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7화 〉 21장 - 동부 재건
율리아가 이번에 새로 고개를 조아린 자들을 대거 동쪽으로 보내 잔불을 끄라 명령한 것은.
그들의 충성심과 능력을 확인하고 키워줄 가치가 있는 자와 그냥 이대로 둘 자.
마지막으로 치워버려야 할 자들을 골라내기 위한 부분이 첫 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로는 보는 눈을 최대한 줄이고서 그동안에 클라우스가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틀을 잡아두고 일을 진행하기 위함이었다.
클라우스와 너무 가까운 모습을 보이면 그들이 그를 견제하려 하거나 역으로 클라우스에게 붙을 가능성이 있으니 왕으로서 그 부분을 방지해야만 했다.
“서부의 동태를 파악하는 것과 정보를 수집하는 부분은 클라우스, 당신이 맡아줘요.”
“그럴까요? 마침 서부에 여러 정보통이 있으니 어렵지 않겠어요.”
“당신과 연이 닿아있는 이들이 많다는 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잠시 인상을 찡그리던 율리아는 한숨을 내뱉었다.
모든 것을 다 이용하고자 하는 그녀라고 해도 음지에서 활동하던 세력들의 손까지 빌리기에는 확실히 거부감이 없잖아 드는 모양이었다.
“붉은 독거미라고 했죠?”
“여전히 걸리는 부분이 있는 건가요?”
“…어쩔 수 없잖아요. 손을 잡아도 되는 세력과, 어떤 순간에도 잡아서는 안 될 것이 있어요. 왕의 자리에 있는 나로서는 온갖 더러운 일을 하던 자들의 뒤를 봐주는 게 좀 그러네요.”
“당신이 봐주는 게 아니에요. 내가 봐주는 거지. 그렇게만 알고 있으면 될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때로는 더러운 일을 맡아주는 이도 있어야 하는 법이랍니다. 일종의 거래죠. 왕은 최소한의 도피처를 제공해주고, 신하는 그 속에서 왕을 위해 제 손을 더럽힌다.”
언제까지고 빛나고 정의로운 일만 할 수는 없다.
권력이 어디 그런 것 가지고 유지가 된다던가.
때로는 더럽고 추하고 역겨운 것까지 모두 이용해야만 한다.
다만, 그걸 이용할 때 왕 본인이 나서는 게 아니라 다른 자를 이용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빠르게 지워버릴 수 있으니까.
“그래도 난 싫어요. 차라리 다른 자에게 맡기면….”
“여태까지 율리아, 당신만을 바라보며 버틴 충성스러운 자들에게 그런 역할을 맡기면 내쳐졌다고 생각할 테고 아직 충성심을 확실하게 증명하지 못 한 이들에게 맡기면 그들의 힘을 축적하는 데에 쓰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두 세력 모두 당신과 거리가 좀 있어요. 바로 옆에서 살피고 때로는 감시할 수가 없는 법이죠.”
“….”
“다른 건 몰라도 정보를 수집하고 보고를 받는 일은 율리아, 당신이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제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은 율리아 바로 옆에서 지내는 남자다.
그렇기에 이런 일에 제격이라고 클라우스는 율리아를 설득했다.
율리아 역시 잠시 고민하는 빛을 보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클라우스가 설득하는 부분도 있고, 따지고 보면 이전 전투들에서 소모된 자금들은 전부 붉은 독거미가 내어준 것이니 이제 와서 내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붉은 독거미의 단장을 은밀히 마왕성으로 불러들이세요.”
“시간이 조금 걸릴 겁니다.”
“상관없어요. 이왕 뒤로 손을 내밀 거 내가 직접 보고 싶네요. 요정과 마족 사이의 혼혈이라고 했나요? 그 여자의 출신이.”
“그렇습니다.”
“상당히 힘겨운 시간을 보냈겠군요. 그만큼 든든한 후원자를 원하고 있을 테고.”
“이제 슬슬 양지로 나서려는 조직입니다. 율리아가 적당히 제어만 해준다면 왕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겠죠. 그 정도로 눈치가 없는 여자가 여인들로 그런 거대한 조직을 만들었을까.”
마음을 정한 율리아는 빠르게 다음 일들을 논하기 시작했다.
일을 결심하기 전까지는 많은 고민을 하는 여인이지만 일단 결정을 하면 그 다음부터는 모든 의심이나 걱정을 거두고 엄청난 속도로 일을 진행하는 스타일이다.
이런 성향 덕분에 단점도 있기는 했지만 지금과 같이 혼란스러울 때에는 장점으로 부각되었다.
무엇보다 마족들이 보기에 이런 율리아의 모습은 능력 있는 왕의 모습으로 비쳤고 말이다.
율리아는 아우펜을 제거하면서 같이 증발한 ‘그림자’ 의 자리에 붉은 독거미를 넣을 셈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왕 휘하의 사조직으로 정보 수집이나 첩보 활동 등을 맡길 생각이었다.
겉보기에는 그냥 양지에서 활동하는 상단 같고 자세히 파보면 음지에서 이름을 떨치는 암흑가 세력이며 거기서 아주 깊숙이 더 파고들어야 비로소 마왕의 그림자가 느껴지도록.
“그림자들은 어떻게 되었죠?”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자들은 모조리 처단했습니다.”
“잘 했어요. 가장 중요한 때에 잡음이 나서는 안 될 거예요. 능력은 둘째에요. 내게 반할 기운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내게 보고할 필요 없이 전부 처리해도 좋아요, 클라우스.”
이후 율리아는 다른 부분을 언급했다.
요즘 들어서 국경 인근에서 자꾸 다수의 인간들이 모습을 보이는데 정체를 알 수가 없다고.
혹 서부가 이쪽의 혼란을 틈타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켜 국경을 넘으려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든다는 것이었다.
이미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던 클라우스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고, 그들이 나중을 위한 아주 조그마한 다리이자 또 가장 견고한 주춧돌이 될 것이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덕분에 율리아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일단 알겠다고 대답했다.
보고에 따르면 그 근처에 따로 집결하는 병력도 없다 하고 무엇보다 현재 서부 상황이 이쪽에서 상상하던 것 그 이상으로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클라우스. 당신 알고 있었죠? 이렇게 될 거라는 거.”
“글쎄요.”
“알아서 굳이 아카데미에서 그렇게 행동한 거잖아요. 처음에는 너무 과한 거 아닌가 생각했어요. 나도 모르게 당신을 막 대하는 놈들에게 날 선 말이 나가기는 했지만 너무 과했던 건 아니었을까. 이걸로 자칫 서부가 다시 하나가 되어 나와 동부, 그리고 당신의 목을 조르는 게 아니었을까 생각했었죠.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요.”
“….”
“지금 서부 상황이 우리보다도 훨씬 더 엉망이라는 걸 들었어요.”
그 말 그대로, 현재 서부는 난장판이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었다.
대륙 전쟁의 영웅 클라우스가 모든 것을 내치고 스스로 동부로 향했다는 소식.
거기에 바로 게거품을 물면서 이것은 배신이고 반역이라 외친 자들은 당연히 귀족들이었다.
정확히는 대륙 전쟁에서 한 것도 없이 본인만 보전했다가 전후 세상이 어지러울 때 모든 것을 쓸어 담은 쓰레기들이 목소리를 높인 것이었다.
클라우스를 단순히 전쟁 영웅으로만 생각하는 이는 순수한 것이다.
조금 더 들어가 보자면 그는 단순히 서부를 구한 영웅이 아니라 대륙 전쟁에서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피땀 흘려 싸워 제 가족과 땅을 지켜낸 전사들의 주심점이라 할 수 있다.
그 중에는 물론 제정신이 박힌 귀족도 있고 옳은 뜻을 가지고 있던 지배 세력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수 이상은 아무 것도 없는, 그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것이 인생인 지극히 평범하고 또 하찮은 인생을 사는 평민들이었다.
마침내 전쟁이 끝났을 때 그들은 사회적 명망을 얻게 되었다.
그것도 자신들이 여태 상전으로 모시던 대부분의 귀족들보다 더 큰 명망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명예로운 보상이지 물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온갖 장난질로 돈과 힘을 긁어모은 자들 앞에서 그들은 그저 지나가버린 영광, 전쟁의 아린 흔적일 뿐이었다.
때문에 대륙 전쟁에서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긴 자들은 그 흔적을 지우고 싶어 했다.
허나 그 영웅들을 대하는 사회의 시선이 귀족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기에.
당장이라도 눈에 거슬리는 그들을 치워버리고 싶지만 그러지 못 하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클라우스가, 그 대륙 전쟁 참전자들의 구심점이 서부를 버렸단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는 기득권 세력이었고 거칠게 그들을 몰아붙였다.
오만함이 마침내 도를 넘어 스스로를 특별하다 여기고 서부와 사람들을 배신했다고.
사람들이 그렇게나 따르던 클라우스와 대륙 전쟁 참전자들의 민낯이 밝혀졌다고.
‘원래 뭔가 켕기는 것이 있는 놈이 더 지랄하는 법이지. 그리고 서부의 사람들도 병신에 머저리가 아니야. 귀족들이 그 지랄을 떠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지.’
저들 딴에는 아주 좋은 기회라고 여겼을 거다.
자신들에게 호의적이지 못 한 민심을 한 번에 뒤집을 수 있는 때라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누구는 귀족들의 말이 맞다고 하고 또 누구는 너희들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냐며 들고 일어나는, 말 그대로 분열의 장이 열리게 되었다.
누구는 이쪽에 줄을 대고, 또 다른 누구는 그와 반대되는 곳에 연을 맺고.
일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면서 그야말로 모두가 눈이 뒤집혔다.
밀려나면 이제는 소외되는 수준이 아니라 제 삶이 위협받을 수 있음을 느낀 것이다.
최악의 배신자를 감싸던 자들, 혹은 영웅을 욕하고 결국 내쫓은 자들.
어느 한 쪽이 지든 그 꼬리표를 달게 될 것이니 이제는 아무도 물러설 수가 없다.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울 겁니다. 여기서 먼저 그만 하자고 손을 내미는 자는 그게 누가 되었든 배신자 소리를 들을 테고 자신들의 약점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겠죠.”
“거기까지 생각하고 내게 온 건가요?”
“하도 나를 쫓아내고 싶어 하기에 숙제를 던져준 거라고 할까요. 어디 한 번 너희가 원하는 대로 해주마. 그런데 그 뒷감당은 오롯이 너희가 하는 거다. 여태까지 왜 대륙 전쟁의 공훈자들이 참고 또 참았을까. 그건 내가 침묵했기에, 내가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기에 그런 거죠. 반대로 귀족들은 그런 내가 영원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솔직히 나도 처음에는 많이 놀랐어요. 클라우스, 당신이 요정이나 수인도 아니고 우리 마족들에게 귀의하겠다고 했을 때. 무슨 이상한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 했을 정도라고요.”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자신의 충성심을 의심하지 않도록 연기해야만 했다.
그걸 위해서 그 좆같은 귀족 놈들의 등쌀 아래서 침묵한 것이 아니었던가.
“클라우스. 이전에도 말했지만 동부를 정리하면 그 다음은 서부에요. 그리고 그 서부 도모가 결코 평화롭거나 조용히 끝나지는 않을 거예요. 알고 있죠?”
“당연하죠.”
“한때 당신의 사람이었던 자가 나를 막아선다면, 내게 부딪친다면. 나는 가차 없이 그 상대를 짓밟고 부서트리고 흔적도 없이 찢어놓을 거예요. 그래도 괜찮아요?”
“왕의 적이 곧 나의 적인데 당연한 걸 묻는군요.”
“…정말 그래도 된다는 말이죠? 나 정말로 당신과 연이 있던 자들도 모조리 죽일 거라고요.”
“항복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클라우스의 대답에 잠시 그를 바라보던 율리아는 한숨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서 아주 조금은 고민하는 모습이나 난처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거기까지 전부 예상하고 있다는 듯 반응하는 저 남자가 조금은 얄밉다.
자신은 제 모든 부분까지 다 보여주었는데 클라우스만은 여전히 숨기는 게 많은 것 같다.
“율리아. 붉은 독거미와 이쪽의 접점은 아무래도 리르를 사용하는 게 어떨까 합니다만.”
“그림자의 일원이었으니 능력 부분에는 문제가 없겠죠. 하지만 출신도 나름 중요하잖아요? 자칫 그 여자가 다른 마음이라도 품으면 어쩌려고요.”
“이미 그녀의 충성심은 증명이 되지 않았나요?”
“민감한 부분에는 여러 겹의 의심이 둘러쳐져야 안전한 법이니까요.”
또각-.
앞으로 살짝 다가온 율리아가 은근한 눈빛으로 클라우스를 바라본다.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말하라고 설득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그 소녀를 살려서 데리고 온 거죠? 리르라는 여자를 완벽히 휘두르기 위해.”
“그냥 동생이 붙잡혀있다고 하기에 빚을 지워둘 겸 데리고 온 겁니다.”
“바로 그걸 인질이라고 하는 거예요.”
율리아의 말에 미소를 짓는 클라우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