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화 〉 21장 - 동부 재건
“서부로 공급하는 양을 일부러 줄이자고요?”
율리아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도 그렇고 다른 이들도 그렇고 원하는 물건이 있는데 그게 순식간이 동이 나서 구매할 수 없다고 한다면, 심지어 더는 만들지도 않는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면.
확실한 건 모르겠지만 일단 괜스레 짜증이 치밀고 또 화가 날 것 같았다.
물건을 파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정적인 공급이라고 율리아는 여태 생각했다.
그래야만 고정적으로 구입하는 자들이 생기고 그렇게 해서 연이 닿아야 조금씩, 조금씩 세를 불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바로 조금 전 그 감정이요. 그게 정답이에요. 율리아.”
“네?”
“돈도 있고 그걸 사서 유지하고 보수할 능력도 되는데 늦어서 사지 못 했다. 그 물건이 보석이 아닌 다른 것. 율리아에게 가장 필요한 뭔가라고 생각해봐요. 그때 드는 감정이 어떻죠?”
“…말해 뭐해요. 당연히 짜증나죠.”
그나마 율리아니까 짜증이 난다, 식에서 멈추는 것이다.
장담하건데 왕국의 귀족들은 그 한정판을 구하지 못 했다고 한다면 환장해버릴 게 분명하다.
심지어 나와 은근히 경쟁 구도를 가지고 있던 귀족 놈은 그걸 샀는데, 나는 못 샀다?
허영심으로 똘똘 뭉친 자에게 그보다 더 끔찍한 악몽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무조건 빠르게, 그리고 비싸게 물건을 사버리겠다고 생각할 테고 말이다.
클라우스는 자신이 바로 그 부분을 노리고 있음을 율리아에게 넌지시 알려주었다.
그에 율리아는 그게 그렇게 분노하고 또 분해할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물건을 사지 못 해 화가 나는 건 자신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그냥 못 산 것으로 끝나야 하는 일이지 거기에 목을 매서는 앞뒤 안 재고 일단 무조건 사고 말겠다는 생각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이상한 거예요? 왜 난 이해를 못 하겠지?”
“이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부디 이해하지 마요. 그런 거에 물들면 큰일 납니다.”
율리아가 후일 동부에서 최고의 인기와 신뢰를 지닌 마왕이 되는 이유 중 하나.
그건 이 여자가 최고 권력자 치고, 그리고 여인 치고 사치를 즐기지 않기 때문이었다.
힘겹던 시기가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꾸미거나 본인을 무슨 온갖 보석으로 치장하는 걸 매우 싫어했다.
클라우스에게 더 아름답게 보이고자 보석을 조금 두르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왕이라는 자리에 있어서 아주 기본적인, 품위를 유지하는 수준에 딱 맞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무튼 그렇게 적당히 해주면 귀족들은 알아서 싹싹 사갈 겁니다. 물론 그들의 경쟁심을 부추기기 위해서 점점 더 좋은 물건을 내놓는 건 필수고 때로는 훨씬 파는 게 아니라 선물 목적으로 어느 정도 뿌리는 일도 있어야겠죠.”
“뭔가 묘하네요. 뭐 그리 잘 알고 있는 거예요? 내가 알기로 클라우스, 당신은 사치와는 애당초 거리가 먼 남자라고 들었는데 그렇다고 보기에는 훤히 꿰뚫고 있는데.”
“귀족들 하는 짓들이 너무 답답하고 고까워서 약점 좀 잡아보려고 조사했던 겁니다.”
미리 준비한 대답을 하니 율리아는 아아, 하고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을 하던 율리아는 일단 그렇게 진행하자는 말과 함께 허면 더더욱 아름답게 보석을 세공할 장인들을 구해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물론 그 장인들 역시 이미 클라우스가 전부 조사를 끝내둔 후였다.
“그리고 하나 더. 교역의 양을 확장할 생각은 분명 있지만 무분별하게, 실질적 관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 키울 생각은 없습니다. 얻는 게 있다면 빠져나가는 것도 많은 법이에요.”
“그렇겠죠. 당장 교역을 재개하면 간신히 성장시켜둔 동부의 식량 자급자족 부분이 다시금 내려앉을 가능성이 높아요. 서부의 작물들에 비하면 경쟁력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니까.”
“더해서 또 다른 문제들도 있습니다, 율리아.”
“알고 있어요. 동부의 여러 소식들이 서부로 흘러들어가는 걸 경계하는 거죠?”
클라우스는 율리아의 대답에 정답이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교역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목적만을 가지지 않는다.
클라우스는 그 길을 통해서 조금 더 쉽게 서부의 정보를 얻고 또 자신을 따라 이곳으로 오고자 하는 오래된 전우들을 몰래 들일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반대로 서부도 동부의 정보를 빼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테고 교역을 이용할 거다.
얻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내어줄 건 내어준다, 대신 과한 손해는 보지 않는다.
그 부분은 율리아와의 통치 이념과도 일치하는 부분이었다.
“일단 교역은 이렇게 시작하도록 하죠, 클라우스. 여기서 백날 떠들어봤자 상황이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거잖아요. 나머지 부분은 향후 서부 쪽 동태를 파악하고서 결정하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일단 왕실 교역 부분은 잠시 멈춰두고 다음으로 넘어가죠.”
“다음이라 한다면?”
“내부를 더욱 견고하게 다지는 일말입니다.”
그러자 율리아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상황에서 바로 떠오르는 게 없네요. 내가 마왕으로서 자격 미달인 건가요?”
“아뇨. 율리아로서는 미처 생각도 못 한 부분일 겁니다. 소금 말입니다, 소금.”
“소금이요?”
예상치 못 한 단어에 처음에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던 율리아.
하지만 곧 클라우스가 무슨 생각으로 그 단어를 꺼냈는지 알아차리게 되었다.
동부는 자체적으로 소금을 생산하는 양이 서부에 비해 매우 적다.
당장 바다에서 생산해내는 양은 물론이고 암염이 있는 소금 광산도 서부에 비교하자면 어림도 없을 수준이었다.
마족이고 인간이고, 요정이고 수인이고 소금은 필수적인 생필품이다.
단순히 음식에 맛을 내는 용도가 아니라 죽고 사는 것과 연결이 되는 엄청나게 중요한 물건.
해서 동부는 과거까지만 해도 서부에서 소금을 계속 들여오던 중이었다.
그게 대륙 전쟁 이전에 점점 값이 올라서 불만이 쌓였고 오죽하면 전쟁 도중에 서부의 소금 광산이나 천일염을 생산해낼 수 있는 해안가를 점하려는 일도 있었을 정도였다.
“현재 동부에서 자체적으로 소금을 생산하고 있지만 풍족하다고는 할 수 없지요.”
“…그렇죠.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그 값이 다른 생필품에 비해서 비싸니까.”
“교역을 재개하면 필시 서부는 이번 기회에 이전과 같이 소금으로 동부를 휘어잡으려고 할 겁니다. 저들도 멍청한 것은 아니라서 동부에 뭐가 부족하고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에요. 우리 동부의 소금 생산량이 적다는 건 알고 있지만 해결 방안이 없다고요. 바닷물을 퍼 올려서 잘 말린다고 소금이 쨘! 하고 나오는 게 아니잖아요? 날씨도 중요하고 그만한 바닷물을 끌어와서 저장할 수 있는 지형도 필요하고. 그게 동부에는 없어요. 너무 제한적이라고요.”
“….”
“소금 광산도 서부에 비하자면 터무니없이 적죠. 소금으로 큰돈을 벌어보고자 했던 귀족들이 수도 없이 많았고 가능한 선에서 곳곳을 다 조사하고 다녔어요. 결과는 처참했고요.”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영지 내에서 만에 하나 소금 광산이 발견될 경우.
왕실에 어느 정도의 세금만 바치면 완벽하게 그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
때문에 과거 마족 귀족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소금 광산을 찾아 헤맸다.
결과는 율리아가 말했듯 모조리 꽝이었지만 말이다.
“보석 세공이야 이전부터 동부의 특기라고 하지만 소금은 달라요. 서부와 동부 땅이 바뀌지 않는 이상 힘들다고요, 클라우스.”
“하지만 소금을 왕실에서 직접 관리하게 되면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습니다.”
“다 찾아봤다니까요. 적당한 곳이 단 한 군데도 없는데….”
“아직 한 곳을 제대로 찾아보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뜬금없는 대답에 율리아가 고개를 막 내젓는 순간이었다.
클라우스의 말을 듣고 있자니, 그리고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문득 자신도 그렇고 귀족들도 그렇고, 심지어 전대 왕들까지 놓치고 있던 한 곳이 생각난 것이었다.
“어…. 혹시, 클라우스? 아니죠?”
“그 혹시가 맞을 걸요. 내가 알기로 동부가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이래 딱히 확장 공사도 없었고 감히 신성한 땅까지 조사해야 한다고 했던 귀족도 없었으니까요.”
톡톡톡-.
클라우스의 손가락이 지도의 어느 한 부분을 가리킨다.
그곳은 바로 동부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곳, 바로 이곳 마왕성이었던 것이다.
“….”
잠시 두 눈을 깜빡이던 율리아는 진심이냐는 듯 클라우스를 바라보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마왕성 일대를 파헤치자는 말이다.
심지어 어디 먼 곳도 아니고 정말 마왕성 바로 옆에 있는 곳을 가리키고 있다!
“저기, 클라우스. 그래도 왕의 권위라는 게 있는데 바로 옆에서 막 그러는 건….”
“권위가 밥을 먹여주나요, 아니면 돈을 벌어다주나요. 마왕성 일대는 예전의 모습 그대로이지 않습니까. 여기서 만에 하나 소금 광산이 나온다면 그 어떤 딴지를 걸 놈도 없이 오롯이 모든 것이 왕실의 것이 될 텐데요.”
땅을 살펴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확신하냐는 질문이 흘러나온다.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곳 동부에서 살아가던 이들도 전혀 생각조차 못 한 것인데.
클라우스는 마치 그 산들 사이에 소금이 대량으로 잠들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실은 아우펜, 그 역적의 처소를 정리하던 와중에 이걸 발견했거든요.”
바로 이 순간을 위해 클라우스는 이미 죽어 말이 없는 자를 이용하기로 했다.
어차피 역적 놈이니 죽은 후에 또 나쁜 짓 하나가 드러났다고 해서 문제될 건 없다.
이놈에게 전부 뒤집어씌우고 단물은 자신이 쪽 빨아먹으면 좋은 일 아니겠는가.
한편 클라우스가 내민 서류를 확인하던 율리아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 서류는 꽤나 오래 전 것으로 보였는데 그 안에는 아우펜이 ‘마왕성 북쪽에 있는 산들은 절경을 지니고 있으니 절대 건들지 말라.’ 라고 굳이 명령문까지 작성해서 뭔가 숨기려고 했던 모습이 드러났다.
“대충 예상하자면 그 시기의 아우펜은 세력도 약하고 무엇보다 율리아의 부왕께서 아직 정정하실 때죠. 여러 모로 마왕가가 힘을 얻으면 곤란하다는 뉘앙스가 잔뜩 묻어나지 않습니까?”
“…이 남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명령문까지 작성해서….”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율리아도 뭔가 수상하다는 걸 느낀 모양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어차피 잃을 것도 없는데 그냥 해보자, 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왕이라는 자가 마왕성 바로 인근을 파헤치는 데에 앞장서는 게 조금 흉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이것으로 동부의 삶이 더더욱 윤택해질 수 있다면 제 성까지도 무너트리고 파헤칠 수도 있다고 생각이 바뀌었다.
“이왕 일을 벌일 거면 확실하게 해야겠죠. 바로 책임자를 내정해서 일을 진행하도록 하겠어요. 아우펜, 내 빌어먹을 숙부가, 그렇게나 조심성이 많은 겁쟁이가 이런 문서까지 남길 정도라면 분명 뭔가가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니 나도 이렇게 말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이용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 이쪽의 적이었던 놈이니 의심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 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마왕성에서 멀지 않은 저 산에는 거대한 소금 광산이 나오게 된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던가, 율리아는 아예 지금 당장 확인해보고 싶다면서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한 후 집무실을 나섰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클라우스는 율리아에게 보여주었던 서류를 살포시 들었다.
- 스킬, ‘위조’ 가 완료된 상태입니다. -
- 당사자를 포함하여 그 누구도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구별할 수 없습니다. -
이런 걸 바로 착한 문서 위조라고 하려나.
클라우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