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화 〉 21장 - 동부 재건
왕국의 귀족, 다넬 키엔마이어 후작은 이마를 싸매고서 한숨을 흘렸다.
기어코 귀족들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 대륙 전쟁에서 꽤 많은 공을 세운 이를 체포한 것이다.
하필이면 귀족이 아닌 평민, 거기에 클라우스 밑에서 활동한 적이 있는 인물.
그가 귀족들을 모욕하고 다닌다는 이유로 아주 거친 방식으로 체포되었다.
심지어 부상까지 입혔다고 하는데 귀족들은 경상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자는 그들처럼 귀족 우월주의에 빠진 자들이 전부일 것이다.
‘멍청하기는. 절대 먼저 움직이지 말라고 했는데.’
자신 역시 귀족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다, 전쟁에서 그저 도망만 친 작자들이다.
그 어떤 의무도 행하지 않고 그저 권리만 누린 자들, 그리고 계속 누리고 싶어 하는 자들.
그들과 같은 귀족이라는 사실이 역겨웠지만 그동안 자신이 누린 것이 있기에 이제 와서 그걸 부정한다고 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해서 키엔마이어 후작은 평민과 귀족, 그 사이에 서서서 어떻게든 갈등을 줄이고자 했다.
클라우스라는 강력한 구심점이 사라진 지금 서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위험하다.
귀족들은 자칫 클라우스를 내쫓은 책임이나 분노가 날아들까 과하게 반응하고 있고.
반대로 평민들은 클라우스마저 내쫓은 자들이 자신들을 해하지 않을까 두 눈을 부릅뜨고 상황을 살피고 있는 중이다.
조그마한 불꽃이라도 튀는 순간 그대로 불타오를 것이다. 아니 폭발할 것이다.
이미 왕국을 넘어 제국으로, 그리고 요정 사회와 수인에 이르기까지.
대륙 전쟁 이전의 기득권 세력과 대륙 전쟁 이후의 새로운 세력들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클라우스, 그 친구가 이런 상황을 예견하지 못 했을 리가 없다.’
그를 이해하면서도 또 가끔은 그가 밉기도 했다.
귀족들의 말마따나 그를 믿던 자들이 몇이고 따르던 자들이 또 몇인데.
그걸 전부 내치고 훌쩍 동부로 떠났다는 소식에 얼마나 놀랐던가.
잠시 그렇게 생각이 들던 키엔마이어 후작은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바로 이런 생각이 클라우스에게는 더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그나마 그가 믿던 친구인 자신마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참으로 한심스러웠다.
이미 그에게서 모두가 결코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다.
여기서 자신들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 하고 헤맨다면 클라우스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키엔마이어 후작은 생각했다.
똑똑-.
“후작 각하. 기사단장입니다.”
“들어오게.”
키엔마이어 후작가의 기사단을 맡고 있는 남자가 안으로 들어선다.
원래 이런 대귀족 가문의 기사단장은 검증된 가문의 뛰어난 기사가 맡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곳의 기사단장은 기사 출신도 아니었고, 심지어 귀족도 아니었다.
대륙 전쟁 당시 키엔마이어 휘하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영지민.
평민이라는 출신이 놀랍게 어지간한 기사들보다도 검술이 뛰어난 남자였다.
이후 키엔마이어 후작은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기사단장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그를 기사로 임명하면서 모든 분란을 잠재웠다.
‘이후 기사단원들을 하나씩 휘어잡는 걸 보고 확실히 내가 사람 보는 건 정확했다고 생각할 수 있었지.’
귀족이라고 해서 무조건 뛰어나지 않고 평민이라고 해서 불쌍하기만 한 게 아니었다.
그 간단한 진리를 너무나도 늦게 깨우친 것 같아서.
심지어 주변의 귀족들은 아직도 깨우치지 못 한 것 같아서.
그래서 키엔마이어 후작은 너무나도 불안하고 또 동시에 미안했다.
그들과 같은 귀족인 것이 참으로 부끄럽고 또 한때는 자신 역시 그러했다는 사실에 한숨만 푹푹 흘러나올 뿐이었다.
“…후작 각하?”
“아, 아아. 미안하네. 잠시 생각하던 일이 있어서. 그래, 무슨 일인가?”
“동부 상황에 대한 보고가 도착했습니다. 이번에는 정확성이 매우 높은 것입니다.”
“저번에는 마왕이 패한 것 같다느니 이상한 보고가 올라왔었지.”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귀족 회의 쪽에서 의도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흘린 것 같습니다.”
“아니야. 그들 딴에는 어떻게든 동부의 혼란을 언급해서 서부의 혼란을 잠재우고 싶었겠지. 신경 쓰지 말게. 자네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사과할 일이야.”
“그 또한 아닙니다. 후작 각하는 그들과는 전혀 다른 분입니다.”
그리 말한 기사단장은 바로 보고를 이어갔다.
“동부에서 이전에 요청한 교역 재개가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입니다.”
“받아들여진다? 여태까지 게거품을 물면서 반대하던 자들이 이제 와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얼마 전부터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합니다.”
뭔가 있군. 그것도 상당히 더럽고 역겨운 뭔가가.
키엔마이어 후작은 그리 생각하면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무래도 이틀 전 들어온 소식이 귀족들의 생각을 바꾼 것 같습니다.”
“이틀 전 들어온 소식이라면… 그래, 동부의 모든 불길이 다 꺼졌다는 것이었나.”
동부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진 게 두 달 전이었다.
서부의 이들, 특히 귀족들은 마왕이 바뀐다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만 최소 반년은 걸리지 않을까 예측했다.
심지어 키엔마이어 후작조차, 클라우스를 잘 알고 있는 그조차 못 해도 세 달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거 웬걸, 반란이 일어난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다시 소식이 전해졌다.
반란군이 대패하고 그 수장이었던 마왕의 숙부가 목이 잘렸다고.
분명 엄청난 군세와 세력을 가졌던 남자인데, 그래서 마왕의 자리에 도전한 자인데.
반년은커녕 세 달도 고사하고 한 달도 안 되어서 스러진 것이었다.
이후 동부는 남은 역적의 잔불들을 소탕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한 달이 흐른 지금, 그 모든 불길이 다 꺼졌다는 말이었다.
‘남은 세력들이 꽤 되었는데도 거기에는 그 어떤 걱정도 하지 않은 채 교역 재개부터 신경을 썼다는 건데. 이번 마왕이 정말로 유능한 자이긴 한 모양이군.’
시기를 보면 아우펜을 잡아 죽이자마자 바로 서부와의 관계 개선에 나선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건 정치적 감각이나 앞을 내다보는 감각이 탁월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바로 이렇게 빠르게 행동할 수는 없다.
클라우스가 왜 동부로 향했는지, 왜 마왕을 새 주군으로 삼았는지.
처음에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던 키엔마이어 후작이었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 정도 수완을 발휘할 수 있는 왕이라면, 그런 능력을 지닌 주군이라면.
다른 이도 아니고 클라우스가 서부를 등지고 여러 사람들을 떠나면서까지 따르고자 했을 거라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귀족들 반응도 만만치 않을 텐데. 여전히 서부는 혼란 그 자체인데 동부는 단 두 달 만에 모든 걸 끝내고 이제 올라갈 일만 두고 있으니까.”
“그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라도 얼른 서부의 혼란을 마무리하고 걷잡을 수 없이 커질 동부에 대항할 준비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는 자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키엔마이어 후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말은 그렇게 하고 다들 고개는 끄덕인다고 해도.
하나같이 양보를 하기 싫어하는 자들 투성이 인데 같은 귀족도 아니고 평민들에게 고개를 숙이기는 죽기보다도 더 싫을 것이다.
한 발자국 물러서면 그 다음에는 두 발자국, 그 다음에는 다섯 발자국, 마지막에는 열 발자국.
물러나다보면 하염없이 물러나야만 하고 그러다가 결국 벼랑에 몰릴 거라는 두려움이 귀족들을 완전히 옭아매고 있는 중이었다.
차라리 동부가 선전포고라도 했다면 급해서 양보라도 할 텐데.
반대로 동부가 평화노선을 택하니 귀족들의 마음이 어중간한 쪽이 되어버렸다.
양보해서 서부를 결집하여 동부에게 적의를 드러내게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부와 이제 와서 다시 손을 잡자니 여태 동부에게 대한 것들이 한둘이 아니라서 마음에 켕기는 것이 너무 많고.
‘클라우스는 알고 있어. 서부는 결코 통합될 수 없다는 걸.’
문득 이제는 아주 멀리 떠나버린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영리하게 살아남아라, 네가 바라던 그 세상이 찾아올 지도 모른다.
잘난 핏줄로 지배하는 게 아니라 능력에 따라 지배하는 세상.
그 말을 곱씹으면서 키엔마이어 후작은 조용히 작성하던 서류들을 내려다보았다.
“….”
그 서류 안에는 만에 하나 동부가 서부와 전쟁을 벌일 시.
그리고 서부가 완전히 밀려날 시 키엔마이어 영지의 향후 행방을 결정지을 뭔가가 빼곡하게 적히고 있는 중이었다.
* * * * * * * * * *
“고생들이 많았다. 그대들 전부 다. 아주 고생이 많았어.”
동쪽으로 파견되었던 인원들은 율리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먼저 전체적인 지휘관은 세실리가 맡고 있었으나 그녀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서 전쟁 경험이 있는 페르디난트 엘세의 의견을 존중하고 경청했다.
그리고 페르디난트 엘세는 비록 지휘관이 자신의 의견을 경청하고 있다고는 하나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면서 군을 이끌었다.
에슐리 팔라티나트는 가장 앞에 서서 적의 약점을 파악하고 사정없이 후벼 파면서 수성전이 무조건 유리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었다.
충성파의 인원들은 못 해도 두 달은 넘게 걸리지 않을까 예상했다.
병력도 적도 지지하는 백성들도 얼마 없다고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들도 필사적이니까.
항복한 귀족들이 오히려 모조리 목이 잘렸다는 이야기는 이제 그들도 알고 있다.
이러면 자신들도 항복을 해봤자 죽을 게 뻔하다고 생각이 들 테니 항전할 수밖에 없다.
그 치열함 속에서 그나마 영지민들에게 나름 잘 대해준 자들은 지지를 얻어 버티기라도 했지만 그 반대에 놓여있던 자들은 페르디난트의 계략에 의해 영지민들에게 전부 살해당하는 최후를 맞이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무리 영지민들과 함께 똘똘 뭉쳐 막아내려고 한다 해도.
세실리라는 절대적이고 압도적인 무기가 있는 마왕군으로서는 패배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위험이 있는 자들에 한해서는 완전 말살 명령까지 받은 후다.
때문에 세실리의 마법에는 자비가 없었고 저항하던 곳에 남는 건 비명뿐이었다.
“보고 드리겠습니다, 마왕 전하. 동쪽의 마지막 잔불까지 꺼트리는 데에 성공하였으며 저항하던 자들은 전부 그 자리에서 즉결 처분하였습니다. 다만 일반 백성들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유의하였으며 적극적으로 협조한 자들에게는 따로 포상을 내렸습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레블랑이라는 가문의 주인에 군 지휘관까지 거친 세실리는 생각보다 더 의젓한 모습이었다.
다만 저것도 결국 연습에 의한 가면이라는 것을, 그걸 벗겨보면 여전히 변태 마족 자체인 것을 클라우스는 뻔히 알고 있었다.
“고생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는 할 말이 없다. 그대들을 믿고 맡긴 일들이니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지. 그대들이 다 이룬 것이다.”
미소를 지으면서 율리아가 신하들을 치하한다.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거슬리던 것들은 자신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겠다는 자들을 이용해서 밀어버렸고.
거기에서 나오는 반발심 중 반을 저들에게 짊어지게 하면서 아무리 귀족이라고 해도 감히 마왕 앞에서 그 어떤 반발도 할 수 없다는 부분을 동부 전체에 인식시켜두었다.
교역 재개도 오롯이 율리아의 이름으로 행한 것이고, 동부에서 귀하다는 소금까지 왕실이 독점하여 완벽하게 손에 틀어쥐고 있다.
저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율리아는 저들로서는 이제 넘어서기 힘든 강력한 것들을 구축하고서 알아서 고개를 조아리기만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포상을 내려야겠지. 혹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해보라.”
아마 이 자리가 예전의 자리였다면 다들 뭔가 하나씩 말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세실리가 딱히 원하는 게 있을 리도 만무하고 이미 클라우스, 그리고 율리아와 진작 입을 맞춰둔 상태였다.
“저와 레블랑 가문은 그저 마왕 전하를 향해 충성을 다 할 기회를 더 얻었으면 할 뿐입니다.”
그 대답을 시작으로 율리아 앞에 선 귀족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세실리의 뒤를 따른다
마침내 동부의 모든 세력이 마왕에게 절대 복종을 맹세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