 오는 동안 편해도 너무 편한 행군을 한 게 오히려 마음에 걸렸다.
“에슐리 팔라티나트. 그대의 생각은 어떠하지.”
“나도 좀 그래요. 최소한 요정 녀석들이 방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이건 마치 얼른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함정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야.”
본토에서 싸움이 나는 것과 타지에서 싸움이 나는 것, 이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해서 페르디난트와 에슐리는 당연히 요정들과 수인들이 이 전쟁을 왕국, 못 해도 제국의 땅에서 시작되고 또 끝나기를 바란다고 예상했다.
헌데 이런 식이면 제국은 일주일 안에 점령당할 것이고 요정 영토까지도 단번에 진격이 가능한 수준에 이를 것이다.
한 마디로 적이 절대 바라지 않는 현실을, 적들 스스로 내어준 것과 똑같다는 말.
당연히 이질감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현재 위치는 제국의 황성에서 하루 떨어진 거리다.”
“정탐 보고들에 의하면 방어선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없다고 합니다.”
“혹시나 기습을 할 만한 곳은?”
“황성으로 가는 길에 조그마한 숲을 하나 지나게 되는데 사실 숲이라고 부를 것도 없습니다. 길도 넓고 숲도 워낙 작아서 적들이 허리를 끊는 것보다 선두가 먼저 숲을 포위하는 게 빠를 수준입니다.”
“그래도 숲이라는 건 거슬리는군. 우회할 수 있나?”
“가능합니다만 그렇게 되면 최소 한나절에서 최대 하루 정도는 소비해야 할 겁니다. 양 옆으로는 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없습니다.”
이번에도 선두를 맡은 아인의 보고에 페르디난트와 에슐리는 침음을 흘렸다.
현재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속도’ 다.
혹여 적들이 제국에 걸쳐 또 다른 방어선을 형성할까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온 것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적들도 없다고 판단되며 설사 기습을 준비한다고 해도 역으로 이쪽이 한꺼번에 잡아먹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피하는 것보다는 제거하는 편이 훨씬 좋았다.
“아인.”
“네, 에슐리 팔라티나트님.”
“정찰을 두 배로 늘려서 숲은 물론이고 그 일대를 샅샅이 수색해. 적들의 흔적, 아주 조그마한 것이라도 좋으니 무조건 찾아내서 보고해줘. 적들이 아무 짓도 안 하고 있다는 게 오히려 더 수상하고 또 걱정이니까.”
“알겠습니다. 이 시간 이후로 정찰병을 두 배로 늘려서 일대 수색을 강화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대보다 더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정찰의 특성답게, 아인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막사를 떠나 저 멀리 사라지는 마족을 바라보면서 페르디난트는 슬쩍 입을 열었다.
“정찰을 두 배로 운용함에도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 할까 그게 걱정이군.”
“내 말이요. 그렇게 되면 3개 순번대로 나뉘어 운용되는 정찰병들을 2개 순번으로 운용한 게 되니까 피로 누적도 상당하겠죠.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행군 도중에 요정들의 공격이라도 받는다면 그것보다 끔찍한 일은 없는데.”
“하나라도 확실한 게 있다면 좀 좋으련만.”
휴식 시간이 끝난 후 마족군이 다시금 출발하기 시작했다.
분명 그 어떤 위협도 없지만 어느 때보다도 긴장한 상태.
국경을 넘어 왕국으로 들어갈 때도 이렇게 걱정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때는 적들이 방어선에 진을 치고 버티고 있었으며 어찌 되었든 적들이 보이는 곳에 있으니 그냥 적당하게 긴장만 하고 있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왕국의 국경, 그리고 방어선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환경이다.
적들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어디에서 기다리고 있는지도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오히려 어디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평화롭고 잔잔한 분위기만 풍기는 곳이다.
헌데 또 우스운 것이 이곳은 고향 땅이 아니라 명백한 적지이다.
눈에 비치는, 피부로 와 닿는 모든 게 평화롭기 그지없는 곳인데 긴장을 해야만 한다.
이런 식이니 지휘관들이고 병사들이고 전투 한 번 치르지 않았는데도 피로감이 극에 달할 수준이었다.
‘좋지 않은데.’
페르디난트는 쯧, 하고 혀를 차면서 병사들의 상태를 점검했다.
아직은 괜찮지만 이런 식으로 며칠 더 시간이 흐르면 결국 분위기가 풀어지든.
그게 아니면 기껏 세운 날이 전부 무뎌지든 부정적인 결과가 나올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사방에 적들이 도사리고 있다면 그 날카로운 기세를 유지라도 할 수 있다.
죽음의 공포와 기습의 두려움 사이에서 오직 그것만이 본인을 지켜줄 수 있는 방패니까.
허나 막상 그 어떤 전투의 분위기도 느껴지지 않는데 자신들만 긴장을 한 상태로 움직여야 한다면 정신적인 피로도가 상당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시원하게 전투 한 번이라도 치렀으면 좋겠군.’
전투로 인해 병사들이 또 얼마나 상할지 알 수 없는 일임에도.
페르디난트나 에슐리는 물론이고 다른 지휘관들, 심지어 병사들까지 그런 생각을 품었다.
적지에서 마주하는 평화가 이리도 이질적이고 불쾌한 것이라는 걸 다들 처음 알았다.
숲으로 진입할 때는 그 피로도가 최고조에 달했다.
요정들에게 있어 숲은 제 안방과도 똑같은 것이니 기습을 당한다면 얼마나 호되게 당할지 어느 누구도 함부로 예측을 할 수가 없다.
덕분에 말단 병사부터 최고 지휘관까지, 모두가 창칼을 굳게 쥔 채로 사방을 경계하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숲을 뚫고 나아갔다.
그렇게 선두가 먼저 숲을 나서 진을 형성하고 본대까지 숲을 거의 빠져나왔을 무렵.
조금 안도하고 있던 페르디난트에게로 누군가가 바쁘게 달려왔다.
“페르디난트님!”
역시 후미쪽을 적들이 들이친 것인가.
그렇게 정찰의 수를 늘렸음에도 기어코 숨어 있다가 기습을 하는 걸 보면 역시 그 요정놈들도 보통 것들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하루 시간을 버리더라도 우회하는 게 나았을까, 그런 부분까지 막 번져가던 찰나였다.
“저, 클라우스님이 당도하셨습니다.”
“…뭐라고?”
마왕 곁에 남아서 왕국 내부를 정리하던 이가 왜 갑자기 당도했다는 것인가.
전선을 책임지는 건 분명 자신과 에슐리에게 일임하겠다고 말하던 율리아인데.
혹 자신들을 불신하여서 수중에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를 내민 것은 아닐까.
페르디난트로서는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아니, 그보다 우리가 떠난 후에 바로 쫓아오기라도 한 건가? 우리가 쾌속 진군을 했는데도 이렇게 빨리 따라잡았다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습니다. 저희가 왕국 국경을 넘기 전까지는 왕성에 계셨다고 합니다.”
부관의 보고를 듣고 있던 페르디난트는 본대가 숲을 나가는 즉시 클라우스를 데리고서 지휘부로 찾아오라고 언질을 남겨두었다.
일단은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이 숲을 벗어난 다음 진을 치는 것이 중요했다.
다행히 별 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았고, 황성으로 진격하기 전 마지막 휴식에 들어간다.
동시에 지휘부로 클라우스가 찾아오니 아직 소식을 듣지 못 했던 에슐리는 으응? 하고 놀라서는 갑자기 왜 온 것이냐고 질문을 던졌다.
“왜. 혹시 마왕 전하께서 너희를 못 믿고 나를 보낸 것 같아 걱정이라도 되나?”
“어?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네게 내려진 왕명은 왕국 내부 정리였잖아?”
“나 역시 그렇게 들었다, 클라우스. 헌데 갑자기 무슨 일이지? 왕국 국경을 넘어 제국까지 이리 달려올 정도라면 무척 중요한 문제 같은데.”
“바로 지금 상황 때문에 그렇지.”
지금 상황? 이라고 반문하면서 페르디난트와 에슐리가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에 클라우스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앞에 펼쳐둔 지도를 툭툭 두드렸다.
“적들이 노리고 있는 건 우리들을 기습하는 게 아니었다. 그냥 전투 전에 진을 빠지게 만들어서 한 번의 전투로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주고 다시금 왕국 영토 안으로 내쫓기게 만드는 거지.”
“…정보가 들어온 모양이군.”
“그래.”
“허면 그냥 전령을 보내는 게 훨씬 낫지 않았나? 이런 식으로 굳이 자네가 올 이유는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물론 그렇지. 하지만 전쟁을 빨리 끝내면 끝낼수록 좋은 거니까. 아아, 오해는 하지 마라. 지휘권은 여전히 너와 에슐리, 단 둘에게만 있다. 나는 너희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따로 병력을 움직일 권한도 부여받지 못 했어. 그냥 소식만 전하고 곁에서 도움을 주기 위해 찾아온 게 다야. 솔직히 나도 또 다시 전쟁 한복판에 뛰어들기는 싫었거든.”
“…네가?”
전쟁이 싫다는 말에 페르디난트와 에슐리가 동시에 반문한다.
다른 이도 아니고 클라우스가 전쟁을 싫어한다니, 그 전장에서 가장 날뛰던 이가 누구인데?
1차 대륙 전쟁에서 지휘만 하던 인물이 아님을, 창을 쥐고서 앞에서 마족 병사들을 도륙하던 인물이기도 했고 동부 내전에서도 반란군의 멱을 따던 이가 바로 클라우스다.
그런 인물이 갑자기 전쟁이 싫다느니 소리를 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을 만도 했다.
하지만 클라우스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짓을 도대체 몇 번이나.
그리고 몇십년이나 반복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
얼른 마무리하고 이제는 더 나설 필요도 없이 말 그대로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어서 편안하게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무튼, 적들은 제국 영토에 없다. 전부 요정들의 영역에서 대기 중이야. 원래라면 당연히 소규모 부대를 보내서 너희들을 괴롭혔을 테지만, 역으로 이런 식으로 마족들의 진을 빼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명예를 지킬 줄 안다는 놈들이 아무튼 이럴 때에는 또 더럽게 약삭빠르네.”
“이래서 요정을 믿지 말라는 조상님들의 옛 격언이 있을 정도다.”
“그러니까 병사들도 좀 안심시켜주도록 해라. 이러다가 전투 전에 다들 진이 빠져서 쓰러지겠다. 다들 몸에 힘이 너무 들어가 있어.”
클라우스의 말에 에슐리가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반박했다.
어찌 되었든 이곳은 적진이고, 엎어지면 닿을 곳에 요정들이 있으니 아군으로서는 그들을 경계하고 또 경계할 수밖에 없다고.
이해하지 못 하는 부분은 아니다, 실제로 클라우스 본인도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다.
그 어떤 정보도 없고, 적들이 없다는 확실한 뭔가가 없다면 말이다.
“몇 번이고 확인한 첩보이니 안심해도 된다. 내가 책임질 테니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뭐, 다른 이도 아니고 클라우스,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확실한 거겠지.”
“다행이군. 황성 앞에 서서 괜스레 사나운 분위기를 주면 제국의 인간들이 혹 우리들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질까 걱정했는데 말이야.”
“아무튼 요정 놈들, 더러운 수를 아주 잘만 쓰네. 역겨운 것들.”
퉤, 하고 침을 뱉어내는 에슐리.
그에 클라우스는 속으로 큭, 하고 웃음을 내뱉어야만 했다.
지금 요정들이 아무 행위도 하지 않는 건 그저 이들을 기만하기 위한 게 아니다.
자신이 뿌려둔 분열의 씨앗에, 나타샤가 물까지 부어준 터라 그 씨앗이 아주 무럭무럭 자라나면서 단단했던 요정들의 중심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