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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가 비선실세-226화 (226/341)

〈 226화 〉 21장 - 동부 재건

부드러운 바람 아래 따스한 아침 햇살이 눈이 부시도록 쏟아진다.

그 청명한 기운이 피부에 부딪치자 곤히 잠들어있던 여인이 천천히 두 눈을 뜬다.

멍하니 눈을 뜨고 있던 그녀가 몸을 일으키니 금실로 짜낸 것 같은 머리칼이 쏟아져 내렸다.

와중에 아주 얇은 속옷만 걸친 덕분에 아주 은밀한 곳까지 다 보일 정도다.

“…아.”

비로소 잠이 깬 것인지 요정 여인은 안타까운 한숨을 내뱉었다.

한창 달콤한 꿈을 꾸고 있었는데, 마음을 준 남자의 품에서 한창 행복하던 중이었는데.

그 꿈에서 자신을 현실로 돌려보낸 오늘 아침이 괜스레 미워졌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여인은 옆에 대충 벗어두었던 옷을 걸쳤다.

그 가슴 부근에 문장이 하나 수놓아져 있었는데, 요정들의 여러 가문에서도 권위가 높기로 잘 알려진 벨라루스의 문장이 확실했다.

평소처럼 잠도 깨고 몸도 깨끗이 할 겸 목욕을 하려고 나서는데, 문을 열어보니 그 앞에 시녀들이 대기하다가 인사를 건네 온다.

“일어나셨습니까, 나타샤님.”

“…그래.”

나타샤 벨라루스, 요정 사회에서 손에 꼽히는 가문인 벨라루스의 여인.

지금은 꽤나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확히는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만 해도 가문의 천덕꾸러기 내지는 이단아로 취급 받았다.

요정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바로 아름다운 자태와 뛰어난 마법 실력이다.

그들 스스로도 그 두 가지 부분에 대해서 아주 자존심이 넘쳐났다.

마력을 돌려 마법을 사용하는 데에 있어서 다른 종족들보다 훨씬 뛰어난 이들.

그게 바로 요정이었고 그들 사회에서 마법은 기본 중의 기본 소양이라고 할 수 있었다.

헌데, 그런 상황에서 나타샤의 마법 실력은 어린 요정들보다도 더 형편이 없었다.

그녀가 피나는 노력을 해도 상황이 그러했다면 차라리 동정이라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타샤는 마법에 딱히 미련을 두지 않고 대신 창과 검을 휘둘렀다.

묵직하면서도 서늘한 느낌을 주는 날붙이들이 휘둘러질 때마다 마음에 가득하던 고민과 번뇌가 깔끔하게 사라지는 것 같았다.

가문에 조금만 오점이 되어도 미친 듯이 쪼아대는 벨라루스의 이름 아래서.

나타샤는 그렇게 몸과 마음을 단련하면서 쏟아지는 눈길 속에서도 버텨냈다.

벨라루스의 이름이 부끄럽지도 않느냐는 말들이나 그럴 시간에 기초 마법이라도 연습하라는.

상당히 무례하고 기분 나쁜 말들을 참 많이도 들었었다.

그런 와중에 대륙 전쟁에서 말도 안 되는 활약을 한 클라우스가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다른 가문처럼 벨라루스 역시 그를 영입하기 위해 비밀리에 한 명을 보내기로 했고, 거기에는 결국 나타샤가 내정되었다.

표면상으로는 아카데미에 가서 마법 수련도 하고 덩달아 클라우스와도 연을 맺으라는 것이었지만 그 속에는 수틀리면 몸을 던져서라도 그 남자를 낚아채 오라는 뜻이 담겨있었다.

처음에는 수치스러웠고, 역겨웠고, 분노가 치솟았다.

하지만 여태껏 자신을 내치지 않고 데리고 있는 가문이기에 갚아야 할 것이 있었다.

가문의 피를 이어받았기에 그 이름 아래서 성장한 자신이지만, 그만큼 그 이름에 짓눌려서 꽤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고 하지만 내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의견을 수용하고 아카데미로 떠나면서, 나타샤는 참 괴롭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감정이 아마 아카데미를 수료하고 와서도 계속되지 않을까 했다.

‘그런 내가 벨라루스에 돌아와서 이런 대접을 받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어.’

시작은 역시나 아카데미에서, 정확히는 클라우스를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처음에는 이게 뭐나 싶었고 시간이 지나니 아카데미에 온 것이, 그리고 그와 살을 부딪치게 된 것이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으며 종국에는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일단 첫째로 특출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요정으로서 해야 하는 기본 이상의 마법 실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덕분에 이전에 받던 모멸감 어린 눈빛도 거의 다 사라졌고, 이제는 정식으로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받아 더는 눈치를 살필 일도 없게 되었다.

둘째, 어찌 되었든 클라우스와 접점을 만들어 두었기에 벨라루스 측에서는 그녀를 클라우스의 지인으로 인정하고 대우하기 시작했다.

비록 그가 동부로 넘어갔다고 하지만 그를 존경하는 이들 중에는 요정들도 분명 존재한다.

더해서 그와 연을 쌓은 이들이 서부에 꽤나 많이 존재하니 그 연을 이용하고자 하는 벨라루스 측에서는 이제부터라도 나타샤를 잘 이용하려고 할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은광.’

클라우스가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라도 투자하라고 했던 그 은광.

그게 얼마 전 ‘대박’ 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이 불가능할 정도로 가치가 수직상승했다.

바로 엄청난 규모의 은이 발견된 것인데 대충 가치로 환산해도 벨라루스가 보유한 모든 자산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초기에 투자자들이 몇몇 있기는 했지만 모종의 이유로 하나둘 투자를 관두고.

결국 남은 건 나타샤인 상황에서 말 그대로 대박을 친 것이었다.

심지어 민감한 부분이 될 수도 있는 ‘동부’ 와의 경계 문제는 나타샤가 율리아에게서 직접 받아온 서류로 아무 문제없이 완벽하게 정리가 되었다.

이제부터 나타샤는 그 엄청난 가치를 지닌 은광의 유일한 투자자 겸 소유주로서 재화를 말 그대로 쓸어 담을 준비가 끝난 것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벨라루스에서도 더는 나타샤를 홀대할 수가 없었다.

최악의 마법 실력은 보통 이상으로까지 끌어올려졌고 거기에 다른 요정들은 감히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근접 전투 능력이 더해지니 무력으로는 요정 사회에서 손에 꼽히는 이가 되었다.

거기에 인맥을 넓힐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결정적으로 엄청난 재력을 지니기까지 했다.

정말 말 그대로, 순식간에 벨라루스의 차기 가주로 거론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문의 수치라는 막말까지 들었던 나타샤가 거기에까지 닿게 되었다.

‘그 남자는 지금쯤 뭘 하고 있으려나.’

동부에서 내전이 발발했다는 소식은 그녀도 전해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몇몇 요정들은 동부가 난장판이 될 것이라며 떠들어댔지만.

나탸샤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으면서 장담하건데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이 정리될 거라고 생각했다.

클라우스, 그 남자가 괜히 율리아를 제 주인으로 택한 게 아닐 것이다.

자신보다 몇 배는 잘난 두 남녀가 뜻을 합쳤으니 상대가 누구든 사정없이 갈려나가리라.

그리고 그런 나타샤의 예측은 현실이 되어서 벨라루스에 전해졌다.

아우펜이 전투에서 대패를 당하고 겨우 몸만 빼내서 도망쳤다는 것이었다.

“이거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군.”

“동부가 혼란으로 가득해질 줄 알았더니… 오히려 아주 빠르게 정리가 될 것 같습니다.”

여러 요정들의 걱정 어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나타샤는 미소를 지었다.

너희들이 나를 멸시하여 아카데미로 밀어낸 덕분에, 세상에서 다시 없을 최고의 인맥을 가지게 되었구나. 정말 고마워.

그리 생각하며 그녀는 동부로 보낼 서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은광이 제대로 개발이 되고 있으니 이제 약속한 금액을 마왕에게 전달할 차례였다.

이미 제 가문에는 듬뿍 돈을 먹여서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게 만들었다.

또한 서부 연합의 중심 세력들에게도 몰래 뇌물을 먹여서 동부로 합당한 대가를 보내는 것에 어느 누구도 딴지를 걸지 못 하도록 해두었다.

‘원래 전쟁이 끝나면, 그 다음은 돈이 들어가는 곳이 우후죽순 생겨날 테니까. 솔직히 율리아, 당신을 돕는 게 썩 기쁘지는 않지만 당신이 힘들면 클라우스. 그 남자도 힘든 거니까요. 약속한 것보다 조금 더 보내두니 유용하게 쓰길 바래요.’

* * * * * * * * * *

“…아무래도 요정 친구가 일이 잘 풀린 모양이군.”

서신을 확인한 율리아가 그렇게 중얼거린다.

그러자 옆에 서있던 시종장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두 눈을 껌뻑인다.

요정 친구라니, 마족과 요정의 사이는 견원지간 그 자체라고 해도 무방한데.

마왕의 입에서 ‘친구’ 라는 말이 요정에게 들어가니 참 이상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시종장. 조만간 국경 쪽에서 보고가 올라올 거다. 아마도 요정 측. 정확히는 벨라루스 쪽에서 합당한 대가를 치르고자 왔다고 할 테지. 국경을 넘는 것이니 철저하게 조사하되 무례하게 굴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일러두도록.”

“아. 알겠습니다, 마왕 전하.”

칼라굴이 고개를 숙이고는 급히 물러난다.

눈치 빠르게 이번에 율리아에게 전해진 서신이나, 요정의 벨라루스 가문이 보낸다는 것이나.

하나 같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실수 없이 빠르게 일처리를 하려는 요량인 모양.

그런 시종장이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한 율리아는 갑자기 와락 몸을 돌려서는 잠깐이나마 방심하고 있던 클라우스를 낚아챘다.

“아.”

직후 두 남녀의 입술이 포개지면서, 아주 격렬한 키스가 시작되었다.

당장이라도 서로의 몸에 걸친 옷가지들을 내던지고 살을 섞기라도 할 것처럼.

흡사 욕정으로 이글거리는 불길이 회의장 전부를 불태울 것처럼, 그렇게 정열적인 키스가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프하.”

마침내 서로의 입술이 떨어지고, 그 끝에서 늘어지는 은빛 실오라기가 톡 끊어진다.

그런 상황에서 클라우스는 말없이 율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또 적극적으로 치고 들어왔는데, 그 이유를 알려달라는 듯이 말이다.

그에 율리아는 싱긋 미소를 짓고는 당연한 거 아니냐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하던 일은 이어서 해야죠. 그렇지 않나요, 클라우스?”

“그렇긴 하죠. 이상한 곳에서 끊기는 것보다 불편한 일은 없으니까. 하지만 율리아? 그런 이유만 대기에는 평소보다 조금 더 격렬하던데. 솔직히 말해요.”

“….”

클라우스의 은근한 어조에 율리아가 살짝 입술을 깨문다.

뭔가 말을 하고는 싶은데, 괜히 말했다가 제 자존심만 상하는 건 아닐까 걱정하는 눈치다.

눈앞의 마왕이 제 속내를 솔직하게 말하기 전까지 차분하게 기다려본다.

어차피 이렇게 바라보고 있으면, 율리아는 얼마 가지 못 해서 솔직하게 말하는 여인이었다.

“…하아. 좋아요. 조금 짜증이 나서 그랬어요. 되었나요?”

“짜증이라. 무슨 말이죠?”

“나타샤요. 저 먼 곳에 있는데도 당신을 그리워하는 기운이 아주 서신 가득 묻어나네요. 당신은 내 거라고, 내 남자라고, 마왕의 반려라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이 요정 참 끈질기네요.”

“원래 요정들이 한 번 마음에 품은 정인은 쉽사리 놓지 못 하는 법이죠.”

“괜히 양보했나 싶기도 하네요. 그냥 내가 꽉 쥐고 아무도 못 오게 할 걸 그랬나.”

그리 말하면서 율리아가 은근한 눈빛으로 클라우스를 바라본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자신이 당신이란 남자를 독점하고 어느 누구에게 조금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이 말에 어떤 의견을 내놓고 싶냐는 듯이.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당신 같은 미녀가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니. 하지만 그럴 생각 없잖아요? 그렇게 해서 묶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당신이 붙드는 게 아니라, 내가 떠나가지 못 하게 만들어야 율리아, 당신의 마음이 훨씬 더 편하지 않을까 하는데.”

그 대답에 잠시 두 눈을 깜빡이던 율리아가 결국 킥, 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이후 당신의 말이 맞다면서, 내가 당신을 붙잡는 게 아니라 당신이 감히 내게서 떠날 생각조차 못 하게 하는 게 맞겠다고 말했다.

“자, 그런 의미에서.”

갑작스레 클라우스의 멱살을 움켜쥐는 율리아.

여인의 두 눈에서 활활 불타오르는 정욕을 느낀 남자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어디 한 번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면 벗어나 보라는 여인의 도발에 응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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