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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가 비선실세-201화 (201/341)

〈 201화 〉 18장 - 새로운 바람

율리아의 숙부, 아우펜 아그리시오는 분명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다.

전대 마왕의 동생이자 현 마왕의 숙부라는 점을 이용하여 아주 야금야금 마왕성의 전력을 갉아먹었는데 단순히 무력만 빼내간 것이 아니라 내부의 재정 상태나 행정 부분을 알게 모르게 망가트리기도 했다.

다만 놈이 한 가지 놓친 게 있다면 제 조카를 너무 과소평가하였다는 점.

율리아가 대부분의 무력 인사들을 놓치는 와중에도 행정이나 재정 부분의 인재까지는 어떻게 간신히 붙잡은 것이 마왕성이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덤으로 내 일거리도 그리 많지 않았고.’

남부 사령관 자리에 있으면서 왕국이 그 지역 일대를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었다.

덕분에 행정 쪽 업무도 고스란히 클라우스가 맡아야 했는데 이게 나중에 도움이 되었다.

물론, 그 업무가 반갑다거나 쉽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차라리 나가서 마족 놈들 목을 몇 개 더 따는 게 낫지, 서류랑 씨름하는 건 정말 사절이었다.

“크, 클라우스님. 리르에요. 들어가도 되, 되나요?”

문 너머에서 조심스레 들려오는 목소리에 클라우스는 옆에 가만히 서있던 플랑슈에게 고갯짓으로 가서 문을 열어주라 말했다.

용서를 받은 것은 아니나 일단 율리아에게 ‘기회’를 얻은 마족 여인.

일단 공식적으로는 플랑슈 밑에서 마왕성의 일을 보는 메이드가 되었으나 율리아나 클라우스의 명령이 떨어지면 언제든 본업으로 돌아갈 수 있는 이였다.

“들어오십쇼, 리르.”

허락이 떨어지자 후다닥 안으로 들어온 리르는 바로 클라우스 앞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착실하게 교육 받은 대로 무릎을 꿇고는 제 주인에게 인사를 올린다.

“며, 명령하신 부분 확실히 이행하고 돌아왔어요.”

“고생했다. 그래, 그쪽에서는 뭐라고 하냐.”

“저, 그것이 말로 전하는 것보다 서신으로 전달하는 편이 더 낫다고 했는데….”

혹 그들의 행동이 클라우스를 불쾌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해서 그 분노가 자신에게까지 미치는 것은 아닐까, 리르는 그게 못내 걱정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마족 여인의 마음을 뻔히 알고 있는 클라우스는 괜한 두려움 때문에 일의 효율이 떨어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쪽에서 나를 잘 알고 있음에도 그런 판단을 했다면 타당한 이유가 있는 거다. 그들의 판단에 대한 결론은 내가 내는 것이고 책임은 그들이 지는 것이니 넌 그 무엇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 괜한 생각 말고 네 일에 집중해라, 리르.”

“네, 네. 죄송해요.”

“마왕 전하께서 주신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를 허투루 날리지 않기를 바라마. 그 분이 너를 버리라 하신다면, 너를 처리하라 하신다면 나도 그럴 수밖에 없어.”

은근히 율리아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는 클라우스였다.

그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든, 아니면 그저 살고 싶어서 발버둥치는 것이든.

솔직히 클라우스 입장에서는 하등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어차피 율리아에게 충성하는 것이 곧 자신을 위하는 길이고 그녀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이 곧 제 영향력이 넓어지는 것과 똑같으니까 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더, 더 열심히 할게요!”

더욱 고개를 조아리면서 힘껏 외치는 리르였다.

살고 싶다는 생존 욕구, 어떤 처참한 미래가 다가올지 모른다는 두려움.

동생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 그리고 한 번만 더 눈앞의 남자가 부드럽고 따뜻하게 자신을 안아주었으면 하는 기대감까지.

처음에는 최면과 미약 등으로 인해 만들어진 왜곡된 감정이었지만.

이제는 리르 스스로가 그걸 원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정도라면 조금 더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끈을 조금 느슨하게 해도 되지만.

클라우스는 리르의 동생을 구출하기 전까지는 최면을 유지하기로 했다.

“여기, 붉은 독거미 측에서 보낸 서신이에요.”

리르가 내민 서신을 받아든 클라우스는 안의 내용들을 확인했다.

정식 보고서도 아니고 암흑가의 조직이 몰래 서신을 보낸 것이니 당연하게도 안에 적힌 것들은 쓸데없는 미사어구나 인사를 전부 다 빼버리고 따라서 간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내용까지 간단하고는 결코 볼 수 없었다.

- 인간 왕국과 제국을 중심으로 반 귀족 세력 준동. 요정과 수인 측 분위기도 심상치 않음. 온갖 흉흉한 소문들이 만들어지고 커져서 확산되는 중. -

무슨 흉흉한 소문이 만들어지고 또 커져서 사방으로 퍼져나가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클라우스 본인이 서부를 배신하고 마족들에게 붙어 서부를 공격하려 한다는 내용과.

반대로 귀족들이 평민들과 대륙 전쟁 공로자들의 마지막 방패였던 클라우스를 치워버리고 곧 대대적인 제거 작업에 들어갈 것이라는 내용 말이다.

서로 지극히 상반되는 소문들이니 그 파급 효과는 더더욱 클 것이다.

귀족들과 조금이나마 연이 있는 자들은 이번 기회에 배를 갈아타려고 할 것이고.

반대로 그들과는 절대 엮이고 싶지 않은 이들은 전쟁 영웅인 클라우스를 쳐낸 것을 이유 삼아서 귀족들에 대한 분노를 가감 없이 드러낼 것이다.

무엇이 되었든 이제 서부는 결코 하나로 뭉칠 수가 없다.

뭔가 다른 수를 만들지 않는 이상 몇 년 전부터 쌓이고 쌓인 갈등이 이번에 제대로 폭발한 것이니 쉽게 이겨낼 수가 없는 게 당연했다.

‘아마 요제프 대공도 그 부분 때문에 이를 갈고 있겠지. 10년 동안 연기 한 거에 홀라당 넘어가서 내가 언제까지고 왕국에 붙어있을 줄 알았나? 지랄하지 말라고. 어림도 없다, 너구리야.’

제 손에 의해 혀가 잘린 기사 놈이 했던 말, 당신을 따르던 이들 걱정은 안 하느냐.

솔직히 아주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한다.

여태까지 자신을 지지하던 이들인데 갑자기 클라우스가 마족들에게로 귀의했다고 한다면 그들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전에도 말했다시피 그들 모두는 자신에게 빚을 졌던 이들이다.

그렇기에 그걸 갚겠다고 자신을 챙긴 것이고 또한 도운 것이다.

그리고 막말로 자신이 아니었으면 어차피 다 뒈질 놈들이었는데 무슨 상관이 있는가.

어차피 다 제 살 길 하나는 뚫을 수 있는 자들로만 선별해서 데리고 있던 클라우스다.

따로 언질을 주지 않아도 알아서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었다.

클라우스는 그렇게 아주 일말의 걱정까지 훌훌 털어낸 후 다음 내용을 살폈다.

- 왕국 남부에서 500여명의 생환병들이 은밀히 동부로 넘어가기를 희망. 나이도 다르고 가족의 유무도 다르며 서로 모르는 이들도 많음. 가만 공통점은 클라우스님 휘하에서 싸웠던 남부군 소속임 -

역시 이 녀석들인가. 언제쯤 움직이나 싶었는데.

자신이 동쪽으로 떠났다는 소문이 비로소 이들에게도 전해진 모양이었다.

대륙 전쟁 당시 클라우스 휘하 남부군으로 있던 병사들, 그리고 장교들.

그 중에서 특히 엄청난 충성심을 보이던 자들이 있었는데 이들도 그 무리 중 일부였다.

서부에서 동부로 넘어가다가 들키면 그 자리에서 즉결 처분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동부로 오려고 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자들의 충성심이 엄청나다는 소리.

심지어 가족이 있음에도 클라우스를 따르려고 한다는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클라우스는 바로 그 자리에서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서부의 소식들은 이대로 계속 면밀하게 살피면서 알려줄 것.

그리고 그 생환병들이 혹 귀족들에게 걸리지 않게 은밀히 도와줄 것.

마지막으로 그에 대한 보상은 차후 지급하겠다는 것.

이상이 그가 쓰는 서신의 내용들이었다.

“리르.”

“네, 클라우스님.”

“이걸 네가 다녀온 국경 인근의 마족 여관 측에 전달하면 될 거다.”

“알겠습니다. 바로 다녀올게요.”

자리에서 조심스레 일어난 리르가 바로 물러나려고 한다.

그에 클라우스는 고개를 내젓더니 곧 손짓을 해서는 그녀를 제 곁으로 불러왔다.

“왜, 왜 그러시는 건지….”

혹 뭔가 혼날 것이라도 남아있는 것일까.

리르가 조금은 겁을 먹은 얼굴로 다가오자 클라우스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마족 여인이 아! 하고 탄식을 지르는 순간.

클라우스는 그녀의 목덜미를 가볍게 무는 듯 하다가 곧 입술을 맞춰주었다.

“흐으읏!?”

남자의 숨결이 목에 와 닿는 순간 리르의 몸이 파르르 떨린다.

미약으로 인한 반응과 거기에 더해서 이전에 한 번 부드럽게 안겼던 기억이 겹쳐온다.

몸에 힘이 쭉 빠지면서 이대로 그냥 클라우스의 품에 안기고 싶다는 욕구가 일렁거린다.

“고생했다. 그리고, 앞으로 더 잘 하라는 뜻이야.”

“아, 아아….”

“네 동생은 조만간 몰래 사람을 보내 빼올 거다. 그 부분에 대한 걱정은 하지 말고 네 일에 집중해. 조금이라도 틈을 보인다거나 실수를 한다면, 적의 손에 죽거나 내 손에 죽는다.”

걱정과 경고를 동시에 하니 조금은 이상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리르는 경고보다는 걱정에 더 무게를 둔 것인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우려하는 일 따위는 절대 없을 거라면서 클라우스가 내어준 서신을 굳게 쥐고서는 방을 나섰다.

그러면서 남자의 입술이 닿은 제 목덜미를 만지작거리곤 했는데, 그 모습을 옆에 서있던 플랑슈가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중이었다.

“플랑슈.”

“네, 클라우스님.”

“마왕 전하의 명령에 따라 리르는 이제부터 네 밑에서 업무를 하는 메이드다. 공식적으로는 그렇다는 거지. 비공식적으로는 다른 임무를 맡겠지만.”

“그녀의 보호와 교육을 제가 맡아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클라우스는 고개를 끄덕임으로서 플랑슈의 말에 긍정을 뜻했다.

리르가 그림자의 일원이었기에 그 은밀함이나 민첩함이 뛰어난 편에 속하는 건 맞다.

하지만 나머지 부분들은 아직 아쉬운 부분이 많으니 플랑슈 곁에 두고서 그 부족한 부분들을 조금씩 채우려는 것이 클라우스, 그리고 율리아의 의도였다.

“알겠습니다. 그녀가 두 분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겠습니다.”

허리를 숙인 플랑슈가 그리 답했다.

그런데 뭔가 할 말이 남았다는 듯 슬쩍 고개를 들고서 말을 잇는다.

“다만, 클라우스님. 그녀가 공식적으로 메이드라면 그런 여인에게 방금 전과 같은 행동은 결코 옳지 못 한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흠?”

“너무 가까우셨습니다. 마왕 전하께서 아신다면 클라우스님이 난감해지실 것이고 리르라는 저 마족 여인은 더 곤란한 처지에 들게 될 수도 있지요.”

“여기에는 마왕 전하가 없잖아. 그리고 개인적인 포상을 해준 것인데도 문제가 되나?”

“업무 능력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정말 업무 능력에 영향을 끼칠까봐 걱정을 하는 것인지.

그게 아니면 자신보다도 더 별 것 아닌 것 같은 여인이 저리 대우를 받는 것이 상당히 속이 쓰리고 질투가 나는 것인지.

클라우스는 갑자기 장난기가 동했다.

동시에, 공을 세웠음을 인정하겠다고 한 율리아의 말도 떠올랐다.

“플랑슈.”

“네, 클라우스님.”

“내 침실에 가서 침대 상태를 확인 좀 해주었으면 하는데.”

“침대는 아침에 확인 할 때만 해도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시트도 갈아두었고 구겨진 곳도 하나 없는 것을 확인했으며 혹시 다른 부분에 문제가 없는지 전부 살폈습니다.”

“고생했네. 하지만 내가 요구하는 부분은 다른 거다.”

“다른 것이라 하신다면 어떤….”

“메이드와 뒹굴어도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튼튼한가 보라고.”

순간 플랑슈의 눈이 두어번 빠르게 깜빡거렸다.

그러다가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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